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

 사람 쳐도 돼. 일단 달리라니까? 달린다고 달리는데, 장애물이 양옆에서 튀어나와 차가 건물에 부딪혔다. 누나는 내가 쥐고 있던 아이패드를 빼앗아 갔다. 누나가 가져가면서 아이패드에 손등을 부딪혀 얼굴을 구겼다. 눈물이 났다. 누나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목소리가 매미 울음 소리처럼 떨렸다. 한겨울에 매미 소리가 울리든 말든, 누나는 아이패드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나는 몇 번 훌쩍이다 눈물을 삼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누나 그렇게 사는 거 아니라고. 빈 집에 아무렇게나 들어와서 물건을 막 뒤지는 누나, 망한 세상에서는 약은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누나. 아이패드에서 나오는 불빛이 누나의 얼굴을 집어삼켰다. 눈밑과 이마에 난 흉터부터 떡져서 뭉친 머리까지. 창문 밖으로 해가 지는 게 보였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달려야 한다고 했다.

 

 지구가 망했다. 언제부터 망했는지도, 망했다는 말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지만.... 고개를 파묻은 베개에서 희미하게 비누 냄새가 났다. 알록달록한 줄무늬가 수놓아진 이불이었다. 벽에 달려 있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2월에 멈춰 있었다. 나는 주먹을 쥐어 손등 뼈를 어루만졌다. 이렇게, 한 달에 몇 일이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보다 한 뼘 정도 작았을 때 지구는 봄, 여름, 가을을 내팽겨쳤다. 누나는 좁은 원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무 젓가락 같은 발목을 돌리고, 이쑤시개 같은 손목을 돌리고 면봉 같은 목을 돌린 다음 제자리 뛰기를 했다. 

 지구가 망하고 우리 집에 강도가 처들어온 날. 모두가 있지만 모두가 없는 집에 돌아갔다 울면서 공부방에 돌아간 날. 아무도 없는 공부방에서 누나는 무릎을 꿇고 내게 말했다. 지구력이야. 지구력이 좋아야 오래 달릴 수 있어. 그래야 살아. 나를 껴안은 누나의 뒷편으로 붙여놓은 의자 세 개 위에 덮어져 있는 담요가 보였다. 누나는 대체 몇 살부터 달려야 산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혼자 깨달았을까.

 

 참치캔과 라면, 인스턴트 카레로 가득차 가방이 무거웠다. 유통기한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누나가 너무 숨넘어갈 듯 달려서 잠깐만 멈추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도에는 눈이 높게 쌓이지 않았는데, 인도에는 눈이 너무 쌓여서 발이 푹 빠졌다. 누나가 달릴 때마다 어깨를 조금 넘는 머리카락이 누나의 뺨을 때렸다. 바지 위에 겹쳐 입은 치마가 커튼처럼 하늘거렸다. 하얀색 니트도 잘 어울렸다. 옷장 앞에 퍼질러 앉은 채 뚜렷한 눈으로 옷을 들춰보던 누나. 중학생 티가 나는 교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옷꾸러미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던 누나. 평생을 달린 누나. 아무리 달려도 내 앞에는 누나가 있었다. 하얀 눈이 나를 지나쳐 달려갔다. 이렇게 달리고 달리면 뭐가 나올까. 목에서 피맛이 났다. 침을 삼킬 때마다 매마른 목이 찢어지는 듯했다. 

 

소현

 굶주린 개를 조심해야 했다. 민규와 나는 숨을 죽였다. 덩치 큰 개 두 마리가 인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노리는 것처럼…. 눈 앞에 개 발자국이 보였다. 동그라미 네 개가 도장처럼 찍혀 있는 게 귀여웠다. 아이패드를 꺼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배터리를 최대한 아껴야 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에 파묻혀 기어갔다. 얼굴이 얼얼했다. 벌떡 일어나 달리고 싶었지만, 허기진 상태에서 개의 속도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뒤를 돌아 민규를 보았다. 민규는 아직 달리기가 느리다. 어려서 그렇다. 미간을 찌푸려 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대형견 두 마리였다. 저 개들보다 작은 동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피어오르고 있는데, 알람이 울렸다. 가방 안에 있는 아이패드를 꺼내 5분 단위로 설정돼 있는 알람을 다 껐다. 익숙한 적막이 흘렀다. 집에 아무도 오지 않았을 때, 공부방에 혼자 있을 때, 지구가 망할 때 느꼈던 적막. 고개를 들었다. 개와 눈이 마주쳤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달려야 했다. 그곳으로 가면 무엇이, 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해가 지는 방향으로 가야 산다고 하는 걸 들었다. 나는 몰라도 민규는 살아야 했다. 절망으로 버무려진 지구에서 살려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개들의 거친 숨이 우리를 쫓아왔다. 민규가 달린다. 자기보다 커다란 가방을 매고 나를 앞서갔다. 눈이 오고 있었다. 발이 눈밭에 푹푹 빠지고, 민규는 달렸다. 민규는 민규이면서도 소년. 평생을 달리다 어른을 맞이할 소년. 양옆을 보거나 뒤를 보면 속도가 느려진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민규가 나를 돌아봤으면 싶으면서도, 민규가 멈추지 말고 더  빠르게 달렸으면 싶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매마른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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