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가 자꾸 불안한 눈빛을 보이자, 민은 그런 토마가 걱정스러웠는지, 토마에게 부실 쪽을 가리키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다.

“봐봐! 저렇게 다들 그냥 앉아서 책도 보고, 혼자서도 보고, 여럿이서 이야기도 하고 하잖아?”

“응... 그러네.”

토마는 다른 모여앉은 부원들에게는 눈길이 거의 가지 않고, 창가에 앉은 부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나도 그냥 저렇게 하면 되겠어.”

토마가 그렇게 말하자, 민도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생각이야. 처음부터 누구하고 이야기를 한다든가 할 필요는 없지. 그냥 혼자서도 즐길 수 있으니까 네게는 좋겠네.”

그렇게, 토마는 창가의 적당한 빈자리를 하나 잡고 앉는다. 뒤의 책장에서는 <라리의 모험> 한 권을 꺼내 들고서, 책을 펴고 앉는다.

“흠... 조금씩 커지고 있네.”

하지만, 토마가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건 따로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 하늘에 뜬, 조금씩 커지고 있는 구름 몇 조각이다. 아직은 조각구름이지만, 어느 정도 커진다면 토마가 원하는 대로 비를 뿌린다든가 번개를 친다든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커지려면, 토마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냥 또 놔두면, 아까처럼 바람에 구름은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니, 토마는 때때로 만화를 보면서도, 하늘을 자꾸만 올려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도 모르게 주위에 희미하게 생겨나는 수증기는 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토마는 그렇게 시간만 흘러가 준다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고, 이대로 시간만 지나가면 될 것이다... 누군가가 토마의 옆으로 일부러 다가오기 전에는.

“응? 여기 있었네?”

아까 전에 토마를 보고 말을 걸려다가 그냥 지나갔던, 줄리안이다. 줄리안은 아무래도 토마를 그냥 놔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토마는 그냥 여기서 도망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줄리안이 토마의 자리 옆을 막아 버렸을뿐더러, 거기서 억지로 비집고 나가려고 한다면 더욱더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시선을 피하네, 또...”

물론, 줄리안은 별 악의 없이 하는 말이지만, 토마는 그런 줄리안에게 경계심을 품는다. 순간적으로나마 토마의 눈에서 불을 뿜는 것같이 되었지만, 줄리안은 눈치채지 못하고, 토마에게 계속 친근하게 말을 걸려고 한다.

“뭐... 어쨌든, 내가 그냥 봤는데 혼자만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봤는데...”

줄리안은 나름대로는 토마를 위해 뭐라도 하려는 건지, 이리저리 토마를 훑어보고, 토마가 들고 있는 만화책도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오, 그래. <라리의 모험> 좋아하네? 혹시 최신 회차까지 본 거야?”

“네... 그렇죠...”

토마는 그렇게 마치 얼버무리듯 말한다. 의도는 분명하다. 줄리안에게 더 뭔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 귀찮으니까 얼른 가 버리라는 것. 하지만 줄리안은 그런 토마의 생각을 읽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읽지 않으려는 건지, 그렇게 쉽게 토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한편, 토마와 줄리안이 앉은 자리 근처에 있는, 몇몇 부원들이 둘러앉은 자리. 민은 만화책을 넘기면서도, 때때로 토마 쪽을 돌아보고 있다. 줄리안이 좀 많이 신경 쓰이는지, 민은 줄리안을 걱정스럽게 돌아본다.

“줄리안 형은 왜 또 저러는 거지...”

“응, 줄리안은 왜?”

옆에서 책을 보던 나디아가 민을 돌아보며 말한다.

“줄리안 원래 처음 만나는 사람들한테 저렇게 말 붙이고 하는 거 좋아하잖아.”

“어... 그런가?”

민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나디아도 생각난다. 작년 12월에 코믹 페스타를 했을 때, 나디아와 아이란, 줄리안이 한 조가 되어 캐릭터 굿즈를 판매하는 부스에 있을 때였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 없이 셋이서 부스를 잘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줄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나디아가 줄리안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이란이 찾았다고 했다. 아이란이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수께끼는 오래지 않아 풀렸다. 줄리안은 처음 보는 손님들과 마치 몇 번 만난 친구처럼 말을 섞고 있었다. 그날은 부원들의 좋지 않은 시선을 한몸에 받기는 했지만, 몇 번 더 비슷한 일이 있자, 만화부원들은 이제 줄리안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 아마?”

민도 나디아의 이야기를 듣더니 생각이 났는지 나디아를 돌아보며 말한다.

“줄리안 형, 그 이후로 하도 그러다 보니까 다들 그러려니 하게 됐지.”

“뭐, 이번에도 그냥 놔둬도 되려나...”

나디아는 곧 줄리안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민과 나디아 모두 만화에 다시 열중하고, 3분 정도 시간이 지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연다.

“야, 그런데 이번에 <고투헬 보이즈> 왜 결방했는지 알아?”

“글쎄...”

입을 연 두 사람은 세이지와 루리. 애니메이션 <고투헬 보이즈>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그거, 성우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그러더만.”

“야, 너는 SNS에서 나오는 소문을 그대로 믿냐?”

“아니, 내가 무슨 소문을 그대로 전파한다고 그래?”

그렇게 세이지와 루리는 서로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서로 싸우지 않던 두 사람이라 그런지, 부실 안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네가 그랬잖아. 그리고 그거 저기 SNS에서만 도는 말이던데.”

“네가 어떻게 알아! 그 성우들은 전에도 사이가 나빴다고!”

“이야, 루리 선배, 의외네요.”

막 말다툼으로 번지려고 하는 세이지와 루리의 옆에서, 아이란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한다.

“비록 설이라고는 해도 케미 좋은 두 캐릭터의 성우가 불화라니, 꽤 쓸 만한 소재 고마워요, 선배님.”

“야, 넌 왜 또 그런 식으로 해석하냐?”

한참 루리와 말다툼을 하려던 세이지는 아이란의 그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을 내뱉는다.

“참... 뭐라고 할까, 너답다.”

그리고 그런 아이란을 또다시 불쾌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나디아가, 아이란의 눈에 들어온다. 아이란은 이제 그 노트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계속 뭐라고 필기를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디아를 지그시 노려본다. 자신의 능력을 다시 써 보고 싶지만, 나디아는 원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초능력을 사용하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그냥, 그거 좀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줘야겠어.”

나디아가 막 그렇게 말하며 아이란을 향해 무언가를 하려는데...

“어...?”

한순간, 나디아의 오른손이 마비되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다.

“뭐야, 내 손이 왜 안 움직이는 거지...”

분명히 나디아는 아이란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아이란의 오른손의 감각을 막 봉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란은 노트에 글을 잘만 쓰고 있다. 분명히 아이란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아이란의 오른손의 감각을 봉인해 두려고 한 참인데...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대상은 잘 지정했을 텐데...”

하지만 나디아가 미처 알지 못한 게 있다. 나디아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나디아를 바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시작한 거냐, 나디아.”

지켜보고 있던 윤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윤진은 혼자서 홀로그램으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던 참이다. 윤진의 시선은 걱정 반, 그리고 한심스러움이 반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한 의미심장한 말까지 더해서 말이다.

“좀 가만히 놔두면 안 되었던 거냐...”


한편, 민은 다시 토마 쪽을 본다. 토마는 줄리안의 질문공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서리고 있고, 줄리안은 그런 토마가 나름은 더욱 걱정스러웠던 건지 토마를 좀처럼 놔 주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줄리안의 태도는 적대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토마가 보이는 반응 때문에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괜찮은 건가... 괜찮지는 않아 보이는데...”


그리고 시간은 지나, 오후 5시 정도. 만화부 활동이 모두 끝나고, 이제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민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주위를 한번 돌아본다. 토마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민보다 먼저 가 버린 것 같다.

“에이, 역시 토마답다고나 한 걸까... 왜 먼저 간 거지... 가는 길에 이야기나 좀 하면서 가려고 했더니만.”

한편, 줄리안 역시 다른 부원들의 틈에 끼어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럼 내일 봐!”

“잘가!”

줄리안을 보고 친구들이 인사하자, 줄리안 역시 손을 흔들어 답한다. 이제, 줄리안의 발걸음은 한결 더 가벼워졌다. 하루의 모든 일이 끝났으니, 집에 가서 푹 쉬는 일만 남았다. 마침 날씨도 좋고, 바람도 살랑살랑 분다. 더할 나위 없다. 줄리안에게는 그야말로 최고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서 줄리안이 발걸음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 어?”

줄리안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공기도, 산뜻한 공기가 아닌, 꿉꿉하고 무거운 숨이 쉬어지는 공기다.

“뭐야... 오늘 비가 온다고 했었나?”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빗줄기는, 유독 줄리안을 향해서 쏟아지고 있다. 마치 그 빗줄기에 의지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비가 이런 식으로 오기도 하나?”

줄리안이 가만히 보니, 주위의 화단이나 주택가에는 비가 안 오는데, 유독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게, 한눈에 봐도 훤히 보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비를 맞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던 줄리안에게,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그래... 맞아! 얼마 전에 알게 된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얻게 된 초능력. 줄리안에게도 있었다. 하루는 집에서 음료수를 따라서 마시려는데, 컵에 담긴 음료수가 마치 젤리처럼 변한 게 아니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초능력을 발동했던 것인데, 그때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한 5분 동안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있고 난 뒤에야, 줄리안은 며칠 전에 공원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목덜미가 따끔했던 사실을 기억해 냈고, 그때를 전후해서 자신이 초능력을 얻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며칠 전 그때처럼, 자신에게 내려오는 빗줄기를 젤리처럼 만들어 버린다.

“오,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자신에게 내려오는 빗줄기가 마치 젤리처럼 되어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줄리안은,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여전히 빗줄기는 줄리안을 향해 내리지만, 그것들은 줄리안을 젖게 하지는 못한 채, 땅바닥으로 떨어질 뿐이다.

글 쓰고, 가끔 그림도 그립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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