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사변 애니메이션 방영을 기념해 22년 1월 디페스타에 발매했던 귀신샌드 책을 무료로 전 분량 웹공개합니다. 중편은 30일, 하편은 31일 차례대로 올라옵니다!

#평범한 현대AU #이타도리-스쿠나가 쌍둥이 #어쩌다 보니 세같살




후시구로 메구미가 목욕을 마친 뒤에도 이타도리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편의점에 다녀오는 김에 겸사겸사 폐지도 버리고 오겠다고는 했지만, 그게 그렇게 시간이 걸릴 일일까? 조금 걱정이 되어 메시지라도 남길까 하던 찰나, 때맞춰 현관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러더니만 이내 잔뜩 상기된 얼굴의 이타도리가 집안으로 뛰어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타도리?”

“후시구로!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아니 그게.”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이타도리는 분기탱천하여 말을 쏟아냈다. 웬만한 일은 서글서글하게 넘기는 성품의 이타도리가 이처럼 흥분했다는 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후시구로는 일단 찬물을 한 잔 따랐다. 이타도리의 모습을 보아하니 냉수 한 잔이 절실히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해 봐.”

이타도리는 후시구로가 내민 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쓱 훔쳤다. 이윽고 숨을 탁 토해내며 시작되는 ‘그게 말이야’에 후시구로는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이타도리가 노끈으로 동여맨 폐지 묶음을 들고 지정된 수거 장소에 다다랐을 때였다. 날이 추워서 얼른 던져 놓고 오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폐지 더미가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었다고 했다. 다들 춥다고 대충 놓고 갔나, 하고 돌아서려는데 왠지 그 너저분한 꼴이 마음에 걸렸다는 모양이다. 결국 몇 걸음 가다 말고 다시 돌아온 이타도리는 폐지를 할 수 있는 한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데 언제부터인지, 102호 할머니가 저만치서 이타도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할머니의 손에도 종이봉투에 담긴 폐지가 들려 있어, 이타도리는 저 때문에 할머니가 폐지를 버리지 못하고 기다린 줄 알았다고 했다. 해서 얼른 비켜서고는, 넉살 좋게 수고 많으십니다, 한마디를 날리며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리려고 했는데…….

“저기, 201호 사는 젊은 사람, 맞지?”

할머니가 대뜸 이타도리를 붙잡아 세웠다. 그러더니만,

“아니, 전부터 한 번 얘기를 해야겠다 싶었어. 혹시 내가 화단에 붙여둔 안내문 봤어요? 안 봤겠지, 봤으면 그럴 수가 없어. 대체 이 건물 사람들이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 그렇게 화단에 꽁초를 못 버려 안달인 거야, 응?”

……라고, 속사포로 쏴 대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만 들어도 뒷일은 충분히 예상이 갔다. 후시구로는 미리 한숨을 쉬고, 물 한 잔을 더 따랐다. 이번엔 자신을 위해서였다.

당연하지만 이타도리가 꽁초를 버린 범인일 리는 없었다. 애당초 비흡연자인 데다가, 소방관이라는 직업상 아무 데나 버려진 담배꽁초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꼭 담배꽁초뿐일까, 후시구로가 아는 이타도리는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인간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고 하면 또 모를까.

설령 이타도리가 흡연자라 해도, 그리고 소방관이 아니라 해도 그가 안내문을 태연히 무시하며 화단에 꽁초를 버리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내일 갑작스레 핵전쟁이 일어나 세상이 무법천지로 변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다. 이타도리라면 그런 때일수록 공권력이 부재한 중에 화재가 일어날 걸 걱정해 불조심을 외치고 다닐 타입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타도리가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히 할머니가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게 아니다. 사실 문제는…….

“후시구로 메구미, 현관문이 열려 있다만.”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애꿎은 이타도리에게 지청구를 들어먹게 한 장본인이 나타났다. 키와 체격뿐만이 아니라,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카락이며 이목구비의 대체적인 생김새가 이타도리 유지와 꼭 닮은 남자. 그럼에도 이타도리 유지를 안다면 어쩐지 동일인으로 착각하기는 쉽지 않은 그의 쌍둥이 형제, 스쿠나였다.

“문단속을 단단히 해야지. 어떤 놈이 들어올 줄 알고.”

“…….”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 중 제일 위험한 작자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후시구로는 이 남자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서 본심을 내뱉는 대신 얼른 유지에게 눈짓을 했다. 웬만하면 방에 들어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 십 분에 한 번꼴로 싸움이 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스쿠나― 그는 이타도리와 ‘일단은’ 형제간이었지만, 형제임을 유추할 수 있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 지 오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이타도리 유지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타도리의 정반대, 다시 말해 안내문을 읽고는 코웃음을 치며 화단에 담배꽁초를 휙 버릴 수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201호에 산다는 걸 알 만큼 번질나게 드나들면서, 화단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남은 꽁초를 한창 자라는 화초에 아무렇게나 던질 사람이 이 남자 말고는 대체 누가 있을까. 후시구로는 밀려오는 두통을 억누르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됐네. 안 그래도 지금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아니, 일단 나부터. 한 가지 확인해 두고 싶은 게 있거든.”

하지만 이타도리의 억울함을 해결하기도 전에, 스쿠나가 재빨리 선수를 빼앗았다. 중간에 서 있는 이타도리의 존재는 무슨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양 무시하고. 그가 느닷없이 후시구로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통에, 후시구로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늘 그랬듯 스쿠나가 좀 더 빨랐고, 정신을 차렸을 땐 스쿠나의 두 손에 고개가 단단히 붙들린 뒤였다.

얼마 동안 스쿠나의 예리한 눈초리가 후시구로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만 느닷없이 그가 후시구로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는 게 아닌가.

“……내 이럴 줄 알았어.”

돌발적인 행동에 후시구로는 물론 이타도리마저 얼어붙어 있는데, 스쿠나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ㅁ, 뭐가……?”

“내가 분명 지난주에 샴푸를 새로 사 왔을 텐데. 그건 어디 두고 원래 쓰던 걸 쓰는 거지?”

일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정곡을 찔려서 나온 게 아니었다. 단지 할 말을 잃어버린 결과였을 뿐이다. 후시구로는 기가 막혀 스쿠나를 쳐다보았다. 멀쩡한 자기 집을 놔두고 남의 집을 제 집마냥 무람없이 드나들 때부터 이미 이 남자에게 일반인의 상식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이제는 별 같잖은 걸로 시비를 다 건다. 샴푸? 뭘 쓰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혹 스쿠나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닌가 싶어, 후시구로는 이타도리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타도리는 싫어도 스쿠나와 한집에서 자라야만 했던 역사가 있어, 후시구로에 비하면 스쿠나의 말을 조금 더 잘 알아듣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타도리 역시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후시구로는 스쿠나가 불쾌해할 걸 알면서도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내뱉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치고 가는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 일요일 밤이었던가, 스쿠나가 느닷없이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던 적이 있었다. 먹을 거냐고 묻자 그게 아니라고 하길래, 내용물을 꺼내 보지도 않고 적당히 다용도실에 처박아 두려고 했는데.

“그거, 내가 직접 고른 거니까 반드시 쓰도록 해.”

그렇게 말하기에 어쩔 수 없이 펼쳐 보았더니, 고급스럽게 포장된 샴푸와 린스 세트가 나와 조금 놀랐던 것이다.

한눈에 봐도 대형마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브랜드의 제품은 아니었다. 생소한 브랜드명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라면 굳이 욕심을 내지 않을 고가품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향수 같은 것도 아니고 샴푸와 린스라니. 일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남자가 굳이 그것을 들고 온 것 자체가 꽤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싸든 비싸든 샴푸는 결국 샴푸. 성능이 어떻건 간에 머리에 거품을 내고 씻어 내면 그만이다. 단지 이번 달 생필품을 구입할 비용을 조금 아꼈다는 것, 후시구로 메구미에게는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해서 별생각 없이 욕실 찬장에 처박아 두었는데…….

“아, 그거…….”

간신히 스쿠나가 말하는 바를 파악한 후시구로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지금 쓰는 게 남아 있는데 굳이 새 걸 쓸 필요가 없잖아. 다 쓰고 나면 어련히 알아서―.”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지?”

그러나 그 대답이 짜증에 부채질을 한 듯, 스쿠나는 한층 더 역정을 냈다.

“슈퍼에 가면 널려 있을 그런 건 내버려 두고, 당장 내가 사준 것부터 쓰란 말이야. 맘에 안 든단 말이다, 후시구로 메구미가 저 녀석과 똑같은 샴푸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는 게!”

스쿠나가 신경질적으로 이타도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 순간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해했기 때문에 흐를 수밖에 없는 침묵이었다.

아…… 고작 그런 문제였나. 후시구로 메구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막히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경험상 이런 일에 더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하지만 잠깐 허탈하고 말았던 후시구로와는 대조적으로, 비로소 스쿠나의 의중을 이해한 이타도리의 표정은 급격히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이제껏 머쓱하게 서 있던 이타도리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오더니 스쿠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후시구로가 서둘러 이타도리의 팔을 붙잡아 봤지만, 언제나와 같이 제 몸이 역으로 끌려갈 뿐이었다.

“그딴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야, 너 전부터 내가 경고했지. 휴대용 재떨이를 안 들고 다닐 거면 애초에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아? 내가 왜 그딴 걸 들고 다녀야 하는데. 왜, 어디서 불이라도 났나? 어차피 불이 나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불을 끄는 게 네녀석 밥벌이인데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지.”

“뭐……? 이 자식이 뱉으면 다 말이라고…….”

순간 이타도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후시구로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뭔지 알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의 전조였다.

후시구로는 포기하고 이타도리의 팔을 놓았다. 일단 둘 사이에 싸움이 붙으면 후시구로로서는 두 사람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정말 위급할 때에는 둘 사이에 몸이라도 내던졌지만, 그건 정말 최후에나 쓸 법한 비기이고 지금 같은 상황에 남발할 건 아니었다. 그랬다간 수명이 못 해도 이십 년쯤은 줄어들 게 틀림없다.

“……됐으니까, 싸우려면 밖에 나가서 싸워…….”

과실의 책임이 명백하고 편을 들어줄 대상이 뻔하더라도, 지금으로선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 둘을 내보내지 않으면 저는 둘째치고 어쩌다 보니 이 집의 위, 아래, 혹은 옆집에 살고 있ᅌᅳᆯ 뿐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테니까. 게다가 소음으로 인한 신고가 이 이상 누적되었다간 위험했다. 언제 이사할 곳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게 될지 모른다.

한동안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던 쌍둥이가 군말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나가기를 기다려 후시구로는 겨우 소파에 주저앉았다. 목욕하고 나왔을 때의 상쾌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깊은 피로감만이 후시구로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이타도리의 광대에 보랏빛이 감도는 불그죽죽한 멍이 든 것을 보고서도 후시구로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땅이 꺼져라 기나긴 한숨을 쉬었을 따름이다. 이타도리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고, 후시구로는 가타부타 잔소리를 하는 대신 묵묵히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이 구급상자는 이타도리가 직업 정신을 발휘해 손수 준비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몇 가지 간단한 상비약만 넣어 두는 것과는 다르게 다종다양한 약과 기물이 늘 안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다. 하지만 가장 자주 쓰이는 건 결국 소독약과 항생 연고, 그리고 반창고였다.

후시구로는 이타도리의 뺨에 멍든 데 바르는 연고를 조심스레 펴 발랐다. 그러다 손등에도 찢어진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해 간단히 처치를 했다. 생채기투성이인 주제에 이타도리는 뭐가 그리 흐뭇한지 싱글거리며 후시구로가 반창고를 붙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제 쌍둥이 형제와 대치할 때와는 전연 딴판이었다.

격무에 시달려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는 녀석이, 어쩌다 그런 성격파탄자와 한 지붕 아래 태어나서……. 후시구로는 슬쩍 혀를 찼다. 그래도 어제는 지극히 무난하게 지나간 편이었다. 이웃집 사람이 쫓아오는 일도 없었고, 후시구로에게도 여파가 미치지 않았으니까.

 

수의학부 2학년 과정을 마침과 동시에 이타도리와 하우스메이트가 된 지 거의 일 년. 집을 계약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벌써 한 차례 이사를 했다고 하면 듣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하기는 저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집주인이 허리까지 숙여 가며, 이사 비용을 부담할 테니 부디 나가 달라고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의 원인은 물론 스쿠나였다. 그는 처음부터 후시구로가 이타도리와 한집에서 살게 된 것을 몹시 마뜩잖게 여겼던 것이다.

후시구로가 학교와 좀 더 가까운 집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는 갑작스런 일이 아니었다.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는 학교 연구실에 배속되는지라, 편도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통학 시간을 줄일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후시구로의 의향을 알고 있었던 이타도리가 때마침 같이 살 곳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둘이 살면 집세와 공과금을 줄일 수 있고, 집안일도 분담할 수 있으니 이득이 아니냐면서.

이타도리가 내세운 근거는 합리적이었고, 더군다나 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이미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쓴 전적이 있었으므로 꺼릴 이유라곤 조금도 없었다. 얼마 안 가 후시구로는 이타도리가 쉬는 날에 맞춰 틈틈이 방을 보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그저 평범한 데이트를 가장한 채.

당연하지만 이사 준비를 스쿠나에게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 그래도 그는 틈만 나면 후시구로를 제 집에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마 후시구로가 평소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알기에 그토록 노골적으로 굴었을 것이다. 언제라도 몸만 오라고 구슬리며 동거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는데, 매번 그 끈질긴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스쿠나의 제안은 점점 더 집요해져만 갔지만, 유감스럽게도 후시구로는 스쿠나의 집에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유는 명백했다. 그가 얼마나 제멋대로이며 또 지독한 성격파탄자인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 후시구로 메구미의 안위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후시구로의 안위를 위한다는 구실 하에 오히려 위협적으로 구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상당히 구속적으로 굴었고, 후시구로는 스쿠나의 그런 면을 자나깨나 경계했다. 스쿠나의 손아귀에 갇혀 살아간다는 건, 이타도리와 속절없이 멀어지는 것뿐만이 전부가 아닐 테니까.

윤리관이라곤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고, 만사를 결정하는 대부분의 기준이 오로지 제 기분에 좌우되는 폭군. 솔직하게 말해 후시구로가 아는 스쿠나란 그런 남자였다.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저만은 끔찍하게 여겨 여러 방면으로 챙겨주었으나, 그럴수록 고맙기는커녕 다음엔 무엇을 요구할지 몰라 두려워질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 변덕, 기준을 종잡을 수 없는 판단의 잣대가 후시구로를 늘 불안하게 했다. 배알이 뒤틀리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의 남자― 그게 바로 스쿠나였으니까.

게다가 이 남자는 뒷배경도 몹시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수완이 뛰어나다 한들, 그 나이에 손에 쥐기엔 백번 생각해도 과한 수입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후시구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따금 그의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험악한 통화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은어가 가득한 심복과의 대화가 어쩔 수 없이 귀에 들어오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관여하고 싶지 않은 어둠 속의 세계가 스쿠나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에게 뻗어오고 있다는 것을.

가능하다면 떨치고 싶지만, 떨칠 수 없다면 거리라도 둬야 한다. 후시구로가 판단하고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문제 때문에라도 이타도리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물론 이타도리가 스쿠나와 비슷한 뒷배경을 지닌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녀석은 완력으로 스쿠나에 대항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이자, 스스로 방패를 자처하는 아군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타도리는 스쿠나를 이해하지는 않더라도 함께 자라 온 시간을 통해 상대의 패턴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터라 크게 의지가 되었다. 덕분에 스쿠나가 놓은 덫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만 해도 몇 번인가.

그러니 이타도리와 함께 살 예정이라는 걸 그에게 알리는 일은 당연히 없었고, 또 없어야만 했다. 그가 길길이 날뛰며 이사를 방해하는 광경이 안 봐도 선했던 것이다. 훗날 스쿠나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후폭풍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가 모르는 사이에 모든 절차를 마쳐 놓기만 하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으나.

 

둘만의 이사 계획이 물밑으로 은밀하게 진행된 지 몇 개월. 마침내 이사를 마치고 나서 느꼈던 해방감은 그야말로 찰나에 사라졌다. 계기는 사소했다. 연락도 없이 학교 앞에 나타난 스쿠나가 끈질기게 데려다 주겠다길래 딱 한 번 이사한 집 근방의 역에 내려달라고 했던 것. 정말 그것뿐이었는데, 무슨 수를 쓴 건지 스쿠나는 그 주 안에 이타도리와 자신의 주소지가 같은 곳으로 등록되어 있음을 알아내 버렸다.

사실을 안 스쿠나가 불쾌해할 것 자체는 누구라도 예상할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건 그 불쾌함의 정도였다. 설마하니 스쿠나가 그렇게나 이를 갈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어쩌면, 스쿠나 자신마저도 그토록 화가 날 줄은 몰랐을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부로 두 사람은 야쿠자에게 거액의 사채를 빌린 사람도 이렇게는 당하지 않을 것 같은 훼방을 직면해야만 했다. 고함과 협박, 싸움과 비명 소리, 누군지도 모를 험악한 인상의 무리……. 이사한 지 근 한 달 만에 집주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찾아오고, 새로 장만했던 집기가 모조리 부서져 나가고…….

후시구로는 그즈음에 벌어졌던 갖가지 사건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했다. 단지 소란과 혼돈이 한데 압축되어 그땐 정말 힘들었지, 라는 인상으로 뭉쳐진 것만을 떠올릴 수 있을 따름이다. 짧은 기간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뇌가 수용량을 초과하는 자잘한 기억은 묻어 버린 것일까. 어쨌건 분명한 것은, 그 일로 인해 후시구로가 처음으로 스쿠나에게 핏대를 세우며 맞섰다는 것이었다.

맞섰다, 라고는 해도 엄밀히 말해 그것이 정면돌파나 대치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참다 참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다. 미친 사람처럼 분을 토하고 저를 붙잡는 팔을 뿌리치며 몸부림을 쳤는데, 어느 순간 눈앞이 새까매지고 숨이 막히더니 눈을 떠 보자 병원이었다. 하얀 천장을 중심으로 양쪽에 쌍둥이가 나란히 서서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던 것을 기억한다. 기약 없이 이어질 것 같던 싸움은 그날부로 일시적인 휴전을 맞이했고, 후시구로는 생애 처음으로 스쿠나가 번민하는 것을 보았다.

결국 후시구로가 쓰러진 것을 계기로 그는 한발 물러났다. 모든 게 지독히도 맘에 안 들고 이타도리만 보면 주먹이 나갈 것 같아도, 꾹 참고 후시구로의 의사를 들어 주기로 한 것이다. 기존에 계약한 집은 별수 없이 포기하고 새집을 찾아야 하긴 했지만, 스쿠나의 평소 성정을 생각하면 이는 앞으로 다시 없을 수준의 양보였다.

물론 그들 역시도 어느 정도의 타협은 피할 수 없었다. 새집을 계약하는 대신 집 열쇠는 스쿠나에게도 넘겨야 했고, 낮이건 밤이건 스쿠나가 제멋대로 드나드는 것 역시 막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웃들의 피해를 책임져야 하는 것 또한 그들이 부담해야 하는 대가였다. 이쯤 되면 둘이 아니라 셋이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고, 때로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 와 모든 걸 되돌릴 수도 없는 이상, 부질없는 후회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아…….”

허나 다짐이 무색하게도 종종 한숨이 기어이 입 밖으로 흐르곤 했다. 이타도리가 흠칫하며 후시구로를 쳐다보았다. 아차 싶어 후시구로는 어설프게 하품하는 체를 했다. 서투른 연기였기에 이타도리를 속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응급실 사건 이후로 이타도리는 후시구로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걱정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자기도 스쿠나 때문에 엄청 속을 썩이는 주제에, 이쪽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으면 안절부절못한단 말이지. 하기는 제가 견디다 못해 양쪽 모두를 놔 버리면 끝날 관계였다. 이타도리는 본능적으로 그걸 느끼고서 눈치를 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후시구로로서는 아직 모든 걸 놔 버릴 생각은 없었다. 이타도리에게 굳이 말로 하진 않았지만, 이타도리가 저를 포기하기 이전에 제가 먼저 이타도리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근방의 제과점은…… 이제 더 이상 새로 가볼 만한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후시구로가 화제를 돌렸다. 거두절미하고 꺼낸 이야기임에도 금방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이타도리가 아, 그렇지, 하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 밑의 화과자집 양갱은 벌써 두 번이나 갔었고…… ‘블랑’에선 카스테라, ‘카페 비앙키’에선 밤과자, ‘파티세리 슈발’은 에그 타르트랑 슈크림이었지……. ‘블랑’은 안 간 지 꽤 됐으니까 거기서 다시 카스테라를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그 할머니, 카스테라를 사들고 가니까 딸이 집에 오면 꼭 사오는 거라고 한마디 하더라고. 좋아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자주 먹는 거라는 얘기로도 들려서…….”

“아…… 그럼 역시 양갱을 한 번 더 사가는 수밖에 없나? 전에 슈크림을 사 갔을 땐 이런 양과자는 보통 손주들이나 와야 먹는 거라고 했다며. 처음엔 물양갱, 지난번엔 밤양갱이었으니까 이번엔 적당히 다른 맛으로…….”

“한 번 더는 괜찮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계속 써먹을 수는 없어. 무슨 일만 생기면 양갱을 들고 찾아간다는 이미지가 박혔다간 죽고 싶어질 거야…….”

주변에서 항의가 들어오면 선물을 들고 사과하러 가는 게 일상인지라,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근방의 디저트 사정에 정통해진 지 오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보 수집에 도움을 준 건 스쿠나였지만 말이다. 그는 입맛이 까다로웠기에, 어느 집의 쑥을 넣은 케이크가 유명하고, 어느 집의 생과자가 맛있기로 소문이 났는지를 꿰뚫고 있었다. 이타도리는 솔직히 말하자면 막입이라, 이런 방면에는 스쿠나 쪽이 더 도움이 됐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스쿠나인데, 사죄용 선물에 대한 정보를 주는 쪽도 스쿠나라니. 이번의 사과 사유만 해도 그가 벌인 꽁초 투척이 아닌가. 하지만 제 입에 넣으려고 사기에도 손이 떨릴 만큼 비싼 과자를 스쿠나에게 부탁하면 냉큼 두 박스고 세 박스고 사 오니까 하는 수 없었다. 후시구로의 지갑 사정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속 편하게 본인이 저지른 만큼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 스쿠나가 가져온 양갱이 꽤 괜찮았는데, 그걸 한번 더 사 오라고 할까……. 후시구로가 이마를 짚으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건지 스쿠나가 현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면 부족인 듯 하품을 하려다 말고 별안간 얼굴을 찌푸리는데, 언뜻 보니 입가에 찢어진 흔적이 선명했다. 하기는 이타도리가 이 정도니 본인도 멀쩡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쿠나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입가의 상처보다도 구급함을 펼쳐둔 채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인 듯싶었다. 미간을 잔뜩 좁힌 스쿠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침부터 무슨 궁리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명백한 시비조에 반응하는 대신, 후시구로는 한숨을 쉬고 옆으로 밀어 뒀던 구급상자를 제 쪽으로 당겼다. 입가에 붙여도 크게 거슬리지 않을 만한 크기의 적당한 반창고를 찾으러 상자를 뒤적였더니 이번엔 이타도리가 대번에 싫은 기색을 했다. 저 녀석은 필요 없잖아, 라며 드러내 놓고 입을 내미는 것이 귀엽기도 하지만 난감하다. 하기는 이타도리 앞에서 스쿠나를 위해 주는 것도 민망해서, 후시구로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나중에 다시 꺼내는 것도 번거로우니까 어차피 펼쳐놓은 김에 지금…….”

“됐고, 비켜.”

스쿠나가 이타도리를 퍽 밀어냈다. 그러고는 이타도리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후시구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 그럼 붙여 봐.”

아직 반창고는 찾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몹시도 흐뭇한 표정으로 스쿠나가 말했다. 이타도리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지만, 어젯밤 이미 한바탕 일을 벌인 터라 차마 아침부터 다시 싸울 엄두는 낼 수 없었는지 큰 소리는 내지 않았다. 대신 후시구로로서는 뜨끔해지는 한마디가 뒤따랐다.

“후시구로는 이런 데서 이상하게 무르니까 저 자식이 자꾸…….”

“이런 건 이상하게 무른 게 아니라 측은지심이라고 하는 거다, 이 애송아. 거기, 반창고만 붙이지 말고 약부터 발라 봐. 이왕 봐줄 거면 꼼꼼하게 봐 줘야지.”

잠시나마 후시구로를 독점하게 된 게 즐거운지, 스쿠나는 후시구로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알면서도 유쾌한 기색으로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그만 뚱해진 이타도리와는 대조적이다.

후시구로라고 해서 그가 기분이 내키면 언제라도 제 주변을 초토화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미 한 차례 온몸으로 겪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 객관적으로건 주관적으로건 친절을 베풀 만한 위인이 못 된다. 하지만 당장 작별을 고할 게 아니라면, 또 그럴 수도 없다면 후시구로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마냥 내켜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얻은 게 없진 않았다. 스쿠나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고, 기분이 좋은 날의 그는 훨씬 덜 난폭했으니까. 약간의 수고로 하여금 집에 돌아온 그의 재킷 소맷자락이 피에 젖어 있지 않다면 후시구로는 앞으로도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용의가 있었다. 공연한 엄살을 부리는 스쿠나를 무시하고 소독약을 빈틈없이 찍어 바르며, 후시구로는 가만히 한숨을 삼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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