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누비는 동안 토르는 머리를 정돈하지 않았다. 방치했고 길게 자라는 것도 무시했다. 사아카르에서 짧게 잘린 머리카락은 그의 무시 속에 차츰 길어져 손에 잡힐 정도가 되었는데, 문득 그 사실을 인지한 토르는 시간의 흐름을 깨닫는 데 머리를 기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 들르는 아스가르드의 풍경이 변화하는 것만이 그가 시간을 파악하는 때였으므로.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을 느낄 무언가가 필요하긴 했다.


그래서 토르는 머리가 길어지도록 죽 내버려 두었다. 길이가 어깨 너머로 넘어가게 되면 짧게 자를 작정이었다.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는 데에는 일 년하고도 반이 조금 넘게 걸릴 것이다.


일 년하고도 반. 괜찮은 듯 부족한 단위였다. 더 짧은 시간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토르는 무성의하게 잘라내던 수염도 내버려 두었다. 정돈된 수염이 턱 아래로 내려와 목을 가릴 정도로 지저분해지는 데는 오 개월이 조금 넘게 걸릴 듯했다.


오 개월과 일 년 반. 토르는 두 개의 시간을 가지고 우주를 누볐다.



스톰 브레이커는 진실로 왕의 무기였다. 토르는 언제고 바이프로스트를 열어 자유롭게 우주를 건너뛸 수 있었고, 이것은 그가 목적을 이루는 데 몹시 도움이 되었다. 물론, 바이프로스트를 부를 수 있는 것만이 스톰 브레이커의 유용한 기능은 아니었다. 커다란 도끼날은 아무리 많은 적을 베어도 전혀 닳지 않았고, 안정적으로 그의 손에 돌아와 주인의 뜻을 따랐다.


토르는 충분히 스톰 브레이커 하나만으로 모든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타노스를 숭배하던 이들이 죽었고, 그에게 무기를 팔아넘겼던 이도 죽었고, 타노스의 이름을 빌려 행성을 통치하던 독재자도 죽었다. 모두가 마른 낙엽처럼 스톰 브레이커에 찢기고 바스라졌다.


토르는 스스로를 필연적인 존재라 칭하던 타노스가, 드넓은 우주의 수많은 행성에서 일어나는 분란을 보고서는 무어라 논할지 참으로 궁금했다. 우주의 균형은 고작 생명체를 반으로 줄인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타노스의 주장은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그러나 죄를 저질러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자들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리면서도, 토르가 종종 멈칫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이러는 것이 옳은가, 자신은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그를 차게 적실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눈앞의 희어졌다.


하지만 토르는 고뇌하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않았다. 정당함과 타당함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의문이 솟을 때마다, 멈칫하고 난 뒤마다 더 세게 칼을 휘둘렀다. 이 모든 혼란은 자신이 초래한 것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맞았다. 그러니 혼란을 잠재우는 것은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에 속했다. 토르는 그렇게 계속 되뇌었다. 주문처럼 당연하다 읊조리며 적을 죽였다.



그는 곧 스톰 브레이커를 휘두르지 않아도 손쉽게 처리가 끝난다는 것을 터득했다. 거듭되는 전투와 학살로 번개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일 이를 응시하며 눈만 깜빡여도 번개가 떨어졌고, 토르는 적진을 산책하듯 걷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스톰 브레이커는 그의 등에 메여 바이프로스트를 부르는 데에만 쓰여 갔다.


번개와 함께 나타나 무자비하게 행성을 쓸고 지나간다는 수상한 자에 대한 소문이 부풀려지고 넓게 퍼질수록, 토르는 제가 세계의 수호자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자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과거의 오딘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평화라는 명목으로 헛된 피를 묻히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토르는 멈출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만두기는 아쉽잖아.



귓가에 서늘한 속삭임이 닿는다. 토르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타노스와 뜻을 같이 했던, 그에게 조력했던 이들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죽이면.



다 죽이면? 뭐가 남지? 그런다고 나는 돌아오지 않을걸.



속삭임에 이어 간지러운 감각이 들었다. 마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미끄러지는 듯한. 혹은 손이 그를 쓰다듬는 듯한. 토르는 이를 악물고 절망을 속삭이는 환청에서 벗어나려 했다. 눈을 뜰 수는 없었다. 지금 눈을 뜨면, 목이 꺾이고 파랗게 얼굴이 질린 로키가 보일 것 같았으므로.



“……로키.”



토르가 탁하게 읊조렸다. 늘 잔인하도록 선명하던 환청은 그가 로키의 이름을 부를 때면 거짓처럼 멎었다. 그렇기에 더 잔인했다.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평소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 이름을 제 혀 위에 올려야만 환청이 멎는 것이다. 환청이 사라지자 침묵만이 남아 그를 감쌌다. 속눈썹이 떨렸다.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은 어느 순간부터 나오지 않았다. 악몽을 꾸고, 로키의 이름을 불러도 눈은 건조하기만 했다. 그러나 메마른 눈가가 더 고통스러운 것은 왜일까. 토르는 괜히 눈을 문질렀다.


그는 타노스의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고 배회했다. 지구에서는 점처럼 보이는 은하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의 행성을 방문하기도 했고, 낌새를 느끼고 도망친 이를 잡기 위해 더 먼 우주로 나가기도 했다. 끝없는 우주의 모든 곳이 토르의 목적지가 되었다.


그러나 어디로든 능히 이동할 수 있는 바이프로스트를 지녔음에도, 온 우주를 헤매면서도, 토르가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가지 않는 곳이 딱 두 곳 있었다. 사라진 아스가르드의 옛 터와 아스가르드에서 22점프 포인트 지점의 우주. 그곳만큼은 차마 들를 수가 없었다. 가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수반되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토르는 두 장소를 모르는 것처럼 살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죽일 이를 죽이고, 어깨 너머로 늘어진 머리를 처음으로 바짝 자르던 날. 그는 발을 들이지 않던 곳 중 한 곳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 년 하고도 육 개월이 훨씬 지나서야 마음을 먹을 수 있던 것이다. 토르는 등에 단단히 묶었던 스톰 브레이커를 풀었다. 그리고 우주를 떠올렸다. 잔재가 고요하게 부유하고 있을 그 지점을.


공기가 사라지고 숨이 턱 막혀온다. 저릿한 한기를 느끼며 토르는 눈을 떴다.



“…….”



그는 폐허가 된 아스가르드와 함께 떠 있었다. 수르트의 검에 으깨진 파편들이 근처에 드넓게 퍼져 있다. 큰 조각이 없고, 가장 큰 것이 그의 주먹 정도 크기였다. 토르는 우주의 추위가 피부를 얼리는 것을 느끼면서 파편 사이를 헤엄쳤다. 처음에는 허우적거리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던 몸짓이 금세 능숙하게 변했다. 그는 파편들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나아갔다. 라그나로크를 직격으로 맞은 고향은 잿더미가 된 모닥불보다 더 처참했다. 모든 것이 검은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확도 있었다. 토르는 타고 무너진 잔해들 속에서 용케 존재하는 금속 조각을 몇 개 구했고, 금덩이도 조금 주웠다. 궁전 전체가 금이었던 것에 비하면 남은 건 전무하다시피 했다. 작은 사금 조각.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재 덩어리만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흐트러진 잔해들을 꼼꼼하게 살폈지만, 더 이상 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토르의 손이 공중에 떠 있는 검은 덩어리를 움켜쥔다. 수르트의 불꽃으로 완벽하게 타버린 덩어리는 그 움켜쥠도 견디지 못하고 부스러져 손 사이를 빠져나갔다.


공허한 우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정말로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은 그 자신의 텅 빈 영혼 속에 빠진 것 같다. 토르는 그 뒤로도 견딜 수 있는 한 길게 잔재들 사이를 유영했지만, 더 찾아낸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견디다 못한 신체가 차츰 굳어갔고, 토르는 이동해야만 했다. 그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아스가르드가 실재했었다는 증거를 망막에 새겼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새 아스가르드로 향했다.




“쿨럭.”




코와 입으로 밀려드는 공기에 토르가 마른기침을 토했다. 메마른 입안에 침이 솟아 튀어나온다. 헐떡거리며 입가를 닦았다. 저번에 아스가르드에 들렀던 것이 머리카락이 귀를 덮을 즈음이었으니, 꽤 오래 자리를 비운 참이다. 토르는 브룬힐데를 찾으려 했다.


그러던 그의 발을 멎게 한 것은 예전에는 없었던 높다란 건물이었다.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건물. 간소화 되었지만 익숙한 디자인. 궁이었다. 토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브룬힐데와 에이트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드디어 돌아오신 겁니까?”

“오, 토르! 궁전을 다 지었는데도 자네가 나타나지 않아 얼마나 초조해했다고!”



에이트리가 땅을 쿵쿵 울리며 뛰어와서는 토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시 기침이 터졌다. 토르는 목을 가다듬으며 브룬힐데에게 그가 열심히 우주를 떠다니며 모은 수확물이 든 자루를 내밀었다. 브룬힐데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자루를 받았다가, 대충 빙빙 돌리며 궁을 가리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 오두막을 왕의 거처로 두기는 좀 그래서요. 넘쳐나는 재료들로 세웠습니다. 맥주를 팔아 만든 돈도 썼고요. 여기 사람들은 완전히 저희가 금에 미쳤다고 생각할 걸요.”



브룬힐데의 손에서 돌아가던 자루가 멈췄다. 그녀가 토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를 다시 자르셨네. 수염은 좀 제멋대로 뻗쳐 있지만……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가 불쑥 나타난 것 치고는 변함없어 보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토르의 눈이 예전보다는 잠잠하다는 거였다. 그 전까지가 한창 몰아치는 폭풍 같았다면, 지금은 소강상태의 폭풍 같아 보인다고 해야 할까.


브룬힐데가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해야 할 일은 다 하신 건가요?”


토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최소한은.”

“좋네요. 페하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늘 호조였으니까요. 이제는 국정도 좀 보시고 하세요. 왕좌도 만들어 놨는데 아무도 안 앉으면 무쓸모 아니겠어요?”



일 년 간의 이야기를 모조리 이 자리에서 풀어 놓아도 시원치 않았지만, 브룬힐데는 일단 그건 나중의 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녀는 토르가 제 손에 들린 자루를 지긋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게 뭔데요?”

“열어 보면 알 터이네.”

“예, 예. 받들어 모시죠, 페하.”



투덜거리며 자루를 연 브룬힐데는 잘게 반짝이는 금 조각을 보고 실눈을 떴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금 조각을 꺼내들고, 이리저리 빛에 비춰 보았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브룬힐데가 조심스럽게 토르를 살폈다.



“잔 조각이지만 괜찮아 보이네요. 꼭-.”

“아스가르드의 황금처럼 보일 테지.”

“……우주에서 독심술도 배워오셨나 보죠.”


토르가 목울대를 크게 울렸다. 말라붙은 목이 따끔거렸다. 그는 짙은 한숨을 토했다.


“진짜일세. 아스가르드가 있던 곳에 다녀왔네.”



브룬힐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자루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토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싸늘한 분위기에 에이트리가 토르에게 궁 내부를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토르는 에이트리를 따라 발을 옮겼고, 브룬힐데는 빳빳한 천과 손 안에서 구르는 사금조각을 계속 만졌다.



“궁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 만들기 수월했다네.”

“그런가.”



익숙하지만 낯선 금빛의 계단을 오르며 토르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눌러야 했다. 높은 천장, 기둥, 펼쳐진 복도. 외관보다 내부가 더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굴릴 때마다 담기는 모든 것이 옛 그대로였다. 토르는 잠시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말았다. 꿈이나 환각은 아닌지. 그리고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저 맨 끝, 가장 작게 보이는 기둥 옆으로 검은 신발과 초록 망토가 비죽 튀어나와 있다. 또 시작이군. 토르는 살이 쓸리고 긁히도록 눈을 거세게 비볐다.



“저쪽에 자네 방이 있어. 예전의 올파더의 방에 들어가 봤던 이가 없어 내가 완전히 새로 짜 넣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 오두막에 비하면 훨씬 나을 걸세.”



에이트리가 씩 웃었다. 그가 수염을 매만지며 방을 확인해 보겠느냐 물었으나 토르는 거절했다. 에이트리는 그렇다면 봐야 할 건 딱 하나 뿐이라며 앞장섰다. 기다란 홀을 걸으며 토르는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직감했다. 이 앞으로 나아가면 그곳에는 아마.



“그리고 여기에 가장 공을 들였지. 자, 자네 자리야.”



에이트리의 손이 조금 위를 가리킨다. 토르는 몇 개의 단 위에 놓여 있는 왕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좌 또한 예전 그대로였다. 헬라를 유인하려 왕좌에 앉아 궁니르를 들었을 때, 그때 앉았던 그 자리가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토르의 턱이 떨려 왔다. 가슴 안쪽이 뜨거워지고, 목구멍으로 뜨거움이 차올랐다.



“…….”

“앉아 보겠나?” 에이트리의 손이 조금 더 올라갔다.

“조금, 조금 뒤에 앉지.”


토르는 석고처럼 굳은 입술을 힘겹게 달싹거렸다.


왕좌를 두려워하는 토르 오딘슨이라, 내가 아는 형은 아닌데.



비아냥대는 말이 들린다. 토르는 손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톡. 톡. 가벼운 빗방울이 궁을 두드렸다. 에이트리는 그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렸고, 토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기둥 옆으로 보이던 신발과 망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환청과 환각이 늘 그랬듯.



새 왕좌에 앉은 뒤로도 토르는 종종 우주로 나갔다. 그를 알지 못하는 먼 곳의 행성을 떠돌며 용병처럼 행동했다. 이름을 대지 않고, 지나가는 나그네로 사는 것도 제법 괜찮은 일이었다.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죽일 이가 남지 않았기에 토르의 여정은 아스가르드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졌고, 그는 물자를 모아 나라로 돌아갔다. 온 국민이 맥주를 판 값만으로 생활하기에는 빠듯했다.


그러던 도중, 향락과 유흥에 젖은 한 별에서 토르는 뜻밖의 생물을 발견했다. 근처의 행성을 침략해 식민지로 삼으려 하던 극악무도한 권력자를 잡으러 온 참이었는데, 암시장을 지나는 빠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이런 우주의 구석에 아스가르드와 관련된 것이 있다니.


토르가 놀라움에 차 눈을 크게 떴다.



“페가수스……? 이게 어떻게?”



토르는 눈을 좁혀 떠 제가 환각이 아닌 제대로 된 것을 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우주를 누비며 온갖 것을 본 그였다. 개중에는 멀쩡한 말의 등에 어쭙잖은 장식물을 붙여 놓고 새로운 생명체인 척하는 사기꾼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말은 그런 우스꽝스러운 꼴이 아니었다. 쭉 뻗은 등에 커다란 날개가 달린, 진짜 페가수스였다.



“오, 이걸 아나?”


썩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이던 등 굽은 노파가 토르에게 접근했다.


“예전에 누구에게서 비싸게 알을 샀는데, 태어난 게 이 날개 달린 말이었지 뭐야! 생긴 거와 다르게 성질은 얼마나 더러운지. 관심 있는 거라면 넘겨주지. 단 값은 제대로 쳐야 할 거야.”



아스가르드에서도 페가수스는 귀히 여겨졌다. 발키리가 전설이었듯, 발키리가 타고 이동하는 페가수스도 그만큼이나 전설이었다. 토르도 페가수스는 책에서만 본 적 있었다. 실존하는 페가수스는 몇 백 년 전 자취를 감추었다 하였는데.


토르는 궁시렁대는 노파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페가수스에게 다가갔다. 푸르릉거리며 콧김을 뿜고 발을 구르던 말이 큰 눈을 깜빡이며 토르를 보았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뒷발로 접근하는 사람을 차버릴 기세였던 페가수스는 직전까지의 투레질이 거짓인 것처럼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주인을 알아보는 모양인데.”



골칫덩이를 넘기고 싶은 노파가 토르를 치켜세웠다.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돈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는지 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토르는 말의 갈기를 거듭 쓸며 말했다.



“아니, 나는 이 녀석의 주인이 아니오. 다만, 주인이 될 자를 내가 알지.”



머나먼 우주에서 이 녀석을 발견한 것에도 어떤 뜻이 있을 것이다. 토르는 기꺼이 노파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따른 거액을 지불했다. 용병 일로 모은 유닛의 반 이상이 깎여 나갔지만 괜찮았다.


에너지 쉴드를 뚫고 내리꽂히는 바이프로스트의 빛. 검술 훈련을 내팽개치고 달려간 브룬힐데가 우뚝 멈춰 섰다. 쉬지 않고 검만 휘둘러서 헛것을 보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땀이 들어가 따끔거리는 눈을 세게 비볐다. 하지만 눈을 아무리 비벼도 보이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녀는 토르에게 묻고야 말았다.



“지금, 이게?”

“먼 우주에서 발견했네.”



토르가 페가수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브룬힐데가 떨리는 손을 페가수스 쪽으로 뻗자 말이 부름에 반응한 듯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한 번 크게 울고는 다리를 접어 그녀가 올라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알아차린 것 같이. 토르가 피식 웃었다.



“주인을 알아보는군.”

“정말로 놀랍군요.”

“이 또한 운명의 뜻이겠지.”



그렇게 해서 아스가르드에는 페가수스 한 마리가 생겼다. 브룬힐데는 제 말이니 제가 돌보겠다며 직접 그녀의 집 옆에 외양간을 지었다. 투박한 모양새에 페가수스가 마뜩찮은 눈으로 말뚝들을 발굽으로 쳐댔으나, 곧 주인의 뜻을 따라 얌전히 머무르게 되었다. 페가수스 덕분에 발키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브룬힐데는 기쁘게 어린아이들을 위한 검술 훈련을 열 수 있었다.


우연찮은 발견은 토르를 좀 더 우주 곳곳을 누비도록 이끌었다. 또 무언가 습득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토르를 멀리 돌아다니도록 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두 번째로 머리를 자를 때가 되었다.


토르는 손에 들린 긴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3년이었다. 끝없이 일어나던 혼란이 조금 잦아들기까지 걸린 시간이. 자신의 과오에서 깃털의 무게 정도가 덜어지는 데 걸린 시간이. 하늘의 구름이 조금 옅어지는 데 걸린 시간이.


우주와 은하를 넘나들며 혼란을 정리하는 것은 토르만이 아니었다. 이제 토르는 분쟁이 일어나는 어딘가의 행성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 궁에 자주 있게 되었다. 좁은 오두막이 넓고 번쩍이는 궁으로 변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불편했고, 때때로 숨 쉬는 것이 어려웠고,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흘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힘겨운 호흡을 내뱉으며 궁의 침대에 누워있던 토르는 그가 피해오던 것을 조금 들추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드디어. 토르는 아스가르드에서 22점프 포인트만큼 떨어진 우주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가 몸에 와 닿는 익숙한 우주의 추위와 소름끼치는 정적, 꽉 메여오는 목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죽어버린 그의 백성들. 눈조차 감지 못한 시신이 주위에 널려 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공격받아 크게 흔들리던 함선, 브룬힐데와 적은 수의 백성을 내보내던 것, 그 옆에서 제 손을 잡던…… 로키.



‘로키.’



토르의 입술이 달싹였다. 공기가 없었기에 그의 달싹임은 소리로 완성되지 못하는 벙끗거림에 불과했다. 하지만 입술이 움직이고 혀가 이 뒤에 닿았다가 떨어지며 흔들리는 일련의 과정이, 로키의 이름을 부르려는 시도가 토르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토르는 순식간에 시간을 거슬러 타노스에게 로키가 살해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때의 자신이 되었다. 플래시백이 일었다. 지난 삼 년간 기를 쓰고 묻어두려 했던 반작용일지도 몰랐다. 토르는 로키의 마지막 모습과 말을 생생히 되뇔 수 있었다.


토르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고, 아스가르드의 잔해 속에서 헤엄쳤던 것처럼 죽음의 잔해 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조각난 함선 파편이 앞을 가로막고, 튀어나온 철근에 피부가 긁히면서도 토르는 찾는 것을 위해 계속 나아갔다. 찾아야만 하는 것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을 위해서.


로키. 로키. 로키……. 토르는 계속해서 덧없이 입술을 떨었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소리는 토르의 안으로 던져졌고 토르의 영혼을 울렸다. 로키. 토르는 몹시도 오랜만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쥔 그가 보이는 모든 시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로키는 없었다.


그러던 토르의 눈에 익숙한 망토자락이 나풀거리는 것이 걸렸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토르는 곧장 그곳으로 갔다.



‘로키.’



로키가 여기 있다. 기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창백한 얼굴과 편히 감겨지지 못하고 반쯤 뜨여진 눈, 선명하게 남은 목의 자국과 피. 토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로키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차가웠다. 죽음의 온도다.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목이 꽉 메여온다. 토르는 스톰 브레이커로 타노스의 팔을 자르고 목을 날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고문했어야 했다. 살갗을 포 뜨고 불로 지져 피를 멎게 하며 가능한 한 오래 살아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했었어야 했다. 그것이 로키를 죽인 자에 대한 응당한 대가였다.


토르는 로키를 끌어안았다. 우주의 추위보다 더 차가운 몸이 품안에 놓인다. 이를 다시 놓칠 수는 없다. 토르가 거듭 로키의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토르는 로키에게 그리 말하며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하지만 로키는 눈을 감은 채로도 고통스러워 보인다. 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어야 했다. 그러면 로키는 자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목의 상처를 가린다면 더 평온해보일 것이고…….


토르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로키와 아스가디언의 시신을 수습하기 전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우주에 방치되어 단단하게 얼어버린 시신을 냅다 새 아스가르드로 데려갔다가는 부서지고 으스러질 것이었다. 토르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로키가 훼손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더욱이나 로키를…….


토르의 눈이 빛을 잃고 우주의 심연을 보았다. 그는 로키를,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이건 유일하게 남은 로키의 증거이자 로키 자체였다. 그의 동생이 그와 함께했다는 증거. 모든 걸 걸고 저를 지키려 했다는 증거. 자신을 사랑했다는 증거.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언제 희미해질지 모르는 기억뿐이었다. 입 맞추고, 몸을 섞고, 사랑을 말하던 기억. 물론 그 기억들도 충분히 감미로웠으나, 토르에게는 내내 두고 추억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이것은 그간 그를 괴롭히던 환청이나 환각이 아니었다. 거짓이 아닌 진짜 로키였다.


토르는 이제야 이곳에 도달한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두렵고 괴롭다는 이유로 로키를 방치하다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가 로키의 몸을 한 번 더 제 품에 가두었다. 얼어붙은 시신과 얼어가는 피부가 닿자 차가움 말고는 느껴지는 것이 없었지만, 토르에게는 충분히 따스했다. 로키의 존재가 온기가 되어 구멍 났던 영혼을 메웠다.


토르는 로키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에 걸어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로키를 필요로 했다. 외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지난 3년간이 이를 증명했다. 그리고 로키를 외면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기 위해서는…… 역시, 로키가 필요했다.


토르가 눈썹을 모아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도 그에게 로키에 관한 이야기를 던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로키의 이름이 나오려 할 때마다 과격하게 반응한 제 탓이긴 했다. 입을 떼기도 전에 태풍이 몰아치는 일이 반복되자 아스가르드에서 로키란 단어는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타노스보다도.


타인의 입에서 로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니, 그의 존재는 차츰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로키를 수면 위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은 토르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토르도 환청과 환각에 미칠 것 같을 때가 아니고서는 로키를 부르지 않았고, 꺼내지 않았다. 힘겨워서이기도 했지만, 로키에 관해 대화를 나눌 이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로키를 아는 사람이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로키를 알고 있다. 토르의 동생으로서. 사연 많은 복잡한 둘째 왕자로서. 다만 그것이 끝이다.


어벤져스도 로키를 알고 있다. 지구에 나타나 마인드 스톤이 박힌 셉터를 들고 테서렉트를 강탈하려던 로키를 알고 있고, 로키가 어떻게 패했는지도 알고 있다. 입마개를 한 로키가 몹시도 불쾌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던 것도 기억하고 있을지 몰랐다. 다만 그것이 끝이다.


브룬힐데와 코르그도 로키를 알고 있다. 사카아르에서 그랜드 마스터의 호의를 얻었던 로키를 알고, 아스가르드로 돌아와 싸우고 피난선에서 그의 곁에 서 있던 로키를 안다. 토르와 로키가 좁은 피난선에서 한 방을 썼다는 것도 안다. 둘이 함께 아침에 등장할 때면 못 본 척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으니, 그것이 무슨 의미였는지도 알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다였다. 이조차 부족했다.



오로지 토르만이 로키를 온전히 알았다. 로키가 어릴 적 마법 약을 만들려다 실패해 몇날 며칠이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과, 그런 로키를 달래느라 알프헤임으로 떠났던 사냥에서 희귀한 달맞이꽃을 따러 돌아다녀야 했다는 것과, 이를 받아들고 로키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안다. 그만이 안다. 이를 아는 사람은 그 외에는 아무도 없다. 반짝이며 휘어지던 로키의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시선을 빼앗는지 아무도 모른다. 로키와 그가 결국 어떻게 마주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온전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네가 진짜였다면 안아줬을 거다.


그렇게 말하던 토르의 심장이 얼마나 거세게 뛰고,


-진짜야.


그렇게 말하던 로키의 눈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그 후 그들의 거리가 얼마 만에 좁혀지고, 호흡이 섞였는지, 이를 아는 건 두 사람 뿐이었다. 운명을 관장한다는 세 여신조차 모를 것이 틀림없었다. 이 감정을 알고 공유하는 건 온 우주에 단 둘, 토르와 로키뿐이었다.


이제는 한 사람이 되었지만.



토르는 로키의 얼굴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손으로 따라 그렸다. 당연하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로키. 널 데리러 오마. 그렇게 다짐하며 토르는 로키의 뺨에 입술을 눌러 약간의 온기를 전했다. 그리고 바이프로스트를 열었다. 필요한 것이 있었다.



다급하게 돌아온 토르는 다짜고짜 에이트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궁의 제 침실 옆으로 새 방을 하나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토르는 내내 웃는 낯이었지만,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에이트리는 웃음을 잃어갔다.



“책장이 세 개 있어야 해. 거기에 셰이드에 관련된 책을 꽂을 걸세. 원래는 커다란 창과 발코니가 있었지만 그건 필요치 않고. 벽에 새겨졌던 무늬들도 내가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지. 나중에 그려주겠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토르가 웃었다. 잃어버린 것을 드디어 되찾은 느낌이었다. 자신은 응당 이랬어야 했다. 그의 미소는 점점 짙어져 보조개까지 파였다.


“중요한 건, 방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야 한다는 거지. 요툰헤임보다도 온도가 낮아야 해. 우주의 심연이 부르는 추위가 방에 가득했으면 한다네.”

“……음. 토르?”



에이트리가 수염을 쓸더니 걱정스런 얼굴로 토르를 보았다. 말을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토르는 빙그레 웃었다. 웃어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토르, 내 생각에 이건…….”

“자네가 부탁을 들어주리라 믿네. 아, 그리고 그 방에 문은 필요 없어. 내 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으면 돼. 내가 아니고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괜찮겠군.”

“……토르. 이건-”

“들어줄 것이지?”



토르가 에이트리의 손을 붙잡았다. 에이트리는 토르의 눈이 파랗게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맙소사. 브룬힐데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무어라 할까. 에이트리는 당장에 찬물을 들이키고 싶어졌다. 토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생기 있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부탁이 있다 하기에 뭔가 싶었는데. 생기인지, 광기인지.



“…….”



대답하지 못하는 에이트리에게 토르는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내내 이어졌던, 물기 젖어 질질 끌리는 걸음이 아닌 산뜻하고 밝은 걸음으로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옅어지는 구름 틈으로 햇살이 슬쩍 삐져나오기까지 한다. 에이트리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걸, 어찌 해야 하지.


토르는 제 침실 옆에 로키의 방을 마련했다. 기억을 샅샅이 쥐어짜 생전 로키의 방을 세세하게 그렸고, 설계도를 에이트리에게 전해주었다. 에이트리는 그의 눈치를 보며 침실 옆을 개조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전해들은 브룬힐데가 난폭하게 왕좌 앞으로 걸어오게 되었다. 그녀의 모든 몸짓이 반대를 표명하고 있었지만, 토르는 뜻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토르는 왕좌에 앉아 그녀를 맞이했다.



“브룬힐데로군.”

“폐하.”



브룬힐데는 토르를 가만히 응시했다. 토르의 눈은 더 이상 텅 비어 있지 않았고, 아스가르드의 하늘에 쌓였던 구름들은 때때로 사라져 해를 드러내게 되었다. 다만, 그것이 좋은 변화에서 야기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토르가 주먹을 펴며 손을 슬쩍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브룬힐데를 바라보는 그 얼굴에도 미소가 걸려 있다.



“마침 자네에게 전달할 사항이 있었지. 지하실을 정비해야겠네.”

“지하실이요?”

“그래. 백성들을 발할라에 보내기 전 잠시 두어야 하니.”



토르는 자신이 함선이 폭파되었던 지점에 다녀왔음을 알렸다. 내가 어리석고 미숙해 그들을 고통 속에 방치했지. 이제 남은 이들도 슬픔을 이겨냈으니, 그들을 발할라로 보내주어야 하지 않겠나.


브룬힐데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왕의 말은 정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발목을 붙잡던 슬픔은 말라 떨어지고 없다. 토르의 뜻을 전하면 백성들은 수긍할 것이다. 기꺼이 눈을 감고 발할라에 들, 들었을 이들을 위한 기도문을 읊을 것이다.


하지만, 토르가 에이트리에게 준비하라고 이른 것은…….



“지하실은 그렇다 쳐도, 우주의 심연만큼이나 추운 공간을 만들어 달라 부탁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녀가 운을 뗐다.


토르가 턱을 괸다. 새파란 왼눈이 유달리 시리고 차가워 보인다.


“아, 그랬지.”


브룬힐데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도 폐하의 옆방으로요.”

“그랬지.”

“에이트리가 말하길, 그런 방을 만들었다가는 궁 전체가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하더군요.”

“그러던가?”

“……요툰헤임의 얼음 궁전이라도 만들고 싶으십니까?”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군.”

“폐하.”



토르가 빙긋 웃었다. 눈도 휘어진다. 하지만 그의 눈매는 서릿발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푸른 밤처럼 밝으나 어두운 눈빛이 또렷하다. 브룬힐데는 왕의 뜻이 꺾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단번에 읽어냈다.



“걱정 말게. 백성들에게는 해가 되지 않을 테니. 궁이… 조금 추워질 뿐이지.”

“…….”



브룬힐데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지금이 금기시 되었던 그 이름을 다시 꺼낼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토르가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는 대충 예상이 가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그녀가 각오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왕제, 아니 로키조차-”

“그만.”



토르가 단칼에 말을 잘랐다. 브룬힐데가 흠칫했다. 정색하거나 화를 내거나 굳은 얼굴로 저를 노려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왕은 미소를 지워내지 않은 채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더니 덤덤히 말을 잇는다.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 주겠나? 브룬힐데, 자네에게는 늘 고마워하고 있다네. 허나 이건 자네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야.”



토르의 목소리는 몹시도 잔잔했다. 격분하거나, 불쾌해하거나, 슬픔으로 떨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미드가르드에서 들은 그의 음성 중 가장 안정되어 있었다. 브룬힐데는 차마 말을 다시 꺼내지 못했다. 토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브룬힐데와 눈을 마주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다.



“걱정 말게. 다 잘 될 거야.”



밖은 분명 여름인데, 초목이 우거지고 있는데, 토르에게서는 늦가을과 초겨울의 쓸쓸한 냄새가 났다. 외롭고, 슬프고, 추운, 그런 냄새. 브룬힐데는 저를 스쳐지나가는 토르에게 겨우 한 문장만을 던질 수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토르는 돌아보지 않고 나아간다. 손을 뻗어 스톰 브레이커를 부르고, 자연스럽게 쥔다. 그의 발소리가 정적을 찢으며 울려퍼지고,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작게 떨어진다. 그런 뒤에야 답이 돌아왔다.



“이제 와 조금 미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나?”



등 뒤에서 바이프로스트가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브룬힐데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입 안을 씹었다가, 빌어먹을 오딘슨 일가를 욕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왕의 명을 따르러 움직였다. 지하실을 정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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