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었다. 무역학과가 삼초무역으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다 싶으면 삼 초 만에 소문이 쫙. 도영은 그 삼 초의 피해자였던 적이 있었다. 김도영이 과팅 중에 왕게임으로 누구랑 키스를 했다더라. 심지어 걔랑 썸을 탄다더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결론적으로 몇 달 뒤에 사귀게 된 건 맞지만 그 당시에는 썸이랄 것도 없는 사이였다. 아무튼 그 소식은 하루도 안 돼서 고작 6학점을 듣는 4학년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것도 아주 과하게 살을 붙여서 말이다. 김도영, 너 여친 생겼다며? 과방에서 저를 보자마자 쏟아지는 관심에 도영은 치를 떨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야겠다. 작년의 도영은 그렇게 굳게 다짐을 했었다.

 


“정윤오 쟤, 은선이 진짜 좋아하나보다.”

 


치고 박고 뒹구르고. 난리도 아닌 광경을 보던 누군가가 내뱉은 말이었다. 거의 일방적으로 민철을 죽일 듯이 패는 윤오를 보며 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소문 또 거지같이 나겠다. 도영의 얼굴 위로 곤란한 기색이 훤히 드러났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손이 멈칫했다. 도영이 뭔가를 결심한 듯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무엇보다도 정윤오와 얘기를 하고 싶었다.

 

 

 

 

다듀가 인사를 하며 무대를 떠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주점과 한참 떨어져있는 사과대까지 들릴 정도였다. 인사 드럽게 크게 하네. 도영이 심드렁하게 벤치에 기대앉았다. 다행히 도영은 둘의 싸움을 말리는 고생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고생을 자처하려던 찰나, 옆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고함소리에 멈칫했다. 도영을 포함한 모두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빨갛다 못해 곧 터질 기세로 씩씩거리는 정우였다.

 


“그마안!!! 그!!! 만!!!”

 


도대체 뭘 구워삶아 먹어야 저런 소리가 나오는지. 덕분에 넋이 나간 민철과 윤오를 주변에서 얼른 떼어놓았다. 여기저기 쥐어터진 민철은 주점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도 정윤오에게 살인 예고를 해댔다. 거의 처맞기만 해놓고 무슨. 민철을 향한 욕 짓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정우가 그랬다. 그 형 미친 거 아니야? 감히 이 잘난 얼굴에 손을 대다니. 평소에 민철에게 잘 치대던 김정우는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이래서 너 두고 어디 다른 데서 술을 마실 수나 있겠냐고. 정우는 윤오가 자신의 아들이라도 된 것 마냥 걱정을 하며 터진 입가에 울상을 짓기도 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괜찮냐는 물음에 윤오는 별 거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그저 보고만 있던 도영은 천천히 주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톡을 보낸 지 오 분도 채 지나기 전에 윤오는 모습을 드러냈다. 몇 대 맞아서 아플 텐데도 뛰어오는 걸 보니 아직 살만은 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윤오와 도영은 다듀가 떠날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싶었다. 대뜸 하고 싶은 말을 하자니, 저와 윤오 사이에 은근한 공백기가 신경 쓰였다. 사과도 해야 했고 오해도 풀어야 했으며, 방금 전의 일에 대한 얘기도 해야 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에 도영은 선선하게 부는 바람만 느끼는 중이었다. 꽤 오래 이어지는 정적을 깬 건 윤오였다.

 


“형, 나 아파요.”

 


유치한 투정에 얼이 탔다. 그러게 누가 싸우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영은 주머니에 숨어있던 연고를 건넸다. 윤오가 오기 전 편의점에서 산 것이었다. 연고를 보던 윤오가 미소를 지으려다 따끔한 느낌에 앓는 소리를 냈다. 엄살 피우지 마. 단호한 도영의 말에 윤오가 입을 삐죽였다. 진짜 아파요. 여기 터진 거 형 눈에만 안 보이나 봐. 윤오가 얼굴을 들이밀며 입가를 가리켰다. 딱 그만큼 고개를 뒤로 내뺀 도영이 슬쩍 윤오의 입가를 눈으로 훑었다. 멀리서 봤을 때도 아파보이긴 했는데 이렇게 보니 상처가 꽤나 컸다. 심각하게 상처를 살피던 도영이 줄곧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올렸다. 윤오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접으며 웃어왔다.

 


“형이 약 발라줘요.”

 


급하게 윤오를 밀친 도영이 아예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또다.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것 마냥 심장이 뛰어댔다. 제발 그만 좀 뛰어라. 의미 없는 심호흡을 연신 해대는 도영이었다. 도영이 형? 저를 부르는 소리에 도영이 흠칫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네가 발라. 애냐? 별 것도 아닌 말에 목소리가 멋대로 뻗쳤다. 타박이나 하려고 부른 게 아닌데. 생각한대로 풀리지 않는 일에 발을 동동 굴렀다.

 


“와, 너무하다. 나 여기저기 아파 죽겠는데.”

 


아이고 팔이야. 의도가 다분한 앓는 소리에 도영이 훽 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치를 보던 윤오가 빠르게 자신의 팔을 주물러댔다. 갈수록 커지는 소리에 결국 도영이 꼬리를 내렸다. 일로 와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오가 몸을 붙여왔다. 도영은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꾹꾹 삼키며 연고를 짜냈다. 새끼손가락으로 살살 입가를 쓸자, 윤오가 순간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잘난 얼굴에 자리한 상처를 보고 있자니 정우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결국 울상을 지은 도영이 속상한 티를 냈다.

 


“진짜 못살아. 주먹질은 왜 해? 너 초딩이야? 김민철 그 새낀 미쳐가지고 애 얼굴에….”

“괜찮아요. 내가 열 대는 더 때렸어.”

“자랑이냐? 그게 자랑이야?”

 


도영의 타박에 윤오가 베시시 웃어왔다. 뭘 잘 했다고 웃어. 가만히 있어 봐. 째려보는 단호한 눈빛에 윤오가 겨우 웃음을 거뒀다. 도영이 입을 동그랗게 모아 호-하고 바람을 불었다. 작은 입김이 윤오의 입가에 닿았다. 두어 번 이어지는 입김에 윤오가 빤히 도영의 입술을 주시했다. 자칫하면 닿을 거리였다.

 

어쩌다보니 서로의 입술에 시선을 둔 꼴이 되었다. 도영 역시 느껴지는 묘한 기류에 천천히 입술을 말아 넣었다. 여기서 눈까지 마주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여전히 시선은 윤오의 입가에 닿아있는 채였다. 이대로 숨이 막혀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도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연고는 맛없으니까 안 되겠다.”

 


미소를 지은 윤오가 다시 멀어졌다. 형 오늘 연고한테 고마워해야겠어요. 얼토당토 않는 말에 도영이 헛소리 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였다. 참고 있던 숨을 내쉬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윤오의 웃음소리가 공중을 타고 흘렀다. 심술이 난 도영이 공격적인 눈으로 윤오를 째려보았다. 너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어? 한 번으로는 성에 안 차나보지? 술에 꼴아 쓰러져있던 인간들 사이에서 입을 맞췄던 순간이 떠올랐다. 씩씩대는 도영을 보던 윤오가 씨익 입가를 올렸다.

 


“한 번은 아니지 않아요?”

“뭐?”

“아니면 말구요.”

 


굳이 따지자면, 도영의 손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췄던 것도 있으니 한 번은 아니었다. 물론 도영은 기억도 못 할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영이 미간을 구기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이냐고 물을수록 윤오는 실수로 말이 헛 나왔다는 핑계를 대며 말을 아꼈다. 정재현 진짜 이럴래? 그냥 장난친 거라니까요. 둘의 입씨름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됐다 됐어. 이제부터 너랑 말 안 해.”

“진짜 안 해요?”

“어! 안 해! 말 걸지 마.”

“형 나한테 할 말 많으면서.”

 


토라져있던 몸이 움찔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도영은 윤오가 진짜 독심술을 배우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삐진 티를 내려 팔짱을 낀 도영이 다시금 발을 동동 굴렀다. 잊고 있었던 전해야 할 말들이 머리 위로 하나씩 튀어나왔다. 그래,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까 하나씩 하자. 도영이 목을 가다듬었다. 왜인지 유치원에서 웅변대회를 나갈 때보다 더 떨려왔다. 시선은 바닥에 있는 돌멩이에 둔 채였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혹시나 진짜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 건데, 나 은선이랑 그런 거 아니야. 김민철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거야, 진짜.”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는 시선 탓에 있지도 않은 축 처진 귀가 보였다. 혹시 진짜 토끼는 아닐까 싶은 생각에 웃음이 났다. 별 다른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윤오가 이상했다. 이게 웃긴 일은 아니지 싶은데. 슬쩍 고개를 들자 윤오가 급하게 얼굴을 굳혔다. 너 왜 안 웃은 척 해. 죽을래? 도영이 귀를 바짝 세웠다.

 


“어이가 없어서요. 내가 그딴 새끼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나름 잘 둘러댄 말에 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면 뭐…. 벌써 도영을 타이르는 법을 터득한 윤오였다. 빠르게 수긍하는 단순한 김도영이 심히 귀여웠다. 마음 같아서는 양 볼을 붙잡고 입술도장을 꽝꽝 찍어주고 싶었다. 도영은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달싹였다.

 


“그리구 너 오지랖 부린 거 아니거든. 내가 분명히 고맙다고 말했잖아.”

“그거야 형이 자꾸 나 안 봐주니까 그랬던 거죠.”

 


뭐라 말을 하려던 도영이 입을 닫았다. 틀린 말이 아닐 뿐더러, 뭐라 변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도 꿋꿋이 말꼬리를 무는 모습이 얄밉기도 했다. 살짝 입술을 깨문 도영이 눈에 힘을 줬다. 너 발언권 없어. 듣기만 해. 알겠어? 난데없이 떨어진 불호령에 윤오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 옆으로 얕게 패이는 보조개가 잠시 시선을 이끌었다.

 


“내가 계속 고민을 해봤는데… 네 말대로 아직 안 늦었으니까 하고 싶은 거 해보려고.”

 


도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아마 도영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 터였다. 뭘 거창하게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피하지만은 않겠다구. 목소리가 떨려왔다. 속에 있는 마음을 꺼내서 보여주는 용기가 고마웠다. 그래서 윤오는 그 용기와 솔직한 마음을 귀에 담았다. 다짐을 하는 목소리가 작지만 단단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도영이 윤오와 눈을 맞췄다.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서로가 담겼다.

 


“그러니까 네가 한 말 지켜.”

“무슨 말이요.”

“칭찬해주겠다는 말.”

“옆에 꼭 붙어서요?”

 


윤오의 기분 좋은 미소가 도영에게로 옮겨갔다. 뻔한 대답을 대신하는 웃음이 싱그러웠다. 그간 존재하던 둘 사이의 거리감이 단숨에 사라졌다. 누군가가 먼저 용기를 내서가 아니었다. 정윤오와 김도영. 둘의 한 발짝이 만들어낸 관계였다.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그런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더 복잡한 사이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정재현이라면 그래도 되지 않을까. 윤오를 마주한 얼굴 위로 애정이 묻어났다.

 

 

 

 

도심뽀까 :
도영이 형.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요?

w. 잳잳

 

 

 

 

무역학과에는 세 가지의 소문이 돌았다. 첫 번째, 김민철이 정윤오에게 뒤지게 처맞았다. 그것도 다듀의 죽일 놈 비트에 맞춰서. 굳이 따지자면 싸웠다는 말이 맞았지만, 주먹을 휘두른 횟수를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평소에도 민철을 그닥 내켜하지 않던 부류들은 배꼽을 잡았다. 맞은 이유를 듣고선 진짜 죽일 놈이라며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누가 꼰대민국 아니랄까봐 선배를 때리냐며 혀를 차는 놈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들어보니까 윤오가 때릴만 했던데, 뭐. 라는 말이 꼭 따라 붙었다.

 


여기서 소문 두 번째가 등장한다. 정윤오가 박은선을 좋아한다. 당시 주점에서 경악을 했던 몇몇이 확실하다며 입을 털었다. 김민철이 좋아하는 사람 건드려서 빡쳤냐고 물으니까 정윤오가 알면서 왜 건드리냐고 그랬다니까? 진짜 그때 소름. 깊은 감명을 받기라도 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근데 걔네 학기 초부터 좀 그런 거 있었잖아. 맞아 맞아. 둘 다 예쁘고 잘생겨서 잘 어울리긴 해. 혹시 둘이 이미 사귀는 거 아냐?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윤오와 은선에 대한 말들이 살을 붙여갔다. 굴려지는 눈덩이도 이보다 빠르게 몸집을 부풀리지는 않을 터였다.

 


세 번째는 어이없게도 김민철의 말을 철썩 같이 믿는 놈들 입에서 나온 헛소리였다. 박은선을 두고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정윤오와 김도영. 앞의 두 소문보다는 잠잠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날 김도영이 먼저 주점 나가고 얼마 안 가서 정윤오도 나갔잖아. 넌 그걸 어떻게 아냐. 걍 쎄해서 좀 봤지. 암튼 걔네 그렇게 나가서 존나 싸웠을 수도 있겠다. 그럼 싸워서 이긴 새끼가 박은선 남친인가? 남의 일이라고 키득거리는 꼴이 한심했다.

 


축제 둘째 날, 이 소문들은 곳곳의 술자리에서 단연 최고의 안주거리였다. 그 탓에 모든 얘기가 무역학과를 넘어 캠퍼스를 타고 흐르는 중이었다. 대숲이나 에타에 툭하면 등장하는 정윤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대개가 일단 귀부터 열고 봤다.

 


부과대인 은선은 어제에 이어 오늘 역시 주점에서 일을 도우는 중이었다. 저를 향하는 시선과 말들을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일 놈이지 뭐를 따라 부르고 있을 때, 정말 죽일 놈이 그런 사고를 쳤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첫인상부터 참 거지같았던 민철이었다. 돈 계산을 하던 은선이 별안간 테이블을 쿵하고 치며 일어났다. 저를 보고 수군대던 입들이 급하게 자취를 감췄다.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지연에게 잠시 일을 맡긴 은선이 주점을 나섰다.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 달갑지 않은 목소리만 벌써 세 번째였다. 입술을 깨문 윤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윤오는 망설임 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 형 설마 또 나 피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쯤, 긴 신호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오매불망 기다리던 목소리에 하마터면 울컥할 뻔 했다. 왜 전화 안 받아요. 토라진 티를 내려 애를 썼지만 음성만으로는 티가 나지가 않았다. 미안. 뭐 좀 하느라. 무슨 일 있어? 도영은 말을 하고서 아차 싶었다. 무슨 일이 있다 못해 모든 이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주 핫한 유명인사지. 달갑지 않은 주제에 잠시 마가 떴다.

 


“무슨 일 없으면 연락하지 마요?”

“확대해석 좀 하지 마.”

“그러게.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이런 게 습관 되려고 그래요.”

 


도영이 말을 더듬었다. 얘가 또…. 아마 평생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무슨 대화를 하든 마지막은 늘 비슷했다. 정윤오의 애정이 가득 담긴 돌직구. 물론 더 이상 싫지 않은 말들이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도영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형 나 심심해요. 그래서? 놀아줘요. 정우랑 놀면 되잖아. 걔 지금 경영 주점에 있다는데 내가 거길 어떻게 가요. 결국 말문이 막힌 도영이 입을 닫았다. 이 상황에 주점을 가게 되면 갑자기 은퇴하는 인기 아이돌 기자회견마냥 질문세례를 받거나, 아님 주변 사람들 가시 방석에 앉혀놓고 눈치 없이 술이나 퍼마시는 개새끼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갈까요?”

“어딜.”

“형 자취방이요.”

 


특유의 덤덤한 직진에 도영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여기 와서 무슨 짓을 하려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열이 올랐다. 그냥 그때 그 긱사 편의점에서 봐. 내가 갈게. 급하게 전화를 끊은 도영이 부채질을 했다. 후하후하. 오바스러운 심호흡도 함께였다. 그러다 눈앞에 떡하니 놓인 침대에 시선이 꽂혔다. 아니 저건 그냥 평범한 침대인데 왜…. 꽤 불순한 상상에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연신 쳐댔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김도영. 하던 일을 정리한 도영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취방을 나섰다.

 

 

 

 

약속이라도 한 듯 푹 눌러 쓴 모자가 꽤나 우스웠다. 행여나 오는 길에 누구라도 만날까 노심초사했던 도영이었다. 다행히 주점과 무대는 기숙사와 반대편에 위치했다. 그럼에도 교문에 떡하니 자리한 부스들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들 입맛에 맞춰서 해석하고 떠들 게 뻔했다. 죄인도 아닌데 이러는 게 조금 억울하긴 했다. 이게 다 남의 일에 관심이 너무 많은 오지랖의 피가 흐르는 민족 탓이었다.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민철을 씹어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저 도착한 윤오는 예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즐겨 마시는 초코우유 두 개를 앞에 두고 말이다. 의자를 빼며 도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니까 꼭 연예인 된 기분이다. 모자를 고쳐 쓴 윤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적어도 우리 과에선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여유로운 말투였다. 그 모습까지 참 정윤오다웠다. 빨대를 꽂은 도영이 초코우유를 쭉 빨아들였다. 칼칼했던 목이 시원해졌다.

 


“약은 발랐어?”

 


모자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에도 유독 잘 보이는 상처였다. 어느새 검붉은 딱지가 앉아있었다. 아니요. 내키지 않는 당당한 대답이었다. 도영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약을 발라야 하루라도 더 빨리 나을 거 아니야. 나름 다그치는 말투가 분위기를 잡았다. 진지한 상황에도 윤오는 입을 앙 다물어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별안간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등 위로 도드라진 뼈가 정갈했다. 유독 툭 튀어나온 뼈 위로 작은 상처가 자리해있었다. 도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작아졌다.

 


“형. 나 여기도 다쳤어요.”

“그걸 아는 놈이 약도 안 바르고 그냥 두냐?”

“알고 나니까 막 따가운 거 있죠.”

 


아프다는 사람치고는 심히 들뜬 목소리였다. 꼭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알아달라며 외치는 사람 같았다. 이상한 낌새에 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재현이라면 충분히 다른 속셈이 있을 수 있다. 너 지금 진짜 아파서 이러는 거 아니지. 턱을 괸 윤오가 도영을 빤히 쳐다봤다. 요즘 따라 자주 보이는 보조개였다.

 


“나는 누가 나 걱정해주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요.”

“참나.”

“아님 그냥 김도영이 해줘서 그런가.”

 


쏙 빠진 호칭에 도영이 발끈했다. 아주 맞먹어라? 그 말에 윤오는 질세라 그럴까? 하고 장난을 쳐왔다. 결국 헛웃음이 터진 도영이었다. 윤오를 도저히 이겨먹을 수가 없었다. 초코 우유를 쭈욱 빨아들이자 바닥을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오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것을 밀었다. 너는 안 마셔? 윤오의 끄덕임에 도영이 빨대로 구멍을 뚫었다.

 


“야, 정재현.”

“왜요.”

“너 내일 뭐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윤오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질문을 한 당사자는 먼 산을 보는 중이었다. 꼭 마주보고 하기 부끄러운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도영의 동그란 코끝을 보며 윤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뻔뻔한 대사에 도영이 잠시 이쪽을 힐끗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말이 그렇게 들려? 어쨌든 맞잖아요. 다 알고 있다는 듯 맞받아치는 게 참 신기했다. 정재현은 눈치가 아주 겁나게 빠르다. 독심술보다는 눈치 쪽으로 결론을 내린 도영이었다. 우리 내일 뭐 할 건데요? 이미 잠정적인 약속을 잡은 윤오가 보채왔다.

 


“그…어 그래. 내일 청하 오잖아. 청하 보러 가자구.“

 


한껏 기대를 하던 윤오는 맥이 풀렸다. 같은 학교 사람은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도 가득한 그 곳에서 청하를 보자고. 상상하던 것과는 한참이나 다른 제안이었다. 왜, 너 청하 별로 안 좋아해? 눈치 없는 질문이 허탈하기까지 했다. 입을 앙 다물고 있던 윤오가 눈에 힘을 줬다. 아니요. 개좋아해요. 같이 보러 가요. 괜한 오기였다. 그조차 눈치를 재치 못한 도영이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도 뭘 또 개좋아할 것까지야…라는 생각에 언짢기도 했다.

 


“청하 인기 많은 거 알지? 일찍 가서 자리 잡아야 돼.”

 


꽤나 열정적인 팬심에 웃음이 났다. 기대했던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영은 귀여웠다. 그냥 함께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어쨌든 도영이 먼저 잡은 약속이었다. 그 사실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청하를 나랑 같이 보고 싶어 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금방 마음을 고쳐먹은 윤오였다.

 

초여름을 걸친 5월의 뭉큰한 바람이 둘의 옷깃을 스쳤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은근한 미소가 도영을 떠나지 않았다. 룸메 오늘 안 들어온댔어요. 일어나는 도영을 윤오가 끈질기게도 붙잡았다. 나랑 더 놀아주다가 가요. 응? 솔직히 잘생긴 얼굴로 앙탈을 부리는데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미인계는 언제나 통하는구나. 잠시 넋을 놓은 도영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안 돼. 나 집에 가야 돼. 거짓말이 아니었다. 얼른 돌아가서 끝내야 할 일이 있었다. 멈칫한 도영이 다시 윤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약 바르고 자. 알겠지. 윤오가 입을 삐죽였다. 몰라요. 상처가 덧나든 말든. 정재현 알고 보면 유딩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게 귀여워서 계속 웃음이 났다.

 


“여보세요.”

 


또다시 정문에 깔린 부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도영이 울리는 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은선이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 아마 은선도 적잖게 당황했을 터였다. 나름 해명이 필요한 상황이긴 했다. 오빠 어디가요? 성큼성큼 내딛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꼭 어디선가 저를 보고 있는 듯한 어감에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부스 사이로 은선이 보였다. 우리 얘기 좀 해야 될 거 같은데. 견고한 목소리였다. 결국 도영은 학교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띠여서 좋을 게 없는 투 샷이었다. 아무리 주점 쪽에 사람이 몰렸다지만 지나다니는 인간들이 한 트럭이었다. 잠깐 고민을 하던 도영은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텅 빈 강의실에서 멍을 때리고 있자, 이내 은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영은 가장 먼저 은선의 표정을 살폈다. 너 괜찮아? 조심스런 물음에 은선이 글쎄요, 하고 책상 위로 몸을 앉혔다. 도영의 시선이 자연스레 올라갔다. 하기야 괜찮을 리가 없지. 기다란 한숨이 이어졌다.

 


“미안. 내가 말만 잘했어도 이런 소문도 안 나는 건데.”

“무슨 소리예요. 나 오빠한테 들을 사과 같은 거 없어요. 대충만 들어도 김민철 그 개자식이 백 번 천 번 잘못했던데.”

 


은선의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듣는 비속어였다. 적잖게 놀란 도영이 토끼눈을 떴다. 쟤가 저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생각해보면 은선도 똑같은 인간이니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동안 봐왔던 모습과 조금 다를 뿐이었다. 게다가 김민철이 쏘아올린 아주 큰 공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수긍을 한 도영은 은선의 욕 짓거리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내가 거기 있었으면 선배고 뭐고 숟가락으로 대가리부터 쳤을 거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하여간 첫인상부터 구린 게 마음에 안 들었어. 은선은 그간 쌓아온 불만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그래도 윤오가 뒤지게 패줬다는 소리 듣고 좀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결국 등장한 이름에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은선이 윤오에 대해 물었던 날이 떠올랐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기억이었다. 은선을 향해있던 시선이 슬며시 엇나갔다. 바닥에 펼쳐진 패턴을 뜯어보던 도영이 영혼 없는 리액션을 했다. 지금 와서 보니 일이 꼬여도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나 싶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하기야 지금 내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데 무슨 일이 수습이 되겠어. 도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까만 머리통을 보던 은선이 입을 열었다.

 


“주변 사람들이 떠들고 씹어대는 거야 좀 짜증은 나지만 곧 사그라들겠죠, 뭐. 그건 차치하고…그래도 우리 사이에 얽힌 건 좀 풀어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 연락한 거예요.”

 


머뭇거리는 사이에 들어차는 공백에서 조심스러워하는 티가 났다. 줄곧 어긋나있던 시선이 그제서야 은선을 똑바로 주시했다. 꽤 진지한 표정에 목이 탔다. 도영이 찾지 못한 해결책의 시발점을 은선은 찾은 듯 했다. 어딘가 신뢰는 주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오늘따라 처음 보는 은선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제가 눈치가 좀 빠른 편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은선이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은선이 운을 뗐다. 저번에 둘이 손잡고 있는 거 봤을 땐 그냥 술기운에 저러는 건가, 친하면 그럴 수도 있지 싶었어요. 아 물론 일부러 본 건 아니고 젓가락 줍다가 얼떨결에 본 거예요. 말을 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놀라 자빠질만한 얘기도 물 흐르듯 듣게 되었다. 도영은 별다른 말없이 은선의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

 

암튼 그래서 오빠한테 윤오랑 친하냐고 물어본 거예요. 하필 그걸 김민철이 봐서 일이 이렇게 개판이 됐지만…. 근데 내가 봐온 윤오는 정말 나한테 한 톨도 관심이 없는 애였거든요. 그런 애가 나 때문에 주먹질을 했다는 거야. 처음에 그 말 듣고 단체로 나 몰래카메라라도 찍나 싶었어요.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지 은선이 코웃음을 쳤다. 도영은 꽤 요상한 부분에서 기분이 묘하게 좋아졌다. 한 톨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저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부분이었다.

 


“이제서야 왜 그때 윤오가 대뜸 노래를 하겠다고 했는지. 또 노래하는 내내 한 곳만 봤는지 알겠더라구요.”

 


웃고 있는 얼굴 위로 씁쓸함이 스쳤다. 도영은 그 찰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윤오의 행동을 이해하고, 윤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있는지. 그런 것들을 담아뒀을 은선의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또 다 알고서도 저에게 먼저 다가와준 것이 고마웠다. 울컥하는 감정을 꾹 누르느라 꽤 애를 먹었다. 그저 귀엽게만 봤던 후배에게서 느껴지는 어른스러움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뭐야. 오빠 지금 눈물 고인 거예요? 허리를 숙여 도영을 살피는 눈이 집요했다. 도영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내 호탕한 웃음소리가 강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잔잔하던 분위기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주제 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설마 아직도 안 받아준 거 아니죠? 그런 거면 나 좀 억울할 거 같은데.”

 


너스레를 떤 은선이 책상 위에서 내려왔다. 도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윤오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봤던 그 얼굴이, 문득 보고 싶어졌다.

 

강의실을 나서려던 은선이 다시 뒤를 돌았다. 차라리 그 날 오빠한테 윤오 얘기 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그때 오빠 표정만 안 봤어도 이렇게 쉽게 포기 안 하는 건데. 도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너무 꽁꽁 숨어 있어서 저도 모르고 있던 걸 들킨 기분.

 


“난 지금도 내가 그 표정을 이해하는 상황이 웃겨요. 같은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리구 나 입 무거우니까 걱정하지 마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는 얼굴이 개구졌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은선이 강의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도영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같은 사람을 좋아…. 은선의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어쩌면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을 감정이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인정해가는 시간이 길었을 뿐. 그러나 더 이상은 질질 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기가 싫었다. 슬며시 새어나오는 미소가 수줍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곳을 들어올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게였다. 건물을 빠져나가던 도영이 폰을 꺼내들었다.

 

약 꼭 바르고 자. 내일 보자 재현아.

 

그 어떤 날보다 기대되고 또 기대되는 내일이었다.

 

 

 

 

/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늘어갔다. 방금 또 하나 느낀 게 있다면, 정재현은 참을성이 별로 없어보였다. 또 다시 울리는 폰을 보며 도영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번엔 전화였다. 구름공원을 지나던 도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나간다고 카톡을 보낸 게 불과 2분 전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얼굴도 볼 거면서 윤오는 그새를 못 참고 전화를 걸어왔다. 못 말린다며 혀를 차는 것에 비해 밝은 얼굴이었다. 내심 좋으면서 표정을 숨기는 티가 아주 팍팍 났다.

 


“여보세요.”

“앞에 두 글자만 다시 말해 봐요.”

 


밑도 끝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장난에 웃음이 났다. 예전 같았으면 이 감정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하고 또 얼굴에 열이나 올릴 게 뻔했다. 아예 감정을 인정해버리고 나니 더 해줬으면 싶은 마음이 불쑥 생기기도 했다. 장난칠래? 곧 볼 건데 전화는 뭣 하러 해. 들뜬 내색을 숨긴 채 평소만큼 투덜거렸다. 빨리 보고 싶은데 안 오니까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했어요. 이제 좀 대답이 됐어요? 이번에는 윤오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이렇게나 저의 마음을 몰라주나 싶은 마음에 부린 심술이었다.

 


“정재현 진짜…….“

 


도영이 급하게 입을 닫았다. 하마터면 생각만 하던 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아마 여기서 귀엽다고 해버리면 계속해서 물고 늘어질 게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도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뭐요. 너 초딩 같다구. 그렇게 말하면서도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도영 역시 그 잘난 얼굴이 얼른 보고 싶었다.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인파가 늘어났다. 청하가 인기가 많긴 많구나. 하기야 정재현도 개좋아한다고 했었지.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표현이었다. 어디쯤이냐며 쫑알대는 목소리가 잠시 미워졌다. 거의 다 왔거든.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나 보여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버킷햇을 쓰고 있어도 심히 눈에 잘 띄는 체격이었다. 몇 번 눈길을 돌리던 윤오 역시 멀리서 걸어오는 도영을 발견했다. 윤오에게 수많은 인파 속에서 김도영 찾기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고작 도영의 등장 하나로 얼굴에 꽃이 폈다. 함박웃음을 지은 윤오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얼떨결에 따라서 손을 흔든 도영이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자꾸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뛰어오면 안 돼요?”

“저기요, 정재현 씨. 여기 오르막길이거든요.”

 


당연히 투정을 부릴 거라 생각했던 너머가 조용했다. 별안간 끊기는 전화에 도영이 황당한 기색을 내비췄다. 뭐 거의 다 왔으니까 끊는 게 맞긴 한데…. 그래도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잠시 끊긴 전화를 보던 도영이 폰을 집어넣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오가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기 있던 애가 어딜 갔지. 윤오를 찾는 데에 정신이 팔린 도영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와중이었다.

 


“혹시 나 찾아요?”

 


자연스레 어깨를 감싸오는 손이 따뜻했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도영이 고개를 돌렸다. 씨익하고 웃는 얼굴이 괜히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새삼 잘생긴 얼굴이 놀라웠다. 버킷햇 아래로 휘어있는 눈이 특히나 그랬다. 멍하니 윤오를 보던 도영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오르막길을 올랐다. 온 신경이 밀착되어 있는 몸으로 쏠렸다. 또 다시 익숙한 심장박동이 시작되었다. 뭘 또 내려오기까지 해. 형이 못 오면 내가 와야죠.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것도 아니면서 윤오가 너스레를 떨었다.

 


“나 어제 약 바르고 잤어요. 누가 엄청 걱정을 해줘가지고.”

 


자랑스럽게 뱉은 말이 칭찬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에 도영은 그래? 누가 걱정도 해주고 좋겠네, 라며 뻔뻔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잠시 얕은 미소를 짓던 윤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이 보기엔 어때요. 그 사람 나한테 마음 있는 거 같아요? 글쎄, 그거 가지곤 판단하기 좀 그렇지 않나. 데이트 신청도 하던데요. 확실히 데이트 맞아? 너 혼자 착각한 건 아니구? 윤오는 저를 놀리는 듯 들뜬 목소리에 오기가 생겼다.

 


“키스도 한 사인데 이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그쵸.”

 


잠시 걸음을 멈춘 도영이 찌릿하고 윤오를 째려봤다. 그건 네가 일방적으로 한 거잖아. 어… 나는 형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실실 웃어오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정재현 너 저리 가. 심술이 난 도영이 자신의 어깨에 둘러져있던 팔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앞서가는 발걸음이 토라진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조차도 사랑스러운 모습에 윤오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어왔다. 형 같이 가요. 윤오는 얼른 도영의 뒤를 따라붙어 다시 팔을 둘렀다.

 

운동장으로 가는 내내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축제 마지막 날의 캠퍼스는 불금을 맞이하는 청춘들로 바글거렸다. 미어터질 듯 꽉 들어차있는 주점을 지나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부디 아는 얼굴을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무슨 질문을 어떻게 날릴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오늘 아침 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김민철이 미안하대. 근데 지도 맞은 게 쪽팔리긴 한지 너한테 직접 연락 못 하겠다더라. 도영은 그 소리에 코웃음을 내지었다. 정윤오한테나 사과하라 그래. 은선이한테도 그렇고. 도영은 민철의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태도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애 얼굴에 상처를 내놓고. 민철이 쌍코피가 터지고 눈가에 멍이 든 것까진 도영의 알 바가 아니었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전이라 관객석은 널널했다. 자리 짱많네. 다행이다. 들뜬 도영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앞쪽은 이미 청하의 팬들로 가득했다. 개중에는 이따만한 대포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도영이 처음 보는 커다란 카메라에 감탄하며 그 뒤로 자리를 잡았다. 중간쯤이긴 했지만 무대를 보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얼굴이 꼭 어린 아이 같았다.

 


“우리 너무 빨리 온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앞자리는 벌써 다 찼잖아. 좀만 더 늦었으면 우리 서서 봐야 돼.”

 


무대 준비로 한창인 스탭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나 둘씩 조명이 켜지고 전광판들도 켜지기 시작했다. 행사 진행 순서를 심드렁하게 보고 있던 윤오의 눈이 반짝였다. 댄스부의 공연 다음으로 복면가왕이 자리해 있었다. 형 저거 지금은 신청 못 하나? 윤오가 도영의 팔을 살며시 흔들었다. 도영 역시 단번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신청은 진작 다 끝났을 거 같은데…. 도영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형 노래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에 도영이 어색하게 웃어왔다.

 


“당장 어떻게 불러. 준비한 것도 없는데.”

 


그럼 다음에 노래방 가서 불러줘요. 못내 아쉬운 티를 내는 윤오였다. 잠시 입을 꾹 닫고 있던 도영이 고개를 돌려 윤오를 마주했다. 그렇게 듣고 싶어?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윤오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요. 나 형 노래 부르는 거 보고 반했다니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도영의 심장이 또 다시 느리게 쿵쿵, 머릿속을 울려댔다.

 

 

 

 

행사는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도영의 말대로 좌석은 빠르게 찼고, 서서 무대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마이크를 잡은 남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띄웠다. 여러 학교에서 엠씨를 봤다던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오디오에 틈이 없었다. 현란한 말솜씨에 가끔은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편안하게 무대를 보는 윤오와 달리 도영은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별 괴상한 드립에 헛웃음을 지은 윤오가 도영의 눈치를 봤다. 형 어디 아파요? 몸을 바짝 붙여 반응을 살폈다. 아니? 완전 멀쩡한데. 시끄러운 주변 소리에 도영이 큰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대답과 달리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옆 학교 댄스부가 공연을 펼쳤다. 온갖 장르의 노래가 다 튀어나왔다. 유명 아이돌 노래가 나오면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윤오는 무대에 별 흥미가 없었다. 얼른 청하를 보고 도영과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윤오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무대를 보는 도영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슬쩍, 도영의 손등 위를 툭툭 건드렸다. 줄곧 무대를 향해 있던 시선이 저의 손등과 윤오를 차례로 훑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힘이 집요했다. 그럴수록 도영은 더욱 힘을 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치사하다. 윤오가 입을 삐죽이며 나가떨어졌다. 도영이 살풋 미소를 지었다. 폰을 확인하자 8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윤오의 귀에 입을 바짝 가져댄 도영이 속삭였다. 콧잔등 위로 버킷햇의 투박한 면이 닿았다. 윤오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꽤나 당황한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도영을 따라 고개가 올라갔다. 같이 갈까요? 도영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빨개진 귀 끝을 주시했다. 이젠 별 게 다 귀여워 보였다. 넌 자리 지켜야지. 무대 잘 보고 있어, 알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영이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보던 윤오가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별 감흥이 없었지만 도영의 당부가 있었으니 무대를 열심히 봐야했다.

 

 

 

 

슬슬 돌아오지 않는 도영이 걱정되었다. 아까 표정 안 좋더니 배 아파서 그랬던 건가. 이 생각도 시간이 지날수록 안 좋은 쪽으로 변질해갔다. 댄스부 무대가 끝나고 복면가왕의 시작을 위해 엠씨가 진행을 할 즈음이었다. 도영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관객석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인파 속을 파고 들어올까 싶었지만, 도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윤오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자, 그럼 복면가왕 첫 번째 참가자를 모시겠습니다! 당찬 외침과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윤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이러다가 자리를 뺏기면 낭패였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청하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도영이 울상을 지을 게 뻔했다. 다시 몸을 붙인 윤오가 카톡창을 열었다. 형 안 와요? 어디예요? 전화 좀 받아요. 나 걱정되거든요. 도영이 형. 김도영. 도영아. 보고 발끈이라도 해줬으면 했던 카톡 옆에는 여전히 숫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윤오를 뺀 모두가 흘러나오는 발라드에 맞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름 복면가왕이라고 부직포로 만든 복면까지 쓴 채였다. 일명 백두산 호랑이는 사나운 이름에 비해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2절이 끝난 반주 구간에서 참가자가 복면을 벗었다. 연예인은 아닌지라 알아보고 괴성을 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같은 과인 사람들이나 헉 소리를 내며 놀란 티를 냈다. 안타깝게도 윤오는 노래를 감상할 정신이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와중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급한 마음에 손이 꼬여 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윤오가 잽싸게 폰을 주워들었다. 이게 또 맞먹으려 들지. 도영의 카톡이었다. 형 어딘데요. 괜찮은 거 맞아요? 이번에는 빠르게 숫자가 사라졌다. ㅋㅋㅋㅋㅋ정재현 오바하지 말고 무대 잘 보고 있어. 어디 가면 죽는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청하를 보기 위한 자리를 지키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누구는 속이 뒤집어지기 일보직전인 것도 모르고.

 


그 뒤로 또 도영은 잠수를 탔다. 벌써 세 번째 참가자까지 노래를 끝마친 상태였다. 계속해서 카톡을 보내던 윤오도 해탈을 했다. 오기만 해봐. 품에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음 참가자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데요? 회식날 김대리 나와주세요! 참 이상했다. 사람의 촉이라는 게 말이다. 여태 누가 나오든 심드렁하던 윤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넥타이까지 풀어헤친 김대리가 쭈뼛하게 걸어 나왔다. 잠시 정적이 돌았다. 윤오의 미간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익숙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색에 꼭 온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사랑해마지 않는 목소리였다. 3년 전 이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부르던 그 노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로지 윤오만이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그 시절 정재현이 첫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목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

 

 

 

 

도영이 무대를 내려가자마자 윤오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복면을 벗은 뒤부터 줄곧 저를 향한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중간 중간 미소까지 보이는 사랑스런 얼굴이 행복해보였다.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저를 이끌고 왔을 도영의 고충이 기특했다. 그리고 귀엽고 또 사랑스럽고 예쁘고 소중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턱없이 부족했다. 도영에게 달려가는 와중에도 웃음이 감춰지지 않았다. 빨리 도영이 보고 싶었다.

 


무대 뒤편에 있는 부스에서 도영이 천막을 걷고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숨을 고르고 있던 윤오를 발견한 눈이 크기를 키웠다. 단숨에 도영의 앞까지 온 윤오가 주변을 살폈다. 끌어안고 예뻐해 주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결국 도영의 손을 그러쥔 윤오가 뛰다시피 발걸음을 옮겼다. 영문도 모른 채 뒤를 따르던 도영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계획했던 것 중에 아직 하지 못 한 것이 하나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어쩌다보니 캠퍼스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후문까지 오게 되었다. 건물 앞에 위치해있는 농구 골대가 허름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도영이 헥헥거리며 죽을상을 지었다. 우리 저기 좀 앉자. 벤치를 가는 와중에도 둘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였다. 으아.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몸을 축 늘어뜨린 도영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려 손을 들어올렸다.

 


“언제까지 잡고 있으려고 이래.”

“형이 안 놔주는 거 같은데요.”

“그런가?”

 


평소 같았으면 어디서 개수작이냐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도영이었다. 너스레를 떨며 웃는 얼굴이 꽤 낯설었다. 점차 가빴던 숨이 잦아들었다. 살랑살랑 부는 시원한 바람에 맺혔던 땀이 식어갔다. 형 연기 잘 하던데요. 나 진짜 깜빡 속았어. 윤오의 반응에 도영이 신난 기색을 보였다. 꼭 꺄르르 소리가 날 것처럼 웃는 눈가 옆으로 살짝 주름이 졌다. 왜 말 안 했어요. 그냥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면 재밌잖아. 얼굴 위로 장난기가 가득했다.

 


“나 잘했어?”

 


도영의 눈이 밝게 초롱거렸다. 세상 제일가는 음치여도 이런 얼굴로 물으면 칭찬을 퍼부어줬을 터였다. 아직까지도 노랫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또 반했다고 하면 대답이 되려나. 자유로운 왼쪽 손이 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도영이 너무 잘했어. 완벽한 어린애 취급에 도영이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진짜 죽어. 위협을 목적으로 쥐어 보이는 주먹조차 귀여웠다. 알겠어요. 안 할게. 윤오가 도영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꼬리를 내렸다. 멀리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덕분에 노래 부를 수 있었어.”

 


늘 남아있던 후회를, 가끔 저를 괴롭히던 절망감을, 해내지 못 할 거라는 두려움을 모두 품어줘서 고마워. 그 누구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말로 나를 일으켜줘서 고마워. 또 이번 기회로 노래는 정말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일깨워줘서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나를 좋아해줘서 고마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들이 마음을 간질거렸다. 누군가를 위해 부른 노래는 처음이었다. 무대에 서있는 내내 정재현이라는 사람 하나로 모든 걸 버텨냈다. 도영은 부디 이 진심어린 커다란 감정이 그대로 윤오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나도 잘했죠.”

“응. 잘했어.”

 


잠시 조용해지려는 찰나에 윤오가 능글맞게 웃어왔다. 몸을 가깝게 붙여오는 탓에 도영이 슬쩍 몸을 뒤로 했다. 말로만? 칭찬의 선물 같은 거 없어요? 뻔뻔하게 하는 요구가 황당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은 도영이 붙어오는 몸을 밀어냈다. 그럼에도 밀리기는커녕 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지기만 했다. 도영 쪽으로 볼을 내민 윤오가 손가락으로 저의 볼을 톡톡 쳤다. 참나. 당당한 행동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저기 있는 농구공 한 번에 넣으면 생각해볼게.”

 


도영이 골대 밑에 놓여있는 낡은 공을 가리켰다. 도영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윤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놓아진 손이 꽤나 뜨거웠다. 농구라면 눈을 감고도 골을 넣을 수 있는 윤오였다. 몇 번 공을 튀긴 윤오가 자세를 잡았다. 형 그 말 꼭 지켜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공은 깔끔하게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쟤는 무슨 농구까지 잘 해. 윤오의 완벽함에 속으로 박수를 쳐댔다. 그 사이 쪼르르 달려온 윤오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보였다. 이러니까 꼭 강아지 같다. 도영의 눈이 휘어졌다.

 


“얼른 선물 줘요. 이왕이면 내가 원하는 걸로.”

“넣으면 생각해본댔지 준다고는 안 했거든.”

 


뻔뻔한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내빼기 있다고? 벙 찐 윤오가 질세라 입을 열었다.

 


“내 마음대로 하기 전에 빨리 주는 게 좋을 텐데요.”

“네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거든.”

“형 마음이 뭔데요.”

 


이번에는 도영이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잠시 윤오를 훑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도영은 주저 없이 윤오의 머리에 씌워져있는 모자를 벗겨냈다. 그늘이 져있던 눈이 그제서야 또렷하게 보였다. 살짝 눌려있는 머리를 정리해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아까부터 이거 너무 거슬리더라.”

 


모자를 자신의 다리 위에 내려놓은 도영이 미소를 지었다. 잠시 윤오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도영이 주저 없이 윤오의 입술 위로 저의 입술을 포갰다. 기다렸다는 듯 부드러운 손이 도영의 뺨을 그러쥐었다. 맞닿은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서로를 향한 따스한 감정이 담긴 두 번째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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