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내가 그 과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랑을 되살려 예전처럼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리고 도저히 그를 사랑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북한 애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옛정인'을 납득시키는 방법이 존재할까? 애초에 납득할 생각조차 없다면 무엇이 나를 구할 수 있는가?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지금보단 나았을까? 복잡한 머릿속에 이성이 끼어들자 부둣가를 향해 달리던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비린내와 짠 내가 묘하게 뒤섞인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낯선 공기였다. 문득 사실이 될 문장 하나가 덜컥 목에 걸려 얕은 숨을 뱉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낼 것이다.


이 도망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내 억누른 숨이 터졌다. 숫제 울음이라도 터질 기세였다. 이렇게 힘을 빼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과연 득일지 실일지 저울질했지만 겪어본 적 없는 사건에서 경중을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을 테니 누군가에게 자문할 수도 없다. 오로지 나만. 내가 나이기 때문에 겪는 일. 그 생각이 나를 못내 외롭게 만들었다.


이렇게 외로운 세상에 날 사랑하는 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뿌리치고 도망을 택해 그마저도 잃는다면

나는 무엇이 될까?


1.

세상 많은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운명을 마주하며 시작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무언가의 종장에서야 시작되는 이야기라니. 그는 이것을 두고 이보다 '낭만'적인 것은 없을 것이라 말했다. 어떤 면이 낭만적인지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상황이 사랑에 빠지기 취약한 상황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그런 것이 그가 말하는 낭만에 가깝겠지.


2.

사고였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맹세하건대 그건 분명히 사고였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도, 지금도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며 악착같이 잘살아 보겠다는 결심을 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사고라는 것이 확실해질 것이다.


경위를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난 그냥 결심을 다질 겸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산을 올랐고, 눈이 덜 녹아 산길이 미끄러울 것을 간과했던 것 뿐이다. 하지만 신년의 떠오르는 해와 새 다짐. 이보다 뻔하고 당연한 조합은 없지 않은가?


이러쿵저러쿵 말은 하지만 떨어지는 그 순간 정말 이런 생각이 들었었는지는 모르겠다. 되려 억하심정이 들어 억울했다면 너무 꼬인 사람일까? 꼬였다 한들, 그것에 대한 벌이 죽음은 아니지 않겠는가? 결론만 말해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같잖을지언정 차근차근 쌓아 올려온 것은 아직 남아있다고.


추락하고 무너지는 것의 속도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물리적인 추락과 사회적인 추락은 다르지만 둘 다 순식간이라는 것도. 적어도 살려달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단단한 바닥에 부딪혀 구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을 테다. 각오할 새도 없이 고통이 닥쳐 마땅할 텐데 살갗에 닿는 것이라곤 찬 바람이 전부였다.


정정한다. 찬 바람, 그리고 사람의 체온. 누군가가 나를 아래에서 받아낸걸까? 그건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바람은 왜 계속 부는데? 감은 눈을 뜰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가정만 하는 게 지금의 전부였으나 이내 용기를 내고 눈을 뜨곤 후회했다. 눈 뜨지 말걸,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아마 살면서 올라가 본 곳 중 가장 높을 것이라고. 나는 그때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면 없었던 것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심장이 차게 식고 눈앞이 핑 돌았다. 와중에 길게 나부끼는 빛을 본 것도 같았다. 죽음 앞에 선 이들이 흔히 본다는 환각인지는 몰라도.


3.

대강 사리 분별이 가능할 정도로 진정한 것은 이미 해가 뜬 뒤의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가늠할 틈도 없이 낯선 목소리가 두통으로 욱신거리는 머리를 두드렸다.


"비로소."


누군가 어스름한 빛을 등져 짧은 그림자가 졌다. 으레 그렇듯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대를 맞이하러 왔네. 나의 사랑, 나의 영원한 정인. 은태."


…목숨 걱정을 하기도 전에 정신 건강 걱정을 먼저 하기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사고는 처음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쨌든. 저 말의 의중은 둘째 치더라도 사람 등 뒤에 날개가 보이는 상황에서 나를 먼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시선을 날개에 고정하고 저걸 물어, 말아? 고민하느라 아까의 말은 차차 잊히는 것도 같았다. 묻자니, 저급한 수작질이라며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고. 그냥 무시하면? 무시하면… 사라지지 않을까? 


얼씨구, 펄럭이기도 해? 저게 실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내 상상력도 꽤 쓸만한 모양이다. 산에서 실족사 당할 뻔한 사람을 구한 미남. …날개가 돋은.


쓸만하다는 말은 취소하기로 하자. 아마 이런 소재의 소설이나 드라마를 낸다면 뻔하고 지겨운 삼류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싸구려 CG와 배우만 바꿔 반복되는 클리셰란 그런 법이지.


여하간, 언급하기도 민망한 저급한 수작질에 불과할 의문을 접어두자 결심한 것은 내게 말을 건 사람이 더 미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를 만나러 왜 와? 누군데 날 사랑해? 왜 내가 정인이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아니, 침착하자. 내가 기절한 사이 지갑을 열어봤을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신상정보란 매일 뿌려지는 전단처럼 값쌌다. 신상을 조사할 정도로 철저한 사기꾼이라면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세상 험한 거야 말로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니까. 이런 접근은 처음 보지만, 보통 남자가 남자에게 접근을 이런 식으로 하나? 사모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비 같은 걸까? 그렇다기에는 태도가 영 심상찮았다.


"…외상은 없어 뵈니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이냐? 아까의 일은 기억나느냐?"


친절하게 웃는 모양새가 나도 여차하면 아는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친근했다. '오래전 깊은 인연으로 맺어졌으나 기억을 잃은 비극 속의 연인들' 같은 전개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같았지만 내가 잃은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금도끼 은도끼, 그런 제목을 가진 동화 하나가 떠오른 것은 조금 엉뚱한 수순이었으려나. 네가 잃어버린 도끼가 이 금도끼냐, 아니면 이 은도끼냐? 그건 제 것이 아니고 제 건 낡은 쇠도끼입니다. 아주 정직하구나. 자, 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모두 가져가렴…. 


"은태."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낯선 음성에 상념에서 거칠게 끌어 올려지며 손바닥에 닿는 까슬한 낙엽을 가볍게 쥐었다.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자 재차 내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는 그는 언뜻 어깨 너머로나 보았던 성서에나 나올 법했다. 성서를 읽어본 적은 없으나 그것이 성스러운 것임은 알았으므로 그 안에 담긴 것 역시 고귀하겠지. 그가 가까이 다가와 열을 재듯 이마를 맞대자 언뜻 푸르름을 짐작이나 할 수 있던 눈동자가 들여다보였다.


'어떤 호수는 너무나 맑아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던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것이었다. 지구의 먹이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경계하며 산다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도처에 죽음이 가득하여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삶. 때문에 내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일 테다. 그 빛에 홀리면 당장 어떤 것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차라리 눈을 감았다. 대체로 비현실과 가까운 것들은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고는 했으니.


이번에도 그래 마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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