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어려운 걸음을 해주어, 고맙구나.”

깨끗한 삼베로 옷을 지어 입은 정안이 제 부모를 따라 함께 온 찬희와 주아를 보고 무릎을 낮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 무척 다정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 이름이 무엇이더냐?”

늘 저를 꾸짖느라 고함치던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다 그 누구보다 다정하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정안의 목소리에 주아는 정안을 빤히 쳐다보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손가락을 쫙 펼치며 말했다.

“우 주아예요! 여섯 살!”

주아의 대답에 주아를 데려온 소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 이 녀석이! 송구하옵니다, 저하. 가르친다고 해도 아직 어려서 그런지 예를 잘 갖추지를 못하옵니다.”

그런 소하를 보면서 정안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전수. 아직 어린아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도 너무 나무라지 말게나.”

소하를 보며 괜찮다 말하는 다정한 눈빛은 곧 대답을 하지 않은 찬희를 향했다.

“네 이름도 내게 알려주지 않겠느냐?”

정안의 물음에 희수는 찬희의 어깨 위로 손을 살며시 올렸다.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고 있다 생각한 희수 나름의 응원이었지만.

“사역원 첨정 공 희수의 여식, 공 찬희라고 하옵니다. 얼마나 큰 슬픔이실지 가늠이 가질 않아 송구하옵니다.”

아직 여섯이라는 어린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무척이나 유려한 말이 흘러나오자 정안은 놀란 눈으로 희수를 바라보고는 곧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내자를 닮아 이리 어여쁜 얼굴을 하고 있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자네를 쏙 빼닮았네, 그려.”

정안의 말에 희수는 멋쩍은 듯, 작게 웃었다가 다시 찬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반갑구나, 찬희야. 그래, 그래도 네가 송구하게 여길 일은 아니니 괘념치 말거라.”

정안은 허리를 숙인 채, 일어나지 않은 찬희의 팔을 잡고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찬희는 그렇게 허리를 펴고서 정안의 눈을 마주보았다.

“주아도, 찬희도. 이렇게 와주어 고맙구나. 이리 어려운 발길을 해준 너희에게 내가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느냐?”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일어나지 않은 정안을 보면서 희수와 소하는 좌불안석이었지만, 주아는 제 부친이 쩔쩔매는 높은 사람이 저를 보면서 부탁한다는 말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무슨 청이요?”

“말씀하시면 따르겠사옵니다.”

너무나 상반되는 두 대답에 정안은 작게 실소를 머금었다가 흠흠 소리내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게 너희 또래의 여식이 있는데, 그 아이에게 아직 동무가 없구나. 허니, 너희가 그 아이의 동무가 되어주지 않으련?”

정안의 다정한 물음이 그저 따뜻하게만 느껴진 찬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주아는 그저 새로운 동무가 생긴다며 신이나 펄쩍 뛰었다.

“좋아요!”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하던 찬희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정안의 얼굴에 뜬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정안은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고서 안희가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여느 때보다 조용한 전각의 마당에 들어서자 머리를 틀어 올린 상궁 하나가 정안을 향해 다가왔다.

“정 상궁. 안희는 안에 있는가?”

“예, 저하.”

“그럼 불러주게나.”

갓난쟁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안희도 혹 잠이 들었을까 하는 염려와 다르게 안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궁의 뒤를 따라 조용히, 인기척조차 내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몸짓을 전각을 벗어났다.

“부르셨습니까, 아바마마?”

치마가 너풀거리는 소리가 크면 얼마나 클까. 하지만 그마저도 곤히 잠든 아우를 깨울까, 치마를 둘러 잡고 신이 끌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안희를 보며, 배려심이 깊다고. 그렇게 느꼈다.

갓난쟁이가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 하지만, 주변에 돌보는 이들도 있을 터인데. 그렇게 주변을 살피고 배려가 몸에 밴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라서, 그래서였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별 것 아닌 행동을 하더라도 찬희가 안희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된 것이.

정안은 제게 다가온 안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슬쩍 제 옆에 바짝 세웠다.

“안희야, 이 아비가 네게 동무가 될 아이들을 소개해주고 싶구나.”

그러고는 아이들을 향해 다가가 다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춰 자세를 낮췄다.

“주아야, 찬희야. 이 아이가 내 딸아이인 안희라고 한단다. 아직 동무가 없는 아이니, 너희가 안희의 동무가 되어주면 좋겠구나.”

정안의 말이 좋아서, 새롭게 생긴 동무가 너무나 예쁘게 보여서 뽀얗고 살이 잘 오른 통통한 뺨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끄덕이는 주아와 눈에 보이던 순간부터 왠지 눈을 뗄 수 없어 안희만을 지그시 바라보는 찬희를 보며 안희는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안희를 향해 다가오라며 손을 뻗은 정안을 보면서 어딘가 더 샘이 난 표정을 하는 안희였지만, 정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며 다가왔다. 아니, 전각을 나설 때와는 다르게 신발을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것이 불만 가득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안희야, 네 동무가 되어주기 위해 찾아온 아이들이란다. 인사하려무나.”

정안도 안희가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모른 척, 아이들의 앞에 세웠지만. 안희의 입은 튀어나와 들어갈 줄을 몰랐다. 거기에 그새 볼까지 불퉁하게 불거져 있었다.

“안희야.”

정안이 차분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안희를 부르자, 안희는 곧 훌쩍이고 울먹이며 소리를 내었다.

“아바마마.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않사옵니까!”

불퉁한 얼굴로 울먹이며 삐죽이던 입술이 결국 곧 크게 벌어지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마, 마마께서, 흐엉, 저리, 흐윽, 흐아아앙.”

제가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으며 동무를 소개해주는 아비를 보자니, 애써 눌러 참고 있던 슬픔이 설움으로 변해 툭 터진 모양이었다.

울음이 터진 안희를 잠깐 보던 주아도 입술을 삐죽이더니 곧 따라 울어 뒤에 선 소하는 안절부절못하며 주아의 뒤에서 들썩였다.

무척, 아주 많이, 슬프시구나. 공주마마께서는.

안희를 지긋이 바라보던 찬희는 저도 모르게 안희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안희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안희는 그런 찬희의 행동에 놀라다가도 그 어깨에 얼굴을 얹고서 더 크게 울었다.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안희의 등을 토닥이면서 찬희는 제 눈에도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훌쩍이면서도 참아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안희에게 말을 걸었다.

“슬플 때는, 울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큰 소리로 우는 안희에게 그런 말이 들릴까 싶었지만, 어린아이가 용케 같이 울지 않고 위로하려는 것이 기특해 정안은 두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픈 것은, 그 사람을 향하는 마음이 무척이나 컸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컸던 만큼 슬픔도 그 자리에 차오르기 때문이라고요. 해서 슬픔이 쌓이면 그 마음을 담고 있던 둑이 터지지 않게 울라고 하셨습니다.”

찬희의 말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안희의 울음은 여전히 줄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찬희는 코를 훌쩍이며 제 말을 이어나갔다.

“슬픔이 너무 쌓이고 고이게 되면 마음의 둑을 무너뜨리고, 그렇게 되면 마음만이 아픈 것이 아니라 몸까지 아프게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찬희의 말에 희수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희수의 내자이자, 찬희의 어미인 유사는 안희의 어미인 희유보다 몸이 약했고, 찬희를 낳고 난 이후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유사는 찬희가 자신을 보더라도 슬픔에 가슴앓이를 하지 않도록, 자신이 떠나도 슬픔에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늘 찬희에게 슬픔은 감추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무척 영민한 아이구나. 그래, 그래서 찬희도 많이 울었더냐?”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한 미소가 어딘지 달라진 것이 보였지만, 그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은 찬희는 작은 얼굴을 끄덕였다.

“늘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마당을 걷지 못할 때는 속이 상하고 슬퍼서 아버님께 안겨 엉엉 웁니다. 그러면 가슴을 찌르르하게 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제 경험으로 위로를 해주었고, 제가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안희가 겪고 있는 곁을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함으로 이뤄진 아픔이 쉬이 가시지는 않을 터.

안희는 찬희의 말에 더 서럽게 울고, 또 울다가 자신과 비슷한 품을 푹 적시고 눈이 퉁퉁 부어오를 때가 되서야 겨우 눈물이 멎어 찬희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제 좀 괜찮으냐?”

“....... 예, 아바마마.”

한참을 울고 난 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정안의 얼굴을 마주하고, 자신이 슬픔과 설움을 쏟아내고 나서야 어린 안희에게도 제 아비의 미소가 마냥 다정하고 따스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바마마가 짓는 미소가, 저렇게 슬퍼보인 적이 있었나? 늘 태양처럼 밝고 따스한 느낌만 들었는데.

그러고 나서야 안희는 제 앞에 서있는 찬희와 주아를 바라보게 되었다. 찬희가 했던 말처럼, 혹여나 어린 딸아이가 슬픔에 매몰될까. 그런 걱정을 가지고서 잠시나마 위로가 될 수 있는 곁을 마련해주려 했다는 것을.

안희는 찬희와 주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와주어서...... 고마워. 내가 경황이 없어, 너희에게 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난 세자저하의 여식인 안희라고 한다.”

안희의 말에 찬희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제 몸의 반을 접어가며 마주 인사를 했고, 뒤에서 찬희의 모습을 보며 훌쩍이던 주아도 얼른 찬희의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손을 모으지 않고 허리를 숙이는 통에 양손이 뒤로 쭉 뻗어지는 모습에 정안과 희수는 웃었고, 소하는 진땀을 빼며 같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보게, 전수. 주아가 너무 귀엽지 않은가?”

“화, 황공하옵니다, 저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채로 대답을 하는 소하를 보면서 정안과 희수는 다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곧 아이들을 보고는.

“안희야, 아비와 벗들은 이만 가봐야 하겠구나. 새로 동무가 된 아이들과 함께 후원에서 같이 놀려무나. 못이 깊지는 않다만, 그래도 조심히 놀아야 하니라.”

정안의 말에 안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아바마마. 저는 주경이를 돌볼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희유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적부터 안희는 보모상궁과 함께 돌보면 된다며 어린 주경의 곁을 계속 지켰다.

여섯 살도 아직 한참이나 뛰어놀아야 하는 어린 나이인데도, 저보다 더 어린 아우를 돌보며 처소에서 잘 나오지 않는 것이 정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데려온 아이들이었는데.

“아니다, 안희야. 보모상궁과 김 상궁이 있으니 오늘은 주경이 걱정은 접어두고 너를 만나러 온 동무들과 함께 하려무나.”

“하오나, 아바마마.”

그래도 제 아우가 걱정이 되는지 다급하게 나서려는 안희를 보며 정안이 고개를 저었다.

“네 동무가 되어준 아이들은 늘 궐로 찾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허니, 오늘은 이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지 않으련?”

정안의 말에 안희는 잠시 넋을 놓은 듯 했으나, 곧 찬희와 주아를 흘긋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안은 그런 안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 아비는 다녀오마. 찬희야, 주아야. 안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라. 서 상궁, 소주방에 일러 아이들이 먹을 찬에는 고기를 꼭 올리라고 전해주게. 한참 뛰어놀아야 하는 아이들이니 말일세. 아, 그리고 생과방에 일러 다과도 준비하라 이르고.”

그리고는 다시 아이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눈을 마주했다.

“찬희와 주아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안희는 다식과 시원한 오미자차를 좋아하는데.”

정안의 물음에 주아는 손을 번쩍 들고는 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저는 옥춘당이요!”

“그래, 주아는 그러하구나. 찬희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정안의 시선이 찬희를 향하자 찬희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갑자기 의젓하던 아이가 낯을 가리나 싶어 희수를 바라보자, 희수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주마마께서 좋아하시는 다식과 오미자를 찬희도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좋아하신다 하셔서 쑥스러운 모양입니다.”

희수의 말에 안희는 찬희의 팔꿈치를 살짝 잡아당겼다.

“정말? 너도 다식이랑 오미자를 좋아해?”

안희의 말에 찬희는 얼굴을 붉히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희는 손뼉을 치면서 잘됐다는 말을 했다.

“오라버니들은 내가 다식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 퍽퍽한 것이 뭐 그리 좋냐며 매번 유과를 입에 넣어주시거든. 근데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네. 그치?”

아까 슬프다며 엉엉 울던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인지. 자신과 같은 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만난 것이 그리도 좋은 모양인지 안희의 웃음은 햇살처럼 밝았다. 그 웃음이 찬희의 가슴에 콕 박혀있다는 것은, 찬희도 뒤늦게 깨닫게 되었지만.

그렇게 떠올리면 햇살과 함께 미소가 떠오르는, 안희가 찬희의 가슴에 선명히 새겨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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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주기가 4일에서 5일로 변경됩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GL러버💕 읽는 것에 환장하고 쓰는 것을 좋아해요🦊💕 onlyonedayS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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