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합석해도 되냐고요? 예 뭐, 앉아요.


아. 별건 아닌데, 이 늙은이가 그 뭐시냐. 자꾸만 까먹는 것들을 적고 있네. 뭔지 궁금하신가? 근데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할 겨, 이게 꽤 긴 이야기라……. 번거롭게 한다니, 요즘 나 같은 사람 목소리 들어주는 사람 별로 없는데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


아, 일단 주스 하나만 더 주문하고. 어? 사준다고? 그래도 되나……. 자릿세라고? 좋네.


재미없을 수도 있는데, 안 하면 안 되나? 미안하네. 나는 여기서의 삶은 계속해서 리셋 되는 사람인데, 넘어오기 전 세계의 기억은 계속 잔향처럼 남는 사람이라.


어린 날의 일이네, 그때 나는 이백원이 부족했고, 누나는 삼백원이 남았지. 그래서 나는 초콜릿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고. 누나는 얼음이 잔뜩 들어간 오렌지 주스를 사 마실 수 있었어.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은 평탄했어. 애초에 학교가 아파트단지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누나는 도덕 수업을 받았을 거야. 요즘은 도덕인가, 윤리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만. 불교의 윤회사상을 받았던 거겠지. 그 시기엔, 주말 밤이 되면 시간여행을 하는 옛날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곤 했어.


그날 누나가 말했지. 그 날은 습지지도 않았는데, 바람 한 점 조차 없어서 말 그대로 모든 게 갇힌 듯 멈춘 듯 했어.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고, 정확히 내 ‘연결’이 끊긴 거지만. 누나는 그랬어.


우리가 살고 죽으면서 그 영혼이 돌고 돈다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환생한다는 건 영혼이 새로이 태어난, 태어날 육체에 깃든다는 건데 빛보다 빠르게 움직여 지구 정반대에서 환생한다면……. 누나는 어떻게든 아는 단어를 이어 붙여 말을 만들어내고 있었지.


이 영혼이 시간을 이겨낸다면, 결국 우리는 단 하나의 영혼으로 이 세계를 계속해서 도는 것이 아닐까. 내가 선생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 길고양이가 나일 수도 있고…….


자네, 오비이락烏飛梨落의 인과를 아는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속담에서는 의도 없이 한 행위가 어떤 행위와 엮여 의심받는 행위라고도 하는데. 실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네.

까마귀가 날아 배가 떨어졌는데, 그 배가 마침 땅을 지나가던 뱀의 머리를 때려 뱀이 죽었고. 뱀은 환생하여 멧돼지가 되고, 까마귀는 늙어죽어 꿩이 됐다. 멧돼지는 땅을 뒤지다 돌을 걷어차 버리고, 봄 한철에 새싹 뜯어먹던 꿩은 어디 굴러온 돌에 머리를 맞아 죽는다.

그럼 이제 그 꿩은 사냥꾼이 됐는데. 이제 멧돼지를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 이거인데. 불교의 윤회사상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쌓는 죄, 과오, 업보에 대해 물어보는 이야기지.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했는가, 그럼 물어보는 거네. 맞춤 정장처럼 누나 하나를 위해 만들어진 그 세계에서……. 단 하나의 영혼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성격, 다른 외모, 다른 의지를 가지고 원맨쇼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 버리면 그 때부터 무슨 일이 생기는가 말이지.


그 시점에서는 나는 직접 그 세계에 방문하는 걸 포기했네. 애당초 내 고향 세계는 아니었으니.


아, 고향 세계 이야기 하는 거 아니었냐고? 아니었네. 우리 고향 세계……. 대별이 무너뜨린 세계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모호해져 버려 명확한 삶과 죽음이 없어. 통치자는 좋을지 모르지만, 결국 혼돈으로 가득 차버려 세계의 경계마저 무너져버렸다네. 사람들은 나태해졌어. 영원한 죽음이란 없었고, 필사적인 목표도 사라졌으니까. 업보? 그건 누가 신경 써? 어차피 죽음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져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데. 인간 생각이 단순화되는 거 시간문제지.


경계가 무너지니 세계 밖으로 모든 것이 퍼지기 시작했지. 그 중 일부는 다른 세계로 편입되거나, 아니면 소멸했지. 나는 좀 달랐지만. 예외개체 취급 받아서 이……. 끝없는 세계인가? 맞나? 이곳에 오게 된 거고.


누나는 그 명확한 경계가 사라지기 전에 죽었어. 다시 태어나기 전에 대별은 그 영혼을 따로 모셔놨지. 그리고 꼬인 위치에 세계를 만들어냈어. 이전 규칙이 적용돼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낸 거야. 그리고 누나의 영혼만 그 곳에 놓았지. 그래서 영혼 하나로만 돌아가는 세계가 만들어진 거야.


그래, 끊임없는 사생활 침해 버라이어티 쇼를 보는 거지. 나 어렸을 때 그런 영화였던가, 예능이었던가.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대별? 당연히……. 이건 추측정도인데, 아마 누나가 자신과 함께하길 바랐던 것 같아. 원하는 답을 찾으려고 그 플라스크 안에 누나를 넣고 계속 돌린 거겠지. 물론 답은 안 나왔어. 누나는 어느 날 사라졌거든. 개폐 권한은 분명 대별한테만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흠집 하나 없는 플라스크에 텅 빈 세계만 있더라고.


결국 나만이 이를 기억하는 실향민이 됐지. 지금 대별은 물론이고 소별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알아보면 연락 좀 주겠나? 대충 이렇게 생겼는데. 그런 애들이 어디 한 둘이냐고? 그건 그렇지.


근데 이런 소문이 돌더라고, 혼돈만 있던 공간에서 갑자기 질서가 개입됐다고. 그러자 세계가 태어났다고.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아는가? 알았네.


이번 삶의 기억 초반은 희미한데 어째서인지 이것만 남아서.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으면 안 되니. 이렇게라도 말하며 사는 거라네. 명심해야 할 것은, 과한 혼돈은 결국 세계의 멸망을 잇는 길이 될 것이며 과한 질서도 똑같이 되겠지. 무엇보다 잘 아는 얼굴이구만, 자네도 세계 밖에서 온 건가?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일세. 더 말해봐야 뭐 알겠는가?


내 이름이 뭐냐고? 난. 난이네. 이전에는 서 씨 성이 있어서 서, 난. 이었는데 여기 오니 뭐. 성은 중요치 않게 됐어. 그래, 리현이라 했나? 다음에 또 보지.


……선이 누나는, 여기 없길 바라야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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