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나는 한 번 입은 옷(그러나 빨기에는 얌전히 입은 옷)과 세탁 후 얌전하게 개어놓은 옷을 별도로 구분한다. 정리를 아주 잘 하는, 정리의 도사들은 그런 한 번 입은 옷을 구분하여 서랍에 넣어놓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공간여유까지는 없으므로 그냥 잘 개어 바닥에 둔다ㅋㅋㅋ 그래서 내 방은 정리된 어지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닥은 내 옷장이다. 그리고 나는 대개, 고심하여 옷을 맞춰 입어야 하는 외출이 아닌 이상은 바닥에 있는 옷들로만 꿰어 입고 나간다. 나만의 나름 귀엽고 쏠쏠한 아바타 옷입히기 룰렛이다. 그래도 훌륭한 짜임의 모양새가 된다. 어떨 때는 굉장히 스트릿스타일이 나온다. 그럴 때면 언니는 꾸미지 않은 듯 멋지다고 부산스럽게 날 동네 골목으로 끌고 나가 사진을 찍어준다(나의 언니는 인물사진을 찍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다) 대부분의 날에는 스님바지, 통이 아주아주 넓은 회색 나팔바지에 아무 맨투맨상의가 나온다. 그러나 또 어떤 날에는 아주 얌전한 교사같은, 유니클로 룩북같은 옷이 나온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삼단으로 주름이 잡힌 검고 긴 캉캉치마와, 역시 검정색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모난 짜임이 교차되어 들어간 작은 디테일의 발목양말이 나왔다. 해는 따뜻하게 나왔으나 바람이 많이 불고 쌀쌀했으니, 꼭 붙는 쥐색 목폴라도 받쳐 입었다. 그 위에는 몇 해 전 유니클로에서 산 따뜻하고 톡톡한 검정 단추가디건을 입었다. 얌전하지만 뭔가 강단있어 보이는 옷차림이 되었다. 오늘의 나는 당연히 며칠 묵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뒷머리는 집게로 틀어묶고, 숱적어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앞머리는 실삔으로 대충 틀어올렸다. 그러자 삽시간에 도믿맨이 되어버렸다. 컨셉에 충실해지기 위해 털실로 짜인 짧은 천가방을 들었다. 그 안에 지갑과 노트북, 담배와 충전기를 넣차 금세 가득찼다. 

옷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오늘의 옷은 나를 차분하고 단단하고, 조용히 할 일을 차근차근 해내는 똑부러진 여자로 만든다. 그런 여자가 된 날에 나는 서점에 간다. 그야말로 컨셉의 마침표다. 

나는 멤버십카드를 여차하면 만들지 않는 사람이다. 카페에서 인터넷접속만 하려해도 개인정보를 적어넣어야 하는 세상에서 멤버십카드는 줄일수록 좋다고 믿는다. 그래도 교보문고 멤버십은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사가는 책값이 아깝다. 멤버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니 그래도 뭐라도 혜택을 주리라 믿는다(나는 뭐라도 돌려받을 건 받고 사는 가성비 여자). 그간 읽고 싶었던 책을 쭉 찾아서 한참을 서점 안 의자에 앉아 있는다. 오늘의 읽은 책 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 장강명, <산 자들>. 사회학과이면서 소설가인 사람이라면 분명 이런 소설을 쓸 것이다>를 제대로 보여줬다ㅋㅋㅋ사회학과이면서 열렬히 문장을 사랑하는 나의 몇몇 동기들한테 선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단편집 전체가 좋지는 못했다. 단연 <알바생 자르기>와 <현수동 빵집 삼국지>가 좋았다. 

- 문학과 지성사, <소설 보다: 봄 2020>. 딸을 위하여의 김혜진 작가,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작가, 다른 한 작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였다. 그닥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 문학과 지성 시인선 - 김민정,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오늘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다. 하지만 나는 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의 시 취향을 어느 정도 정립하고 나서야 시집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어떤 출판사보다 문학과지성사/민음사가 표지를 가장 잘 만드는 것 같다. 민음사가 훨씬 요새 잘나가지만, 난 지성사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 유유 출판사, <시의 문장들>. 유유출판사는 언제나 읽기에 관한 읽을거리를 출간해오는 곳이었고, 그래서 이 책도 시의 문장들을 읽는 법에 관한 책인줄 알았는데, 그냥 작가의 자전적인 읽기습관에 관한 소소한 일지였다. 목적이 달라서 도로 보내줬다. 

- 채석장 시리즈, <아카이브 취향>, <자본에 대한 노트>. 사실 이때부터 마스크를 그렇게 쓰실거면 다른 곳으로 가셔야 한다는 서점 직원과, 대답도 미동도 없이 직원을 무시하던 옆자리 할아버지와의 실랑이 때문에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안 그래도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내용이었는데! 너무 정신사나워서 허둥지둥 책뭉텅이를 정리하다가 그만 구매하기로 맘먹은 책도 내려놓고 와 버렸다! 지금 알아차렸다 할아버지 미워요

오늘의 구매한 책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 민음사, 배삼식 희곡집 <화전가>. 말이 필요없다. 이걸 꼭 갖고 싶었다. 올해 봄 국립극장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코로나때문에 기약없이 공연이 없어졌다. 많이 아쉽다. 

- 유유출판사, <필사의 기초>. 내가 이 글을 올리면 꼭 봐주는 우리 자기. 자기가 요새 필사의 재미에 빠져 있다고 한다. 나도 필사를 좀 해볼까, 싶은데 이런 마음은 뭐 누구에게나 있다. 이 책은 손으로 쓰는 정통필사에 관한 책이다. 한 번 읽어보고, 유의미한 내용이라면 자기에게도 추천해줘야지. 추천해줘야겠다는 마음까지도 이미 읽고 있겠구나 자기야. 

- 문학과지성 시인선 - 임지은, <무구함과 소보로>. 그렇게나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역시나 좋았다. 

- 심너울,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단 한글자도 읽어보지 않고 바로 집어들어 계산대로 향했다. 충격적으로 좋은 표지의 책이다. 지금도 충격에 젖어 왼손으로 멍하니 표지를 쓸어보고 있다. 


오늘의 나는 요상한 머리모양에 시커멓고 꼭 붙는 긴 옷을 입은 여자. 참 이상하지 밖에는 바람이 치마가 다 뒤집어지도록 불어오는데 이 여자는 머리가 한 오라기도 흩날리지를 않는다. 핀으로 꼭꼭 틀어박은 머리카락이 어쩌다가 귓가에라도 한 올 내려오면 그것이 더 이상해보이는 이 여자.
입을 꼭 다물고 책을 읽는 여자. 고집스럽게 헤드셋으로 귀를 단단히 틀어막고 마스크 너머에서 활자를 오물오물 곱씹는 여자. 한 권 더 집어들고 싶지만, 멋진 책이기는 하지만 가격에 비해 건질 문장은 별로 없다며 도로 내려놓는 여자. 문고본 네 권에 사만원이라니 비싸기도 하다, 경악하다가도 이깟돈 스파브랜드에서 한 철 입고 버릴 옷 한 벌 값과 같다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여자.
멤버십 조회를 위해 핸드폰 번호를 또랑또랑하게 끊어말하는 여자. 쿠폰이 있으니 적용해주겠다는 말에 세상 유일한 대접이라도 받은 듯 기분이 한껏 좋아지는 여자. 작은 책꾸러미를 한 손에 들고가려 봉투를 사양하는 여자. 초록색 띠지로 책을 둘러 포장해주고, 그 사이에 사은품으로 증정된 북마크를 한 장 솜씨좋게 끼워넣어 준 직원의 능숙함에 감탄하는 여자. 영수증을 주머니에 구겨넣지 않고, 지갑을 열어 반듯하게 뉘여놓고 똑딱이를 닫아두는 여자.
수분크림을 새로 사야 하지만 오늘은 예상없던 지출이 생겼으니 다음에 사자, 되새기며 촉촉한 손등만 연신 문지르는 여자. 담배를 꼭꼭 씹어 피우고 휴대용 재떨이에 꽁초를 넣어가는 여자. 점원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인사하는 여자. 우유를 두유로 변경하고, 휘핑을 빼달라고 조곤조곤 주문하는 여자. 다리를 꼬지 않고 두 발바닥을 똑바로 지구에 붙이고 있는 여자. 전주의 드럼 스틱 소리만으로 카페에서 막 흘러나오려는 지금 이 노래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발레리>라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는 혼자 좋아하는 여자.
최소한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자신이 갈 곳이 어디이며 다음의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넓고 빠른 보폭으로 활보하는 여자. 빠르게 움직이지만 여유넘치는 물결치는 물고기같은 오늘의 이 여자. 나만 아는 오늘의 이 여자.
만 가지의 나 중에 바깥바람을 쐬게 된 오늘의 나는 책을 읽는 여자. 얄팍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 요새는 이 여자가 제법 자주 외출을 하는 바람에, 그 여자가 남긴 의욕있고 단단한 책들이 수북하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책장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오늘의 이 여자가 뭣보다 좋아하는 건 고집과 절약과 책이랍니다. 그래서 이 여자의 이름은 알슈 31178호가 아닌 책읽는 여자. 


*

내 집 아닌 누구네 집도 아닌 그 먼 집에서 누구세요? 아 누구네 집 아닌가요? 죄송합니다………올라갈 때의 행방은 왜 내려올 때면 불명이 될까요……

*

잊으셨겠지만 서로의 집에
데려다주기 바쁜 시절의 연인들.
잊고 싶으시겠지만 서로의 집에서
안 데리고 나가기 바쁜 시절의 연인들.

서로 손을 잡고 잡았다 한들
잴 수 있었을까 서로의 온도를.
서로 등에 업고 업혔다 한들
잴 수 있었을까 서로의 무게를. 

김민정,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꾸 생각에 남는 시집. 다음에 한 번 더 이 여자를 시켜 사오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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