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기억 바꾸기


그때까지 나는 본즈가 다시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연락 없이 불쑥 찾아간 본즈의 방은 비어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보나마나 탕비실에 갔거나 야근 중이겠지. 금방 돌아올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본즈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본즈를 기다리며 심심해진 나는 그의 방을 뒤졌다. 홍차 시럽이 들어있는 병은 본즈의 방에 딸린 작은 와인 셀러에 들어 있었다. 나는 셀러를 열어 안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본즈다운 광경이다.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병 중에서 술이 아닌 건 그 작은 시럽 병 하나뿐이었다. 셀러에 들어 있는 술은 대부분 줄어 있었다. 개봉하지 않은 것처럼 꽉 차있는 건 시럽 병밖에 없었다. 나는 그 병을 끄집어내 본즈가 했던 대로 조합기에서 받은 우유에 섞었다. 씁쓸한 브랜디의 향 뒤로 퍼지는 홍차 향과 단 맛은 잘도 목을 넘어갔다. 나는 본즈를 기다리며 병을 반이 넘게 비웠다. 본즈는 내가 침대에 누워 가물가물 잠들 무렵 돌아왔다.

“짐?”

본즈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힐난하는 기색과 어이없어하는 어조가 섞여 있었다. 날 내려다보는 본즈의 손에는 반쯤 남은 시럽 병이 들려 있었다.

“이러라고 내 개인실 출입 권한을 준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가 험악한 얼굴로 병을 들어 보였다.

“이게 뭐냐? 함장이란 녀석이 남의 방에 들어와서 멋대로 냉장고나 뒤지고 말이야.”

“오늘 사피가 홀로덱에 불러서 칵테일을 만들어 줬는데 이게 그렇게 생각이 나더라고. 먹으면 안 되는 거였어?”

“내 방에 말도 없이 들어온 게 문제야, 이 녀석아.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연락도 없이 들어와? 게다가 멋대로 뒤져서 훔쳐 먹고, 팔자 좋게 뻗어서 잠까지 자고 있고.”

“곤란해질 게 뭐가 있어? 네 방에 들어올 사람이라고 해봤자 나하고 너밖에 더 있어?”

본즈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 * *


우스운 일이다. 거짓말을 하고 싶은 사람의 기억은 왜곡된다. 변명의 여지없이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기억을 간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왜곡은 더 심해져 후에는 같은 상황을 겪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스스로 조작한 기억의 원형을 받아들이는 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일이다.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어떤 사람은 정신을 놓기도 한다. 본즈가 그렇게 된 이후 본즈에 대한 기억들을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내가 이날 사실은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모나는 그 이후로 두 번 다시는 나를 홀로덱에 부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나와 나는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모나가 했던 말이 오래도록 남았다. 당신한테는 문제가 있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해도 문제는 문제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여태까지 만났던 사람들이랑 대화해 봐. 나는 당신하고 더는 만나지 않을 거지만, 적어도 뭘 찾고 있는 건지는 알고 찾아다니는 게 어때….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모나의 말 속에서 나를 향한 비난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모나에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모나는 마치 역병을 피해 달아나는 셔틀처럼 나를 뿌리치고 돌아섰다. 방에 돌아와 보니 상자 하나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모나의 숙소를 오가며 알음알음 두고 다니게 되었던 자잘한 생활용품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확인하고 컴퓨터를 불러 내 개인실의 출입 권한에서 모나를 삭제했다.


* * *


“미안한데 잠깐 쉬었다 해도 괜찮을까.”

“아, 네. 물론이죠. 미안하실 거 없어요. 이건 공식적인 만남도 아니고 취조도 아닌걸요.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저는 커피를 한잔 할까 하는데 함장님도 드시겠어요?”

H의 호칭은 어느새 다시 함장님으로 바뀌어 있다. 나는 잠깐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할까 하다 그만둔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H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커피 머신이 있는 복도로 나갔다. 나는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창밖은 여전히 초록이다. 나는 차마 H에게는 하지 못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 * *


“헤어지자.”

나는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얼굴을 바라본다. 차갑게 굳어 바늘 끝조차 들어가지 않을 거 같은 단단한 얼굴이다. 처음 임관해 왔을 때 그의 파일에서 봤던 증명사진을 보는 것 같다. 단단하고 어색한 무표정,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 사프렌 모나는 실제로 내가 본 사람에게는 다소 단단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같이 화려하고 달콤한 사람에게는 좀 더 간지러운 이름이 어울릴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그의 이름에 얼마나 걸맞았는가를 느낀다. 모나는 웃음기 하나 없는 엄격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처음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생각했었지.”

모나의 얼굴에 농담이나 장난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려던 시도를 그만둔다. 꽉 쥔 채 무릎 위에 얹어둔 주먹 안이 축축해진다. 모나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막상 내가 겪어보니 견디기 힘드네. 그냥 여기까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사피. 무슨 얘긴지 알아듣게 설명해줄 수 없어?”

“예상 못했다고 할 참이야?”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계속 그가 냉랭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별 통보를 받을 정도의 잘못은 한 적이 없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이상하다. 모나는 내 표정을 보다가 쓴웃음을 짓는다. 헤어지자고 한 건 자신이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묻고 싶다.

“헤어지자고 한 건 내가 하지 않아도 조만간 자기가 내게 할 말이기 때문이야.”

나는 당황해 입을 벌린다. 할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허둥대다 겨우 말을 고른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야? 내가 왜 헤어지자고 해?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그럴 마음 없….”

“정말 몰라?”

모나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차갑다. 나는 입을 다문다. 모나는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본다. 나는 여전히 그 차분한 얼굴에서 어떤 결정을 읽는다. 되돌릴 수 없는, 이미 생각이 끝난, 그가 일생 동안 살아온 방식을 통해 숙려해 고민이나 재가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결정을 내린 눈.

“당신이 모른다면 나는 더 말을 보태고 싶지 않아. 그건 당신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니까.”

모나는 눈을 내리깐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 단단하고 굳건하게 보였던 모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연약한 인간의 것으로 변한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답례로… 친구로서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짐. 당신한테는 문제가 있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해도 문제는 문제지.”

“사피. 제발 이러지 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하겠어. 대화를 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나는 모나가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엄격한 얼굴이 나를 바라봤다.

“여태까지 만났던 사람들이랑 대화해 봐. 나는 당신하고 더는 만나지 않을 거지만, 적어도 뭘 찾고 있는 건지는 알고 찾아다니는 게 어때.”

모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얼결에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그는 칼 같이 내 배웅을 마다한다. 문 앞에서 몸을 돌리기 직전 모나의 입꼬리에 아주 희미한 떨림이 스쳤다. 모나는 마치 미소 짓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주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는 듯.

나는 모나가 방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쓰린 심정으로 바라본다. 금속성 광택을 띤 굽슬굽슬한 은색 머리카락은 어떤 조명 아래서도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그 색에 홀렸던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모나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압도적인 미모에 눈을 뺏겼다. 그러나 모나와 함께 시간을 조금 더 보내다보면 첫눈에 매료되었던 미모는 사프렌 모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아주 작은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나의 영혼을 이루는 정수는 그 빛나는 지성에 있었다. 단호하고 주도적이며 정한 기준에 가차 없는 성품과 그 성품을 뒷받침하는 출중한 지성. 모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도 각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나가 내게 다른 사람과 각별히 달랐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유는 분명하다.

스스로조차 속이고 싶은 사람이 자신의 기억을 왜곡하는 건 쉽다. 소리 내어 인정할 때와 달리 두 번, 세 번, 영원히 반복하는 것도 가능하다. 과거에 무수히 반복했던 것처럼.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이 사무실에 온 게 아니었던가. 나는 잠시 모나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긴 은발, 유연하고 탄탄한 몸과 자신감으로 별처럼 반짝이던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H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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