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점점 가빠졌다. 속도를 점점 내면 낼수록 터져 나오는 호흡이 거칠어 졌다. 어스름이 해가 뜰 때 즈음 진태가 매일같이 하는 루틴이었다. 운동장 20~30바퀴. 컨디션에 따라 조금 더 돌 때도 있었고 조금 덜 돌 때도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두 바퀴를 더 돌기로 했다. 운동장 뛰기를 마치고 야구부 라커룸 옆에 있는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교복으로 갈아입으면 얼추 등교 시간과 비슷했다. 가장 먼저 등교하는 진태는 야구부원 중에서도 악바리로 통했다. 코치나 감독이 하는 이야기가 너도 진태만큼 연습이나 하고 투덜거리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진태는 다른 선수들에게 욕도 많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꾸준히 그 속에서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진태가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연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습으로 어느 정도 경지까진 올라갈 수 있었지만 진태에겐 반짝이고 빛나는 재능이 없었다. 그 빌어먹을 재능. 누구에겐 넘치고 누구에겐 어중간하게 주어진 그것 말이다. 좋아하는 만큼 잘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기라도 탄탄하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매달릴 곳이 명확했으니. 그러지 않아도 삽질을 하는 진태의 자격지심에 불꽃을 틔운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고교야구 대회에서 부산에 있던 한 팀과 준준결승을 치르고 나면서였다. 정말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날카로운 눈빛. 탄탄히 다져진 기본기. 그리고 천재적인 감각. 상대 팀이었지만 진태는 이미 어느 경지를 넘어선 듯한 그의 모습에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운드에 서서도 떨리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반짝거리는 재능은 진태에겐 영원히 닿지 못할 별이었겠지만 그걸 보면서 아름다워할 순 있으니까.

 

 

진태는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경하던 사람이 바로 제 앞에 있다니!


“최동원. 알지? 지난번에 우리 준준결승에서 물 먹였던 놈. 이 자식들 표정 펴라.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거니까 따돌리고 이러고 하면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인사하고. 연습하자.”

“내는 최동원이다. 잘 부탁... 하.. 느그들 맘대로 하그라.”


부산에 있어야 할 동원이 왜 자신의 학교에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태는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동원은 그대로 학생들 틈으로 들어오더니 진태의 옆쪽에 자리했다. 진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크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니, 좀 하던데. 내 때문에 선발 싸움 해야 되가 미안타.”

“어?”


진태가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눈이 진태를 보고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도 엄청나게 잘 하던데 뭐. 잘하는 사람이 선발 되는 거지. 뭐, 어때.”

“그래도. 내가 굴러와가 박힌 돌 뽑았뿟다 아이가.”

“괜찮아. 자.. 잘 부탁해.”

“그래. 내도. 잘 부탁한데이”

 

진태가 내민 손을 잡아 오는 동원의 손끝이 온통 굳은살이었다. 저 역시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단단하고 남자다운 손끝에 동경하는 마음이 훌쩍 더 자라 버렸다.


 

아이들의 열등감은 오롯이 행동으로 결과를 보여줬다. 동원은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팀워크가 맞지 않는 건 둘째치고 유치하게 괴롭힘이 없는 대신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동원은 말도 많지 않았지만 정말 연습만 하고 돌아가는 게 태반이었다. 동원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진태가 유일했다.


 

“야, 최진태. 너는 자존심도 안 상하냐? 오자마자 바로 투수 자리 뺏겼는데 벨도 없어요. 정말.”

“실력이 있어야 자존심도 부리는 거야. 너희는 동원이 만큼 못하잖아. 잘하는 사람이 마운드에 올라가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야, 이 새끼 너 누구 편이야?”

“유치하다. 그런 거.”


한 마디를 덧붙였다가 그대로 싸움에 말려들었다. 이 새끼가! 하면서 진태의 턱으로 날아온 주먹 덕분에 진태는 휘청이며 바닥을 굴렀다. 자신의 이에 찍힌 볼 안쪽이 터졌는지 입안 가득 피 맛이 났다. 그리고는 쓰러진 진태의 몸 위로 발길질이 시작됐다. 어쩌다가 화풀이 대상이 진태가 되었는지. 몸 위로 떨어지는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작금의 사태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어린것들. 몸은 이미 성인만큼 커졌지만, 마음은 아이인 그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꼬!”

 

언제 라커룸 문이 열렸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발길질을 받는 사람이 진태라는걸 확인하자 동원은 아이들에게 몸을 날렸다.


“씨발 미친것들이! 아를 왜 패는데!”

 

진태가 그대로 맞아주길 선택했다면 동원은 아이들을 저지하며 그대로 갚아주길 선택한 것 같았다. 어설픈 린치에 비는 틈을 확인하고 그대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이리저리 타격음이 들렸다. 진태는 발길질에서 벗어난 사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두어 명이 까인 다리를 붙잡고 나뒹굴고 있었고 아이들의 얼굴은 열이 받아 붉게 달아올라 씩씩대며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때까진 숫자의 차이만 있었지 맨몸으로 싸우는 건 같았었는데 진태의 눈에 방망이를 휘두르려 하는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안 돼요!! 어깨와 등이 쪼개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한 번 더 휘두른 방망이가 진태의 옆구리에 박히면서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최진태!”

 

동원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진태에게 다가섰다. 이 씨발놈들이! 방망이를 쥔 선배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동원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만 방망이를 버리고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도주는 그 순간 나타난 감독님에 의해 저지됐고, 감독은 쓰러진 진태를 확인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가 이랬냐.”

 

다들 땅만 쳐다보고 선뜻 나서지 못했다.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다 슬그머니 손을 드는 사람을 보고 감독은 그대로 뺨을 내려쳤다. 아무리 성인만큼 큰 학생이라도 권력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대하는 폭력을 담대히 마주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들 교무실로 따라오란 말에 움직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동원이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감독님! 지금 아가 죽어가는데 교무실보다는 병원이 먼저다 아입니까? 아 죽일라 캅니까?”


동원의 말에 그러면 네가 먼저 병원에 데려가란다. 동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얼른 긴급통화를 눌러 119를 불렀다.

 

“병원으로 바로 갈 끼고 야 때문에 경찰도 올 낍니다.”


동원의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감독은 큰 한숨을 뱉으며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썰물같이 사람이 빠져나가자 찬 기운이 돌았다.

 

“니 개안나? 빙신 맹키로 그걸 와 니가 처 맞고 쓰러지는데?”

 

진태는 동원의 핀잔에 으으- 하는 소리밖에 하지 못했다. 동원은 진태와 함께 응급실로 간 후 경찰을 불러달라고 했고 교내 폭력으로 신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물었다. 다행히 진태는 군데군데 멍이 들고 타박상이 좀 심했고 뼈는 부러지지 않았는데 갈비뼈에 금이 갔다고. 그리고 손목 인대가 다친 상황이라 깁스가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2주 정도 입원을 권하고 그 이후엔 상태를 봐서 통원 치료를 할지 계속 입원할지 선택하면 된다고. 동원은 제가 진태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확인했다. 진태의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 그리고 감독님까지 모두 오고 나서야 상황이 조금 정리됐다. 다들 병실 밖에서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동원이 진태에게 다가왔다.

 

“그거 내 때문이제? 니 처음에 아들한테 뚜디리 맞고 있었던거. 미안타.”

“아냐. 걔들이 유치했어. 선배라는 사람들도 나잇값도 못하고.”

“아까 감독님 이야기하는 거 들으니까 아들 우르르 정학 무가 한 2주는 연습도 몬한다 카더라.”

“헐.”

“있잖아. 내 학교 마치고 여 좀 와있어도 되나?”

“어? 연습 안 하고?”

“내도 이참에 좀 쉴라고.”

 

멀뚱히 서서 이야기하는 동원에게 진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태의 부모님이 들어오자 동원은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누워있는 진태를 보면서 울상을 했다.

 

“엄마, 미안.”

 

진태의 사과에 어머니는 눈물 나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손등을 찰싹 내리쳤고 진태의 엄살에 금세 사과를 했다. 아버지는 집에 가 짐을 챙겨오겠다고 가시고, 선생님과 감독님은 우선 몸을 낫는 게 먼저라고 잘 쉬라고 하고 돌아갔다.

 


매일 오전 6시면 연습을 하기 위해 눈을 뜨던 게 버릇이 되어 눈이 떠졌다. 새벽이니 캄캄할 것이라는 진태의 예상과 다르게 병실은 훤하게 밝게 빛나고 있었고 때마침 아침밥이 들어오고 있었다. 압박 보호대를 한 진태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뜨자마자 테이블에 얹어지는 밥을 보니 허기가 밀려왔다. 약간 밍밍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맛이 있었다. 6인실을 쓰는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이 잘 먹어서 예쁘다며 과일이며 떡이며 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진태는 넙죽 웃으며 받아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으려다 오늘 학교 마치고 동원이 오기로 한 것이 생각이 났다. 친구 오기로 해서 친구 오면 같이 먹을게요. 진태의 한마디에 그럼 더 챙겨줄 테니 맛있게 먹으라며 테이블에 간식이 쌓여갔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니 잘생겨서 인사성도 바르다고 호들갑이었다. 헤헤 웃으며 칭찬을 즐기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 이후엔 지루한 시간뿐이었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티브이를 즐겨보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몸 움직이면서 야구만 하다가 꼼짝 않고 누워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학교에서 여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 몇 시쯤 올까. 이런 것만 생각했다.


 

동원은 정규 수업만 듣고 곧장 온 것 같았다. 안녕! 진태가 손을 들어 인사하자 동원이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가 놨다.

 

“심심 하제?”

“어.”

“이기나 봐라. 내가 좋아하는 기다.”

“어?”

 

동원은 가방 안에서 만화책을 몇 권 꺼냈다. 같이 볼래? 혼자 보면 심심하잖아. 진태의 물음에 동원은 만화책을 살짝 치더니 저는 몇 번이나 읽은 거라고 제가 가고 나서 읽으란다. 내일 또 뒷이야기를 가져다주겠다고. 진태는 시간 때울게 생겨 좋다고 웃었고 동원 역시 작게 웃음 지었다.

 

니 공부는 좀 하나? 동원의 물음에 진태의 입이 꾹 다물렸다. 완전 바닥은 아니지만 공부를 또 잘 한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리 해가 줘도 안 볼꺼제?”

“어... 만화책만 좀 보면 안 될까?”

 

동원은 알겠다고 크게 한숨을 쉬었고 진태는 조금 머쓱해졌다. 원래 이런 사적인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친하진 않았는데. 진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 치부가 모두 까발려진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거, 너 오면 먹으려고.”

“환자가 이런 거 막 먹어도 되나?”

“속이 아픈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진태는 오전에 선물 받은(?) 빵을 꺼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동원의 손에 빵을 쥐여주니 머뭇머뭇하다가 군말 없이 잘 먹었다. 진태도 크게 입을 벌려 빵을 한 입 물었다. 둘 다 양 볼을 빵빵하게 불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동원은 그날부터 한두 권씩 책을 바꿔줬고, 오다가 사 왔다며 진태에게 먹을 것을 내밀기도 했다. 같이 먹자고 반을 뚝 잘라 내밀었으나 동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왜? 아니.. 니가 좋아할 것 같아가. 내는 밸로 안 좋아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동원은 식단 관리를 하고 있었단다. 진태가 그걸 알게 된 건 퇴원을 하고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다 이상해 물어보니 그렇다고 말을 한 것이었다.

 


둘 사이에 그렇다 할 말이 별로 없으니 진태는 동원이 가져다준 만화책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나 감상이 비슷하면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지며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진태는 동원과 부쩍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동원은 진태가 퇴원할 때쯤 야구부원들의 소식도 알려주었다. 야구를 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야구를 그만둔 아이가 두 명이나 있었다. 연습은 하고 있지 않은데도 야구부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고. 그 장소에 있었던 아이들은 모두 정학 3일에 봉사 40시간을 채워야 한다고 했고, 동원 역시 동일한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뭐야? 너 첫날에 학교 마치고 왔었잖아!”

“그기는.. 집에서..”

“에이, 뭐야. 그런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오라고 할걸.”

 

진태는 매일 같이 동원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시간이 조금은 억울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학교 가?”

“당연하지. 내는 학교는 안 빼먹는데이. 걱정 마라.”

“알겠어.”

“니 퇴원 해도 운동 할 수 있나?”

“올해는 완전 망한 거지.”

“관둘 건 아니제?”

“할 수 있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이것뿐인데 어떻게 관두냐?”

“내도. 내도 그렇다.”

“다 낫고 나면 나 좀 잘 알려줘. 노하우 같은 거. 알지?”

“알았다.”

 

진태는 언제쯤 다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을까 생각에 빠지느라 동원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축하한데이.”

“축하는 무슨, 이제 내일부터 당장 학교부터 가야 하는데. 너 아직도 혼자 밥 먹어?”

“아이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없으면 같이 먹으려고 했지.”

 

진태의 말에 그러면 같이 먹던가. 하고 말을 흐렸다. 진태는 동원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친구들 다 데려와도 된다고 한마디를 해주었으나 동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태는 여전히 조심해야 했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은 할 수 있는 정도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학교에서 거의 동원과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붙어 다녔다고 해봤자 점심때 같이 밥 먹고, 수업 마치고 같이 연습하고. 그게 다였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는 어려워 가벼운 몸풀기 정도만 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운동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부러운 생각과 얼른 운동하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동원은 눈부신 재능만큼이나 연습량도 상당했다. 아니, 대체 병문안은 어떻게 왔던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투구 연습을 하는 동원을 낱낱이 관찰했다. 공을 쥐는 손이나 팔의 각도. 다리는 어느 정도로 드는지. 자신과 어떤 모습이 다른지. 옆에서 직접 보고 비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살피고 있다 보니 벌써 어둑어둑한 밤이 되었다. 동원이 진태에게 다가와 집에 가자 말하고 나서야 다른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연습을 하던 동원과 저 둘만 남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근데. 넌, 그 전엔 연습을 아예 안 했어?”

 

진태의 물음에 의아한 표정을 한다. 아니, 그러니까. 매일 같이 병원에 있다 갔잖아. 진태가 그리 묻는 이유를 말하고 나서야 동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맨날 새벽까지 했지. 뭐.”

“매일?”

“하믄. 연습은 빼먹으면 안 된다.”

“와, 너 진짜. 그럼 연습한다고 말을 했어야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같이 놀자고. 시간이나 뺏고. 어휴.”

“내 때문에 그런 거 아이가. 니 다친 거. 그리고..”

“그리고?”

“아이다. 가자.”

 

동원은 진태의 걸음에 맞춰 느릿하게 라커룸으로 향했다. 벌써 해가 다 지고 어둑어둑해지니 체온이 금방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 빨리 씻고 올게. 쪼매 기다리라.”

 

동원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진태는 아무도 없는 라커룸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사물함 앞에 섰다. 글로브며 공이며 정리가 안 된 상태로 마구잡이로 있어 정리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마이 기다맀째?”

 

춥지도 않은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가슴으로 툭툭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옷 가져다 달라고 하지.”

“그냥 입으면 된다 아이가.”

“어. 너 근데 운동 진짜 열심히 하나 보다.”

 

아직 덜 자란 몸이라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근육이 많이 생기지는 않는데 동원의 몸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근육이 잘 잡혀있었다. 진태는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가 동원의 팔을 만지작거리다 순간 제가 한 행동을 깨닫고 퍼뜩 손을 뗐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

“괘안타. 니도 몸 좋다 아이가.”

“근데, 뭐가 아냐?”

“어?”

 

진태의 물음이 제 사투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동원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옷이나 입어. 진태의 핀잔에 티셔츠를 꿰어 입는다. 머리에 떨어지는 물기를 탁탁 터니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었다. 진태는 제 앞에 서 있는 동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문득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진다. 경기에서 처음 본 이후 학교에서 만나고. 병원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이. 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동원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좋아해.”

 

진태는 말을 하고 제가 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러니까. 진태의 변명을 듣기도 전 진태의 몸이 휘청이며 뒤에 있는 로커에 부딪혔다. 멱살을 잡고 있는 동원의 눈이 번쩍였다. 눈이 마주치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날카롭고 매서운 눈이었다.

 

“미안해.”

“니, 감당할 수 있나? 니가 한 말 감당할 수 있냐, 이 말이다.”

 

동원의 말에 진태는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제 멱살을 쥔 흰 손이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손등 위로 핏줄이 다 서 있었다. 진태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 손에 힘이 풀리더니 구겨진 옷을 툭툭- 편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기 아이다. 니는 감당 몬한다.”

“... 내가 뭘?”

 

진태의 물음에 동원은 둘 사이 거리를 벌린다. 덜컥 겁이 난 진태는 동원의 팔을 붙잡았다. 놔라. 진태의 손을 뿌리친 동원이 안경을 쓰고 교복을 덧입기 시작했다. 가방까지 챙겨 든 동원은 진태에게 이만 가자고 했다. 진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야, 진태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몸을 돌려 라커룸을 나가던 동원이 돌아본다.


“내가 널 좋아하는데 뭘 감당해야 하는 건데?”


동원이 덮으려 했던 것을 기어이 벗겨내려 했다. 크게 한숨을 쉬는 동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후회하지 마래이. 내는 분명히 경고했데이.”

“내가 뭘 후회하는데?”

 

동원은 진태에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목덜미를 단단히 잡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볼에 닿는 차가운 안경테가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막연히 첫 키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던 진태는 키스가 이렇게 사람 몸을 달아오르게 하고 숨이 턱턱 막혀오는지는 알지 못했다.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던 진태의 손이 어색하게 동원의 등 뒤에 살그머니 내려앉았다. 조심스러운 손짓과 다르게 입맞춤은 과격했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을 땐 둘 다 평소보다 붉은 입술 색을 하고 있었다. 진태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너, 나 좋아해? 왜?”

 

진태의 물음에 동원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고마 가자. 배고프다 아이가. 회피를 하려는 것인지 진태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는 동원의 팔을 잡고 다시 되묻는다.

 

“너 진짜 나 좋아해?”

“관심 없는 사람한테 키스하는 미친놈도 있나? 니는 내가 왜 맨날 니 보러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해서?”

“하.. 고마 됐다. 이거는 없었던 일로 하자. 내 배고프다. 밥 물거면 따라오고 아니면 혼자 가라.”

 

진태는 동원의 뒤를 따라나섰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 걸어 꽤 거리가 벌어졌다 생각했는데 동원의 걸음이 점점 늦어지더니 제 옆에 섰다. 진태는 괜히 가슴이 벅차 저녁은 제가 쏘겠다고 하며 학교 앞 분식집으로 동원을 이끌었다.

 

떡볶이며 순대, 어묵, 김밥. 라면까지 주문하고 나니 식단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게 생각이 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됐다. 하루 먹는다고 안 죽는다. 밥이나 무라.”

 

동원의 말에 둘은 말도 없이 젓가락질만 했다. 바닥까지 싹싹 비우고 일어나 계산을 하고 나오니 벌써 시간이 꽤 늦었다. 평소처럼 걷다 보니 제 집이 보였다.

 

“드가라. 내일 보자.”

 

동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더니 제집 방향으로 가버렸다. 진태는 집으로 돌아와 오늘 하루 폭풍처럼 일어난 일을 곱씹기 시작했다. 제가 동원에게 품고 있었던 마음이 정말 동경이 아닌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었는지. 동원의 행동이 뜻하는 게 뭔지. 한 번도 남자와 키스를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거부감은커녕 좋았다는 것 또한 충격적이었다. 제가 게이였었던가? 하는 질문까지 이르렀다. 동원의 자리에 자신의 친구, 선배 후배 등등 떠오르는 얼굴을 넣어봤지만 인상만 찌푸려졌다.

 

학교에 가서 귀에 들어오지 않는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 동원의 반으로 가니 진태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급식실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다른 대화는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밥을 먹고 헤어지면서도.

 

“오늘은 내가 공 잡아줄까? 아무것도 안 하고 보기만 하니까 몸이 쑤셔서. 그냥 연습 삼아.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진태는 저 혼자 질문하고 저 혼자 이유를 댔다. 알았다. 한마디를 한 동원이 그대로 반으로 들어갔다. 그래. 그래도 긍정 대답이니까. 진태는 희망차게 생각하기로 했다.


 

동원이 공을 던질 때마다 글러브를 쥔 손 전체가 떨렸다. 그냥 캐치볼 정도만 하자고 해야 했나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진태는 동원의 공을 받는 순간이 너무 좋았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못한 탓인지 제 몸을 생각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봤을 때보다는 위력적이지 않게 생각되어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진태 저 때문이라면 그걸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였고, 컨디션이 안 좋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었으니까. 한참 공을 받던 진태가 몸을 일으키자 공을 쥔 팔도 아래로 툭 떨어졌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결국 진태가 다가와 글러브를 벗은 손으로 동원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 일 없다. 근데 오늘은 고마하자.”

“피곤해? 아무 일 없는 거 아니네.”

 

동원은 그대로 몸을 돌려 연습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감독님에게 오늘 상태가 좀 별로인가 봐요! 대신 답해주니 그만 들어가라고 손을 휘휘 젓는 게 보였다. 연습장에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해주고 따라 들어가니 그새 옷까지 다 갈아입은 것인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오늘은 먼저 가려나 보다. 섭섭한 마음에 동원을 살펴보고 있는데 가방을 들고 나가려던 동원이 툭- 한마디를 뱉는다.


“안 가나?”

“어, 가.”

 

진태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는 동원과 함께 교문을 나섰다. 오늘은 제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동원이 일전에 알려준 방향으로 향하는데 다급하게 진태의 손을 잡아 온다. 왜?


“거, 아이다.”

“응? 너희 집 00 아파트라며.”

“거, 아이다. 그냥 너거집 쪽으로 가자.”


진태는 왜 그러냐며 묻다가 기어이 길 한복판에 섰다. 오늘은 너의 상태도 나쁘니 꼭 데려다주겠다는 의지였다. 진태의 손을 잡아끌던 동원이 결국 한숨을 푹 쉬고 앞에 섰다. 가. 진태의 강경한 태도에 동원은 진태를 데리고 걷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으로 간 동원은 학생 두 명 몫의 교통카드를 찍고 빈자리에 앉았다. 진태의 집 방향도 아니고 동원이 말한 그 아파트 방향도 아니었다. 30분 가까이 버스를 타고서도 10분을 더 걸어 들어갔다. 진태의 집 방향과는 거의 반대 방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태는 동원이 내미는 음료수 하나를 받고 입을 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게 빌려주었던 만화책이 책상 한쪽 책장에 가득했고, 동원의 사진, 상장, 야구공, 글러브 같은 게 있는걸 보고 있자니 여기가 정말 동원의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뻥쳐가 미안타. 그때는 당황해가.”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나 보네.”

“집이 가까워야 같은 방향이라꼬 핑계라도 대지.”

 

이제껏 있었던 일을 조합해보니 자연스럽게 동원이 저를 좋아한다는 결론이 났다. 온도가 어떻게 다르던 둘 다 비슷한 마음이라는 게 기분이 좋았다.

 

“너 오늘 컨디션 안 좋으니까 쉬어. 내일 학교에서 보자.”

 

진태가 음료를 후루룩 마시고 일어나려 하자 동원이 팔을 잡아 왔다.

 

“이까이 왔는데. 밥 묵고 가라.”

 

동원의 말에 진태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 이후 둘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냈다. 집이 정 반대 방향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하교할 때엔 자연스럽게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동원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진태의 몸도 많이 나아져 이제는 정규 연습을 참여하고 개인 연습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기도 했다. 진태의 예상처럼 2학년은 그냥 쭉- 날리게 됐고, 내년 1년 조금 더 열심히 해볼 생각이었다. 폭력 사건으로 구설에 오르긴 했지만, 그 이후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야구에 조금 더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팀워크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대회에 나가기엔 모자라 학교별 연습경기 정도만 하는 수준이었지만 동원은 그중에서도 눈에 띌 만큼 실력이 늘어났다. 연습벌레인 진태가 보기에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거기다 몸을 회복한 진태가 매일 새벽같이 학교에 나와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원이 진태가 오는 시간에 맞춰 등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운동장을 뛰는 사람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진태는 힘들 테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했지만, 동원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마음도 커졌다. 그때의 실수(?) 이후로는 따로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거나 깊은 스킨십을 하진 않았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저와 동원이 같은 마음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던 진태가 이제는 마음에만 담아둘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커졌다는 것에 있었다. 매일 시간을 보내고 훈련을 하고. 하는 것으론 자신의 간질거리는 마음을 숨기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연습을 끝내고 평소처럼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지려는데 그날은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웠다. 인사를 하며 버스에 올라타는 동원의 뒤로 따라서 올라 옆자리에 섰다. 당황한 동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게. 대답했다. 버스에서 함께 내려 함께 걸어갔다.


“쪼매 더 걸을래?”

 

동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동네 산책로가 있다며 그쪽으로 가잔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걷고 있을 뿐인데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이 됐다. 진태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자리에 섰다.

 

“와? 여는 별로가?”

“야, 최동원. 너 아직 나 좋아해?”

 

툭 뱉어진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동원은 이유가 궁금해졌는지 왜 그러냐 되물었다. 진태는 주위를 살펴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허리를 살짝 굽혀 동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쿡 찍었다. 키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짧은 입맞춤이었다. 뭐꼬? 동원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너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너무 좋아. 너도 나 좋아하지? 그렇지?”

 

진태는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거의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동원은 덩치에 맞지 않게 덜덜 떨고 있는 진태를 얼른 끌어안고 토닥이기 시작했다.

 

“내도 니 좋아한다. 니도 알고 있다 아이가. 갑자기 와카노. 사람 놀라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둘은 지나가던 사람이 끌끌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진태가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바람에 그제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귀 끝까지 빨개진 진태를 보던 동원은 고마 가자. 하며 손을 내밀었다. 진태는 잠깐 고민하다 살그머니 그 손을 잡았다. 차게 식은 미지근한 손이었지만 이내 온기가 따스하게 돌았다. 충동적인 고백이라 언제 다시 제 마음을 끄집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 시간이 오래 지속하길 바랐다. 먼 미래 아름다웠던 추억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보일 수 있도록.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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