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리야의 뺨에 하얗고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눈이었다. 회색빛 하늘에서는 어느새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결한 눈송이들은, 그러나 재투성이의 땅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그녀는 더럽고 황량한 대지를 보며, 한 때 이곳을 가득 메웠던 은빛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을, 긴 로브 자락을 끌고 다녔던 마법사들을, 그리고 반짝이지도, 장엄하지도 않은 초라한 푸른 갑옷을 입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 중 유독 눈에 띄었던 구리빛 얼굴에 장대한 기골을 가졌던 그를 떠올렸다. 네리야는 그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의 낮고 신뢰가 가는 목소리는 불안에 떠는 신참들 사이에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 곁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금발 머리, 깊고 깊은 호박색 눈동자. 비록 서자라지만 그의 부계 혈통을 능히 짐작하게 하는 크고 탄탄한 몸. 지금 그는 금박으로 장식 된 붉은 벨벳 더블릿을 입고 있지만, 당시 그는 꾀죄죄한 푸른 갑옷을 입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회색 감시자의 신참자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커다랗던 그는 동그란 볼을 하고 반짝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때 그녀는 그를 ‘감자’라 불렀다. 동그란 볼에 빡빡 깎은 금발 머리가 퍼렐든 촌구석 감자 같다고 그녀는 그를 놀렸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는 어수룩하게 웃으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자는 파티에서 그의 별명이 됐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감자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날 그가 처음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빡빡 깎았다지만 역광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은 황금을 두른 듯 반짝였고, 갈색 눈동자는 꿀처럼 반짝였다. 그의 말투는 어눌했지만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가 처음 아치디몬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날 곁에서 타오르던 모닥불처럼. 하지만 그 때도 모닥불보단 그녀의 손을 잡아주던 그의 목소리가 더 따뜻했다. 비록 내용은 우울했지만. 


이후로도 그녀 앞에는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하지만 그 때마다 그의 유머, 혹은 실없는 소리가 그녀를 어둡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누추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둡지도 않은 현실로 그녀를 다시 데려다 놓았다. 그는 그녀의 닻이었다.   


부서진 회색 감시자를 재건하고, 블라이트를 막아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는 테다스의 이방인 중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엘프이면서 마법사인 그녀의 위치에 함몰되지 않고, 테다스를 구한다는 목표에 헌신할 수 있게 해주는 닻.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 회색감시자에서 도망쳐, 테다스 구석에서 시골뜨기들에게 허브로 만든 약이나 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블라이트로 창궐한 다크스폰에게 사지가 찢기던지, 아니면 아치디몬의 부름에 미쳐 빛도 안 드는 딥로드의 귀신이 됐겠지. 하지만 그건 블라이트가 끝난 지금에도 변하지 않고 그녀 앞에 놓여져 있는 현실이었다. 누구든 회색감시자가 된 이상 ‘부름’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도 그리고 그 아사리 판을 거치고도 그녀에게 여전히 소중한 그도.


“왜 이 겨울에 굳이 여기엔 오자고 한 거야?”


하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거는 말 치고는 네리야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전에도 온 적이 있잖아?”


알리스테어는 여전히 상념에 잠겨 있는지 꿀색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 때는 할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고... 오스트가는 언제든 올 수 있어.”

“... 우리 여정이 시작된 곳이잖아? 신년을 맞아 오기엔 아주 좋은 장소지.”


알리스테어가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눈밭을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너무나 깊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로 화답할 뻔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네리야는 알리스테어가 능청스럽게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너무 의미 깊은 장소라 불어오는 칼바람과 냉기에 아바르 족들이 만든다는 사슴 육포처럼 될 지경이다.”

“넌 사슴이 아니잖아.”

“그럼 퍼렐든 특제 엘프 육포라고 하지 뭐.”

“하하하.”


네리야 특유의 헛소리에 알리스테어가 결국 우울한 표정을 걷고 활짝 웃었다. 그가 왕이 되기 전, 아니 그녀가 퍼렐든의 영웅이라 불리기 전 둘은 인간 성기사와 엘프 마법사라는 까마득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 헛소리로 친해질 수 있었다. 한 때 그는 그녀 못지 않게 우스운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아니 난 변했어. 다만 네가 너무 많이 변한 것 뿐이지.’


하지만 네리야는 말을 삼켰다. 그녀도 변했지만 그는 더 많이 변했다.  그는 더 이상 흰 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하지 않는다. 그녀의 별 볼일 없는 농담에도 쉽게 부풀어 오르던 그의 동그란 볼은 푹 꺼졌고, 그의 눈은, 한 때 호박색으로 반짝 거리던 그의 눈은 그녀의 옛 고향처럼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지나간 세월은 짧았다. 하지만 그동안 그의 눈은 수십 년을 산 사람처럼 깊어지고, 고통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었다.


“확실히 차갑긴 차갑구나.”


그리고 불쑥 튀어나온 알리스테어의 손이 그녀의 상념을 깼다. 


“하지만 말린 육포라니...이렇게 보드랍고 말랑거리는 걸.”


알리스테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뺨이 차갑다는 말을 하는 그의 손도 차가웠다. 네리야의 손이 멈칫거리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 만큼이나 그녀의 손도 찼다.


“너 말랐구나.”


뺨 위에서 느껴지던 길고 커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이 갑자기 멎었다. 


“요새 생활이 많이 힘드니?”


알리스테어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그의 근심에 가득한 갈색 눈동자가 한가득 네리야의 눈에 들어왔다. 네리야처럼 그 또한 말랐고, 얼굴에는 예전에는 없었던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그는 너무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은 그녀를 아프게 했다.


“난 괜찮... 아니 괜찮습니다.”


네리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알리스테어의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네리야. 난...”

“전 그저 회색감시자 사령관일 뿐입니다. 오스트가에서 볼 일은 끝나셨습니까?”

“...웅”

“그럼 전하의 마차와 호위병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허공에서 머뭇대는 알리스테어의 손가락을 모른 척 하며 그녀는 등을 돌렸다. 아무리 어제같이 생생하다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다. 그는 왕이고 그녀는 그저 회색감시자 사령관일 뿐이다. 퍼렐던의 영웅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얻었지만 그걸 빼면 그녀는 그저 보잘 것 없는 작은 엘프 마법사일 뿐이었다. 가문도 영지도 없는. 그리고 그 사실은 이미 몇년 전에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그녀는 꿈을 꾼 적도 없었지만 이제 와 다시 꿈을 꾸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애초의 둘의 희미한 연대를 먼저 깬 것은 그였다. 그 희미한 가능성조차 견디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누굴 선택하고 싶어?”


탁자 위에 널려 있는 수 많은 서류와 작은 초상화들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이몬 백작과 그녀가 추려 놓은 문서와 초상화는 몇 장 되지 않았다.


“너랑 이몬 삼촌이 결정하는 대로 따를게.”

“무슨 소리야 결혼하는 건 넌데. 네가 결정해야지.”

“그저 비즈니스일 뿐인데 뭐.”


‘그 결혼을 하겠다고 내게 말을 꺼낸 사람이 누군데!’


그녀는 순간 탁자를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사랑한들, 왕자인 그와 마법사인, 거기다 테다스에서 가장 천한 대접을 받는 엘프가 결혼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퍼렐든의 왕족은 애인을 둔 일도 별로 없었지만, 옆 나라 올레이의 예를 봐도 엘프는 왕의 연인이 된 경우도 별로 없었다. 현 올레이 여제의 애인인 브리알라는 그야말로 특이한 경우였다. 그녀는 평범한 엘프도 아니었고, 올레이의 엘프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파이 마스터로 올레이 궁정에서도 지위가 높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프라는 그녀의 신분은 항상 구설수가 되었다. 거기다 알리스테어는 올레이보다 보수적인 퍼렐든의 왕이었다. 아무리 퍼렐든의 영웅이라도 왕비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왕비가 될 생각이 없었다. 왕비가 될 수도 없었지만 설사 된다 한 들, 옷 한 벌 마음대로 입지 못하는 그 위치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화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초에 거절할 생각이었거늘. 그저 당연한 사실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일 뿐인데.


“일단 우린 후보를 두 명으로 추렸어.”


알리스테어가 즉위식이니 뭐니 하며 빈둥빈둥 노는 동안 이몬 백작과 그녀는 그의 뒤처리를 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의 왕비 후보를 추리는 일 또한 그 중 하나였다. 퍼렐든에 신분 높은 아가씨는 많았지만, 정치적으로 입지가 약한 서자인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드물었다. 


“첫 번째 후보는 길런 공작의 딸 엘리자베스 영애야. 길런 공작가는 쿠슬랜드 가까지는 아니지만 꽤 오래된, 유력한 가문이지. 정치적으로도 입지가 강한 가문이고. 길런 가문이 우리 편이 돼준다면 앞으로 국정 운영이 좀 더 편해질 거야. 거기다 엘리자베스 아가씨는 짙고 풍성한 갈색 머리로 유명한 미인이기도 해. 아마 내 생각엔 네 마음에 가장 드는 후보가 아닐까 싶어.”


“글쎄...”


네리야가 내민 초상화를 보는 알리스테어의 얼굴이 여전히 시큰둥했다. 초상화의 여인은 아름다웠다. 갸름한 얼굴에 가녀린 목. 유명한 숱 많은 긴 갈색 머리는 느슨하게 묶어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는 이 여인이 가는 뼈대를 가진 미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러모로 고전적인 미인이었다. 초상화를 준 네리야와는 다른.


“단점은 뭐야?”


초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알리스테어가 한 마디를 던졌다. 다른 후보가 있다는 건 그걸 상쇄할 만한 단점이 있다는 거겠지? 라는 투로.


“일단 길런가는 랜즈미트때까지 로게인을 편든, 로게인쪽 사람이야. 공작의 후계자는 하우 백작쪽 사람과 결혼했고.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딸이 왕비가 되어 준다면 그저 감사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처지지만. 하지만 그녀가 왕비가 돼도 계속해서 충성할까?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통제하기 힘든 사돈이 될 가능성이 높아.”

“그렇군...”

“하지만 우리 편이 돼준다면 천군만마 같은 가문이기도 하지. 너랑 이몬 백작의 역할이 중요할 거야.”

“...너는?”


한참 말이 없던 알리스테어가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 파란 달빛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어둡고 공허했다. 


“나는 네 즉위 관련 일이 마무리 되는 대로 비질 요새로 내려갈 생각이야.”

“...”


알리스테어가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방은 어두워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애꿎은 초상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흠흠 그리고... 사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흠일지 모르겠는데, 길런가는 손이 귀하기로 유명해. 공작과 공작 부인은 금슬이 꽤 좋은 편인데도 영애를 포함해서 자식이 셋 밖에 없다는군.”

“...”

“하지만 그건 네가 하기에 달린 일이니까... 어쨌든 기왕이면 예쁜 아가씨가 좋겠지?”


동의를 구하듯, 네리야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알리스테어는 그녀의 눈을 맞추지 않았다. 


“다른 아가씨는?”


한참 초상화를 만지작거리던 알리스테어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네리야는 알리스테어의 무거운 분위기가 싫었다. 애초에 새 신부를 찾겠다고 한 사람은 그였고, 아무리 동맹이 중요하다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다른 여자에게 팔아 치우듯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 무거운 짐을 자신에게 맡긴 건 그였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알리스테어의 눈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인 양 원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좀 신경 써서 들어봐. 네 일이잖아?”

“난 열심히 듣고 있어.”

“난 뭐 좋은 줄 아니?”

“뭐?”

“너한테 신부 후보를 소개하는 게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겠냐고!”

“네리야...”


탁자를 두고 앉아 있던 알리스테어가 벌떡 일어섰다.


“내가 내가 무슨 뚜쟁인 줄 아니? 내가 권력에 환장한 여자로 보여? 자기 애인을 팔아 먹는게 정말 좋을 것 같냐고!”


네리야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네리야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지만 자꾸 목소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네리야 미안해. 난...아니 내가 잘못했어.”


알리스테어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악을 쓰는 와중에도 그녀의 작은 몸이 그의 품 안에 쏙 안겼다. 그녀는 이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화가 난 거지, 위로 받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나 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한 것도 너였잖아? 그래 놓고 어떻게....어떻게 나를 그렇게 볼 수가 있어?”

“네 말이 맞아. 미안해...”

“어떻게...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후계자가 필요하다니...어떻게 그런 말을... 그냥 차라리 내가 엘프라서 안된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미안해 네리야. 미안해...”


네리야는 알리스테어의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떄려댔다. 하지만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견뎠다. 가슴을 때리던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그녀의 분노의 찬 목소리도 점점 울음 소리로 변해갔다. 


“네리야... 난 너와 헤어지지 않았어...”

“뭐?”

“어디에 있건 누구와 함께 하던 너와 나는 헤어질 수 없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했잖아.  내가 무슨 올레이 여잔 줄 아니?”

“이 모든 게 끝나면... 내가 내 의무를 다 하고 나면 난 너에게 돌아갈 거야.”

“모든 걸 끝내다니 무슨 소리야?”

“모든 회색 감시자의 끝을 너도 알잖아.”


그제서야 그녀는 그녀가 다크스폰의 피를 마셨던 날 그가 해줬던 얘기를 떠올렸다. ‘부름’ 모든 회색 감시자가 피할 수 없는 미래. 다크스폰의 피를 마신 그 순간부터 회색 감시자는 아치디몬과 연결되고, 그 연결로 테다스를 지키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연결은 결국 그들은 파멸로 몰고 갔다. 진해지는 피는 날이 갈수록 그 어미를 찾듯, 그들을 자꾸 다크스폰에게로 인도했다. 


“너는 왕이잖아...”

“왕이기 전에 회색 감시자지.”


네리야의 머리 위에서 그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메마르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너는 침대 위에서 죽을 거야.”

“...”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아들을 보고, 너는 침대 위에서 죽을 거야.”

“네리야...”

“딥로드에서 죽는 일 따위, 내가 허락하지 않아. 나는 너를 침대 위에서 죽게 할 거야.”


네리야는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알리스테어는 말 없이 껴앉았다. 그날 밤 달빛이 유독 시렸다.


비질 요새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네리야는 최대한 엄숙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고, 알리스테어는... 알리스테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네리야는 철저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자석에 이끌리듯 그와 시선이 마주쳤고, 그 때마다 보이는 알리스테어의 공허한 시선에 네리야는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그녀는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했다.


‘안돼 벌써부터 마음이 흔들릴 수 없어.’


 하지만 네리야의 시선은 그의 눈동자를 넘어, 그의 손가락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뺨에 와닿던 차가운 손가락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차갑게 와닿았던 그날의 그의 손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에게 돌아오겠다고 계속해서 네리야에게 속삭였지만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왕이었고 그에게는 법적인 부인이 있었다.


그 날 네리야는 알리스테어에게 아름다운 길런 공작의 딸을 추천했지만 알리스테어가 선택한 사람은 말론 백작의 딸이었다. 백작이었지만 왕가에서 갈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강력한 계승권을 가진 가문이었고, 그에 비해서 영지도, 왕궁에서의 입지도 작은, 왕권을 위협하지 않을 가문이기도 했다. 비록 강력한 동맹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장식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가문이었다. 서자인 그의 신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론 백작의 딸은 아름답지 않았다. 땅딸막한 체구에 커다란 엉덩이는 아이를 낳기엔 딱 좋아보였지만 보기에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애인의 부인 후보를 고르는 날, 네리야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초상화를 꺼내 들었다.


“이 여자가 딱이겠네요.”

“레이디 수라나!”

“왜요? 댁들이 그렇게 원하는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은 여자잖아요? 저 엉덩이 좀 보세요!”

“레이디 수라나, 아무리 상대가 없다기로소니 백작 따님에게 이 무슨 무례한 언동이란 말입니까.”

“왜냐면 전 못 배운 엘프 출신에, 반란자들이 드글대는 마탑 출신이기 떄문이죠.”


‘아...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한 번 터진 말문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네리야,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건 이해 합니다만...”


그리고 이몬 백작의 말이 그녀의 뒤집힌 속에 불을 붙혔다.


“마음에 안 들어요? 겨우? 지금 내게 벌어진 일들이 고작 마음에 안드는 상황이라고요?”

“...”

“나는 아파요! 가만히 있어도, 그의 생각을 하지 않아도, 매 분 매 초 숨 쉴 때 마다 심장이 바스라지는 것 같아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어서 일하던 도중에도 일어나 숨을 고르지 않으면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인데... 이몬 백작께는 이게 겨우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라는 거군요.”

“레 레이디...”


이몬 백작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이 이건 그냥 법적인 후계자를 보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누가 뭐라 해도...”

“왕의 애첩이니까요?”

“...퍼렐든의 영웅이니까요.”


이몬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왕비 후보를 정하는 일에 네리야를 끌어들인 것을 후회했다. 그는 네리야가 알리스테어의 부인이 될 사람을 고르면 조금 더 쉽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재앙을 맞는 것 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어느 정도 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몬 백작은 네리야의 이성을 믿었다.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겨우 애정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를 망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모두 틀렸다. 그녀는 블라이트로부터 세계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이성으로 갈무리한다 한들 그녀는 광기와 감정에 지배 받는 마법사였다고 이몬 백작은 생각했다.


“전 제 지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겨우 명예 때문에 아치 디몬과 싸운 줄 아세요?”

“아닙니다.”

“공같은 귀족 나으리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여자에게 파는 일도 담담하게 하실 수 있나 보군요.”

“우리는 왕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공께서는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저는 가난한 엘프 거주 구역 사람이라서,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을 나눌 수는 없어요. 그래요. 공의 말씀대로 저는 그를 파는 게 아니에요. 제 사랑을 파는 거지. 그리고 저는 무얼 위해 제 사랑을 파는 건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제게 남은 건 하나도 없는데...”

“레이디...”

“어찌 되었건 공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길런 공작의 딸 엘리자베스라고 했나요? 왕께 공이 권하는 아가씨를 추천하지요.”


그녀는 이몬 백작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섰다. 크게 부릅뜬 눈에서 뜨거운 것이 넘쳐 흘렀다. 네리야는 아무렇지않게 손가락으로 그것을 쓰윽 훔쳤다. 


그러나 알리스테어는 결국 말론 백작의 딸을 선택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녀 가문의 다산성을 높게 쳤다. 그는 이몬 백작과 그녀의 우려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의무를 위해 결혼한다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겠다는 양, 가장 적합한 하지만 가장 아름답지 않은 여인을 골라 결혼했다. 


네리야는 후회했다. 그녀는 말론 백작의 딸을 권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스러웠지만, 기왕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람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구중궁궐이라도 부부의 도는 저잣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녀는 그의 아니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그녀의 행복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왕이 된 이상 그녀는 사라져야 할 과거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새로운 왕국에 과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비질 요새로 가는 마차 안에 앉아 그녀의 왕이자 옛 연인과 무릎을 맞대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치듯 비질 요새로 왔지만 과거의 그림자는 끊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왕과 화해는 했어요?”


아직 가을이 다 가지 않은 어느 날, 요새의 부서진 부분을 점검하고, 신병 훈련을 점검한 뒤, 요새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던 부관이 그녀를 보자마자 한 소리였다. 


“뭐?”

“요 몇 년 간 사이가 좋지 않았잖아요.”

“왕과 회색 감시자 사령관 사이에 좋고 나쁠 게 뭐가 있어?”

“좋고 나쁠 게 없는데 매년 왕은 비질 요새에 오겠다고 연락이 오고, 대장은 온갖 핑계를 대서 거절하나요?”

“작년 동쪽 탑 수리는 사실이었어.”

“귀빈실이 동쪽에 있나요?”

“...”


네리야의 유창하고 수려하게 움직이는 혀가 이번에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로 끊어낸 거라면 방문을 막을 이유도 없겠죠.”

“끊기 위해 이러는 거야.”

“그래서 끊어졌나요?”

“...아니.” 

“그러니까 정리가 안 됐죠.”

“뭐?”

“대장이 끈의 한 쪽을 붙잡고 놓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연결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여기에 처박혔는데 어떻게 정리가 될 수 있겠어요?”

“내가 여기에 온 것 자체가 끝이란 소리야.”


네리야는 더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를 상대하는 부관은 유연하면서도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거야 대장 생각이고요. 상대는 결국 제대로 된 대답을 못 들었잖아요. 대장이 그렇게 애매하게 굴면, 상대도 애매하게 굴 수 밖에 없어요.”

“...”

“아니면... 사실 헤어지기 싫으니까 이러는 것 아니에요?”

“뭐?”

“정말로 헤어지고 싶었다면 진작에 얼굴을 보고, 제대로 헤어졌겠죠. 아니면 최소한 단호하게 편지라도 써 보내던가요. 하지만 여기 와서 대장이 한 게 뭐 있어요? 왕의 요구는 적당히 눙치다가, 때가 되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보고서만 올린 게 다잖아요.”

“야! 그건...”


회색 감시자가 주둔한 비질 요새는 퍼렐든에서도 튼튼하기로 소문난 요새였지만,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건물이라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작은 부대가 주둔하던 예전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던 흠들이,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자 참아 넘길 수 없는 흠이 되었다. 요새는 거의 매일 수리 중이었고, 수리를 위해 대규모의 자재가 필요했다. 왕은 비질 요새에 예산을 넉넉히 배정해 줬지만, 항상 예산은 부족했고, 결국 네리야는 궁성으로 전갈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죠. 하지만 편지를 받는 입장에선 어떻겠어요.”


네리야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관의 말은 얼마든지 논파 가능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의 말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를 보면 즐거웠지만 한 편으로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가도, 그에게서 영원히 멀어지고 싶었다. 비질 요새에 온 이후 그녀는 거의 매일 그의 꿈을 꿨다. 꿈에서 그녀는 그에게 키스하곤, 그의 팔을 비틀어 부러뜨렸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왜 눈물이 나올 것 같은지는 모르면서.


결국 그녀는 왕궁에서 보내온, 안드라스테 탄신일은 비질 요새에서 보내고 싶다는 왕의 요청을 수락하고야 말았다. 물론 이번에는 제대로 헤어지겠다는 각오였으나, 막상 그의 얼굴을 보면 각오대로 할 수 있을지,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설마 이번 안드라스테 탄신일에 왕과 헤어지려는 건 아니죠?”


왕을 비질 요새 최북단에 있는, 빛이 잘 드는 귀빈실에 안내한 뒤, 집무실에 돌아오자, 네리야를 반기며 부관이 한 말이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상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요새에서 가장 땔감이 풍부한 벽난로의 온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물론이지...”

“에....진짜요? 안돼요. 헤이지시려거들랑 내년에 하세요.”

“네가 얼굴을 보고 헤어지라며.”

“아~. 안돼요. 저번에 탄 예산이 거의 간당간당 한다고요.”

“벌써?”


네리야가 입을 딱 벌렸다.


“올해 한파가 일찍 찾아왔잖아요.”

“아 맞다...”

“덕분에 올해 내로 수리해야 할 남쪽 성벽이 아직 수리가 덜 된 상태예요. 저희는 돈이 필요해요. 우리에겐 아직 왕에게 사랑 받는, 유능한 사령관이 필요하다고요."

“...”

“그리고 그렇게 고생 하셨는데 조금 더 득을 봐야죠.”


부관이 그녀를 향해 한 눈을 찡긋 해 보였다. 네리야는 그러려고 그를 왕위에 올리려 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런들 그는, 아니 요새의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진실했을 지 몰라도, 현실이라는 강풍 앞에선 헤어지고 삭아질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그녀가 사는 요새처럼 말이다. 









 





 

마르세이유 타로 리더, 점성술사, 사이킥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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