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부 윤대협과 전학생 서태웅.

1편 : 


윤대협의 책상 위로 단풍잎이 불어 들어와 앉은 건 그때였다.

서태웅은 세상모르고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고, 대협은 그런 서태웅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서태웅은 아무렇지 않게 윤대협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파놓은 잔잔한 연못에 돌덩이를 던져 놓고 태평하게 등교를 하고 잠을 자고 꼬박꼬박 도서관에 얼굴을 내밀었다. 

만난 지 이틀 만에, 둘 사이에 폭탄을 떨어트린 서태웅은 대협이 대답을 하지 않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레모나 박스를 대협에게 밀쳐 놓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 때문에 화가 난 거지, 생각하고 있는 찰나 서태웅이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와 대협이 앉은 자리 앞에 섰다.

"몇 명인데?"

"...뭐가?"

"몇 명이랑 키스해 봤냐고."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수만 개 떠올랐지만, 대협은 이쪽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에 시선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한... 일곱...?"

서태웅의 검은 눈이 동그래졌다.

"일곱?"

대협은 목덜미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아마 그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대협의 말 없는 대답에도 서태웅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대협을 쳐다보던 서태웅은 결심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드르륵.

천천히 문을 닫고선.

아무래도 반에 또라이 한 명이 들어온 것 같다.

그것도 같은 남자도 홀릴 만큼 예쁜 또라이가.

대협은 책상에 안착한 단풍잎을 주워 교과서 페이지 속에 끼워 넣었다.

서태웅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날 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저 웃긴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안영수에게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영수에게는 서태웅에 대한 말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도서부에 입부했다는 사실조차 어쩌다 보니 숨기게 되었다. 

그 일이 있던 날은 대협의 기억에 생생히 박혔다. 특히 자신을 바라보던 서태웅의 눈이. 단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곧게 쳐다보던 그 새카만 눈은 이제 보지도 않고 그릴 수 있을 만큼 또렷했다. 기억이 조금만 더 선명했다면 아마 그의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윤대협은 아무에게도 그날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아마 그런 경험은 생전 처음이어서 그런 거겠지. 살면서 저렇게 의뭉스럽고 이상한 애는 처음이니까. 

"자, 다음 주부터는 문화제 준비 기간이니까 잘 상의해서 좋은 모습을 선보일 수 있도록 해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종례를 마쳤다.


서태웅이 놓고 간 레모나는 사서 책상 서랍에 고이 보관해 두었다. 대협은 오늘도 레모나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놓고는 상자를 열어 하나를 뜯어 입에 털어 넣었다. 서태웅은 뭘 하는지 아직 도서관에 오지 않았다. 종례 시간에도 자고 있더니, 혹시 아직도 자고 있나?

하지만 대협은 굳이 서태웅을 찾으러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없으면 좋았다. 서태웅을 보고 있으면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러면서 대협은 레모나 하나를 더 꺼내 먹었다.

익숙한 발소리가 들린 건 레모나 껍질을 버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천천히 열린 미닫이문 뒤에는 익숙한 표정의 서태웅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처음 보는 얼굴 하나. 대협은 저도 모르게 손안에 쥔 레모나 껍질을 움켜쥐었다.

"늦었네?"

그렇게 말하는 대협을 쳐다보던 서태웅은 말없이 시선이 아래로 깔더니 함부로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둘은 도서관 깊숙이 사라져버렸다. 아마 가장 끝에 있는 서고로.

첫 키스는 레몬 맛이 나지 않는다. 

대협은 레모나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생각했다.

그냥 허무한 장난이었을 뿐인데.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지.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니까. 서태웅 같은 놈 주변에 흑심을 품은 사람들이 꼬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나?

알고 있었잖아. 첫날부터 너 잘 알고 있었잖아.

대협은 그대로 도서관을 나가버렸다. 

조용한 복도를 거닐며 대협은 시간을 가늠했다. 언제쯤 다시 도서관에 돌아가야 서태웅이 달고 온 파리를 마주치지 않아도 될까. 1학년 때부터 가꿔온 도서관이 갑자기 오염된 느낌이었다. 입 안이 텁텁했다. 큰 애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도서관에 갑자기 이방인이 허락도 없이 들어왔고, 그 이방인은 자기 마음대로 대협이 정성스레 그려놓은 경계를 흩트려 놓았다.

"내 도서관인데... 내 건데...."

대협은 혼잣말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대협은 왔던 길을 다시 뛰다시피 되돌아갔다. 


쾅소리 나게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는 선생님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고 대협은 서태웅이 있으리라 생각한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서태웅은 복도 쪽으로는 등을 보인 채 자기가 데려온 애의 앞에 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뭐하냐?"

어지러이 나온 목소리는 타인의 것처럼 들렸다.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서태웅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아, 고마워."

서태웅의 앞에 서 있던 아이는 그 책을 재빨리 받아 들더니 난감한 듯 눈치를 살피고는 얼른 자리를 빠져나갔다.

대협은 눈을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왜 늦게 오냐고.... 부활동 시작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도서관에 울렸다. 솔직히, 윤대협도 자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왜 방금 전까지 들끓던 화가 이제는 파도에 휩쓸리듯 싹 사라져 버렸는지.

하하, 지금 저렇게 물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크흠, 아 태웅아, 우리 문화제 때 뭐 할까?"

대협은 옆의 책꽂이에 팔꿈치를 걸쳤다가 다시 내리고는 물었다. 서태웅은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책장 앞에 서서 대협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왜? 내가 쟤랑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

서태웅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구나. 

"태웅아, 그게...."

그때, 멀리서 선생님의 커다란 하품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미동 없던 서태웅도 움찔했다. 그제야 대협은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너야 말로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어?"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대협은 푸흣,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손을 올려 눈을 반쯤 가린 서태웅의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겨 주었다.

"응? 태웅아."

"...키스."

"응?"

그리고 난데없이 서태웅은 얼굴을 쳐들고 대협의 입술에 제 입을 부딪혀왔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생각할 새도 없이, 서태웅이 밀어붙이는 힘에 밀려 책장에 기댄 대협은 커다랗게 뜨고 있던 눈을 천천히 감아봤다.

요령도 그 무엇도 없는 입맞춤이라니. 이건 키스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그냥... 입술 박치기 정도...?

그래서 그냥 서태웅이 원하는 대로 하게끔 가만히 있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힘겹게 삼키면서. 서태웅이 남자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과 일주일 전에는 생전 처음 본 사람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제일 문제인 건, 서태웅이 키스가 뭔지 모른 다는 거였다.

대협은 서태웅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살짝 밀어보았다. 그제야 서태웅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뒤로 물러났다.

"입에 힘 좀 풀어볼래?"

선생님이 들을까 속삭이듯 말한 대협을 뾰족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서태웅은 그의 말에 따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에서 힘을 뺐다.

대협은 저를 올려다보는 서태웅의 허리에 살며시 팔을 두르고, 서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벌어진 입술에 숨결이 닿았을 때,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을 혀로 문지르며 대협은 서서히 서태웅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팔 안에서 움찔거리는 게 느껴지자 대협은 더 깊이 그에게 기댔다.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기분이 좋은데, 굳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대협은 서태웅의 입술을 머금고, 혀로 그의 입 안 구석구석을 핥아주는 데 집중했다.

서태웅은 달콤했다. 

처음 그가 온 날 불었던 그 바람처럼. 


한참 동안 서태웅을 붙잡고 있던 윤대협의 입술이 떨어지자 서태웅은 생각했다.

'진짜... 레몬 맛이네.'



원래 두 편만 생각했으나 쓰다 보니 더 쓰고 싶은 태웅이 시점의 이야기도 쓰고 싶어서 번외편을 쓰게 될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I ram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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