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면 창문 사이로 햇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하고 몸을 돌려 앉으면 지난 날 밤의 일이 떠오른다. 꿈이였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구석에서 코를 골고 있는 이치마츠를 보면 아, 꿈이 아니구나. 하고 실감이 난다. 하지만 꿈이 아니여도 좋다. 이치마츠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의 상냥함을 알게 되었다. 말을 걸어주면 어떻게든 대답을 돌려준다. 그 작은 사실로 기뻐지는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스로도 한심하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어제 남은 음식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 식사는 이게 전부일까. 이치마츠가 깨어나면 같이 먹는 것이 좋겠다. 곤히 자는 이치마츠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더 자게 두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일어날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뭐야. 자는 사람을 빤히 보기나 하고."

"잘 잤나. 이치마츠."

".....잘 잤겠냐. 살인마가 저택을 돌아다니는 통에."

"그건 그렇군."


다름 아니고, 아침 먹지 않겠나. 엊저녁 남은 거지만. 하고 쟁반을 들어보이면 이치마츠는 쳇, 하고 혀를 차더니 몸을 일으켜 세워 앉는다. "줘." 하고 손을 내미는 이치마츠와 남은 빵을 두쪽으로 나눠먹는다. 빵을 받아 우물우물 씹어삼키는 이치마츠의 모습에서 얼핏 어린 티가 나는 것 같았다.


"이치마츠는 몇 살인가?"

"쓸데없는 말은 안한다며. 어제 말한 것도 까먹는거냐. 썩을 기억력."

"......"

"아니, 갑자기 침묵하는건 뭔데?"


물었으면 대꾸라도 하라고! 짜증내던 이치마츠에게 그러면 나이를 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숨을 쉬며 22세라고 대답한다. 생각보다 이치마츠는 어렸군. 내가 저택을 들어올 때의 나이구나. 하고 웃으면 "뭐야. 넌 나이가 얼마나 많길래." 하고 툴툴거린다. 28세라고 대답을 돌려주면 "거짓말. 너 그렇게 노땅이였어?" 하고 웩, 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한다. "그렇게 안보이는데 말이야. 기껏해야 2~3살 차이 날거라고 생각했어."


"훗, 동안이라는 건가." 하고 척 웃음을 띄우면, 쓸데없이 젠 척 하지 말라고 딱밤을 얻어맞는다. 아프다, 하고 울상을 지으면 키득이더니 "못생겼네."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이치마츠. 너무하구나. 나도 알고 있는데. 


"그러고보니 22살에 저택을 들어왔다고?"

"햇수로 6년이 지나가는구나."


그러고보니 첫 해에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가 떠오른다. 돈은 나를 안을때마다 사랑한다고 매번 속삭였고, 그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가 그로부터 6년간 나가지 못할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때 도망쳤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돈은 곧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에게 폭력을 멋대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각인까지 새겨가며 처음과 다르게 굴었다. 처음에는 항의하던 나도 결국에는 체념하고 돈의 폭력과 험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무 대답도 반응도 돌려주지 않았지만 성관계는 계속됐다. 그에도 질렸을 때 돈은 여러 오메가들을 들여왔다. 나는 그대로 방치됐고, 이 구석진 방으로 옮겨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다.


이따금 돈은 내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아이도 갖지 못하는 나를 임신시키겠다고 콘돔도 없이 몇번이고 정액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불임인 내가 임신할 리는 없고 돈은 차츰 스스로 지쳐갔다. 그리고 다른 오메가 첩들에게로 관심을 두었다.


신데렐라의 기적에 가까운 행복 따위는 없다. 붙잡은 동앗줄은 내 목을 조여맬 뿐. 그럴 수록 망상에 매달려 행복을 상상하며 살아온 나의 6년간의 인생. 그리고 이제는 돈도 죽어버리고 저택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차올랐다.


아직도 살인마는 저택에 있다. 이치마츠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만. 이치마츠는 창창하고 젊으며 내가 쥘 수 없었던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청년이다. 조금 그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의 나이를 들으니 잊고 있었던 것이 되살아나버렸다.


나의 꿈, 희망, 즐거웠던 추억들. 그 시간들을 낭비하며 살아온 나의 버러지같은 지난 날들이.


결국 내가 변변찮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쓰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이치마츠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너 무슨 생각해?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불렀나. 미안하군. 잠시 예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경쓰지 말게, 서둘러 수습하고 먹던 빵을 마저 입으로 우겨넣은 후 억지로 꿀꺽 삼킨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이치마츠, 먹으면서 생각해봤는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뭐? 그렇지만 살인마가 있다고. 함부로 돌아다니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봐야 언젠가는 들킨다."


식량도 이걸로 끝이다. 굶어가며 버틴대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나갈 수 밖에 없다며, 이치마츠를 설득해. 그렇지만 아직도 이치마츠는 회의적인 것 같다.


"상대는 총을 가지고 있잖아. 너무 성급해."

"허투루 나가자는 뜻은 아니다. 여기 바로 아래가 어딘지 아는가?"

"아? ....주인의 방이지..."

"돈은 침실 밑에 항상 총을 숨겨둔다. 여기저기 손이 닿을 곳이라면. 그걸 찾으면 나름 전력이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비밀 통로도 있다."


그렇지만 그곳까지 어떻게 도달하느냐, 가 관건이지 않느냐는 이치마츠에게 창문을 가리키면 정확히 0.5초만에 미쳤냐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전에 돈의 눈을 피해 가지고 있던 로프가 있다."

"왜 그런걸 가지고 있어?"

"자살하기 위해서다."

"뭐어???? 자...자살이라고....?"

"이 생활에 지쳐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마지막으로 돈의 앞에서 보여주듯이 죽으면 좋겠다고 로프를 감춰두었다. 하지만, 돈은 내게 관심이 없으니 죽은들 그저 성가시게 여기며 치우라고 할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죽으려고 하는 것도 관두어서 방치되어 있었다."


내 죽음이 누구에게 영향을 끼칠거라고 생각하다니, 굉장히 오만한 생각이였지. 말하며 책상위로 올라서서 천장을 밀어내면 공간이 생겨나고 그 안에 로프가 끌려나온다. 이치마츠는 안도하는 기색을 띠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지 입맛을 다시고 있다.


"왜 그런가. 그런 사연이 깃들어 있어 찝찝하기라도 한가? 미안하군. 이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엄청 찝찝해. 네가 죽으려고 한 밧줄로 살 방법을 모색하다니. ....나는 여기서 일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친한 녀석도 없어 너와 주인이 어떤 관계인지는 솔직히 잘 몰라. ....하지만 왜 그렇게 된 거야?"


좋아서 같이 살게 된 게 아니였어? 라고 순진하게 물어오는 이치마츠. 그래,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였다. 나에게도 그와의 행복을 진지하게 믿었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오메가다. 하지만....아이를 낳지 못하는 오메가다."


돈은 권위적인 사람이고 또 아이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돈은 화를 냈다. 어째서 그걸 숨겼냐느니, 혹은 거짓말하지 말라느니 하고 욕설을 하고 매도하면서도 끝없이 내게 아이를 배게 하기 위해 범하고 또 범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결국 돈은 다른 오메가를 데려왔고 이 독박생활이 시작됐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돈의 성욕처리로 이용됐지. 이해되는가? 살아있는 오나홀, 식사는 꼬박꼬박 이어지지만 그 누구도 인간 취급은 하지 않는다. 지나갈때마다 구역질 나는 눈으로 쳐다본다. 점차 나는 밖에 나가지 않고 돈 또한 그걸 더 원하는듯했다. 바람대로, 계속 이 방 안에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로서 다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말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솔직히 말하면 지금 살인마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는 이 상황이 가장 자유롭다. 나는 마츠노 카라마츠이다. 웃으며 내가 이치마츠를 바라보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치마츠는 당혹스러운 얼굴이다. 한참동안 나를 보던 이치마츠가 다가오더니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다. 이런 썩을 마츠가. 갑작스러운 자극에 아려오는 머리를 쥐고 이치마츠를 보면, 어쩐지 슬퍼보이는 이치마츠가 서 있다.


".....너는 원래부터 너였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더라도 널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 널 바꾼 건 너야. 그러니까 나를 특별취급 하지마. 그렇게 이치마츠는 말하며 로프를 창틀에 걸쳐 묶는다.


"내려가자. 카라마츠."


이름, 불러줬어? 놀란 나를 뒤로 하고 단단하게 묶은 로프를 잡고 아래로 내려가는 이치마츠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는 노트를 챙겨들고 천에 조심스레 싸들고 이치마츠를 따라 로프를 타고 내려갔다.




.


끼익, 창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참혹했다. 상자에서 쏟아져나온 보석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돈의 모자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전화기로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저택의 통신선을 끊어놓았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미 살인마가 다녀갔는지 엉망진창이였다.


"총이 남아있을까. 다 털어갔는데?"


여기저기를 뒤지며 이치마츠가 푸념을 늘어놓는다. 잠시 기다려봐라. 침실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면 허공으로 휘뜬 눈동자와 마주친다.


"히ㅡ이.."


순간적으로 이치마츠가 내 입을 막고 조용히 해, 하며 속삭인다. 큰 소리를 내면 어쩌자는거야. 이치마츠는 나를 밀쳐낸 뒤에 한숨을 푹 쉬고 시체를 질질 끄집어낸다. 가늘고 하얀 팔. 여자의 손이 바닥에 끌려온다. 하던 중에 습격당했는지 전라이다. 이치마츠의 얼굴이 빨개지며 당혹으로 물들지만 이내 냉정해졌는지 침착하게 여자를 마룻바닥에 눕힌다.


"죽기전 침대로 숨어들었다가 총을 맞은 모양이야."


이치마츠의 표정만큼이나 내 안색도 좋지 않다. 하지만 연민에 빠져들 시간은 없다.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겨져 있는 서랍의 문을 열면 천으로 휩싸인 권총이 모습을 드러낸다. "찾았어?" "그렇다. 한 자루 있군." "총탄이 들어있는지 확인해봐." "아, 나 그런 건 잘 모르는데." 당혹스레 손안에 들린 총을 내려다보면 한숨을 쉬더니, 줘봐. 하고 이치마츠가 나오라는 신호를 낸다.


침대 밑에서 빠져나와 총을 이치마츠에게 건네면 이치마츠는 총을 분리해 떨어지는 총탄을 확인한다.


"....인가. ....이고, ....이네. 꽤 괜찮은걸 지니고 있는걸."

"마피아...니까 그렇겠지. 이치마츠, 총 쏠 수 있어?"

"그것도 모르면서 여기로 오자고 한거야?"

".....그렇...네. 확실히....나는 쏠 줄 모르고...."


혀를 차며 나를 매도하던 이치마츠가 한숨을 쉬더니 이내 쏠줄 안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할 줄 아니까 됐어. 정말 썩을마츠 정~말 쓸모없네."

"미안하다."


눈썹을 내리며 그렇게 말하면 이치마츠는 됐어, 애초에 너에게 기대한 적 없으니까. 라고 말하며 총구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박는다. 그리고는 더 뒤질 것이 없나 한참 침실을 들쑤신다. 아, 캐러맬 찾았다.


"뭔가 무기가 생기니 든든한 기분이다!"

"너무 들뜨지마. 총이 생겼다고 다가 아니니까."

"그래도 맨몸보다는 안심이 되지 않는가?"


지긋이 웃으며 이치마츠에게 달라붙으면 야, 떨어져. 하고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굳이 내치지는 않는다. 이치마츠는 상냥하구나. 팔에 닿는 체온이 기분좋아 끌어안으면 "남자끼리 징그럽게." 하고 이치마츠의 타박이 들려온다.


"그래서, 총도 찾았겠다. 비밀 통로라는 건 어디?"

"잠시 기다려봐라. 기억을 더듬고 있다."

"흐음...."


캐러멜을 우물거리며 이치마츠는 느긋하게 나를 기다려주고 있다. 나도 서둘러 입구를 찾고 있다. 어디였더라, 조급해진 탓인지 돈이 일러주었던 것이 기억이 않는다.


"....아직이야?"

"....어떤 암호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아."


아주 오래전에 돈이 나에게 사랑의 증표로 속삭였던 키워드. 그것을 떠올리려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다려주고 있는 이치마츠에게 미안해질수록 머릿속은 새하얘져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돈과 행복했었을 때, 그 때가 언제였더라. 행복했었던 시절이 까마득한 탓이다. 적어뒀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분명,


적어둬.... 적어둔다. 품안에 들고 있던 보따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는 정신없이 수첩의 페이지를 뒤진다.


예전에 써두었던 이야기, 돈과 나의 이야기를 다룬 허구의 소설. 그 안의 주역들은 행복했던 시절의 나와 돈을 참고로 했고, 서로를 부르는 호칭 또한 똑같이 맞췄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모레...."


그렇게 중얼거리자 굉음이 들리더니 침대가 갑자기 움직여 그 위에서 캐러맬을 먹던 이치마츠가 목이 막혀 켁켁댔다. 침대가 물러나며 벽쪽으로 이어진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생겨났다.


"뭐야....이건."

"이 저택은 돈과 내가 설계했다. 내가 비밀통로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돈도 재미있어보인다며 동의했지. 이 출구는 나와 돈의 음성을 인식해 열린다. 열려라 참깨, 라고 외치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아는가? 그걸 참고한 거다!"

"켁, 유치해. 그래서, 여기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그런 셈이지. 돈은 목숨을 자주 노려지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공을 들여 철저하게 신변을 보호했다."

"정말 돈 있는 녀석들은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멍청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하네. 뭐 됐나. 일단 가볼까."


네가 열었으니 먼저 가, 난 여기 좀 수습하고 갈게. 하고 이치마츠가 등을 떠민다. 잠깐...이치마츠. 여기는 높이가 낮아서 머리를 부딪힌다. 너무 떠밀지 말라고 바둥대다 이내 등을 숙이고 내려간다. 뒤에서 철컥, 금속음이 들려온듯도 한다. 이치마츠는 제대로 내려오고 있을까. 시야가 캄캄해 촉각과 청각에 의존하면서 내려갈 수 밖에 없다. 한참을 내려가다 이내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면...


사방이 넓어지며 지하실로 이어진다.


"....아, 도착했다! 이치마츠! 나갈 수 있어! 들리는가?"


기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며 아직도 내려오고 있을 이치마츠에게 전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면....


머리 위로 음영이 지더니 익숙한 바리톤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굳어진다.


갓티나.


위를 올려다보기가 겁이 난다. 하지만 봐야 해. 호흡이 턱턱 막히는듯한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위를 올려다 보면....



"돈....?"


"살아 있었을 줄이야. 여길 또 찾아온 건 두번째로 놀랍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인간의 출연에 당황하고 있으면, 돈은 아주 오래전에 보여줬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나를 팔로 감싸안는다.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야말로 네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어."


팔을 쳐내며 돈을 노려보면, 그 반응이 놀랍다는듯이 돈이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내려다본다.


"그랬다면 각인이 풀렸겠지, 갓티나. 알잖아. 알파가 죽지 않는 한 오메가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너도 그걸 아니까 나를 찾아 여기까지 내려온거 아니야?"


아니야, 나는 저택에서 벗어나려고, 아니. 너에게서 벗어나오려고....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걸까? 그가 살아있다는걸 알고 있었을까? 돈의 시체를 직접 본 일은 없다. 그렇다면, 어쩌면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나의 각인은 그대로. 싫든 좋든 그에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알파란 것은 정말 팔자 좋은 것들이다. 그저 각인을 찍는 것만으로 오메가라면 죄다 장난감처럼 굴릴 수 있다니. 내 인생은 정말로 지옥이군. 이치마츠, 미안하다. 나는 다시 그 빌어먹을 방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숨이 턱턱 막혀와,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마지막 출구가 닫혀버린 것 같다.



그것을 돈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준다. 그 순간,


"썩을마츠한테서 떨어져."


너는.... 돈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총성이 울리며 돈이 주저앉는다. 어째서 네가....돈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스쳐지나가다 이내 몸이 고꾸라지고 바닥에 쓰러져. 무심코 돈에게로 달려가려는 나를 팔로 가로막은 것은, 총을 쏜 장본인인 이치마츠.


"돈! 돈!"

"어째서 네가...."

"뭐하는 거냐, 멍청아. 왜 뛰쳐나가."

"어...어째서, 쏜 거야. 이치마츠. 왜 돈을...."

"너 정말로 멍청하네."


이치마츠는 또 혀를 찬다. 머리를 박박 긁으며 귀찮다는 얼굴을 해. "아직도 모르겠어?"


저택의 살인마가 누구인지.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이치마츠를 불안하다는듯이 쳐다보고 있던 내게 이내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에 피어오른다.


순간 이치마츠에 닿아있는 체온이 오싹하게 느껴져 뒤로 물러나다 넘어져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렇지? 어째서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은 걸까. 왜 그 때 나가지 않고 다시 너에게로 돌아온 걸까."


숨어있는 돈을 찾기 위해서야, 라고 말하며 이치마츠는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너는 쓸모없지 않았어. 카라마츠. 훌륭하게 돈을 찾아냈잖아.


다가오지 말라고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지만, 이치마츠는 평소같은 평온한 목소리로 총을 버리고 다가온다. 내가 무서워, 카라마츠? 그렇게 잘 따르던 주제에. 고개를 저으며 너같은건 모른다고 소리친다. 도망가려고 등을 돌리지만 이내 이치마츠가 몸을 감싸와서 도망갈 수 없게 된다.


"널 해칠까 무서운거야, 카라마츠? 걱정마. 내가 총 버린 거 봤잖아. 난 널 해칠 마음이 없어. 아니, 애초에 이 모든 게 무엇 때문에 시작된거라고 생각해?"


왜 내가 그 때 네 방에 있었을까? 너는 그저 식사를 가져왔다가 그 곳에 발이 묶인거라고 착각했겠지만 그 모든게 계획된 거였어. 나는 널 데리러 간 거야.너나, 나나 돈이 있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어. 겁에 질려 경련하는 뺨을 쓰다듬으며 이치마츠는 다정하게 웃는다.


"카라마츠, 다른 것들은 전부 잊어버려. 오메가든, 돈이든 널 제대로 취급해주지 않은 모든 버러지같은 녀석들은 잊어버려."


내가 네 행복의 길을 만들어줄게. 나와 함께 가자. 그렇게 말하며 끌어안은 이치마츠의 품 안에 무언가 딱딱한 금속재질의 무언가가 닿지만 공포감에 그게 무엇인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마, 저택의 사람들을 죽인 또 다른 총이겠지. 내가 알고 있던 이치마츠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지금은 내가 무섭겠지. 뭐가 뭔지 모르겠지. 하지만 곧 익숙해질거야. 너는 적응하는 것이 특기잖아."


입술을 잘근 물고 이치마츠를 노려보면, 이치마츠는 별 내색없이 그저 웃고는 나를 끌어안는다. "대화하자, 카라마츠. 내 옛날 이야기 들어줄래? 예전에 말이지, 한 6년 전일거야. 나는 갑자기 혼자가 됐어."


지금은 저기 널부러져린 네 옛 애인 덕분이지. 내 소중한 사람들이 죄다 죽어버렸어. 나는 굉장히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그들이 마음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는데 항쟁에 말려들어 죄다 죽어버렸지.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고 나도 죽어버릴까 했지.


그로부터 4년 후, 돈의 저택에 무사히 진입했어. 허드렛일을 하며 최대한 눈에 안띄려고 애썼지. 그러다가 어떤 귀찮은 녀석의 시중을 맡게 되었어. 다 죽어가는 녀석 말이지. 대체 왜 있나 싶은 찬밥데기 녀석. 그녀석의 식사를 가져다 주는 일을 했어. 덕분에 눈에 띄지 않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됐지.


어느 날 그 녀석의 노트를 어쩌다 봐버렸어. 응? 아, 미안해. 멋대로 봐버려서.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쓰길래 늘 궁금했었거든. 걱정마. 바보취급 하지 않아. 굉장히 재미있었어. 이런 생각을 하는 녀석이였구나 싶었다니까. 항상 공허한 눈으로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네가 이걸 쓸 때만은 눈이 빛나고 있었어.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였어. 그렇지만 그 뿐이였지.


그런데, 네가 폐렴에 걸렸을 때. 기억나? 넌 열에 들떠서 잘 기억 안날 수도 있겠다. 네 물수건을 갈아주다 손목이 잡히고 네가 내 팔을 잡고 울었어. 이젠 다 싫다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혼자로 남고 싶지도 않다고. 같이 있어달라고 내게 말했었지. 알았으니 팔을 놔달라고 해도 듣지 않았어. 나라는 걸 알고 얘기한건지 누군가를 투영하고 떠든건진 몰라도, 나는 네 곁에 있어주기로 마음 먹었어.


널 외롭게 만든, 그리고 내 가족들을 죽여버린 돈을 나는 용서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이 저택에서 나가자. 카라마츠. 더이상 허구에 매달리지마. 너를 돌아보지도 않을 남자는 잊어버려.


"카라마츠. 날 선택해.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의지로."


그 말과 함께 입술이 다른 체온으로 덮이고 이내 미끄러지듯 입술 사이를 비집고 말캉한 혀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부드럽고, 쓰다듬는듯한 키스에 온몸이 반응해 이윽고 쏟아져온다. 이치마츠의 팔에 안겨

나는 이치마츠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일까. 살인마와의 로맨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이치마츠는 허구가 아니라는 점. 눈을 감고 눈물과 뒤섞인 짭조름한 맛의 키스를 돈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 한참동안 이치마츠와 타액을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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