현진은 생각한다.



“야, 너 이리와 봐.”

“…저요?”

“그램마.”



아,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수업 한 번 째려니까 이런 일을 당하는 거구나.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네. 하지만 정말 아픈데. 저 막 식은땀 나고 그런단 말이에요. 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튈까? 몸 상태도 안 좋은데 튀다가 잡히면? 더 감당 못할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쪼끄만 머리통이 휙휙 돌아가는 동안 짜증을 한껏 실은 목소리가 현진을 재촉했다. 빨리 안 와, 새끼야? 넘의 집 귀한 자식을 인마니 새끼니 제 맘대로 부르는 놈. 너 말이야, 어? 내가 그렇게렇게 만만하니? 현진은 비장하게 고개를 쳐든다. 길쭉한 기럭지에 맨들하게 잘생긴 대한건아 황현진. 나도 입 닥치고 인상 쓰면 좀 무섭게 생겼다 이거야.



“너 돈 좀 있냐?”



그런들 튈 자신도 팰 자신도 없으면 부른다고 뽀르르 가야지 뭘 어째. 현진은 본격적으로 삥을 뜯으려는 양아치 놈들에게 둘러싸여 애꿎은 가방끈만 꼭 부여잡았다. 그 주먹을 앞으로 내지를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그냥 지금 상황이 무섭기만 하다. 황현진 이거 허우대만 멀쩡했지 깡이라곤 개 줄래도 없어서. 왜냐, 황현진은 외동아들로 곱게곱게 자라신 도련님이라 이거야.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제 구역 벗어난 것도 낯선데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일을 겪는 건 상상도 안 해봤다. 원래 여기 애들은 이렇게 다 무섭나? 돈 없다는 소리만 겨우겨우 웅얼대는 게 전부였다.



“이 새끼 가방도 비싼 거 신발도 비싼 거 시계도 비싼 건데 돈이 없다고?”



시계를 툭툭 치는 손이 별로 크지도 않다. 사실 키도 저가 더 크다. 쟤네가 현진보다 큰 건 머리 크기 정도였다. 근데 그게 그렇게 무서워. 어쩔 수 없다. 원래 황현진은 허우대만 멀쩡하지 본투비 쫄보다. 그래도 입 닥치고 인상 쓰면 쫌 무서워 보인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았는데, 친구들아. 아까부터 인상 쓰고 있는데 얘네 미동도 없는 거 보면 너희 거짓말했던 거지? 다 용서할 테니까 나 좀 도와줘! 현진은 소리 없이 절규했다. 서울로 발령 난 엄마가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새끼 그냥 내놓을 생각이 없네. 야, 이 새끼 뒤져봐.”

“아, 안 돼! 뭘 뒤져! 악! 어딜 만져요!!”

“만질 것도 없는 새끼가 존나 웃기는 소리하네.”

“마, 만질 게 없어도 만지면 안 되죠! 신고할 거야!”

“븅신새끼. 해라, 해.”



엄마아! 친구들아! 얘네가 나 성희롱해! 현진은 진심 무서웠다. 조금 더 있으면 엄마 부르면서 울 수도 있다. 아, 다리에 힘 풀려. 나 좀 살려줘. 여기서 죽을 확률은 당연히 없지만 오바 좀 보탰다. 닥치고 있으면 제법 매섭고 기럭지 긴 황현진은 그동안 이런 일 따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다. 몸 상태가 영 메롱인 것도 한몫했다. 장난 아니고 진짜 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나 죽나? 진짜 죽나? 현진이 막 자리에 주저앉으려던 순간이었다.



“야, 이 씨…. 약속을 했으면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거 아냐. 근데 뭐? 잤다고? 퍼질러 잤다고? 야 이 새끼야, 넌 내일 뒤졌어!”



엄마. 서울 너무 무섭다. 여기저기서 욕을 막 이따만큼 해. 현진은 결국 주저앉았다.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아까부터 올라오던 식은땀은 거의 줄줄 새다시피 나고 있었다. 나의 운명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맨날맨날 저 등쳐먹고 비열하게 웃던 김철수도, 무심하고 시크한 얼굴로 퉁박 주던 이맹구도 다 그리운 걸 보니 진짜 죽으려나 보다. 현진은 서글퍼졌다. 아직 예쁜 첫사랑도 못 해봤고, 손도 못 잡아봤고, 뽀뽀도 못 해봤는데! 열심히 삽질을 하며 길지도 않은 인생을 꼼꼼히도 돌아봤다.







한편, 격하게 욕을 지껄이며 지나가는 저 사람은 누구냐.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요 일대에 양아치로 이름 날리는 한지성 옆에 껌딱지마냥 붙어 다니는 이용복 되시겠다. 붙어 다닌다기엔 졸라리 싸워대기는 하는데 아무튼 젓가락 한 쌍처럼 세트로 딸려 다녔다. 아닌 척하면서 이용복 존나게 챙기는 한지성이랑 남이 한지성 욕하는 꼴은 또 못 보는 이용복이라 그렇다. 한마디로 끈끈한 사이라 이거다. 그 끈끈함이 도가 지나쳐서 서로 엿 먹이는 짓도 막 하고, 응. 영화 쏠 테니까 학교 땡 까고 나오라는 한지성 말에 못 이긴 척 튀었는데 이 새끼가 고사이 낮잠을 쳐 잔다거나 하는 그런 짓. 하.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 새끼는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잠을 존나 깊게 쳐 잘 수가 있지? 제 생각엔 작정하고 전화를 씹었거나 예약 문자를 걸어놓고 마음 놓고 퍼 잤거나 둘 중 하나다. 학교 땡까고 잠이나 자고 싶은데 혼자 혼나기 싫으니까 저를 꼬신 거다. 분명하다. 한지성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빼빼로 새끼 존나 발로 차버려. 이용복은 어째 제 얼굴에 침 뱉는 듯한 욕을 하며 땅을 꺼뜨릴 기세로 걸었다.



“야, 거기 너. 존나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지나가라?”



아니, 빡도 날 치는데 저건 또 무슨 개 짖는 소리. 용복은 휙 뒤를 돌아봤다. 각양각색으로 인상 더런 놈들이 웬 멍청하게 생긴 놈 하나 둘러싸고 저한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오는 시비 안 막는 주의의 이용복은 지금 이 상황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 뭔가 격렬하게 쳐야만 했는데 쟤네가 내 샌드백 해준다니 고맙지, 뭐.



“뭐, 이 새꺄. 불만 있냐? 눈깔 안 깔아?”



제 맘대로 생긴 놈 하나가 주둥이를 놀렸다. 용복은 아랑곳 않고 그 놈을 야렸다. 근데 그 눈깔 참 형형하여라. 야, 저 새끼 눈깔 흰자밖에 안보여. 순간 쫀심 상하게 쫄아버린 양아치들은 지들끼리 눈빛 교환을 열심히 하다가 선빵을 결심하곤 용복에게 달려들었다. 싸움은 선빵! 맞는 판단이었다. 처맞는 판단. 분명 선빵을 치려고 달려들었는데 되려 선빵 맞았다. 그것도 제대로 맞았다. 퍽도 아니고 뻑 소리가 났다. 저 새끼 이 나갔어. 백프로야. 더 놀랄 새도 없이 형형한 눈깔의 이용복이 양아치들에게 달려들었다. 악마다. 저건 악마야. 지옥 불에서 올라온 케르베로스! 현진은 생생한 폭력의 현장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뒤로 넘어갔다. 나 진짜 아픈데. 나 정말 죽나 봐.







이십 분이나 지났나. 용복은 손을 탈탈 털었다. 어깨도 함 돌려주고, 목도 휙 젖혀보고. 몸을 움직이니까 화가 좀 풀리네. 상쾌하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한지성 존나 빼빼로 새끼 넌 죽음을 면한 줄 알아라. 하하, 진심 행복하게 웃는 얼굴 참 선샤인하다. 한참 움직여 배고프니 이제 집 가서 라면이라 먹어야겠다. 그리곤 돌아서는 그 발걸음 가볍기 그지없어라.



“…….”



근데, 딱 돌아서는 그 순간에 눈에 걸렸다. 아까 그 멍청하게 생긴 애. 삥 뜯기던 애. 내가 쟤까지 때렸나? 용복은 슬쩍 걱정이 돼서 고놈 옆에 가 섰다. 일단 꼬라지 멀쩡하니 제가 때린 건 아니다. 그럼 이걸 버릴까 말까. 잠깐 고민을 하는데 또 눈에 걸렸다. 얘 땀이 그야말로 비 오듯 흐른다. 어떡하지. 용복은 단축키 1번을 눌렀다. 개 거지같은 한지성의 번호였다.







현진은 눈을 떴다. 아득히 날아갔던 정신이 돌아와 눈에 불을 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떡.”

“뭐?”



눈앞에 웬 인절미가 둥둥 떠다니는데. 머리는 콩고물 색에, 볼따구는 한가득 빵빵해서. 나 진짜 죽었나? 그러고 보니 이 인절미, 아까 지옥 불에서 올라온 케르베로스 걔 아닌가. 그 와중에 그 얼굴을 용케 기억에 넣어놓은 모양이었다.



“여기…, 사후세계인가요?”

“What? 한지성. 얘 헛소리하는데.”



인절미가 몸을 돌려 누군가를 부르면 거기 반응하는 쟤도 만만찮은 볼따구다. 현진은 괜히 제 볼따구 한 번 쓸어봤다. 나도 저런가?



“일어났냐? 뭐라는데?”

“떡이라고….”



인절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배가 찢어져라 웃는, 어, 까만 머리니까, 까만콩떡. 뭐야, 너 왜 웃어. 인절미가 목소리를 쫙 깔고 험악하게 물으면 콩떡이 상큼하게 답한다. 너 개떡같이 생겼다는 소리잖아, 그거! 제 좋을 대로 해석해놓고 약 올리는 게 빤히 보이는데 인절미는 또 그거 참을 성격이 못 되는 모양이었다. 이 새끼 진짜 너 죽고 나 죽자.



“여기서 소란 피우면 안 돼요.”



때마침 등장한 간호사쌤이 아녔으면 쟤네 싸웠겠지. 벌써 서로 멱살 잡았다. 현진은 눈 뜨자마자 험악한 꼴 볼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호사쌤, 나이스 타이밍. …간호사쌤. 간호사.



“…….”

“몸은 좀 괜찮아요?”

“…네. 근데 여기 어디….”

“…? 병원이죠?”


간호사쌤이 그걸 모르느냔 눈빛으로 저를 본다. 아니, 제가 그걸 묻고 싶은 게 아니라요.


“근데 제가 왜 여기….”

“급체했던데. 친구들이 데려왔어요.”



떡이랑 친구요? 전 사람만 취급하는데…. 현진은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 말 했다가 멱살 잡힐라. 제가 헛생각을 하는 동안 속전속결로 바늘을 제거한 간호사쌤이 병실을 떠났다. 링거 다 맞았으니까 퇴원해도 된단다. 현진은 팔뚝에 붙은 반창고를 물끄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저쪽을 봤다. 아직도 서로의 멱살을 꼭 붙잡은 두 놈이 저를 보고 있었다.



“어, 저기….”

“감사 인사는 됐고, 밥이나 사라.”



콩떡이 현진의 말을 싹둑 잘라 먹곤 당당하게 지껄였다. 그 옆의 인절미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본다. 어, 그래. 너도 같은 생각이라 이거지? 허허. 뭐, 보답하긴 할 건데. 이게 왜 삥 뜯기는 기분이 들까. 현진은 어거지로 웃었다. 엄마. 나 별로 안 좋은 애들이랑 엮인 것 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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