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함께 한다는 것의 정의는 가지각색이다. 함께라는 범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드시 마주보고 함께 있어야 함께 일 수도 있고, 같이 있으면서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함께 일수도 있었다. 꼭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이 닿아 있으면 그것도 함께라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모든 함께라는 것의 전제는 혼자가 아닌 것이었다. 같은 공간에서도 혼자 있는 같을 때,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혼자 먹는 것보다 지루할 때, 안고 있을 때도 다른 생각이 들 때. 돌아 본 얼굴이 그래서 차라리 모르는 얼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 그때가 마음의 끝이었다.


“아, 출근하기 싫다.”

“출근 하기 싫어요?”

“그걸 그렇게 의문스럽게 물어볼 일인가?”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겁이 났다. 함께라는 것은 그렇게 시시각각 얼굴을 바꾸고 변해서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유난히 따뜻하다 느꼈고, 포근하다 느껴서 잠에서 깼을 때 나는 바로 눈을 뜨지 않았다. 이 느낌이 꿈은 아닐까, 꿈이 아니라면 내가 눈을 떠 마주할 사람이 누구일까. 곽아론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잠시 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이 세상에 출근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어요?”

“있는데.”

“누구요.”

“나.”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익숙하고도 평범한 냄새가, 일정한 숨소리가, 평온한 떨림이 전해졌다. 이 사람은 곽아론이 맞다. 그 결론이 내려지자마자 느리게 눈을 떴을 때, 나는 가만히 웃었다.


“...아, 뭐. 그러시겠죠. 본부장씩이나 되면 출근이 재밌을 수도 있겠네요.”

“....”

“월급이 많으니까, 연봉이 엄청 많을 테니까.”

“....”

“7천? 8천?”

“한국은 그렇게 줘요?”

“더 받아요?”


잘 잤어? 마치 한 번도 잠든 적 없었던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밤새 나를 안고 있었던 몸이 여전히 나를 품에 꼭 안은 채 내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올렸다. 눈을 떠 본 얼굴이 다른 얼굴이길 바라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것은 참 큰 행복이었다.


“얼마 받는지 궁금해요?”

“네. 매력이 상승할 것 같아요.”

“....”

“조크예요.”

“아닌 거 같은데.”


출근해야죠. 물론 현실이라는 가장 큰 장벽이 그 행복을 잠시 보류하게 만들었지만. 그 한 마디에 꿈에서 깨어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비적비적 화장실로 걸음을 옮겨 마주한 거울을 보고는 그대로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출근이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즐거워요.”

“.....”

“내가 제법 쓸모 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

“.....”

“그런데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인 동시에,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

“더 좋아졌어요, 나는.”


왜 그래요, 무슨 일이야! 프라이를 하던 팬을 그대로 든 채로 욕실로 한 달음에 달려온 곽아론이 곧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곽아론을 보며 멍하니 서있다 이내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며 문을 그대로 닫아버렸다.


“내가 누굴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

“그 사람을 출근만 하면 매일 보는 것도 좋았고.”

“.....”

“최민기 퉁퉁 부은 얼굴도 좋고.”

“..마지막은 놀리는 것 같은데.”


내가 밤새 뭘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부을 건 또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얼굴을 내내 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뜨자마자 입까지 맞춘 곽아론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거울에 한 팔을 기대고 선 채 그대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사귀는 사이에 이건 너무 했어, 진짜.


“난 최민기씨가 무슨 짓을 해도 좋은데.”

“....”

“머리를 완전히 밀어도 좋고, 티셔츠랑 바지를 바꿔 입는다 그래도 좋고.”

“...네?”

“아니 아예 옷을 안 입어도 좋고.”

“마지막만 진심 같은데요.”


뭐 꼭 그런 건 아니라는 듯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곧 슬쩍 내 손을 잡아 오는 곽아론의 손을 꽉 힘주어 잡았다.


“나도 출근하면 본부장님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나도 그건 좋은데.”

“.....”

“지금은 어차피 같이 있는데 왜 출근을 해야 하나 이 말이죠, 나는.”

“그건 그렇네.”

“어차피 본부장님 보려고 출근 하는 건데 이건 이유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정말 하기 싫다는 듯 이제 회사가 코앞에 보이는 도로 밖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민기야! 닫힌 문 밖에서 애타게 나를 찾는 곽아론의 목소리에 서둘러 세수만 하고 나타난 나는 곧 걱정스럽게 양손에 뭐 하나씩을 들고 서있는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럼 우리 출근 하지 말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왜요, 하기 싫다면서.”

“그러다 나 잘리거든요?”

“출근하기 싫다면서 잘리는 건 싫은가보네?”


나 지금 너무 못생긴 것 같아요. 내 말에 어? 하고 한참을 멍하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곽아론이 이내 고개를 진심을 다해 갸웃거렸다. 못생긴 건가? 그리고는 이내 목만 쭉 빼 나를 바라보다 곧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민기야, 넌 항상 예뻐.


“당연하죠, 어떻게든 붙어 있을 거야.”

“....”

“그래야 티켓 값 벌죠.”

“무슨 티켓?”

“미국 갈 비행기 티켓이요.”


거짓으로라도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싫을 리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진심이라면 더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그 온도가 설령 낮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상관없는 마음이 말 한 마디에 금세 또 동했다. 그럼 당당하게 밥 먹을게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곽아론은 서둘러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국?”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번씩은 갈 거예요.”

“내가 와도 되는데.”

“싫어요, 내가 갈래요.”


다 와서 막히는 도로가 고마웠다. 출근 시간의 정체에 막혀 잠시 멈춘 덕분에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오는 얼굴을 보며 나는 곧 바깥 풍경의 냄새를 맡듯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들이쉬었다.


“본부장님은 한국에서 내가 어떤 길로 출근을 하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

“어떤 사람들과 일하는지 다 알잖아요.”

“....”

“상상이 아니라, 진짜를 떠올릴 수 있잖아요.”

“....”

“근데 난 아니에요.”


이 풍경 속의 곽아론이 나는 제법 익숙했다. 아니,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서울의 도로를 익숙하게 달리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곽아론도, 한국의 아침에 정체된 도로를 뚫고 출근을 하는 곽아론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출근 하고 있어요. 미국으로 돌아간 곽아론이 그렇게 말을 한다면, 나는 어김없이 지금의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다 내가 만들어 내야 해요.”

“.....”

“뉴욕에 있는 당신 집도, 집 근처의 꽃집도.”

“.....”

“거기 있는 장미가 예쁘다는데, 미국 장미는 어떻게 생겼나.”

“.....”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나 그것이 나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의 곽아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계절이 바뀌는 풍경 속의 나는 지금과 달라지는 것이라곤 옷의 두께와, 머리의 길이정도겠지만 곽아론은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살고 있는 대륙도, 쓰는 언어도, 먹는 음식도 그리고 밤과 낮까지.


“그러니까 내가 갈게요. 내가 한 번, 그리고 당신이 한 번.”

“.....”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

“지루해질 만큼 자주 본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

“적어도 못 봐서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자동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 완전히 멈출 때까지 곽아론은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를 향해 완전히 돌릴 수 없는 얼굴을 나만 그저 힐끔거렸다.


“이래서 싫다고 했구나, 처음에.”

“네?”


거슬린 적 없던 엔진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멈추자 놀라울 만큼 고요해진 공간의 적막을 곽아론이 먼저 깨트렸다. 그렇다는 동의도, 그래도 싫다는 거절도 아닌 뜻밖의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은 나는 곧 나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린 곽아론이 곧 그대로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는 것을 막지 않았다.


“미안해요. 헤어지는 것부터 하게 해서.”

“본부장님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

“어쩌면 본부장님 계획에 끼어든 게 나일 수도 있는데.”

“.....”

“끼어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진 않아요.”

내 말에 곽아론은 품에 안고 있던 나를 놓으며 이내 턱 끝을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피는 나를 보며 곽아론은 곧 헛헛한 웃음을 뱉어냈다. 같이 출근하는 거 자체가 이상한 것 같은데. 그 말에 아, 하며 짧게 동의의 탄성을 뱉어 낸 난 곧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얼굴을 같이 마주했다.


“고마워요, 끼어들어줘서.”

“.....”

“훌륭한 새치기였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대, 새치기 이런 말.”

“식당에서 들었어요. 새치기 하지 말라고.”


개발팀 황 팀장이 알려준 맛집이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막 그거 가지고 싸웠다는 이야기를 하며 진지해지는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곽아론에게 입을 맞췄다.


“출근하기 싫다.”

“....”

“그냥 계속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

“지금 너무 좋아요.”


아무렇지 않게 대단한 것을 사소함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거창한 이야기지만,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이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진심이 전부인 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라 좋았다. 그래서 입을 맞추고 가만히 곽아론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다 곧 결심한 듯 돌리는 얼굴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벨트 다시 해요.”

“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다시 시동을 켜는 곽아론의 팔을 서둘러 붙잡은 나는 이내 뭐하는 거냐는 듯 살짝 눈을 치켜떴다.


“나도 출근하기 싫어져서.”

“아니 그렇다고..”

“안됩니까?”

“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내리자는 듯 고갯짓을 하자 그제야 아쉬운 듯 시동을 끄는 것을 보며 나는 먼저 조수석에서 내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리듯 걸어 뒤를 살폈다.


“이제 나오십니까?”

“아, 네.”


1층에서도 타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알지만 잘은 모르는 상사를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나는 이내 그의 옆에 서있는 곽아론을 향해서도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순간 의아해하다 곧 상황을 눈치 채고는 입술을 감춰 물며 웃음을 참는 얼굴을 나는 그대로 외면했다.


“....”

“....”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인 척 어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는 곧 나보다 한 발 정도 뒤에 서는 곽아론보다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엘리베이터의 벽에 새겨진 뜻 모를 문양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는 곧 1층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밀려드는 사람들 틈에서 한 발, 두 발 뒤로 밀려났다.


“.....”

“.....”


그러다 순간 누군가 뒤에서부터 가만히 내 허리를 붙잡는 듯한 느낌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완전히 내 뒤를 막고 선 곽아론이 있었다. 올곧게 정면을 바라보며, 만원이 된 공간 안에서 나를 붙잡고 선 얼굴을 힐끗거린 난 곧 느리게 그 손을 떨어뜨렸다.


“......”

“......”


그러나 그것이 나를 완전히 벗어나게 할 순 없었다. 그보다 먼저 내 손을 슬며시 붙잡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획 고개를 돌린 나는 여전히 묵묵히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보다 곧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흠..”

“.....”


한 층, 한 층 멈출 때마다 조금씩 공간이 생기고 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많아지는 공간이 점점 여유로워졌다. 벽에 붙어 설 정도로 가장 뒤라 우리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헛기침을 하며 곽아론을 향해 눈치를 주자 곽아론은 아예 나를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뭐해요.”

“이거 스릴 있다.”

“스릴 같은 소리하고 자빠..”

“...”

“아, 누가 봐요.”


서로에게 들릴 정도로만 아주 작게 거의 입모양으로만 속닥거리던 나는 곧 누군가 크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에 서둘러 붙잡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제야 내 손을 놓아 준 곽아론이 곧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끌어 올린다.


“이따 봅시다.”

“.....”


보긴 뭘 봐요, 안 봐요. 꼭 그런 시선으로 곽아론을 흘기던 나는 이내 느리게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좋냐?”

“아, 깜짝이야.”


들어가기 전에 아예 커피를 뽑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휴게실로 방향을 튼 나는 갑자기 불쑥 나타난 얼굴에 그대로 자판기를 붙잡고 서서 고개를 돌렸다. 지은 죄가 있기는 있구나? 놀라는 거 보니. 그런 나를 향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중얼거린 변만식이 곧 자판기 안으로 동전을 성의 없이 툭툭 찔러 넣는다.


“너 그러다 들킨다, 어?”

“내가 뭘.”

“엘리베이터에서 뭐하는 짓이야.”

“.....”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줘도 모르고.”


네가 뭘 어쨌는데. 나를 향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뻔뻔하게 대꾸하자 곧 막 뽑혀 나온 것을 꺼내든 녀석이 이내 그것을 냉큼 제 입으로 가지고 간다. 줄 거라 기대도 안 했지만, 줄 생각도 없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그 몸을 밀어내고 동전을 하나하나 넣은 나는 곧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못 들었어?”

“뭘.”

“너는 진짜 나 없이 어떻게 곽 본이랑 연애 하냐?”

“...너 커피로 죽빵 안 맞아봤지.”


곽 본 이야기 들었지? 그 말에 동전만 넣어 놓은 채 고급커피를 누르지 못하고 멈춘 손가락이 이내 당장이라도 녀석의 눈을 찌를 듯 달려들었다. 그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뺀 변만식이 이내 주변을 살피고는 곧 자판기에 등을 기대고 섰다.


“곽 본, 미국에서 되게 좋은 일 맡을 기회가 생겼대.”

“.....”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잘만 되면 승진은 따 놓은 건가봐.”

“.....”

“무른 사람은 아니다 싶었는데, 대단하긴 한가보더라.”

“본론만 말해.”


부러워 죽겠다고, 나도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이것보다 훨씬 나았을지도 몰랐다며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말까지 덧붙이는 변만식을 향해 단호하게 중얼거리자 곧 입에 물고 있던 커피를 손으로 옮겨 잡으며 다시 입을 연다.


“안 맡겠다고 했대.”

“왜?”

“왜는 무슨 왜야. 책임자가 되면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렇지.”

“......”

“시간 달라고, 한국에서 일을 정리하고 가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못 간다고.”

“......”

“여기 일 정리할 거 없잖아, 솔직히.”


있다고 해도, 굳이 여기서 남아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면 이유는 뻔하지 않겠냐며 나를 향해 중얼거리는 변만식을 빤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내 이미 뽑혀 나와 있는 커피를 빼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이 이야기 나한테 해주는 이유가 뭐야? 너 때문에 안 간다고 한 거니까 미안해해라, 그런 거야?”

“어차피 가서 그거 맡았다고 잘 된단 보장 없어. 책임자라는 자리가 잘하면 좋지만 못하면 폭망이니까.”

“.....”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곽 본은 굳이 여기서 시간 낭비 할 사람이 아닐 거라는 거야.”

“......”

“네가 아니면.”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까지 보장 받으며 여기에 남으려는 이유, 곽아론이 정리해야 할 것.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나 때문이 아니라는 말은, 억지였다. 그건 확실히 무책임한 말이었다.


“그럼 의도가 뭔데, 나한테 알려주는.”

“잘 지내라고, 고마워하면서.”

“표면적 의도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야, 나 그렇게 막장 아니거든?”


그걸 지금 내가 납득할 수 있겠냐는 듯 콧방귀를 뀌자 순간 반응한 얼굴이 이내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다시 얌전해진다. 그리고는 곧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 흔든다.


“뭐냐, 그 기분 나쁜 표정은.”

“너 나 되게 좆같았잖아.”

“.....”

“근데 나 같은 거 생각도 안 날만큼 좋은 사람 만났으니.”

“.....”

“행복 하라는 말이다, 어?”

“.....”

“사람이 말이야, 선심을 쓰면 그걸 받을 줄도 알아야지.”


정말 너무하다는 듯 불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곧 내가 꺼내지 못하고 있던 커피를 대신 꺼내 나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는 곧 다시 입을 연다.


“별로 안 믿고 싶겠지만 진심이야.”

“....”

“너도 한번은 행복 하라는 말.”

“....”


승진을 못하면 그런 거라도 해야지. 난 과장 달 것 같다. 결국 마지막은 그런 식으로 끝을 내고 돌아서는 변만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 손에 든 커피를 꼭 쥔 채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나는 어쩌면 이미 꽤 좋은 연애를 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끝이 이별이었어도, 결국 그 이별이 지금 내가 곽아론을 만날 수 있었던 기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이별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와 헤어져 준 변만식이 조금은 고마워졌다.


“......”


아니, 꽤 많이.






붙잡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기에 굳이 얼마가 남았다 세지 않던 나는 벌써 절반이 사라진 달력을 빤하게 바라보았다. 곽아론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이보다 깔끔할 수 없게 정리가 되어버린 것들을 핑계로 더 이상 회사에 머물 수는 없었다.


“그럼 본부장님은 바로 미국 돌아가시는 건가?”

“뭐 그렇지 않겠어?”

“아, 미국이라.”

“따라가.”

“제가 여자였으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았을 거예요. 사랑한다고, 데려가 달라고.”


실없는 소리를 하며 한숨을 내쉬는 주석 선배를 보지도 않은 채 달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회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직 우리에게 시간은 남아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다 돌아갈 생각이니 걱정할 것 없다던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복도를 걷던 나는 곧 늘 당연하게 노크를 하고 들어섰던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


이제 내일이면 이렇게 찾아와도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순간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서둘러 긴 숨을 내쉬고 얼른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그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선 채로 짐을 정리하고 있는 곽아론을 향해 곧 빙긋 웃어보였다.


“벌써 다 챙겼어요? 내가 도와주려고 했는데.”

“챙길 것도 별로 없어요. 이게 다야.”

“...그렇구나.”

“.....”


상자 한 개가 전부라는 말을 하며 나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 곽아론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먼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곧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누군 좋겠네. 적어도 2주는 백수로 살 수 있어서.”

“백수?”

“논다구요, 일도 안 하고.”

“아, 그렇지. 그거 좋지.”


너무너무 좋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곽아론이 사실은 미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여기서 처리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시차가 맞지 않아 밤새 한 숨 자지 못하고 일을 했을 얼굴 여기저기에 피곤이 덕지덕지 내려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피곤한 티를 내지 않으려 웃기만 하는 얼굴을 바라보던 내가 곧 소파 가장 끝으로 엉덩이를 옮겨 앉았다.


“나 본부장님 핑계대고 좀 쉬려고 왔어요.”

“내 핑계?”

“뭐, 어찌됐든 내가 본부장님 여기 있는 동안엔 비서 겸 서포터였으니까.”

“.....”

“마지막 가시는 길도 잘 보좌하겠다, 뭐 그런 핑계?”

“.....”

“그러니까 여기 누워요.”


제 옆에서 멀어지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곽아론이 곧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는 내 손을 보고는 이내 냉큼 그대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당연하다는 듯 가져가 붙잡아 제 가슴께에 올려두는 손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정갈하게 넘긴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집 정리할 거예요.”

“집도 빼래요? 회사 그만 나온다고?”

“아니, 있는 동안은 지내도 된다고 했는데 내가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럼 어디서 지내요?”

“당분간은 호텔에 있으려고.”


집도 없이 그래도 되겠냐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곧 조심스럽게 곽아론을 불렀다. 본부장님. 내 목소리에 살며시 감았던 눈을 밀어 뜬 곽아론을 향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는 동안 나랑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하고 싶은 거?”

“내가 뭐 해줄까요. 안 심심하게.”

“......”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곽아론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당장 바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바뀐 밤낮도, 불편한 호텔도 다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럴 수가 없어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물었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


“최민기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응. 해달라는 거 해줄게요.”

“....못 할 것 같은데.”

“왜요, 할 수 있어요.”

“.....”


그래서 꺼낸 말에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곽아론의 표정이 곧 담담해지더니, 이내 몸을 돌려 내 허리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당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면 좋겠어.”

“......”

“가지 말라고.”

“......”

“붙잡으면 좋겠어.”

“.....”


충분히 이기적인 나에게, 조금도 이기적이지 못한 곽아론은 말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순간 숨을 멈추고 내 가슴께에 읊조리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던 나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가지 말라고 해.”

“.....”

“주면 좋겠어.”

“.....”


어떤 이별이든 이별은 당연히 슬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재회의 약속이 있음에도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떨어지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곽아론의 얼굴을 적셨다.


“......”

“......”


아니, 그것은 곽아론의 눈물이었다.


“가기 싫다, 민기야.”

“......”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끝내 이기적인 나에게 곽아론은 울며 매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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