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햇빛 한 점 없었지만, 여전히 후덥지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거기에 한층 농도 깊은 습기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일기예보에서 했던 오전부터 비가 내릴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먹구름들만 하늘 햇빛을 막아내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다니고 있었다. 태현은 보통 때에는 수업에 잘 집중하는 학생에 속했다. 하지만 이렇게 습한 날씨에도 기온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에어컨도 틀어주지 않는 날에는 당연히 수업에 집중할 마음은 없었다. 태현은 책에서 손을 떼었다. 습한 날씨 때문인지 태현의 손에 책이 잠깐 붙어 있다 떨어졌다. 태현은 책상에 엎드리고 교실의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현은 코로 깊게 숨을 들이셨다.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태현을 채웠다. 태현은 불쾌한 느낌에 작게 한 숨을 내뱉었다.

태현은 빨리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태현이 잠에 빠지길 원치 않는 듯했다. 태현은 생각에 자신을 맡겼다.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미래, 과거, 후회, 슬픔. 태현은 눈을 떴다. 태현은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태현이 깊게 생각을 할 때면 항상 생각은 나쁜 쪽으로만 흘러갔다. 그래서 태현은 아주 가끔을 제외하고는, 어떤 때든 생각을 깊게 하지 않았다. 태현은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태현은 머리를 비우려 창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체육시간에 말을 하는 아이들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창 밖으로부터 들어온 미지근한 바람이 태현의 얼굴을 스쳤다. 태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태현은 살짝 눈을 떴다. 그때 수업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들렸다. 태현은 꽤 많은 피로감을 느꼈다.

쉬는 시간 태현은 이끌리듯 학교 옥상으로 올라왔다. 옥상은 다른 공간인 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 남학생이 위태로운 난간에 기댄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태현의 눈에 들어왔다. 태현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학교 옥상의 문을 저 아이가 어떻게 열었는지 궁금해했다. 평소라면 자신이 가진 열쇠가 아니라면, 교무실에서 열쇠를 훔치는 것이 아닌 이상 옥상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태현의 발소리를 들은 남학생은 뒤를 돌아보았다. 태현을 발견한 남학생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곤 태현에게 다가왔다. 남학생은 태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태현에게는 낯선 상황이었다. 학교에 친한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자신에게 먼저 이렇게 말을 거는 아이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현의 귀에는 막이라도 생긴 듯 자신에게 말하는 아이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태현은 멍하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던 중 ‘편지’라는 단어를 듣게 된 태현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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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학교에 등교해 자리에 앉은 태현은 책상 서랍 속 편지를 발견했었다. 상당히 칙칙한 색의 편지봉투로 쌓여있었다. 태현은 편지를 뜯지 않았다. 그저 곱게 접어 자신의 바지 뒷 주머니에 넣고, 곧 자신에게 체육복을 빌리러 온 친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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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현이 그 자리에서 뜯지 않은 편지를 꺼내들자 남학생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태현은 “잠시만.”이라는 말과 함께 편지를 읽어 갔다. 칙칙한 색, 마치 지금 하늘 위에 떠 있는 무거운 먹구름의 색과도 닮아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고백이었다. 좋아한다는 단어가 많이 보였다. 그리고 ‘옥상에서 기다릴게.’라는 말이 끝에 있었다. 태현은 곧 편지를 곱게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남학생에 “조금만 시간을 줘.”라는 말을 무심하게 내뱉었다. 남학생은 태현에게 물었다.



“편지도 안 봤는데,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야?”



“찾아 온 건 아냐. 그냥, 난 평소에도 여기 자주 오거든.”



멍해 보이는 남학생을 뒤로하고 태현은 발걸음을 뗐다. 태현은 난간 가까이에 주저앉아 바람을 느꼈다. 시원했다. 태현의 코끝을 감싸는 바람이 점차 태현의 온몸을 뒤덮었다. 태현은 자리에 몸을 쫙 펼쳐 누웠다. 그런 태현의 행동을 남학생이 바라보고 있었다. 태현은 잠시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남학생은 언뜻 봐도 자신보다 키가 커 보였다. 태현은 ‘저런 애가 굳이 왜 날.’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현은 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한 숨을 크게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그 알 수 없는 더움이 밀려오는 교실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태현의 몸이 무거워졌다. 옥상을 나서려는 태현의 귓가에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옥상에서 기다려. 편지에 대한 답, 꼭 할테니까.”



남학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태현의 뒤를 따라 교실로 향했다.

태현의 대답을 기다리는 남학생의 시간은 늦게 흘러갔다. 애초에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는 태현에게 고백을 한 것이 말이 안 됐다. 남학생은 태현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상대 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한 뼘쯤 작은 아이가 축구를 하던 중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주려 손을 내밀었다. 살짝 깨끗한 비누향기가 불어왔었다. 남학생은 그때 태현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때부터 태현이 남학생의 눈에 띄었다. 남학생이 태현과 두 번째로 마주쳤을 때는 도서관에서였다. 체격이 건장하다는 이유로 국어선생이 자신에게 도서관으로 책을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었다. 구시렁거리며 도서관 문에 도착한 남학생은 책들을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도서관 문이 잠겨 있기 때문에, 국어선생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 도서관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남학생은 창을 통해서 도서관을 들여다보았다.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는 태현이 보였다. 태현은 자신의 옆에 책을 쌓아 놓고 있었다. 그때 남학생은 처음으로 태현의 눈물을 보았다. 국어선생은 어느새 도착해, 남학생이 보고 있는 태현을 같이 보았다. 남학생이 놀람과 동시에 국어선생은 도서관의 문을 열쇠로 열고 태현을 불러내 혼냈는데, 태현은 국어선생의 말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저 보고 있었던 책의 여운을 잔뜩 느끼는 듯 눈물을 계속 보였다. 그 후로도 남학생은 태현과 몇 번을 더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남학생은 마음속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난 후에, 태현에게 편지를 쓰고 방과 후에 태현의 자리 서랍에 편지를 넣어 놓았다. 남학생은 옥상에서 만난 태현의 모습을 생각했다. 이미 반쯤은 거절할 것 같은 표정의 태현이었다. 남학생은 후회했다. 괜히 고백을 한 것 같았다. 남학생은 태현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뻔했기 때문이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남은 수업은 두 개였다.

남학생은 옥상에 올라가지 않았다.



두 번째로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남은 수업은 한 개였다.

남학생은 고민했다. 차라리 태현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학생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남학생의 친구들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남학생은 어색한 웃음을 내비치며 친구들을 보냈다. 남학생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살짝 불안한 모습이었다. 곧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고, 남학생은 ‘수업 시작해서 못 가겠네.’라고 생각하며 애써 차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세 번째로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다들 가방을 챙기고 하교를 시작했다.

남학생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교를 하는 아이들이 한 둘 씩 보였다. 남학생은 부디 저기에 태현이 있기를 바랐다. 남학생의 친구들이 집에 안 가냐며 물었다. 남학생은 먼저 가라며, “국어 선생이 부탁한 게 있어서 도서관에 들렀다 갈 거야.”라며 친구들을 보냈다. 잠시 후 창 밖으로 자신의 친구들이 학교 정문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남학생은 이쯤 되면 태현도 집으로 갔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슬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을 멘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점점 진한 색으로 물드는 운동장이 보였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 냄새와 함께 찝찝함이 남학생을 찾아왔다.


남학생은 옥상으로 가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학생에게는 계단 한 칸, 한 칸을 오르는 것이 힘에 겨웠다. 옥상의 문 앞에 서 있는 남학생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지금 자신이 붙잡고 있는 이 손잡이를 돌리는 것에 비하면 정말 별 것 아니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학생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남학생은 지금 들리는 이 발소리가 태현의 것인가를 생각했다. 발소리는 점점 복도를 울리면서 남학생의 온몸 전체에 울려갔다. 남학생은 지금 만큼은 태현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남학생은 숨을 꾹 참고 손잡이를 바라보며 옥상의 문을 열었다. 학교 옥상으로 나온 남학생은 온 힘을 손에 집중해 최대한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히 움직이며, 옥상의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은 남학생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학생의 머리 위로 비가 떨어졌다. 남학생은 고개를 숙인 채로 생각했다. ‘언제까지 옥상에 있어야 하나..’라고. 남학생은 뒤이어 자신의 뒤에서 나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살짝 비에 젖은 채로 미소를 띠고 있는 태현이 보였다. 남학생은 깜짝 놀란 채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때 태현의 입이 열렸다.



“한 참 기다렸잖아.”



언제 사라졌는지 모를 무거움을 뒤로하고 남학생은 태현과 마주했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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