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구질한 구애인  04








“경수야..... 자?”


백현은 문을 슬쩍 노크를 해보았으나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나 방 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보아선 벌써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 샤워도 안 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자타공인 결벽증에 가까운 깔끔이가 씻지도 않고 잠을 자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현은 그래도 혹시나 깜빡 잠들어버렸나 싶어, 되도록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환한 조명 아래,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 있는 경수. 제가 들어와도 미동조차 없는 거 보니, 정말 잠들어버린 듯 했다. 오늘 많이 피곤했나 보네, 우리 경수.....


“경수야.... 씻고 자야지.”

“으응.....”


그때, 마치 백현이 말에 대답하듯 경수가 칭얼대는 소리를 내며 백현이 서있는 방향으로 돌아 누웠다.


“......”


중력에 의해 경수의 머리카락이 침대 시트 방향으로 쏠리며 감은 눈이 살짝 가리여졌다. 그걸 바라보다 백현은 천천히 바닥에 엉덩이를 내렸다. 눈앞에 아기처럼 곤히 잠든 경수의 얼굴이 있었다. 한때는 매일 눈에 담을 수 있었던 얼굴이었다. 제 품에 안겨선, 언제든 키스 할 수 있는 거리에 예쁜 얼굴로 잠들어 있던 경수. 백현은 머뭇머뭇 조심히 손을 뻗어 경수의 앞머리를 살짝 거둬냈다. 그제서야 가지런히 펼쳐진 긴 속눈썹이 제대로 보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붉은 입술 사이로 쌔액쌔액- 귀여운 숨소리가 났다. 평소 말 할 때는 꽤나 낮은 목소리를 내는 경수지만, 간혹 저도 깜짝 놀랄 정도로 톤이 높은 음성을 내뱉을 때가 있었다. 예로 들면, 깊은 잠에 취해 한 번씩 웅얼거리는 잠꼬대라든지.... 유독 피곤한 날에 내는 특유의 숨소리라든지.... 그리고 내 밑에서- 주어지는 자극을 감당하지 못해 터트리는 울음 섞인 신음이라든지.... 백현은 하얀 나신의 경수가 제게 안겨 몸을 떨며 울먹이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다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백현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타들어갈 듯이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하아, 미친.... 변태냐? 자고 있는 애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백현은 자신을 나무라며 제 얼굴을 연거푸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후우...... 참 자알-도 자네, 우리 경수.....”


백현은 제가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경수가 사랑스럽기도 하면서도 조금은 야속했다. 요즘 들어 제게 차갑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눈 탓에 사실 백현은 속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사실 어제 기념일을 빌미로 작년처럼 조촐하게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었는데.... 급하게 잡힌 회식에 막내라 빠질 수도 없어 끌려갔더니, 폭탄주 세잔을 연거푸 들이켜야 했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기억이 드문드문 했다. 이젠 기념일이 기념일이 아니게 됐으니, 대놓고 챙길 수는 없어도, 그래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언가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아오게까지 하다니.... 미안했지만, 그걸 빌미로 맥주 한 캔씩 하며 간만에 얘기라도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귀가가 늦었고, 묘하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경수의 태도에 그것조차 못하게 되어, 오늘도 글렀겠거니 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다니... 심지어 헤어지고 나선 쉽게 볼 수 없었던 잠든 얼굴이었다. 솔직히 럭키라고 생각했다. 노린 것은 아니었으나 이 타이밍에 들어온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자주 찾아오는 기회도 아니고 이참에 마음껏 눈에 담아두자 싶었다. 백현은 경수 앞으로 몸을 더 바짝 붙여 앉았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침대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백현은 경수의 얼굴을 더욱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요 며칠 새 많이 고단했는지 얼굴이 좀 푸석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백현은 습관적으로 볼을 쓸어주려 손을 뻗었다가 아차 싶어, 금세 다시 거두었다. 경수는 몸의 피로도가 곧장 피부로 드러나는 타입이라, 백현은 매일 경수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으로 경수의 몸 상태를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이젠 만질 수 없으니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요즘은 제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그 조차도 어려워져버렸다.


“경수야.... 많이 힘들어....?”


내가 옆에 있어서.... 매일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나를 마주해야 해서.... 많이 힘들지? 


“......”


백현의 말에 경수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댔다. 백현의 말을 알아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백현의 목소리에 습관적으로 반응한 것 같았다. 물론 백현은 그걸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돼.... 지금은 안 돼......”


이기적이라 욕해도 좋아. 찌질하고 추잡한 욕심이라고 나를 비난해도 좋아.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당장의 나는, 너를 못 놔.... 놓아줄 수 없어.....


“미안해... 경수야.....”


백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경수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코가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지고 나서야 다가가는 속도를 살짝 늦췄다. 백현은 경수의 입술 앞에서 머뭇거리다 방향을 위로 틀었다. 결국은 경수의 결 좋은 앞머리 위로 제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말이야.....”


오직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 순간순간을 선택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이게 정답인지... 솔직히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괴롭다..... 힘들다, 경수야..... 





그때는 어렸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여러 면으로 미성숙했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이 버거웠고, 힘들었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자신이 쓸모없는 무능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백현아. 나... 나, 합격했대! 다음 주부터 출근하래!’

‘정말? 잘됐다...! 정말 잘됐다. 축하해, 경수야.’



‘백현아. 미안한데, 내 책상 위에 있는 USB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아... 나 지금 알바가야 하는,’

‘진짜 급해서 그래. 제발...! 응? 안 될까?’

‘...아니야. 괜찮아. 지금 가지고 갈게.’

‘고마워! 나 지금 회의 들어가 봐야 되니까, 오면 연락해!’

‘응. 아, 경수야. 근데 너네 회사 주소가,’

-뚜뚜뚜...

‘......’



‘하, 진짜 짜증나. 내가 동네북도 아니고. 맨날 나만 가지고 뭐라 그래.’

‘......’

‘아- 내일 출근하기 싫다....’

‘...싫어도 어쩌겠어. 돈 벌려면 견뎌내야지.’

‘누가 몰라서 그래? 아는데- 그래도 짜증나니까, 이렇게 푸념이라도 해보는 거지....’

‘...힘내. 조금만 견디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겠지? 하아... 빨리 수습기간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게.....’



‘경수야. 어디야?’

‘아, 미안. 나 지금 회식중이야.’

‘...미리 얘기해주지. 기다렸잖아.’

‘미안해. 갑자기 붙잡혀서 말 못했어....’

‘...알았어.’

‘백현아, 진짜 미ㅇ,’

-뚜뚜뚜...



‘우리 다음 달에 여행갈까?’

‘여행...?’

‘응. 너 알바 쉬는 날에 기분 전환할 겸, 가까운 데라도 다녀오자.’

‘경수야... 내가 지금 그럴 형편이야? 돈도 없는데, 어떻게 여행을 가.’

‘...아니- 돈이야 내가 내면 되지... 너 취업하면 더 바빠질 텐데, 그전에 미리 간다 생각하고,’

‘내가 거지야? 네가 왜 돈을 내?’

‘거지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번엔 내가 내고, 다음에 너 취업하면 그때 네가 내면 되는 거지.’

‘야, 도경수... 네 일 아니라고 참 속편한 소리 한다.’

‘뭐...?’

‘내가 언제 취업할 줄 알고? 올해 못 하면? 내년엔? 내후년에도 못 하면?’

‘백현아.....’

‘후우.... 됐어. 싸우기 싫으니까, 이런 얘기 그만하자.’

‘미, 미안해, 백현아. 내가 실수했어.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화내지마.... 응?’

‘......’



‘백현아. 우리 내일 있잖아... 성호랑 같이 오랜만에 술 한 잔 할까...?’

‘바빠. 나 알바 더 늘렸어.’

‘...알바를 늘리다니...? 언제부터? 왜 말 안 했어?’

‘말 할 시간이 있었어야지. 너 요즘 계속 야근에 회식한다고 늦게 들어왔잖아.’

‘...백현아.’

‘나 나가봐야 돼. 나중에 얘기하자.’

‘......’



‘백현아. 자....?’

‘......’

‘잘 자....’

‘......’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을 때였다. 참아내야 하는데 참을 수 없는 순간들이 계속해서 늘어갔다. 그중에서도 제일 참기 힘들었던 건, 경수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초라해지는 제 자신이었다. 완벽한 애인은 아니었지만.... 자랑스럽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남에게 보이기 부끄럽지 않은 애인이 되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경수를 마주할 때 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다보니 자꾸 거리를 두게 되고 피하게 되고... 급기야 경수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안 그래도 회사 때문에 힘든데, 거기다 나까지 더해서 경수가 더욱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나는 내 자신의 문제에 급급해 매몰차게 외면했다. 지쳤다. 그래. 정말 여러 의미로 지쳐버렸었다. 무언가를 해보고자 했던 의지도, 해내야 한다는 목표 의식도 흐릿해지는 나날이 이어지면서 나는 지쳐버렸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하는 경수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경수는 나보다 한참 앞선 위치에 서서 내게 빨리 오라고 손짓 하는데- 아직 출발점에도 못 선 나에겐.... 내밀어진 그 손을 붙잡을 용기도, 의지도... 면목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경수에게로 한 발 내딛는 것 대신,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그게 경수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내 불행이 경수에게까지 옮는 것이 싫었다.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나 때문에 우는 경수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 건데.... 그랬었는데..... 결국 나는 마지막 한 가닥 뻗어진 끈까진 놓지 못 했다. 그대로 같이 살자는 경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할 수 있었지만... 조금 무리하면 방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놓아주자고 다짐했으면서.... 그럼에도 나는, 아직 경수의 곁에 있고 싶었다. 연인이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친구로서 라면, 곁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정말 경수를 생각한다면 그러면 안 됐지만, 그때의 나는 사실 다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거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새끼였다. 나는 결국 또 경수가 아닌 나를 택한 것이다. 그 집에 남으면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절대 경수에 대한 마음이 식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힘들었다. 하지만 억눌러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고. 경수도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그렇게 내 자신을 세뇌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의 나를 납득시킬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금세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 결과로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이젠 취업도 했고 경제적으로도, 사회적 위치로도 한 발 나아갔을지는 몰라도, 내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나는 경수를 완전히 놓아주지도, 그렇다고 붙잡지도 못하고 있다. 대체 나는 경수를.... 우리를 어쩌고 싶은 걸까.....






-도경수. 술 먹자!

“뭐야? 갑자기?”

-원래 술은 갑자기 먹어야 맛있는 거야.

“뭐래- 이 알콜 중독자가..... 언제?”

-이번 주 토요일.

“잠시만. 스케줄 좀 보고.”

-응.

......

“그래, 먹자. 어디서?”

-너네는 둘이고 난 하나니까 편하게 너네 집 근처에서 보자.

“둘? 왜 둘이야?”

-백현이도 불렀으니까.

“...됐어. 나 안 가. 둘이 마셔.”

-웃기시네? 그래놓고 결국 올 거면서 튕기기는.

“......”

-내가 친히 가주는 거니까, 메뉴는 내가 정한다? 장소 정해서 알려줄게.

“...알았어.”


경수는 끊긴 전화를 한 동안 쳐다보다 데스크 위로 이마를 박았다. 백현이랑 술이라.... 그러고 보니, 셋이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래도 성호가 있으니까- 어색하진 않겠지...? 경수는 핸드폰을 허벅지 위에 얹었다, 손바닥에 쥐었다를 반복했다. 헉, 잠시만. 토요일? 토요일이면.... 백현이 소개팅 하는 날 아냐? 경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 맞다. 주말이라고 했었지...? 주말 언제일까. 토요일일까, 일요일일까? 백현이는 뭐라 답 했으려나.... 아니 그전에, 진짜 소개팅 보는 거 맞나....? 금시초문인 반응이었는데.... 성호한테 슬쩍 떠보라고 해볼까...? 부탁하면, 그 자식 분명 나보고 또 미련이 남았네, 어쩌네. 하면서 깐족댈 게 뻔한데. 그치만, 그래도 신경 쓰이니까.....


“경수씨.”

“네? 네! 과장님.”

“손님 왔는데, 3번 미팅룸으로 커피 두 잔만 부탁해요.”

“아, 네! 알겠습니다.”


경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 신입사원이 한 명 들어왔지만, 아직 수습이다 보니 적어도 앞으로 2-3개월 동안은 계속해서 경수가 차를 내가야할 터였다. 사실 경수는 이런 잡일을 하는 것에 별 불만이 없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오히려 잠깐의 릴렉스 타임이랄까. 잠시라도 모니터에서 멀어질 수 있어 나름 기분전환이 되었다. 익숙하게 탕비실에서 커피 두 잔을 타낸 경수는 트레이 위에 잔을 올리고 미팅룸으로 향했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김과장과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경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찻잔을 각자의 앞에 놓아두고 뒤돌아섰다. 그 때-


“어? 경수씨?”


갑자기 불린 자신의 이름에 경수는 반사적으로 저를 부른 사람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어....?!”


눈앞의 얼굴을 인지한 순간 경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제...제희....씨?”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그가 경수를 보며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

사이다 한 잔 드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고구마였을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gongs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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