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고 왔다고?"

과연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가, 레예스는 살펴보던 보고서를 내려놓고는 언짢은 눈초리로 자신 앞에 서있는 맥크리를 올려다보았다. 

"사령관님께 가서-
"내 앞에서 굳이 존칭 붙이지마."

맥크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한번 크게 굴린 후 말을 이어나갔다.

"모리슨 사령관에게 한 번만 더 징계 처분에 대해서 생각해달라고 말하고 왔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하고 왔어?"

맥크리는 꺼림칙하다는 듯이 레예스의 눈을 피했고, 당연히 레예스는 이때다-싶어 꼬투리를 놓지 않고 맥크리를 계속 압박해나갔다. 

"정말 글자 그대로 '징계 처분에 대해서 한번만 더 생각해주십쇼.'라고 말하고 왔냐고."
"...아뇨."
"숨기려고 하지 말고 다 털어놔, 제시 맥크리. 정확히 뭐라고 하고 왔는지 말해."

이미 맥크리는 자신이 간파당했다는 걸 알고 있다. 평소라면 자신이 졌다면서 순순히 털어놓으려 하겠지만 오늘은 유독 입을 쉽게 열지 않는다. 도대체 왜? 어차피 불게 될 거면서. 레예스가 굳이 호통치거나 소리지르지 않았던 이유였다. 어차피 자신은 답을 가져갈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상대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맥크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일부러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작전인건가, 마음 한 켠이 살짝 간지러운 듯했지만 레예스는 연연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고 곧 보상을 가져갔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왔습니다."
"네가 뭘 잘못했다고-"
"안토니오 그 놈의 도발에 넘어가 감정적으로 반응한 것도 저고, 그 과정에서 그 놈에게 총을 쏜 것도 저라고 말하고 왔습니다. 실망시켜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리고 왔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벌은 제가 혼자 달게 받을테니 팀 전체의 징계는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왔고요. 이제 됐어요?"

한번 입이 열리니 맥크리는 고해성사하는 이처럼 하나하나 내뱉었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아예 레예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는데 본인이 예상했던 것처럼 레예스가 반응했기 때문이다. 맥크리의 경험 상 레예스의 침묵은 영 좋지 않은 전조현상이었다. 레예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큰 소리나 큰 동작 없이도 타인을 자유자재로 지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점을 맥크리가 모를 리 없었고, 답답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정적을 깼다. 

"혼내실거면 빨리 혼내시죠, 이러는게 더 불편하다고요. 빨리 다 내뱉어봐요 할말 많잖ㅇ-."
"너에게는 도대체 '사과'가 뭐냐?"

레예스가 자신에게 던질 수많은 폭언들이 맥크리의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저 말은 없었다, 정말 비슷한 말도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고,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맥크리는 마른 침만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사과... 음 그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하는거 아닙니까."
"그건 표면적인 것들이잖아."

레예스의 어조는 그 어느때보다도 평온했다. 너무 잔잔하다면 잔잔했지, 흥분과 분노와는 전혀 거리가 멀어보였다. 맥크리는 레예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슨 심정인지를 파악해보려 했으나 레예스는 역시 끄떡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레예스를 바라보는 순간순간 맥크리 본인이 얼마나 눈치 없는 인간인지 간파당하고 있다는 것만을 뼈저리게 느꼈을 뿐, 맥크리에게 돌아오는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란 말입니다. 아니면 때려도 좋으니까 이렇게 날 옥죄지 말아달라고요. 물론 이 말들은 올바른 상대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긴장으로 인해 고조되고 있는 맥크리의 머릿속에만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레예스가 화났을 법한 진짜 이유가 떠오른 것은 혼란스러운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지금 내가 뭐, 사과에 진심 같은걸 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화난건 아니죠?"

레예스는 미약하게나마 아까와는 다른 눈빛을 보였고, 맥크리는 곧 자신이 레예스가 어느 정도 듣고 싶었던 답을 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화난 이유가 내가 사과에 진심을 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라니. 레에스가 맥크리에게 화가 났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맥크리 또한 화가 났다. 설사 내가 진심을 담지 않은채로 사과했다고 해도 그게 쉬웠을 줄 알아? 칭찬을 듣고 싶어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도리어 자신에게 잘못을 따져버리니 맥크리는 더 억울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최선을 다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다 했다고요. 우리에게 돌아오는 피해를 막기 위해서 한건데 뭐가 그렇게 아니꼬운겁니까?"
"네가 했다는 그 사과는 이기적이었어. 잘 생각해봐, 네가 했던 그 행동에 정말 '우리'가 존재했나?"

레예스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크고 확고한 목소리로 맥크리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맥크리는 그제서야 레예스가 정말로 분노를 힘들게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신도 마음 속에 불꽃이 일렁이지만 잠시 동안이나마 상대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할말은 해야겠으니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지금 저보고 이기적이었다고 하는겁니까? 내가 설마 영웅놀이 하려고 사령관실에 찾아가서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네고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하 정말, 오히려 당신이 했어야 할 일 내가 해줬으니까 고맙다고 해야할 판에-"
"그게 핵심이다, 제시."

제시, 제시.. 레예스는 왠만해서는 맥크리의 성이 아닌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어떤 감정이든 레예스가 가장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을 순간에만 그는 맥크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중 나름의 애원과 호소, 또는 답답함이 모두 섞인 감정이 표출될때 유독 레예스는 맥크리를 제시라고 불렀다. 아무리 눈치가 느린 맥크리일지라도 이 점을 모를 수는 없었으며 그제서야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며 레예스를 돌아봤다. 아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레예스의 눈빛에 서린 감정은 단순한 분노나 화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빛이었음을.

맥크리는 곧 문이 닫히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문을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열어두기 위해서 발을 비집어 넣어본다.

"대장, 내가-"
"두 번 반복 안 한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결국 맥크리는 이미 그 거대한 문이 닫혔음을 깨닫고는 밖으로 나와 벽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젠장, 젠장, 젠장! 입 밖으로도 몇번이고 내뱉고 싶은 욕이었지만 탈출하지 못한 채 속을 어지럽게 휘저을 뿐이었다. 토할 것처럼 속이 뒤엉킨 상태였지만 맥크리는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레예스를 실망시킨 이유를 찾고서 그에 대해 솔직하게 레예스에게 말한 다음에는, 그러니까 그런 다음에는...

우선은 이 공간을 벗어나야겠다. 계속 여기서 알짱거리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테니까. 맥크리가 고민 끝에 내린 가장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 




"상황은 대충 잭에게서 들었어. 그러니까 지금 네 고민은..."

맥크리는 여느때보다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는 아나의 눈을 피했다. 모자의 어두운 챙에 가려져 굳게 다문 입술만이 아나의 시선에 들어올 뿐이었다.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해나가야 되냐겠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사령관님."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니, 제시? 

맥크리는 다시 한번 입을 굳게 다물고는 정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리 할 말이 있음에도 내뱉을 수 없어 분하고 답답한 감정이 섞인 듯한 표정이었고 아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시, 왜 가브리엘이 네게 화가 잔뜩 났다고 생각해?"
"대장은 제게 화만 난게 아니었어요."
"그래?"
"그건..."

맥크리는 몇 시간 전의 기억 속 레예스를 떠올렸다. 다른 것은 흐릿해졌어도 여전히 자신을 향한 눈초리는 선명했다. 꾸준히 쌓아왔던 마음 속 어떤 것을 본인의 손으로 무너뜨렸다는 생각에 더 아찔할 뿐이었다. 

"실망의 눈초리였겠지?"

덤덤하게 말하는 아나의 목소리에 맥크리는 잠시 고개를 올려 아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나는 늘 그랬듯이 모든 걸 이해한다는 너그럽고도 여유로운 표정의 소유자였고, 맥크리는 더 부끄러워져 다시 한 번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면, 가브리엘 레예스는 왜 네게 실망했을까? 제시, 한 번 네 생각을 말해보렴."

아나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동시에 그녀는 지휘관이었다. 지휘관답게 그녀는 어떤 문제든 그녀만의 방식대로 풀어가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능력은 언제나 맥크리의 존경심을 샀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차분하게 엉킨 실타리를 풀어나가는 아나의 모습에 맥크리는 말라가는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건 제 몫이 아니었으니까요."
"더 자세히."
"모리슨 사령관님께 가서 사과하는 건... 제 몫이 아니었으니까요."

잠시동안 아나도 아무말을 하지 않은 채 정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의 정적은 더 이상 맥크리에게 있어 조금 전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적을 통해 차분함과 냉정함을 되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남이 하는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어요. 애초에 해야 할 사람이 하지 않은 사과인데 진심이 담겼을 리가 없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제일 중요한 하나가 빠졌어."

다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더 잘못한 게 있는건가? 난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빼먹은게 있다고? 불쾌한 감정이 다시 몸을 휘감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책임, 넌 그걸 잊고 있었단다, 제시."
"..네?"
"사과에는 책임이 뒤따라온단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한다는 건 단순히 진심을 담는 걸 넘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도 담겨있는 셈이지. 그리고 이번 일에 책임을 질 건 네가 아니었어, 제시. 이번 일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그게 바로 가브리엘 몫이었던거지."

책임, 그게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이었구나. 맥크리는 벙찐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표정은 결국 자신이 내렸던 결정이 순전히 본인의 이기적인 욕심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리고 책임감은 그 욕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깨달음과 자책감이 한데 섞여 어지러워지고 있던 찰나, 풀썩 기가 죽은 맥크리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린 뒤 말을 이어나갔다. 포근함과 견고함이 고루 실린 느낌이 들었다. 

"너무 기죽지 마. 잘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건 그만큼 가브리엘이 너를 많이 신뢰했다는 증거 아니겠니?  그러니까 허리 피고,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사과 하러 갈 생각이나 하렴."
"그렇지만..."
"그렇지만?"
"진정한 사과라니,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사과의 기본도 알고 있지 못했는걸요."

여전히 맥크리는 길을 잃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나는 곧 맥크리의 표정은 단순히 길을 찾지 못해 곤란해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올바른 길을 찾았고 길을 헤쳐나갈 방법도 알고 있지만, 뭔가가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맥크리에게 아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곧 아나는 차게 식은 머그를 들고는 에헴-하는 작은 기침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던 맥크리는 그녀의 인기척에 현실로 돌아와 일어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난 조언자지, 대변자가 아니란다. 실행은 네 몫이야, 제시."

실행은 네 몫이야. 덩그러니 혼자 남은 공간에서 맥크리는 이 마지막 한마디를 곱씹었다. 이 한마디는 결국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솔직한 사과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오직 그 자신만이 행할 수 있을뿐. 한 번 실망시킨 것이 두려워 멈춰서 있는 건 오히려 더 큰 실망만을 불러 올 것이다. 그리고 맥크리는 그것이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큰 파멸이 될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가브리엘 레예스는 제시 맥크리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과정이 어떻든 끝까지 잡아끌어준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실망의 눈초리는 어떤 욕이나 폭력보다도 고통스러웠고 공포스러웠다. 이러한 생각의 고리는 곧 맥크리의 마음 속 확신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블랙워치 총사령관의 신임과 가브리엘 레예스 개인의 믿음, 그 어떤 것도 제시 맥크리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예전에 앙겔라가 레예스에 대해 이야기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경험상 가브리엘은 사람은 거부해도 술은 거부하지 않더라고. 맨날같이 구박받는 네 인생이 불쌍해서 내가 친히 알려준다. 마침 운 좋게도 숙소 침대 안쪽에 숨겨둔 위스키 한 병이 있었다. 마냥 가볍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아까의 무거움은 어느정도 덜어낸 발걸음으로 그렇게 맥크리는 자리를 떠났다. 자신을 향한 믿음을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행해야 할 책임을 갚기 위해서.

쓰고 싶은 것을 씁니다

Ette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