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 04 (석진)



태형을 만나고, 윤기가 돌아와 나는 다시 안정을 찾았다.

빈집에 앉아있을 때마다 윤기가 한 말이 생각나고 순차적으로 태형이 떠올라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가족들의 따스함이 배어 있는 집에서도, 늘 말없이 나를 돌봐주던 윤기가 곁에 있어도 나는 이따금 우주에 떨어진 미아처럼 헤매었다. 서걱거리는 마음은 아주 날카로워, 상대가 무엇이든 쉽게 베어버릴 듯했다. 그는 이렇게 혼자 앉아 있을 때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날 선 마음이 금세 먹먹해 코끝이 찡해지는 날이 반복됐다.


주치의이자 형수가 금기한 혼자 술 마시기를 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형수는 –처음 만났을 때는 형의 여자친구였지만 그때는 몰랐다- 내게 말했다. 김석진 씨, 외롭고 무서운 거로는 안 죽어요. 그러니까 이러다 죽을 것 같다, 이렇게 죽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은 하등 쓸데없다는 말이에요, 알겠어요?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상담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환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의사는 없을 것 같았다. 형수가 취한 것을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언젠가의 밤에, 내 볼을 한껏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리 석진이가 너무 예뻐서 이 누나는 다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사실 죽을 수도 있어, 그래서 내가 있는 거지, 하고 웅얼거리는 형수를 질질 끌고 갔던 게 형이었는지 윤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Y는 마음이 아픈 걸 못 견뎌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매일 밤, 윤기가 읽다 만 책을 들고 정국이 일하는 카페에 갔다. 오지 않는 김태형과 답장하지 않는 민윤기를 기다리면서 같은 장면을 읽고 또 읽었다. 가끔 곁에 와서 날 확인하던 정국이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지만 해줄 말이 없었다. 나는 며칠째 같은 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테이블에 엎드려 정국이 일하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날도 있었고,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니 소파에 앉아서 졸 때도 있는 민폐 손님이었다. 카페에는 가끔 아는 얼굴들이 드나들어 아는 체를 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호들갑을 떨며 시끄럽게 했다. 개강 후 학교에 갔더니, 김석진이 전정국 때문에 학교 앞 카페에서 산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이유 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익숙했지만, 윤기나 정국을 끌어들이는 것은 꽤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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