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초인종 소리가 경쾌했다. 손끝을 적당히 밀어내는 금속 버튼의 감각이 유쾌했다. 스텔라의 취향이겠지? 나름 차려입은 캐주얼 재킷을 바로잡으며 칼은 집의 와관을 둘러보았다. 판넬 목재에는 새하얀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현관문 양 옆으로는 예쁜 화단이 가꾸어져 있었다. 계절마다 꽃이 바뀌는 이 화단은 스텔라의 자랑이었다. 아직 초봄이라 피지 않은 재즈의 꽃봉오리가 살랑거렸다. 주인에 어울리게 화사한 신혼집이야, 아니 이젠 신혼집도 아닌가? 이제는 세 가족의 보금자리가 된 집을 올려다보며 칼은 콧노래를 불었다. 


"칼 형! 셰인이랑 재스도! 어서와요!"


현관문이 열리고 예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강한 혈색의 얼굴이 나타났다. 녹색 눈이 반갑게 반짝였고, 문고리를 쥔 팔뚝의 건장한 근육은 얇은 티셔츠로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나 지금이나 참 강아지 같은 인상이다, 지금은 머리에 왁스는 덜 바르는 것 같지만. 이런 녀석이 벌써 애아빠라니 시간 참 빠르다고 칼은 생각했다. 알렉스와 스텔라의 주례를 서 준 것이 겨우 얼마 전인 것 같은데.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왜 칼은 형이고 나는 셰인인데?"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셰인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억지로 입은 흰 셔츠는 아침에 칼이 다려준 덕에 반듯했지만 그 위에는 결국 고집대로 후드티를 걸친 모습이었다. 

"그야 셰인이 더 늙..."

"아, 그만해 그냥!!"


"스텔라 이모~~!!"

남자들의 유치한 자존심 싸움을 무시한 채 재스가 열린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작은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새 원피스 자락을 팔락이며 뛰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알렉스가 평소보다도 따듯한 눈으로 재스의 종종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스, 건강해 보이네요." 이제 자신도 딸이 있어서인지 은근한 부러움이 묻어났다.

"행복하기만도 모자란 아이야, 밝게 자라줘서 고맙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칼이 미소지었다. "자자,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지? 들어가자."


실내도 외관만큼이나 아늑한 집이다. 집안 여기저기에 꽃 장식이 분위기를 더하고, 더스티와 달링이 꼬리를 흔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의 찬장에는 고급 식기가 놓였고, 타닥타닥 불 소리를 내는 벽난로가 실내를 따듯하게 비췄다. 작은 식탁에는 벌써 큰 의자 두 개와 더불어 유아용 의자가 세워져 있었다. 


"야, 설마 저거 너냐?" 셰인이 소파 위에 놓인 인형을 발견했다. 초록색 단추로 눈을 달고 갈색 털실이 머리에 감긴 모습이 영락없는 알렉스였다. 자수로 볼터치까지 놓인 것이 깜찍하다. 

"너무 자세히 보지 마요... 스텔라가 꼭 거실에 둬야 댄대서..." 알렉스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지만 실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칼~ 셰인~ 여기에요!"


안쪽 방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청량하고 꾸밈없는 목소리는 이름에 참 어울리게 울림이 좋다. 실례할게요, 살짝 열린 방문을 밀고 들어가자 하얀 린넨으로 덮인 침대 위에서 그녀가 반겼다. 침대 뒤쪽으로 넓게 트인 유리창이 햇빛을 쏟아내어 환하게 빛났다. 고생을 한 탓인지 머리는 푸석했지만, 표정만은 변함없이 티없이 화사한 웃음을 담고 있어서 역시 스텔라구나 싶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연분홍색 포대기. 침대 옆에 무릎을 대고 앉은 재스가 신비에 찬 눈빛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칼은 셰인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맙소사, 스텔라... 축하해요. 이 애가?" 혹여 아기가 자고 있을까, 묻는 칼의 목소리가 살풋이 울렸다.

"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름은 어떻게 지었어요?" 

"조이. 조이에요."

"조이... 정말 예쁜 이름이에요."


칼은 신생아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도 작고, 분홍빛이 도는 모습이 생명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꼬물대며 움직이는 입가가 한없이 작아 저도 모르게 긴장에 어깨를 움츠렸다. 반면 옆에 선 셰인은 눈가를 행복하게 늘인 채 아기를 바라보았다. 재스의 어릴 적과 겹쳐 보이는 걸까? 비애를 머금은 행복감과 축복이 담긴 표정을 보고 있자면 우리도 아이를 입양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되는 칼이었다. 


"건강해 보여요" 셰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그럼요. 우리 자기가 힘써줬는걸요~ 그렇지 알렉스?"

"자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재스도 있는데." 알렉스는 급 울상이 되어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미안미안 놀려봤어, 자기가 이렇게 귀여우니 어쩔 수 없잖아. 장난스럽게 웃는 스텔라를 재스가 올려다보았다.


"스텔라 이모, 아기한테 선물 줘도 돼요?"

재스의 손에는 보라색 리본으로 묶은 작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어머, 고마워요 재스. 스텔라는 긴 손가락을 뻗어 재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새틴 리본이 스르륵 풀려나가자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속에서 아주 작은 옷이 나왔다. 배내옷은 고급 면 재질에 자수로 튼튼하게 꾸며져 있었다. 


"와! 재스 네가 고른 거니? 마음에 든다, 아기도 좋아할 거야."


뿌듯함에 재스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엊그제 주주시티로 나가서 직접 고른 디자인이었다. 그런 재스를 바라보며 칼은 역시 선택하게 해 주길 잘했어 속으로 외쳤다. 옆을 돌아보니 셰인이 그 예쁜 광경에 넋이 나가 있었다. 이런, 좀 밀어줘야겠는걸? 칼은 팔꿈치로 셰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제서야 셰인이 아차하며 손에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스텔라. 저도 하나 준비해 봤어요. 별 건 아닌데..."


스텔라는 고맙다며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쇼핑백 안에서 들려 나온 것은... 닭 모빌? 게다가 파란색이다. 크흡... 셰인... 푸흐흑... 옆에서 알렉스가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줄 알았지. 칼은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요, 전 최선을 다했어요 스텔라. 그게 제일 나은 거였다면 믿으시겠어요?"

"아, 내 취향이 어때서!! 이쁘기만 한데..." 셰인은 투덜댔지만 막상 선물을 받은 스텔라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셰인! 우리 아이도 커서 농부가 될 지도 모르죠! 셰인처럼 닭을 잘 키우면 좋겠어요."


스텔라는 눈을 돌려 칼을 바라보았다. 칼 차례인가요? 칼은 헛기침을 하곤 안주머니에서 작은 곽을 꺼냈다. 명품 브랜드 로고가 금박으로 반짝였다. 화장품 회사의 로고는 스텔라는 물론 알렉스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최대한 골라봤는데, 이쪽에는 식견이 없어서. 고생했어요 스텔라."


케이스 안에는 유산지에 싸인 립스틱이 들어 있었다. 스텔라가 뚜껑을 열자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린 립스틱은 주황색이 도는 다홍빛이다. 글로시 계열의 제형이 부담스럽지 않게 반짝였다. 어머어머... 동그래진 스텔라의 눈에 알렉스가 칼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선수를 뺏겼다는 표정에 칼은 보고 배워라, 임마. 라고 웃으며 던져주었다. 


"정말 예뻐요 칼! 조자 때부터 섬세한 줄이야 알았는데, 이런 구석까지는 몰랐잖아요!"


기분좋게 립스틱을 닫은 스텔라는 다시 소중하게 케이스에 넣어 머리맡에 두었다. 재스가 돌연 스텔라에게 물었다. 아기 만져봐도 돼요? 스텔라는 포대기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부드럽게 손 잡아봐요. 재스의 아담한 손가락이 조이의 손바닥에 닿았다. 순간 고사리처럼 손가락을 쥐는 폭신하고 말캉한 감촉. 재스의 눈이 자수정처럼 빛났다. 


"셰인, 나도 동생 낳아줘요!!"


뭐라고?? 알렉스가 내어 온 펀치를 마시던 셰인이 음료를 뿜었다. 칼도 화들짝 놀라 쥐고 있던 딸랑이를 떨어뜨렸다. 두 사람의 귀가 경악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그래 재스. 너도 이제 성교육을 받을 때가 됐구나." 전직 변호사의 언변은 다 어디로 갔는지, 칼이 마구 더듬거리며 운을 떼었다.

"페니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진심을 나누면 아기가 태어난대요! 칼, 셰인을 사랑하잖아요! 나도 조이처럼 예쁜 동생 낳아줘요!!"


셰인은 뚝뚝 흘러내리는 펀치를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목까지 번진 홍조가 불탔다. 칼도 터지기 직전이었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떨리는 입가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스텔라와 알렉스는 다른 의미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알렉스는 침대머리를 붙잡고 웃고 있었고 스텔라는 아예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달링과 더스티가 이상하다는 듯 컹, 하고 짖었다.


참으로 따스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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