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관람차와 기분 좋은 바닷바람, 개항도시 특유의 이국적인 풍경…지난 가을부터 정든 고국을 떠나 신세를 지게 된 이 요코하마라는 도시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어느 지역보다 음악이 친숙하다는 점이었다. 듣자 하니 음악으로 유명한 사립고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타지에서 홀로 보내게 된 크리스마스이브, 어차피 남 눈치 볼 일도 없으니 좋아하는 음악이나 실컷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가볍게 가 보았던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아주 감동적이었던 것을 계기로 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자주 요코하마 거리를 배회하게 되었다.

 

 오늘도 늘 그랬듯 미나토미라이 주변을 산책하며 다양한 연주를 들었지만, 그 중 지난 콘서트 때 봤던 하늘색 머리의 잘생긴 학생이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던 ‘별은 빛나건만’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한 기교도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곡이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진지한 표정으로 묵묵히 바이올린을 켜기만 하던 소년이 떠나는 것을 보며 나도 공원을 벗어나 아카렌가 창고로 향했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야외 스케이트장을 지나 건물에 들어가서 윈도쇼핑을 즐긴 후 크림브륄레 팬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나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의 밤은 짧기도 하지. 오늘도 충실한 하루였다며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와 조금 전에 들었던 ‘별은 빛나건만’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귀가하려던 차에 작은 돌부리에 탁 걸려서 그만 앞으로 엎어져 버렸다. 기적적으로 안면강타는 면했지만, 아스팔트를 짚은 손바닥과 무릎이 욱신거렸다.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이었을까, 너무 아파서 손조차 털지 못하고 넋이 빠져 있는 나를 보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 몸을 숙여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까?”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천천히 일어났다. 상당히 아프다. 걱정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면서 그냥 두었으면 싶은 모순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부디 이 사람에게 울먹거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기를. 스러지듯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고 넘어진 바닥을 바라보았다. 들고 있던 가방의 내용물이 다 튀어나와 바닥에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물티슈, 지갑, 파우치는 물론이고 내 보물인 레몬 초콜릿까지. 아, 진짜로 울고 싶다.

 

 먼지와 피가 뒤엉겨 지저분해진 손바닥으로 조심조심 내용물을 주우려 하니, 그 사람이 물티슈를 주워 내게 내밀고 나머지를 줍기 시작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물티슈를 뽑아 손바닥을 닦으며 힐끗 보니 그는 다른 것들을 다 가방 안에 넣어준 후 마지막으로 자신이 쥐고 있던 레몬 초콜릿 봉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건지 아니면 딱 봐도 동양인인 사람이 이탈리아산 먹거리를 들고 있어서 신기한 건지. 의아한 마음에 마주 보니 나를 도와준 남자의 얼굴이 매우 낯익었다.

 “……어라?”

 기억 속의 사람은 한눈에 봐도 깔끔한 차림새에다 수염도 깔끔하게 깎았고 머리카락도 길지 않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김새가 닮아 있었다. 설마, 아니, 그럴 리 없지만 어쩌면 본인일까? 혹시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서로 혼란스러운 얼굴로 몇 분 동안 그렇게 탐색하듯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남자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표정을 수습한 뒤 초콜릿을 가방에 넣어 주었다.

 “…그럼 이만. 몸조심하시길.”

 “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짐작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큰 키로 휘적휘적 도망치듯 떠나버렸기에 나는 그저 가방을 꼭 쥔 채 그가 뛰어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 사람이 여기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정말 조금 전에 만난 사람이 내가 찾던 그 사람이라면 음악이 가득 찬, 이 요코하마에서 꼭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외출 이유가 또 늘었다.

 “하아…….”

 차가운 겨울밤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 후 가방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먹었다. 새콤한 레몬 맛에 감추어진 희미한 알코올의 향기가 반짝이는 옛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들었던 소년의 멋들어진 바이올린 소리도, 혼자 불렀던 어설픈 흥얼거림도 아닌, 10년 전 어느 날 들었던 테너의 미성과 함께.

 

 E lucevan le stele 별들은 반짝이고

 e oleszava la tera 대지는 향기로운데

 stridea l'uscio dell'oto 저 화원 문을 열고

 e un passo sfiorava la rena 가벼운 발자국소리 났네


드림러. 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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