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실조
04

w. hiver






경기를 끝내고 나면 집으로 보내지 않고 꼭 학교에서 해산하는 감독님 때문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복도에 건물 그림자가 커져서 몇 시인지 잘 가늠할 수 없는 정도. 바닥과 슬리퍼가 마주치는 소리만 들리는 텅 빈 학교. 나와 왕이에겐 지금 이 시간이 훨씬 익숙하다. 혹시 아직 남아있을까 싶어 왕이네 교실로 갔더니. 그림자에 덮여 있는 왕이가 보인다. 책 위에 펜을 잡은 손 그대로 엎드려서 내가 다가가는지도 모르고 깊게 잠들어 있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펜을 쥔 주먹이 너무 작아서 내 손에 잡히면 주먹이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항상 잘 정리 되어 있는 귓가의 머리카락, 가만히 다물고 있어도 샐쭉 올라가있는 입꼬리. ‘되게 예쁘다.’ 감겨있던 눈을 천천히 뜨는데, 어... 천사 같다.




“왔어?”

“왜 아직 학교에 있어.”

“너네 경기 끝나면 학교로 오잖아.”

“그래서 있었어?”

“응.”

“착하네.”




‘내가 좀 착하지.’ 눈꺼풀이 무거운지 다시 눈을 감고 아주 살짝 미소 짓는다. 웃는 입술로 나른하게 말하는 걸 보고 있는데 가슴 근처 어딘가 싸하게 이상한 느낌이 든다. 체한 것도 아니고 진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간질간질.




“왕아,”

“응..”

“나 좀 기분이 이상한데.”

“왜?”

“몰라. 이게 무슨 기분인지.”

“어떤데.”

“아픈 거 같기도 하고.”

“기분이 아파?”




잠이 가득 든 눈으로 몸을 일으켜 양손으로 턱을 받치더니 앞에 있는 나를 쳐다본다. 안경이 없는 눈을 정면으로 보는 건 오랜만이라 나도 같이 양손으로 얼굴을 받쳤다. ‘경기는 어땠어?’ 또, 바람이다. 왕이 머리가 흔들리니 왠지 아까 그 간질거림이 더 심해진다. ‘열심히 뛰었어?’ 야오왕은 시합 후에 한 번도 이겼는지 졌는지 물었던 적이 없다. 열심히 했는지 최선을 다했는지, 그리고 경기 후의 나는 어떤지 물었지.




“엄청 열심히 했지!”

“그럼 됐어.”

“내가 골 2개나 먹였어.”

“역시.”

“잘했어?”

“응.”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까딱,
볼에 바람을 가득 채우고.




“야오왕아-”

“왜.”

“고마워.”

“뭐? 왜?”

“내 친구 해줘서.”




난 모르는 게 너무 많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시합준비 하느라 시험공부 잘 하고 있는지도 안 물어봤네.




“양예밍.”

“응?”

“난 ‘해주고’ 있는 거 아닌데.”

“음?”

“어려운 말 싫지?”

“어- 싫어.”

“나도 그냥, 너 좋아하는 거야.”




아, 가슴 안쪽 간지러운 기분이 쫙 퍼져서 손끝까지 이상하다. 왕이도, 좋아하는 구나.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있다. 어려운 거 싫다고 방금 전에 말했는데. 마주보고 있는 자세 그대로 한 번도 더듬지 않고 조기졸업에 대해 말하는 야오왕. 모르겠다고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 같으니까 그냥 열심히 들어줘야겠다. ‘선생님이 해도 괜찮대.’ 교무실에 다녀 온 이야기까지 하고서야 끝났다.




왕이 가방을 앞으로 메고, 어깨동무를 하고. 팔에 닿아있는 왕이 목이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어깨가 생각보다 단단하다고도 생각했다. 키가 자랐어도 팔을 걸쳐 내 옆에 딱 맞게 끼워 걷는 데는 문제없다.




“야, 오늘 누가 너 마크했냐?”

“한 3명 있었지.”

“뭘 그렇게 세게 했대?”

“무슨! 내가 다 처리했는데!”

“너 광대 부었는데.”

“나?”

“어, 여기.”




운동장 한가운데 우뚝 서서 눈 아래를 손으로 꾹 누른다. 뻐근하게 아픈 걸 보니 밀리면서 어딘가 부딪쳤나보다. ‘아야!’ 깜짝 놀란 얼굴로 얼른 손바닥을 펴 얼굴을 감싸준다. ‘장난이지롱.’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벙긋벙긋- 어, 야오왕 욕도 하네.




“호- 해줘라.”

“웃기시네.”

“너 때문에 아프잖아.”

“엄살이야.”

“아아-”




야오왕이 재미있어 하는 앓는 소리와 우는 소리 섞어 내기. 가까이 와서 후- 내가 원하던 호- 와는 거리가 먼 ‘바람 불기’. 오늘 경기하다가 어딜 다치기라도 한 건가 정말 가슴이 이상하네. 심장도 너무 빨리 뛰어서 머리가 아프다. ‘왜? 너 진짜 아파? 야!’ 잠깐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정말 이상하네.







“우림아,”

“이름을 왜 불러, 무섭게.”

“있잖아.”




물어 볼 사람이 동우림 밖에 없었다. 헬맷을 쓰다 말고 우다다- 얘기하니 고개를 갸우뚱 ‘나 이거 어디서 들은 적 있어.’ 누가 나랑 똑같이 이상한 사람이 있어? 진짜 어디가 아픈 건가?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크게 넘어갔다. ‘나 병원 가야 하냐?’ 울고 싶다. 나 진짜 하키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우리 형이.”

“형?”

“형이 여자친구한테 고백하러 가기 전에,”

“…….”

“지금 너랑 비슷하게 말했는데.”

“어..?”

“근데 넌 아니잖아.”

“…….”

“어제 언제 그랬는데? 너 진짜 병원 가야 될 수도.”




‘넌 여자친구도 없는데 가슴이 왜 간지러워?’ 병원을 가야겠다며 노래를 부르는 우림이를 따라가서 혼내줘야 되는데. 코치님한테 기합 받기 싫으면 지금 빨리 나가야 되는데. [나도 그냥, 너 좋아하는 거야.] 왠지 지금 야오왕이 엄청 보고 싶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안 되는데 저녁을 먹고 누웠을 때부터 계속 야오왕 목소리만 귓가에 맴맴. ‘나도 그냥, 너 좋아하는 거야.’ 좋아한다. 좋아한다. 12시가 넘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일어나서 운동을 할까. 분명 깜깜하고 불빛이 하나도 없는데 천장에도, 벽에도, 책상 위에도, 자꾸만 왕이가 보인다. 이러다간 꼬박 밤을 샐 것 같다.


‘양예밍! 일어나야지!’ 엄마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아침이다. 해가 조금 뜨는 걸 보다가 잠들었는데. 멍하게 앉아 방을 조금 둘러봤다. 밤에 가득하던 야오왕은 없어지고 다시 내 방이다. 겨우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하는데. 아, 오늘은 정말 하루 종일 책상에 엎어져서 자야겠어.





아침구보를 뛰는 내내 머리가 쿵쿵 울려서 어지러웠다. 여름방학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햇빛에 모래가 지글지글 끓는 것 같다. 아무리 하키부가 시험을 열심히 치지 않는다지만, 시합이 끝났는데도 시험기간인데도! 훈련이 줄어들지 않아서 괴롭다. 기합도 아니고 이렇게 덥고 힘든 날 지상훈련을 시키는 코치님. 미친 건 아닐까. 긴 시간도 아닌데 더 이상 뛰면 맞아 죽든지 말든지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체력이면 세 발자국도 못 가서 잡히겠지만. ‘양예밍! 똑바로 안 할래?’ 아, 제발 그만 부르세요.




“야, 양예밍. 너 왜 그래?”

“밤샜어.”

“뭐? 왜? 설마 시험공부?”

“미쳤냐.”

“근데 왜 밤을 샜어?”

“그럴 일이 있어.”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시험이고 뭐고 책상에 엎드렸다.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아- 정말 아플 건 가봐. 


눈치를 보면서 찍기는 했는데 실컷 자고 일어나니 이제 좀 성적이 걱정된다. 왕이가 찍더라도 문제는 읽고 찍으라고 했는데. 왕이, 야오왕, 학교 와서 왕이에게 한 번도 안 갔네... 아아- 오늘 훈련은 못하겠다고 말해야지,




“양예밍!”

“...어?”




집에 가려고 교실을 빠져 나가던 애들도 모두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잘 뛰지 않는 야오왕이 순식간에 내 앞으로 와서 머리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괜찮아?’ 묻는다.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왠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태 미운 일곱살처럼 굴어서 왕이가 나를 [밍밍] 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동우림은 야오왕이 내게 [밍밍]이라고 할 때마다 소름 돋는다며 저 멀리로 피해 버린다. 야오왕이 머리 만져주면서 불러주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면서. 아무도 몰라. 모른다. 코가 시큰시큰, 입술까지 마음대로 삐죽거리는 바람에 야오왕은 당장이라도 뭐든 할 것처럼 발을 굴렀다.




“너 밤 샜다며,”

“응..”

“아프다던데? 어디?”

“…….”

“병원 갈까? 같이 가줄게.”

“왕아-”

“응?”




다, 야오왕 때문이다. ‘밍밍?’ 착하고, 다정한 야오왕 때문이다. ‘햄버거 먹을까?’ 예쁘고 똑똑한 야오왕 때문이다. 다 너 때문이야. 엄마한테는 이제 컸다고 방에도 못 들어오게 하고 속옷 빨래도 내가 한다고 했는데. 왜 자꾸 왕이 앞에서는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지. 말을 하지도 일어나지도 않는 나를 보고 있다가 옆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나한테도 말 못할 일이야?”

“…….”

“엄청 서운하네!”

“…….”

“밍밍, 슈퍼스타 된다고 나 버리면 안 돼.”

“…….”

“응? 피곤하다고 나랑 안 놀아주면 안 돼.”

“…….”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혼내주지. 내 표정이 안 좋아서 그런가, 옆에 자꾸 가까이 와서 쳐다보며 장난을 친다. ‘오늘 훈련은 못 한다고 말해 줄까? 갔다 올까?’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는 왕이에게 미안해서 얼굴을 못 쳐다보겠다. ‘갔다 올게, 기다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일어나서 가려는 왕이를 꼭 잡고 싶었다. 넘어질 뻔한 야오왕을 끌어안고 있으니 ‘...진짜 무슨 일이 있나 본데?’ 다행히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왕아,”

“응.”

“나 있잖아..”

“양예밍, 너 무슨 사고 쳤냐?”

“나....”

“아, 빨리 말해! 답답해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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