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탄 개성인 내가 사실은 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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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불발탄. 여기서 졸지 말고 방에 쳐들어가서 자라고. "



" ...아, 뒤질 거 같거든. 지금. "



아앙? 휴일을 꼬박 들여 인간을 만들어줬더니 지랄하는 거냐? 샤워를 마치고 따끈따끈한 타올을 두르고 나온 바쿠고가 입에서 불을 뿜는다. 기숙사 1층 소파에 거의 녹아 웅크려 누워있는 내게 따끔한 불호령이 떨어져,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빡침이 울컥 몰려온다. 니 자식이 꼬박 반나절을 쪼아댄 통에 지금 팔 한 짝 들기도 힘들단 말이다. 나의 투덜거림에 바쿠고가 비릿하게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우뚝 들어 올린다. 아무짝에나 쓸모없는 개성 활용법 알려줬으면 고마워해라. 병신아!




바쿠고와 나는 똑 닮은 개성을 가지고 있다. 바쿠고는 땀샘에서 니트로글리세린을 분비하여 폭약처럼 사용한다. 나는 거기까지는 발전시키지 못한 단순 분비 수준에 그쳐, 뇌관과 도화선 같은 서포트 아이템을 들고 다녀야만 유에이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다. 화약 소총보다도 훨씬 번거로운 이 전투 방식은 A반의 바쿠고를 만나며 재평가되어- 나는 실력을 인정받아 서포트과에서 히어로과로 편입될 수 있었다.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냐고. 바쿠고의 서포트를 맡는다.



처음엔 본인의 짝퉁이라며 겸상도 하지 않으려는 바쿠고에게, 편입시험 겸 치러진 반 대항전에 합류하여 땅에 도화선을 깔아 기습 폭격을 먹여주었다. 이이다에게 올라타 근거리 공격에 특화된 바쿠고와 거리를 벌리고- 세로의 도움을 받아 갈퀴를 단 뇌관을 뻗쳐 그가 번쩍이는 속도로 날아올 길목에 설치했다. 그리고 미네타와 함께 한껏 그를 도발했다. 나는 단전에서부터 숨을 끌어올려, 양손을 입에 붙인 채 소리를 빽 질렀다.



" 야! 네 짝퉁 여깄다. "



" 부숴주마! "



번뜩이는 눈으로 돌격하는 바쿠고를 보니 식은땀이 다 난다. 근데 나도 꽤 왈가닥하는 성격이거든. 나는 그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 그가 들어온 길목을 차례대로 폭파해 위력에 휘말리도록 설계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 사이에서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버린 바쿠고가 벙찐 표정을 지었을 때,


어때. 너를 똑 닮은 방식으로 공격당해보니. 오기가 붙어 승자의 미소를 지어주자, 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부숴버린다는 둥 악에 받친 지랄을 해대다 동급생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렇게 그의 눈엣가시가 된 히어로과 A반의 나는, 머지않아 바쿠고에게 간택당했다. 그때 쓴 기술의 꿍꿍이를 알려달라고 협박당하고, 니트로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는 둥- 휴일마다 불려가 강제로 합을 맞추고 있다. 그래! 그렇게 우쭐대다 니트로 원거리 공격을 먹어보니 어떠냐.



" 야. 짝퉁. "



" 썩 꺼져버려. 바쿠고. "



" 넘버원 히어로가 될, 이 몸의 도움이 될 기회를 준다. "



교실 한복판, 바쿠고가 재수 없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저를 지칭한다. 어쩜 부탁하는 법도 지랄맞아.

이건 비밀인데, 그와 내가 만들어내는 니트로글리세린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부를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와 치료제, 정반대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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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로글리세린은 강력한 폭발성을 가진 물질로

다이너마이트의 주요 성분으로 쓰이고

심장의 통증을 줄이는 혈관 확장제로도 쓰인다. 



CURE!

바쿠고 카츠키 드림


* 드림주의 개성은 '치유'입니다.

* 개성 발동 조건은 '접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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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성은 치유다.


내가 분비한 니트로글리세린도 실은 치유 개성의 물질을 뒤튼 것으로, 개성을 속이기 위한 눈속임에 가깝다.

말하자면 치유에 특화된 몸으로, 니트로를 비롯한 치유를 위한 물질을 생성하고 접촉하여 구조자에게 전달한다.


발동 조건은 접촉이다. 몸의 면적을 얼마나 접촉하는지에 따라 발동 강도가 달라진다. 리커버리걸이 입술을 접촉하여 치유하는 것처럼, 부상이 심한 사람일수록 나는 가능한 몸의 많은 면적을 구조자에게 맞대어 개성을 발동시킨다. 간단한 생채기나 베임 정도야 손을 가져다 대면 즉각적으로 치유가 가능하지만, 상처가 깊어질수록 나는 온 몸을 열어 구조자를 감싸 안고, 최대한 넓은 면적을 맞붙여야 한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돌연변이처럼 불쑥 발현된 개성이 시작이었다. 여느 때처럼 할머니의 병문안으로 요양병원에 방문하여, 간이 의자 한 켠에 구겨져 앉았다. 의식도 온전하지 않은 그녀를 보며 고장 난 듯 눈물이 나왔다. 할머니까지 가면 나는 이제 누구랑 살아. 나 너무 무섭다. 나는 속상한 말들을 여과 없이 뱉으며 눈이 벌겋게 충혈되도록 목놓아 울었다. 욕창이 생긴 할머니의 허벅지를 만지며, 상실의 홍수를 목전에 두고 무력감을 실감하며 끊임없이 바랐다. 구하고 싶어. 구하고 싶어.



그러다가, 욱신거리는 가슴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을 짓누르는 통증에 도저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생소한 고통에 허우적대다가 겨우 의자를 지지대 삼아 다시 일어나 앉고, 호출 벨을 눌러야 하나 망설이던 참이었다. 내 손이 닿아있던 할머니의 짓무른 살이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에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쉽게 믿기지 않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삑, 삑, 할머니가 매단 유지장치의 일정한 신호음이 귀에서 점차 흐려져 갔다.



그렇게 어느 날- 느리게 발현된 내 개성의 단점이라고 하면, 나를 치유하는 게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다. 내 개성은 내게는 적용되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목숨은 한 개 뿐이다. 남을 구할 수는 있지만, 나를 구할 수는 없는 반쪽짜리 능력이었다. 나는 나를 구원해보고자 방 안에 박혀 비밀리에 개성을 컨트롤하며- 자가 치유를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애꿎은 흉터만 몸에 늘어갈 뿐이었다.



내 쓰임새 정도는- 나도 안다. 개성을 등록한다면 분명 유용하게 쓰이겠지. 죽어가는 히어로를 치유하여 살리는 쓰임이야 그 얼마나 귀한 개성인가. 히어로 사회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가 치유가 불가한 시점에서 이 개성은 내게 치명적인 단점이 되었다.



빌런과 대항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히어로들을 위해 개성을 사용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빌런의 타깃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나다. 나를 1순위로 죽이겠지. 최악의 상황에는 으슥한 곳에 꽁꽁 묶여 이용만 당하다 죽을지도 모른다. 자가 치유가 불가능한 현재 시점에서 개성을 밝히는 순간, 말 그대로 내놓은 목숨이 된다. 어디 내 목숨을 내놓고 남을 살리는 일이 쉬운가. 나는 머리를 저었다. 머저리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어느 바보 같은 히어로가 저를 제물로 바쳐가며 남을 살리겠는가. 프로 히어로면 몰라. 그래도 나는 역시 안 된다. 개성이 생긴 이후로 철저히 유에이의 보호 아래에서 개성을 쓴 리커버리걸과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 유에이마저 휘청거리는 이런 상황에서 나는 높은 확률로 살해당한다. 아마 백퍼센트.



그래서 나는 나의 안전을 지키고자

유에이 서포트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올마이트가 은퇴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조한 불발탄 개성을 훈련 중에 흘려,

히어로과에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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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발탄. 방과 후 7시다. "



" 아. 안 해! "



" 시위하지 마라. "



저거 완전 독재자 아니야? 식판을 들고 다가온 바쿠고가 제 할 말만 툭 던져놓고 급식실 벽기둥 뒤로 사라져버렸다. 어제도 특훈을 빙자해 폭력 비슷한 혹사를 얼마나 당했는지 모른다. 방과 후에 다시 불려갈 생각을 하니 볼 한쪽에 밀어 넣어놓은 미트볼도 아무 맛이 없다. 급조한 개성이다 보니, 바쿠고와 힘겨루기를 하면 다음 날 온 몸을 쓸 수 없게 된다. 츠유와 우라라카가 나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쨩은 고생이 많네. 츠유의 위로 비슷한 말을 들으며 젓가락을 우물거렸다. 나는 여가 시간도 뺏긴 채 이런 식으로 바쿠고에게 시달리는 게 싫으면서도- 사실 이 곳에서 지내는 것이 싫지는 않다.



히어로가 빌런에 의해 공격당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러서, 발 뻗고 잠들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빌런 연합의 규모가 커지고 모종의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며 히어로의 입지가 위협받는 세태에서, 이런 식으로 섞이는 방법이야 말로 나의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치유 개성을 쓰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여기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설상가상 나는 히어로과의 동급생들과도 가까워지며 정 비슷한 것이 생겨서, 그들을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정의감도 마음 깊숙이 피어오르고 말았다. 나는 여기에 있다. 필요한 순간이 오면 이들을 돕는다. 기밀처럼 마음 깊이 숨겨둔 다짐이었다.




" 요즘 너무 여유 없지 않아? 쉬어가면서 해. 바쿠고! "



" 맞아. 컨디션을 챙기는 것도 히어로의 본분이다! (-)도 요즘 무리인 것 같고. "



" ... 내가 알아서 한다고! 망할, "



신경끄라고! 부글거리던 바쿠고가 소리를 빽 질렀다. 성난 표정의 바쿠고에 훈수를 두던 이이다와 카미나리가 입을 다물었다. 우와, 표정... 옆에서 열심히 숟가락질을 해대던 키리시마가 바쿠고를 보고 폭소했다. 바쿠고, 너 고춧가루 끼었거든? 쾌활하게 웃어대는 키리시마의 뒤통수를 냅다 갈긴 바쿠고가 날카로운 눈으로 밥을 한 움큼 떠 넣었다. 미도리야 이외의 동급생에게 관심조차 잘 가지지 않던 바쿠고가 외골수 훈련만을 고수하다, 무슨 심경의 변화로 편입생과 휴일 마다 합을 맞춰대는지 키리시마와 카미나리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와 바쿠고가 비슷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할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바쿠고는 그에 대한 설명을 제 친구들이나 심지어 (-)에게도 해준 적이 없기에, 바쿠고의 낯선 태도가 재미있었다.



바쿠고 네 녀석, 설마! 사심 채우는 건 아니지? 바쿠고를 한 번 더 긁을 심산으로 입을 연 키리시마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판에 얼굴이 처박혔다. 거의 세모난 눈을 한 바쿠고가 이죽거렸다. 죽여주랴? 아니라고 말하면 될 걸 과하게 반응하는 바쿠고를 의심하기에는- 그의 성정이 원래도 불같은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카미나리와 이이다가 둘을 떼어놓았다. 그래. 밥이나 먹자. 이따 필요하면 영양제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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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썩을 불발탄!



번쩍거리는 섬광과 함께 눈앞이 점멸했다. 그 위력도 대단하다는 바쿠고의 A.P 샷이 코 앞까지 다가와 번쩍이고 있었다. 저 새끼는 확인도 안 하고...! 나는 그를 탓 하기도 전에 화끈해지는 얼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옆에서 튀어 오른 미도리야가 허리를 낚아채 궤도를 돌려주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가뜩이나 신체 능력도 이 중에서는 최악인데, 이러다간 실전 임무에 투입되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겠다. 미도리야가 땅에 착지해 나를 내려주자마자 나는 무섭게 바쿠고에게 달려갔다. 바쿠고도 외려 빡친 표정으로 내게 돌진한다.



" 사정거리 안에서 알짱거리지 마라, 병신아! "



" 네가 말도 안 하고 쏴대서 그렇잖아?! "



" 둘 다... 진정하면 어떨까...? "



훈련장 한 가운데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는 통에 A반 동급생들의 이목이 쏠렸다. 살벌하네... 키리시마와 세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들을 제지하기 위해 다가갔다. 변하지를 않네. 사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우선 둘 다 심호흡 좀 해봐...! 미친 듯이 싸우는 나와 바쿠고 사이에서 식은 땀을 흘리는 미도리야가 말리는 와중에도 빌어먹을 말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딴 식으로 굴 거면 집에 가라. 바쿠고는 화나는 말만 골라서 하는 재주가 있다. 며칠 내내 혹사해서 컨디션도 안 좋은데, 이대로는 진짜 쓰러지겠다. 나는 화악 열이 올라,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훈련장을 나가 라커룸으로 향했다.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은 바쿠고가 몇 걸음 쫓다가 우뚝- 멈춰서는 발소리가 들린다. 편입한 지 한 달도 안 됐잖아! 방금은 바쿠고가 너무했다. 동급생들이 한 마디씩 질책하는 소리도 들린다.



꼴 좋다. 핑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간 A반을 따라잡아 보겠다고 지랄맞은 폭살왕과 행한 고된 훈련이, 그때마다 가차 없이 가해진 바쿠고의 공격이 무참해서 왈칵 눈물이 다 나온다.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닌데, 몸이 고생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데미지가 쌓였나보다. 깔아지는 몸을 끌고 우선 기숙사로 향하며 혼자 조용히 진단을 내려본다. 몸살에 걸린 것 같아 당장 몸을 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대강 찬 물로 샤워를 끝내고, 침대 안쪽에 웅크려 눕는다. 말 없이 훈련장을 뜬 게 마음에 걸려서, 내일 일찍 일어나서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 것도 없잖아. 오늘 하필이면 A반 대부분이 우리의 저녁 훈련에 참여해서 괜히 못 볼 꼴만 보여준 것 같다. 이불을 걷어차고 싶어도 다리가 욱신거려 도무지 들리질 않는다.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희번뜩하게 빨간 눈을 부라리는 바쿠고가 아른거린다.



바쿠고. 바쿠고. 상냥하게 대해줘. 바쿠고.


체육대회 영상을 돌려보며, 금메달을 입에 문 채로 몸을 뒤틀던 그를 기억한다. 노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진지한 얼굴로 화려하게 전투에 임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언뜻 멋있다- 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꽤 미남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급조한 개성과 궤를 같이하는 그의 개성을 보고 있으면, 그의 손바닥에서 반짝이며 만들어지는 폭발이 아름답다고도 생각했다. 전투에 대한 감각도 훌륭하고, 공격에 대한 센스도 좋고, 개성을 능숙하게 사용해서 승기를 쥔다. 저런 히어로를 언젠가 꼭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된 거야. 바쿠고.



바쿠고.



" 불발탄. "



아른거리던 바쿠고가 선명해진다. 환영이 아니다. 벙찐 바쿠고의 얼굴이 요 앞까지 다가와 있다. (-)의 침대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바쿠고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잠에서 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가 초점을 맞추어 바쿠고를 바라보다가, 이내 커다란 눈이 점점 동그래진다. 바쿠고다. 바쿠고가 진짜 눈앞에 있다.




" 문, 열려있길래 들어온 거다. 오해 마라. "



약 주러 왔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몇 번 뒤적거린 바쿠고가 패키징된 알약 두 정을 건넸다. 훈련 시작부터 이 녀석의 체온이 올라가 있다는 것은 대강 느낄 수 있었다. 모션을 다시 잡아줄 때도 체육복이 걷힌 팔이 뜨끈했고, 볼도 평소보다 빨갰으니까. 아마 제 폭파를 바로 알아채고 피하지 못한 것도 근육통과 컨디션 저하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이를 하나둘 먹은 게 아니니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마 (-)는 자신이 생각한 것 보다도 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바쿠고가 내심 걱정이 되어 방 앞까지 찾아온 것이다. 바쿠고는 이런 타입을 싫어한다. 제 몸 상태를 제대로 체크하지 않고 혹사하는 애새끼는 싫단 말이다. 진짜 힘들었다면 저에게 미리 언질을 줘도 됐을 텐데, 돌아보니 전화번호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쿠고가 입술을 말아 넣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약을 받아서 든 (-)가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고마워. 노랗게 깔린 침대 보조 조명이 바쿠고를 또렷하게 바라보는 (-)를 비추었다. 저렇게 대놓고 볼 건 뭐야. 괜히 어색해진 바쿠고가 갈 곳을 잃은 손을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고 눈을 피하자, (-)가 냉장고를 가리키며 툭 던진다. 물도 떠와야지.



명령하지 말라고 뭐라 하려던 참에, 아직도 홍조가 가득한 (-)를 보고 바쿠고가 간신히 말을 삼켰다. 환자다. 어쨌든 지금은 환자야. 주문처럼 되뇌며 물을 따라 대령했다. (-)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띈 채 알약을 마시자, 이번엔 바쿠고가 (-)에게 툭 말을 던졌다.



" 자면서도 나로 잠꼬대를 한 단 말이지. "



풉, 물을 뿜을 뻔한 것을 초인적인 힘으로 막은 (-)가 바쿠고를 노려보았다. 흘러나온 물을 잠옷 소매로 닦은 (-)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 악몽이었거든?! " 외친다.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바쿠고가 무심하게 답했다. 아. 그러냐. 거 근데 방 되게 어지럽네.



" 깨면 정리 좀 해라, 폐에 먼지 차겠다. "



뭘 보냐! 넌 일어나면 뒤졌어. (-)가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리자, 그래도 그리 심한 몸살은 아닌 것으로 보여 안심한 바쿠고가 책상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뭐야, 왜 앉아... 당황한 그녀를 여전히 쳐다보지 않은 채 바쿠고가 입을 열었다. 몸이 무리하는 것 같으면 말하지 그랬냐. 근육에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날그날 풀어줘야 한다고. 몸 강화에 대한 상식이 전혀, 너 애초에 히어로를 목표로 한 건 맞냐?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에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그야, 쭉 공부만 하던 무개성 일반인이었고, 발현은 작년에 했으니까. 히어로를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말하다 보면 기원이 추적된다.



" 저기, 내가 부족한 건 맞는데... 네가 앞뒤 안 재고 처박는 것도 있거든. "



바쿠고군은 협동작전에는 못 쓰겠구만. 비아냥거리는 (-)에 바쿠고가 다시 타오른다. 아앙? 평생 누워있게 해주랴? (-)는 쉬지 않고 불만을 쏟아냈다. 난 너처럼 센스가 좋지 않다고! 그래도 너 말 따나 네 발톱 때 만큼이라도 따라가 보려 노력하고 있으니까, 못되게 굴지 좀 말고 기다리라고. 봇물처럼 몰려와 쿡쿡 박히는 말에 바쿠고가 팔짱을 낀 채로 부들거렸다.



" 그니까,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죽을 둥 연습하란 말이다! "



" 뒈질 일 있냐! 세상 사람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



싸우면서도 바쿠고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이 녀석은 히어로를 지망하던 학생도 아니었을 것이고, 개성을 사용하는 몸짓도 아직 미숙한데다가 니트로에 대한 이해도 낮다. 무언가 숨기고 있지만 그게 실력은 아니다. 혼자 두면 어디 가서 콱 죽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최전방으로 향하는 저와 다니면 위험하다. 그런데 데리고 다녀야 할 것만 같다. 자신도 누굴 지켜가며 싸우는 데엔 영 요령이 없지만, 저만큼 뛰어난 학생은 A반에 없다. 데쿠나 반쪽이보다야 이 개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자신과 합을 맞추면, 생존율은 물론 이 녀석의 실전 능력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티격태격하는 음성이 흘러나와, (-)의 방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야오요로즈와 아시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바쿠고군은 믿을 수 있어요. 엉큼한 짓을 할 인물은 아니니까. 그래도 또 싸우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염려하는 둘에 우라라카가 고개를 저었다. 저 둘은 대화가 필요해. 우선은 두자! 그나저나 별일이네. 바쿠고가 여성과 저렇게 친근한 건 처음 봐. 갸우뚱거리는 츠유에 지로가 자신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자면 시작 단계인 거지.



-



'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 



이 날은 유에이 전체에 경보음이 울려 동이 트기도 전에 로비에 모여야 했다. 잠에 깊게 빠진 나를 건지러 와준 것은 오챠코와 츠유였다. 대충 후드집업만 챙겨서 밖으로 나가자 이미 A반 학생들이 집합해 있었다. 아이자와 선생님께서는 신원미상의 빌런이 학교에 침입했다고 간단하게 일러주신 뒤, 아직 그를 찾아내지 못해 선생님들이 순찰을 돌 동안 로비에 모여있으라고 지시하셨다. 피곤한 기운이 역력했던 동급생들은 '빌런'이라는 단어를 듣자 마자 번쩍이는 눈을 하고 경계 태세에 돌입하여, 내 잠까지 쏙 달아나는 차가운 공기였다. 결의에 찬 표정의 A반 학생들이 코스튬 가방을 들고 로비 소파에 모여 앉았다.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내 옆에 앉은 미도리야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 (-)는 처음이니까 불안할 수 있어. 괜찮아! 아마... 별일 아닐 거야. "



" 아이자와 선생님이 신호를 주면, 출격해야 하는 거야? "



" 어. 최악의 상황에는. "




미도리야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은 바쿠고가 대답을 채갔다. 썩을 데쿠, 옆으로 가든가 꺼지든가. 새벽부터 성질을 부리는 통에도 미도리야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심보가 뒤틀린 표정을 짓는 바쿠고가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무표정이다. 냉철한 그의 태도에 나는 어쩐지 괴리감이 들어서, 멍하니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내 눈빛을 느낀 바쿠고가 고개를 돌려 고장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잠이 덜 깬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닌 날카로운 눈. 이상하게 그 눈에 빨려들어 시선이 잡힌다. 투박한 손으로 잠옷 위에 대충 걸친 내 후드집업의 지퍼를 올려주며, 그가 입을 뗐다.




" 불발탄. 여기 번호 찍어라. "



" 뭐? 갑자기? "



"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잖냐. 만일 떨어지면 이걸로 연락한다. "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쿠고의 휴대전화를 받아들어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그는 태연히 번호를 받아가 저장 버튼을 누르고, 문자 보냈다. 라고 건조하게 말을 건넸다. 초연한 그의 모습에 문득 현실감이 돌아와,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공포감을 누르려 소매 사이로 손을 숨기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실전 경험 없이 빌런을 마주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긴장을 안 하기가 더 어렵다. 기합이 들어간 A반 학생들과 모여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내가 다치는 것보다 이들이 다치는 게 더 두렵다. 내게서 공포를 읽은 바쿠고의 눈이 다시금 내게 꽂힌다.



" 얘들아! 아이자와 선생님의 전화다. 들어봐. "



- A반. 근방 감옥에서 대규모 탈옥이 일어났다. 우리는 프로 히어로에게 합류해 탈옥수를 검거한다. 



아이자와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코스튬을 갈아입고, 함께할 인원을 찾고, 동선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바짝 얼어 서 있는 내게 뜨끈한 체온이 맞대어진다. 내 뒤에 가까이 선 바쿠고가 어깨를 잡아 돌렸다. 빙글, 반강제로 돌아간 몸 앞에 한 쪽 입꼬리를 올리고 선 바쿠고가 호령했다.




" 불발탄. 실전이다. "






이과의 은밀한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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