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이 막 팀장을 달았을 때였다. 입사동기 중 해준이 가장 먼저 팀장이 되었고 단 세명만이 승진했다.  정확한 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티오는 오래전부터 관습과도 같았다.  대리는 열명, 팀장은 세명, 과장이 한명.  승진연차를 막 채운 대리 5년차 해준이 그 세 명 안에 드는 것은 사내에서 공공연하게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물론 해준 자신에게도.


우쭐했다. 셋 중에서도 자신의 능력이 제일이라 여겼다. 나머지 둘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자만하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다행이도 아주 오래전부터 해준은 자신의 감정을 능숙하게 숨길 줄 알았다.  침묵으로 겸손함을 가장했다.  잘 먹혔다.  그 자존심과 자부심에 구멍을 낸 것은 우습게도 본인이 아닌 부하직원 태정이였다. 

신입사원 기본교육을 제가 시켰다. 회사 특성 상 가장 중요한 교육이었고, 태정은 고만고만한 녀석들 사이에서 당연 눈에 띄었다.  괜찮은 아이였다.  눈치도 빠르고 일도 곧 잘했다.  전체적인 신체밸런스 얼굴 스타일까지 제 취향과 잘 맞았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해준이 평가해야 하는 항목은 단 한가지였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인가. 해준은 그렇다고 판단했다. 아마 최고점을 줬을 것이다. 


오년 뒤,  대리승진대상자 교육과정 중 제가 있는 팀으로 삼개월 간 연수를 받았다. 연수기간 동안 연수자도 팀을 탐색하지만 팀도 연수자를 탐색한다. 쓸만한 녀석이 있을까. 신입 사원 연수 때에 비해 인원이 5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인원이 다 회사를 나간 것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 다른 연수원 어딘가에서 전혀 다른 내용의 연수를 받고 있겠지. 여기 있는 5분의 1은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예전의 해준처럼. 다시 만난 태정은 신입만의 풋풋함을 버렸지만 대신 그동안 약간의 노련함과 여유를 배워왔다.  제 눈치를 과하게 보는 듯 했으나 사실은 그것마저도 사회생활임을 해준은 잘 알고 있었다. 대리를 달면 제 팀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사람에게는 안 내던 욕심이 났다.  연수 막바지, 마지막 보고서에서 태정은 실수를 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았다.  잔소리 몇 번하고 제가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경직된 표정. 딱딱한 말투. 실수에 비해 좀 오버 된 반응이었다. 그 연차에는 어떤 실수도 실제보다 커 보인다.  아니면 그것마저도 태정의 사회생활일지도. 자리에서 일어나 제 앞에서 얼어있는 태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일단 퇴근하고 내일 보자며 먼저 퇴근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태정은 해준에게 아침인사 대신 사직서를 내밀었다.

 

 

기가 막혔다. 이 새끼 뭐지? 잠시 할 말을 잃고 하얀 봉투만 쳐다봤다. 봉투 겉면에 사직서라고 한자로 써 있다.  인터넷을 보고 배꼈는지 글씨를 썼다기보다는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흘깃 올려다 본 태정의 표정은 어제보다 한결 편해보였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 했다. 제정신까지도.

 

 

"이거 뭐야?“

 

“...........................”

 

“이태정. 이거 뭐냐고.”

 

“............................”

 

“입이 붙었어?”

 

“사직서입니다. 팀장님.”

 

“그건 알겠는데. 이걸 왜 가져오냐고.”

 

 

다그침에 내어놓은 태정의 목소리가 표정만큼이나 담담했다.

 

 

입사 이래 수 많은 선후배와 동기들의 퇴사를 지켜봤다. 회사는 기회를 여러 번 주지는 않았다. 자질이 부족하다 싶으면 회사 일을 더 많이 알기 전에 해고시켰다. 직원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지만 나간다는 사람을 잡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비밀유지를 빙자한 입막음이 우선이었다. 회사의 기본 방침이었다. 뛰어난 업무능력과 무거운 입. 그리고 철저한 충성심. 생계를 위한 일자리 중에 하나지만 DS상사맨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다.



“이거밖에 안되나...”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태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어떻게 내 밑에서 일한지 세 달 만에 그만둘 생각을 하게 했을까. 그래서 한심해졌고. 고작 이 정도 실수에 사표 쓰는 새끼인지도 모르고 남몰래 어여삐 여겼다. 그래서 화가 났고.

 

그런데 태정이 그 한마디에 심하게 동요했다.  평소에는 빠릿하게 대답을 잘하더니 오늘은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리라고 굳은 결심이라도 한 것 같았는데 갑자기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고 어깨를 움찔했고 입술이 달짝였다. 해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태정의 약점을 보았다.

 

 

“어? 이거 밖에 안되냐고.”


혼잣말은 질문으로 둔갑되어 다시 입 밖으로 나왔다. 태정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아닙니다. 저....그...죄송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내놓았다.

 

 

 

어쩔까.

회사의 방침이 해준의 방침이었다. 저 역시 회사를 떠나는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제 발로 떠나겠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사원은 또 만들어내면 된다. 이런 걸로 떠날 새끼면 어차피 언젠가는 떠난다. 정을 둬봤자 저만 손해다.

 

그런 해준이 발목이 잡힌 건, 태정에 대한 정이 아니라 자신의 자부심과 자존심이었다. 해고자가 아니라 퇴직희망자라. 대리를 목전에 둔 녀석이. 내 팀에서 연수를 받다가. 말이 도는 것이 싫었다. '자나 깨나 입단속,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가 표어나 마찬가지인 회사지만 '비밀은 없다.'는 어느 회사에나 있는 진리였다. 무엇보다 저와 함께 팀장을 단 2팀장의 빈정거림이 환청처럼 귓가에 들렸다. “서팀. 1팀에 대리연수 온 놈, 사표 썼다며? 대단해. 다음이 우리였는데 우리 팀엔 와보지도 못했잖아. 잘 생겼다길래 얼굴 좀 보려고 했더니..서팀이 책임져.”

 

 

 

“아니면 어쩔 건데. 이보다 나을 수 있겠어?

 

 

해준은 결단을 내렸다.

 

 

 

“따라와.”

 

 

책상 위 사직서 봉투를 낚아채듯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24층을 누르자 따라 들어오던 태정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봤으면서도 해준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가는 줄 알았을까. 태정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디 가십니까?’하고 물을 정도로 눈치없지 않았다. 도착해서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제야 태정은 알았을 것이다. 그날도 이상하게 옥상에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는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믹스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태우곤 했었다. 옥상 문을 연 채로 문고릴 잡고 태정을 돌아봤다. 먼저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한발 뒤에서 따라오던 태정이 다시 움찔한다. 벌써 무서워? 이제 시작인데.


다음편 대신 써주실 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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