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남은_기숙사에서 #단둘이 #감기 #쌍화탕 #맛없어 #미친놈인가



#01



둘 다니는 대학교는 유명한 산 중턱 고립된 국공립 ■■대학교. 학기가 끝난 뒤 겨울방학이 찾아왔음. 학기 중에는 꽤 북적이던 기숙사였지만, 방학 기숙사 신청을 한 사람도 얼마 없었을 테니까 한산하고 꽤 을씨년스럽기도 했음.

물론 그 방학 기숙사에 남은 사람 중 한 사람인 김독자(국문과)는 이 분위기를 꽤 맘에 들어 했겠지. 솔직히 공립이다 보니 난방도 이정도면 빵빵하고 룸메도 없고 와이파이는 무료고 꿀이다 이거야. 취식이 불편하긴 하지만 점심 학식은 운영되고, 산을 좀 내려가긴 해도 편의점도 열고 있고 원래 그렇게 먹는 거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김독자는 적당히 학내 도서관 알바나 하면서 유유자적할 거 같다.

그리고 그런 방학 학교를 즐기던 김독자가 정말 뜬금없이 유중혁을 만나게 된 건 한파가 몰려온 일요일 저녁이었음.

평소라면 냄새도 그렇고 남은 사람들에게 민폐일까(누군가와 연관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좀 컸음) 꼭 1층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 김독자였는데 그날따라 창문을 드르륵 열어보니 너무 추운 거야. 숨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퍼짐. 진짜 오늘은 나가는 거 무리일 거 같은데…. 조금 남은 기숙사생들도 보통 일요일에는 본가에 가니 제 기숙사 들어올 때 바로 위층이 빈방인 것도 확인했겠다. ‘오늘은 괜찮지 않을까?’ 하며 김독자는 창문 밖으로 몸을 살짝 빼고 담배에 불을 붙였음.

'허…. 살겠다. 춥다.'

담배 연기를 후 불면서 넋 놓고 있는데 위층에서 드르륵 소리가 났음. 김독자가 그 소리에 ‘아 누가 있구나.’ 하면서 담배를 얼른 끄고 가려고 마지막 한 모금을 급하게 빨던 순간이었음. 갑자기 촤악!하며 머리 위로 물이 쏟아짐 칙. 하고 담뱃불이 꺼지고 나와 있던 몸 탓에 어깨까지도 젖어서 차가운 겨울바람에 그대로 얼어버렸지.

뚝뚝.

몸에서 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지고 바깥과의 온도 차 때문에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음. 그리고 위로 드르륵 탁! 하고 날카롭기 그지없게 창문을 닫는 소리가 들림. 5층이었음.

김독자는 힘이 풀린 손에서 담배꽁초가 떨어지는 순간 추위와 어이없음으로 가출한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함.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지 방 창문을 닫고, 방구석에 놓인 수건을 겨우 찾아 머리를 대충 훔치고 바닥에 떨어뜨린 물도 닦았음.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막 어이가 없고 화가 나는 것이다.

‘이건 솔직히 정도가 심하잖아…! 이 겨울에 물세례라니…. 적당히 말 만해도 껐을 것을! 대학교의 전통적인 불만표출의 수단 포스트잇도 있는 판에…!’

쿵쾅거리며 걸어가서는 문고리를 잡은 김독자. 근데 또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성격상 문고리만 바로 나갈 것처럼 붙들어 쥐고 쉬이 올라갈 생각을 하진 못하지.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게 기숙사 문 앞에 붙은 ‘생활 규칙표’ 인 거야. 기숙사 금연구역 표시가 눈에 들어오고 김독자는 문에 머리를 박는다. 저 5층 망할 자식이 사감에게 찌르면 경고란 말이지 경고받으면 지금이야 안 쫓겨나도 다음 기숙사 신청 때 점수 깎이니까 가뜩이나 고학년은 기숙사 잘 안 받아주는데….

‘하…. ㅅ바….’

김독자 하는 수 없이 자기가 포션용으로 사놓은 초코 우유 하나를 들고 문을 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과받고, 사과하자. 세상 사는 게 넘나 험난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인성 쓰레기 놈’이라고 이미 지칭한 위층에 대한 욕을 속으로 계속해서 읊조리며 3층에서 5층으로 향함.


*


당연한 순서지만 물을 인성 쓰레기 놈은 당연히 유중혁이었다. 김독자와 같은 학년으로 체육학과인 그는 (합기도 특기) 전국 대회를 앞두고 학교에 남았음. 훈련용 전문 기구들이 있는 곳이 흔치 않다 보니 현재 집에 못 간 채 특훈 중이었거든. 아침에 나가서 오후까지 훈련하고 너무 요즘처럼 너무 추워지는 날엔 근육 경직 때문에라도 일찍 들어와서는 보통 방에서 조용한 근력 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음. (빈 룸메의 이층침대를 손가락으로만 붙들고 턱걸이라던가 한쪽 팔로 푸쉬업이라던가. 절대 소리가 나지 않는 케틀벨 스윙이라던가 했음.)

그렇게 운동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더워진단 말이지 방에 땀 냄새도 차고 유중혁은 어쩔 수 없이 창문을 조금 열고 운동하곤 했는데 늦게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밑에 골초가 사는 모양인지 저녁마다 담배 연기가 창문으로 넘어들어왔음. 확인을 해보니 그 원인은 제 바로 아래 4층이었지.

솔직히 며칠은 참았음. 그리고 안되자 유하게 의사를 전달했지. 포스트잇에서부터 직접 찾아가는 것까지 다 해봤음. 그리고 결국 면대 면으로 만나기까지 함. 문을 연 상대는 하얀 나시티 아래로 배를 벅벅 긁으며 곧 졸업한다고 하며 부루퉁한 태도로 '아, 네. 죄송함다.' 만 함. 그러고 바로 복수라도 하듯 방안에 담배 연기가 또 들어왔지.

결국, 가진 참을성은 다 끌어다 쓴 유중혁이었음. 뿌드득 주먹에 핏줄이 섰음. 체대생은 싸움 일으키는 순간 문제 될 확률이 높으므로 몸의 대화는 불가능했음. 몸을 만들기 위해서 음식도 끊고 몸에 안 좋은 걸 다 끊은 유중혁이 간접흡연에 시달리면서 미쳐가던 때, 그날도 마침 담배 냄새가 난거지. 문명인의 행동은 다 해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원시적 방법이다 싶었던 유중혁은 작게 열었던 창문을 마저 다 열고, 자신이 마시는 스포츠 물통 2ℓ짜리를 그대로 부어버린 거야. 올라오던 담배 냄새가 뚝 끊겼고 유중혁은 만족하면서 몸을 돌렸음.

얼굴을 봤던 그 복학생 성격상 바로 사람이 올라올 것이라 예상하며 유중혁은 마저 하던 푸쉬업 개수를 늘렸지. 뭐라고 하거든 나도 그냥 창문이 있기에 물을 버렸노라고 말할 참이었음. 바로 쿵쾅거리면서 올라올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그 사람은 푸쉬업 개수가 백 개쯤 돼서야 조용히 등장했지. 그것도 문을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만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임.

유중혁이 턱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서 문을 열지.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이 살짝 흠칫 거리는 게 보였음. 내려다본 시야에 눈이 맞고 유중혁은 (얼굴로는 절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살짝 당황했음. 알고 있던 그 얼굴이 아니었거든. 분명 밑에 있는 그놈은 군대 이후로는 자기관리라는 것은 해본 적이 없이 생겼는데, 앞에 있는 사람은 순간 창백한 안색과 젖은 머리에 귀신이라고 착각할 뻔했지만, 그것 외에는 긴 속눈썹이나 검은 눈동자나 하얀 티셔츠가 젖어서 피부에 들러붙었지만, 그 티셔츠가 티도 안 나는 하얀 피부나 추워서인지 살짝 푸른빛 도는 앙다문 입술이나 살짝 떨고 있는 연약한 마른 몸이 영 다른 사람이었거든.

'아이돌(처럼 비리비리하게) 생겼군.'이라고 유중혁은 순간 생각함.

그리고 유중혁이 놀란 것과 마찬가지로 김독자도 놀라고 있었음. 인성 쓰레기라 그에 걸맞은 외모(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화가 났다.)를 상상하고 왔더니 일필휘지의 짙은 눈썹과 시원하게 쭉 뻗은 콧날, 그림처럼 그려놓은 짙은 눈매와 검은색 눈동자, 베일듯한 턱선에 아래로 선이 굵은 목선을 따라 제법 큰 키와 다부진 근육이 느껴지는 몸까지…. 티비에 나오는 배우들의 얼굴을 후려칠 만큼 잘생긴 사람이었지.

제 이상과 부합하는 얼굴에 순간 물에 맞은 걸 잊어버릴 뻔했음. 그 사람이 사나운 얼굴로 사나운 몸을 하고 땀을 뚝뚝 흘린 채 예상한 듯 김독자를 보며 문 간에 몸을 기대고 팔짱만 안 꼈다면 말이지. 두꺼운 팔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보면서 김독자는 입술을 씹었지. ‘아씨…. 잘못 걸렸다.’ 김독자는 그 서슬 퍼런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을 내리깔았음. 그냥 방에 있을 걸 하는 깊은 후회가 밀려왔지

"뭐지?"

상대방은 목소리도 좋았어. 정말 책에서 읽는 낮고 깊은 목소리를 옮겨다 놓은 거 같았지. 아니 이런 생각 말자. 김독자가 가볍게 숨을 혹 내쉬었어. 일단 온 김에 할 건 해야지. 주먹을 쥐고, 고개를 팍 들고 눈을 마주했음. 상대는 놀랐는지 눈동자가 조금 커졌지 그래 봤자 아주 미미했지만.

“죄송합니다.”

김독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음. 상대가 자신의 행동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터라 정수리가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음. 별로 눈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따가움이었지.

“제가 오늘 진짜 너무 추워서 잠시 담…. 큼, 크흠. 그거…. 좀 했습니다. 제가 내년 긱사가 급해서 진짜 죄송한데 좀 넘어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겁니다.”

김독자는 솔직담백하게 제 잘못을 고했지. 상대는 딱히 무어라 대답이 없었음. 대신 흐음…. 작게 콧소리를 냈지. 마치 자신의 사과에 점수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걸 듣는 순간 김독자는 눌러놨던 화의 대가리가 삐죽 고개를 드는 느낌이 들었지.

“아니…. 뭐 핀 건 잘못하긴 했는데 물을 뿌릴 건 아니잖아.”

“뭐라고?”

김독자가 턱 제 입을 막았음. 생각만 한다고 했는데 말로 내뱉은 모양이야. 상대방의 그림 같은 눈썹이 삐죽 올랐지. 김독자는 그 얼굴을 향해 빙긋 웃었지. 그리고 품속에 가져온 초코 우유를 상대의 품에 넣지.

“정말 진짜 너무나도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아, 이건 사과의 선물이에요.”

“...”

유중혁은 받지 않은 채 뻔뻔스레 빙그레 웃는 김독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지. 제 귀가 나간 것도 아니고 아까 한 말도 못들을 정도의 소리도 아니었는데 시침 떼는 게 연극과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음.

“됐다. 필요 없다.”

응? 이게 아닌데? 김독자는 저에게로 휙 던져지는 초코 우유를 받으면서 눈을 똥그랗게 떴음.

“꼴을 보니 그쪽이나 많이 먹는 게 좋겠군.”

“ㅁ, 뭐…?”

“사과는 잘 받았다. 부탁대로 사감한테는 말하지 않도록 하지. 그럼 이제 가라.”

뻐끔뻐끔 김독자가 초코 우유를 품에 안고 입을 벌렸다 닫기를 반복했음. 그러는 사이에 상대는 몸을 뒤로하고 눈앞에서 문이 닫혔지.

황량한 복도에 버려진 김독자 혼자 그 방문을 보고 있었지. 와…오…. 와…. 싸가…. 순간적으로 문을 쾅 두들길까 했지만, 제 손의 아픔이나 이 뒤에 저 싹수를 보아 후환이 무서워 들었던 손을 쭈굴거리면서 내렸지. 뭐, 그래도 초코 우유는 지켰다. 이거야. 그리고! 적어도 감점을 받지 않았으니까 원래 목적은 달성했어, 그거면 됐지. ㅅㅂ. 김독자는 몸을 돌렸음. 그러면서도 그 닫힌 방문을 향해 소심하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줬지.

“너나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물 너머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김독자는 으슬으슬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음. 얼른 방에 들어가서 이불 속에 늘어지고 싶어졌지. 늘어진 슬리퍼를 직직 끌고 김독자는 계단으로 향했음.

“엣취!!”

아 미친 감기가 오려나. 불안한 예감에 김독자는 괜스레 코를 한번 훌쩍였음. 이제 이불 속은 하고 싶은게 아니라 필수가 됨. 그게 감기를 미리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김독자는 알고 있었지. 부지런히 발을 옮기는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지.

직직하는 슬리퍼 소리가 문 너머로 멀어져 가는 소리를 유중혁은 문 옆에 기대서서 듣고 있었음.

“욕도 자기같이 하는군.”

유중혁이 작게 읊조렸지. 나름 조용하게 한다고 했다지만, 모든 기숙사가 응당 그렇듯 이 나무문은 굉장히 얇은 편이어서 유중혁 귀에는 고대로 들어왔음. 뭐 사실 욕이라고 해봤자 체육대생이 듣기에는 딱 귀엽게 살벌한 정도였음.

다만, 재채기 때에는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음. 뭔진 몰라도 그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밟혔음. 유중혁이 괜히 찜찜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어. 딱히 나쁘게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자기 기준임), 잘못도 처음 한쪽은 저쪽이고, 자기도 한 짓이 있으니 온건하게 돌려보낸 편이었음. 그래도 왠지 죄를 지은 기분이랄까. 유중혁으로서는 생소한 느낌이었음.

“벌크업이나 마저 해야겠군.”

유중혁이 방 귀퉁이에 놓인 덤벨을 들어 올리면서 의식적으로 중얼거렸음.


*


쿨쩍. 엣취. 콜록.

김독자는 연신 이 세 개를 반복하는 중이었음. 도서관 전담직원이 일도 없는 편이니 들어가도 좋다는 말에도 고집있게 고개를 저은 김독자는 한사코 앉아서 책들을 정리했지. 새로 들어온 책들에 띠지를 두르고 바코드를 입력하고. 가끔 오는 사람들도 확인하고.

“이거 대출이요.”

“학생…. 큼! 학생증이요….”

바코드를 찍고 ‘이 날짜까지 반납해주셔야 해요.’를 말하면서도 목이 잘 나오지 않아서 김독자는 연신 목을 가다듬었지, 까끌까끌한 목 안으로 따끔함이 느껴졌음. 아, 이거 안 되겠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잠시 쉬고 오라는 말에 김독자는 고개로 까딱 인사하며 야구점퍼를 껴입고, 편의점으로 향했음. ‘상비약 상시구비’라니까 감기약 정도야 있겠지. 김독자는 유리문을 열었음.

“큼, 감…. 콜록, 기약 있나요?”

앉아서 게임을 돌리던 알바생이 머슥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음.

“아, 죄송합니다. 학기 중도 아니라서 아직 안 들여놨는데요.”

“아…. 네.”

딸랑.

김독자는 결국 초코 우유와 삼각김밥 두 개를 붙은 걸 사서 편의점을 나왔지. 머리가 어질한 게 이제 감기가 열로 오는 모양이야, 점심시간 동안 밥 먹고 잠시 누워 있다가 오후에 할 것들을 마무리하면 좀 일찍 보내달라고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생각에 빠져 아래를 보고 걷다 누군가에게 부딪혔음. 정확히는 무언가 푹신한 것에 머리를 박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푹신함의 정체는 누군가의 가슴이었음. 김독자가 눈을 끔벅이다가 얼른 놀래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습관처럼 고개를 숙였음.

“아, 죄송합….”

“실수가 잦군.”

김독자가 고개를 들어보니 잊기 어려운 잘생긴 얼굴이 보였지. 자기가 박은 곳은 저 자식의 넓은 가슴이었던 모양이야. 김독자의 눈이 슬쩍 그 가슴으로 향했다가 정신을 차리며 눈을 올리지, 유명브랜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그는 춥지 않은 모양인지 별다른 겉옷도 입지 않은 채였음. 난 이렇게 추운데. 김독자는 쿨쩍 코를 먹었지.

“감기인가?”

“네 뭐….”

누구 덕에요. 굳이 뒷말하진 않은 김독자는 눈을 옆으로 흘긋 피했음. 뭔데 갑자기 친한 척 말을 걸고 난리인지.

“아, 큼…. 제가 실수가 잦네요. 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이따 또 일하러 가야 하고 그 전에 밥도 먹어야 하느라 바빠서요.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김독자는 팔랑이며 그 사람을 피해 빙 둘러서 기숙사로 들어가지. 지금 기숙사에 저놈이랑 자기만 남은 게 틀림없는 모양이야. 그게 아닌 이상 이렇게 자주 부딪힐 리가 없잖아. 애당초 이 넓은 캠퍼스에서 이렇게 부딪히는 게 더 신기한 일이긴 했지만.

김독자는 의무처럼 맛없게 삼각김밥을 먹고서는 알람 정해놓고 침대에 구물구물 기어들어가지.

‘아…. 잠 온….’

똑똑똑.

처음에 김독자는 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몰랐지. 자기를 찾을 사람은 없었거든. 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것이란 걸 알았지만, 문을 열어줄 생각은 없었어. 이대로 잠들면 딱 30분 정도만 잘 수 있을 테니까.

똑똑똑.

똑똑똑.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떠날 만도 한데 누구인지 꾸준히 방문을 두드렸지. 결국, 김독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음.

“누구세요.”

“…나는 유중혁이다.”

유중혁? 그게 누구야? 감독관이나 사감이나 뭐 이런 사람인가? 김독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자 그 앞에 아까 보았던 트레이닝복이 보였음. 그리고 그 잘생긴 본체도.

“…유중혁?”

“그래.”

네놈 이름이 유중혁이구나. 이름도 굉장히 그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순간 제 눈앞으로 붉은 병이 훅 내밀어 졌음. 그 위로 궁서체 같은 글씨로 ‘쌍화탕’이라고 적혀 있었음. 쌍화탕?

“쌍화탕이다.”

“그건 알겠는데. 이걸 왜.”

“감기에 걸리지 않았나.”

“콜록, 네, 그런데요.”

“어제 물에 맞은 탓도 있는 모양이니.”

“탓이 아니라 그게 원인이죠.”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음. 어제 물 탓이 100%지 이건. 김독자가 올려보자 어제 무섭게 보였던 꿈틀거리는 눈썹이 보여. 여전히 꿈틀거리긴 하는데 고 사이에 적응한 것인지 이젠 조금 덜 무서웠지.

유중혁은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김독자가 문가에 기대서 비실비실 웃는 게 보였지. 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기도 한데 빨간 얼굴은 열이 오르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줬음.

“그렇다고 해두지. 그러니 받아라. 먹고 자라.”

김독자는 유중혁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음. 얜 뭐가 다 말이 짧아.

“모르는 사람한테 약 안 받습니다.”

“체육학과 ■■학번 유중혁이다.”

나랑 동갑이네. 나이로 우위를 접점 하기도 힘든 모양이야. 김독자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유중혁의 자기소개에 약간 기운이 빠져 기대있던 벽에 머리를 기대지.

“너는?”

“물건 받을 사람도 말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

“그래, 국문학과 ■■학번. 김독자.”

김독자는 제 발치에 중고거래를 하려고 꺼내놓은 저번 학기 전공서적이 보였음. 쪽팔림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 그냥 훅 말해버릴걸. 그런 김독자의 모습에 유중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음.

“자기소개 끝났으니, 이거 받아라.”

“자기소개는 아, 뭐…. 됐고.”

김독자는 유중혁인 내미는 쌍화탕을 밀어냈음. 그리고 자기도 슬쩍 반말로 전향했지. 이대로 당하는 건 억울했거든.

“약이야 내 돈으로 편의점에서 사면 되니까, 사양한다.”

쌍화탕을 좋아하지도 않고. 맛도 없고. 김독자는 어제의 유중혁처럼 문을 닫아버리려고 했음. 하지만 턱 하고 유중혁의 손이 올라가 잇는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

“편의점에 약 없을 텐데. 거긴 2주 전부터 약 따위 없었다. 너도 확인하지 않았나.”

유중혁이 턱으로 방금 먹고 남은 책상 위 삼각김밥 비닐을 가리키지. ‘저런 걸 먹으니 아픈거다.’ 유중혁이 덧붙이는 말이 들렸음. 쓸데없이 예리한 자식. 김독자는 눈을 흘겼음. 그러자 그 눈앞으로 다시 쌍화탕 글씨가 가까워져 오지.

“받아라.”

김독자는 결국 그것을 받아들지. 데워 온 것인지 손안으로 따끈한 온기가 느껴졌음.

“...됐냐?”

“그래. 바쁘니 먼저 가보지.”

내가 바쁘다고 했던 거 복수하는 거야 뭐야. 그래 가라. 김독자가 문을 닫으면서 손을 휘저었음. 다시 안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야.

김독자는 쌍화탕을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놓고 잠시 잠을 자러 구물구물 이불 속을 다시 파고들었어. 이 감기가 얼른 떨어져 주길 바랄 뿐이었음.


*


망했어. 이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됐음.

막 10분쯤인가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좀 부었지만 물 마시면 목소리가 나왔단 말이야. 몇 시간 지난 지금은… 이젠 나오지도 않아. 기침할 때마다 목을 따로 분리하고 싶어졌지. 심지어 히터를 돌리는 학교 내부는 건조해서 죽을 지경이었음. 갖다놓은 물도 다 마셔서 이제는 잔기침만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 도서관 마감이 6시니까 그때까지만 버티자는 의지로만 버티는 상태였음.

“대출.”

“…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꾸역꾸역 말하면서 바코드를 찍고 학생증을 받자 사진이 묘하게 익숙했지. 이름에 적힌 건 체육학과 ■■학번…유중혁? 삑. 바코드를 찍고 고개를 드니 역시나 유중혁이었음. 운동을 마치고 온 건지 또 다른 유명브랜드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같은 브랜드의 스포츠 크로스백을 멘 체였지. 유중혁이 김독자를 보자 혀를 찼음.

“목소리가 맛이 갔군.”

대답해주기도 싫지만 대답하기도 힘들었음. 김독자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책과 학생증을 쭉 내밀었지. 책도 보니 「근육의 역학」 뭐 이런 제목이었음. 자기 같은 살벌한 걸 읽는 모양임.

“마셔라.”

제 크로스백에서 뜯지도 않은 새 생수를 꺼내 교환하듯이 밀어 넣고, 유중혁은 책을 챙겼음. 받아도 되나 싶었지만, 솔직히 이건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생존이 걸린 문제여서 좀 많이 심각하게 고마웠음. 김독자는 슬그머니 생수를 손에 들지, 그리고 머쓱하게 볼을 긁다가 '고맙다'라고 입으로 벙긋거렸음. 그걸 슬쩍 옆눈으로 보고 돌아선 유중혁 입가에 작게 웃음이 걸렸던 것도 같음.


*


유중혁은 자신이 김독자에게 쓸데없이 많이 신경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 정신차리면 왠지 김독자를 지켜보고 있었거든. 캠퍼스 길을 지나다닐 때라던가 도서관 통유리 너머로라던가. 이렇게 사람을 의식한 적이 없었는데 신기한 일이었음. 자기도 그 원인을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빚지기 싫어하는 제 성격에 약간의 오해로(?) 누군가가 감기 걸려서 골골대는 꼬라지가 보기 싫었을 뿐일 거로 생각했지. 지금도 저거 봐.

유중혁이 방에서 운동하다가 몸을 잠시 식히고 싶어서 창밖에 다가서니 감기에 걸려놓고서 정신 못 차리고 야구잠바 하나 걸치고서는 종종거리며 기숙사 건물 밖으로 나가는 하얀 얼굴이 보였음. 멀리 걷지는 못하고 근처 정자(흡연자들의 애연 장소)에서 팔짱을 낀 채로 불꽃이 튀는 게 담배 피러 나간 모양이야. 목소리도 안 나오는 주제에 담배를 피우는 것을 봐. 그 와중에 자기랑 약속을 신경 쓰는 모양인지 기숙사 건물에서 나가는 뒷모습도 신경 쓰였음. 마른 몸을 달달 떨고 있는데 저 모습이 어떻게 신경 안 쓰이겠냐고.

열린 창문 사이로 멀리 큽, 콜록 컥! 콜록! 하는 기침 소리가 들렸음.

담배를 마시다가 기침이 나오는지 크게 들썩이며 기침하는 것도 꼴 보기 싫었지. 김독자가 기침을 하며 담배를 결국 포기한 모양인지, 재떨이에 비벼 끄는 걸 보고는 유중혁은 창문을 닫았음.

“김독자.”

괜스레 그 이름을 불러보고는 말이야.




#02



김독자는 제 감기에 대해서 근본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 그러니까 금방 떨어질 거라는 자신감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스무 살 초의 나이에 감기에 앓아봤자 어릴 때 이후로는 크게 앓아본 적이 드물었거든. 그러니까 이번 감기도 약을 안 먹더라도 하루 거하게 앓고 나면 떨어질거라고 생각했지.

아침에 일어나서 김독자는 퀭한 눈 아래를 문지르면서 후회했음.

저녁부터 아침까지 김독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면서 자야 했음. 열이 올라서 몸이 식은땀이 나고 떨어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목도 아픈데 그 와중에 코는 막히지. 세상 모든 게 자기를 괴롭히는 것 같기만 했어. 할 수 있는 건 그저 머리맡에 생수나 마시고 참고 자는 수밖에 없었음. 다만 감기 기운에 중간에 기절하듯 잠들었다는(그것도 늦은 새벽이었지만) 하나가 위안이었달까.

아침에 일어나서 본 얼굴은 죽기 직전에 몰골과 비슷해 보였음. 세수하는데도 머리가 어질거려서 휘청거렸지. 속이 쓰라려서 입맛도 없었음. 핸드폰을 넘겨보며 돈은 좀 들더라도 감기약이라도 당일 배송시킬까 했더니, 대일밴드라던가 마데□솔 같은 상처용 연고밖에 안 파는 거야. 하긴 약이니까. 김독자는 서글픈 깨달음을 얻음.

일은 나가야 하니까 있는 옷이란 옷은 다 껴입으면서, 김독자는 한숨을 쉬고 문을 열었음. 그리고 깜짝 놀랐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입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이 문앞에 있었으니까. 감기로 맛이 가서 저승사자를 봤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음. 그 얼굴은 이제 제법 익숙해진 잘생긴 얼굴이었으니 심장 한번 쿵 하는 정도로 끝났지. 김독자는 제 놀란 심정을 숨기러 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음. 큼, 나오지 않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가다듬어 입을 열었음.

“…여기 왜 있냐?”

“살아있군."

"숨도 잘 쉬고 잘 살아있다."

"숨쉬기 힘들어 보인다."

"…."

김독자가 눈살을 찌푸렸어. 아침 댓바람부터 시비 걸러 온 거야 뭐야…. 그래, 나 코 막혀서 코맹맹이다. 목도 나갔다. 뭐 이 자식아. 김독자가 유중혁처럼 제 눈썹을 들어 올리고 똑바로 바라봤지. 그래도 유중혁은 데미지 1도 안 받은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음. 다만 찬찬히 그 얼굴을 들여다봤을 뿐이야.

"약은 먹었나?"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잠시 머리를 굴렸지. 약…? 뭐, 쌍화탕 그거? 그거 맛없는 차 아니야? 약이었냐? 비슷한 뉘앙스로 줬던 건 같은데…. 이제 어디 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병의 행방을 떠올렸음. 그게 어떻게 되었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일단 저 얼굴을 보아하니 답을 해야 할 거 같아.

“머, 먹었지?”

“받아라.”

제 눈앞에 익숙한 붉은 병이 또 내밀어 졌어. 쌍화탕. 김독자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하지. 얜 말보다 표정으로 말하는 거 같음. ‘받아라.’ 눈썹이 말했음. 아 말이랑 별로 길이 차이는 없네. 쓴 눈물을 삼키며 김독자는 억지로 그 병을 받았지. 또 출근해야 하거든, 계속 여기에 서 있을 수는 없잖아. 뜨끈한 병이 또 손안에 쥐어지지. 뭔가 거짓말하고 사탕(이 경우는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받은 거 같아 김독자는 괜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지.

“…그래, 고맙다. 이제 가라….”

유중혁이 눈이 끈질기게 김독자의 옆얼굴을 보더니 슬쩍 몸을 비켜줬음. 김독자는 그 틈으로 슬금슬금 발을 움직여 호다닥 달려갔지. 기숙사 건물을 빠져나와서 슬쩍 올려다보니 도서관 건물 쪽을 향한 복도에 유중혁이 서 있는 게 보여.

‘아니, 쟤 왜 저러냐?’

생면부지 타인이 자신을 챙기는 것을 처음 겪은 김독자는 이상한 기분에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부지런히 발을 옮기지. 얼굴이 뜨겁다고 느껴지는 건 분명 열이 올라서일 거라고 생각했음.


*


유중혁은 솔직히 일주일 동안만 김독자를 지켜볼 마음이었음. 딱 일주일간만 상태 보면서 챙기면 그 뒤에는 잊어버릴 요량이었다는 거지, 그리고 오늘이 정확하게 일주일이 하루 남은 날이었음. 그러니까 유중혁이 김독자 머리 위로 물을 부은 지…가 아니라, 김독자가 감기 걸린 지 6일을 채웠다는 뜻이지.

빌릴 책이 딱히 없었기도 하고 굳이 멋쩍게 김독자 앞에 등장해서 의식하고 있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아서 (다른 의미로 이미 늦었지만) 유중혁은 전면이 유리로 된 도서관 출입구 앞에서 안을 들여다봤어. 사람이 없는 도서관 안은 작게 울리는 기침 소리만이 채우고 있었지. 김독자가 자리에서 비척거리며 일어나 책을 챙겼음. 그 모습을 보면서 유중혁을 이맛살을 찌푸림.

왜.

‘왜 감기가 안 낫지?’

보통 일주일 정도면 웬만한 20살 남성들은 감기가 낫지 않나…? 아니 일주일도 아니고 이틀만 얇으면 끝나는 게 감기 아니었나? 유중혁은 진심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음. 심지어 매일같이 김독자에게 쌍화탕을 건네주고 있었거든. 그러나 김독자의 안색은 이전과 똑같이 하얗고, 책을 옮길 때는 다리에 힘이 없어서 휘청거리고. 오징어도 저것보단 똑바로 걸을 거 같아. 유중혁은 진심으로 생각했지.

이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


*


‘얘는 이거 어디서 만들어 오나 봐.’

콜록.

잔기침을 뱉으며 김독자는 자기 책상 옆을 채우기 시작하는 쌍화탕을 보았지. 총 유중혁에게 받은 것인 5개를 채워가고 있었음. 요 며칠 동안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매일 아침 쌍화탕을 받았다는 거지. 6개 중 1개가 빈 건 김독자가 이렇게 된 거 먹어나 보자하고 뚜껑 열고 호기롭게 한 번에 입에 넣었다가 그대로 화장실로 가서 세면대에 뱉어서 버려진 한 병이었음. 으으…. 존나 맛없어. 감기가 한방에 낫는다고 해도 못 먹을 맛이었음. 세면대에 입을 가글하고 난 뒤 김독자는 초코 우유나 다시 마셨지.

오늘도 달콤한 초코 우유의 입구를 열면서 김독자는 목을 가다듬었어. 그래도 예전만큼 죽을 정도는 아니야. 뭐랄까 이 상태로 적응한 느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간혹 올라오는 미열과 목 아픔과 가침과 가래에 적응한 것은 좀 짠 내 나는 이야기지만. 요즘은 코가 안 막힌 날에 감사하다고 만세를 할 정도이니 뭐….

“정말 약을 사와야 하나….”

사실 이 생각을 오늘이 토요일이기에 일찍 끝나고 캠퍼스 정문을 보며 생각했음. 버스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분명 문을 연 편의점이 있으니까. 집에 돌아가는 정도도 아니고 버스 환승을 노리면 큰 지출도 아니었음. 감기가 낫지 않길 바라는 건 아니었음, 고통스러움. 진짜 고통스러운데…. 근데 굳이 가지 않은 건―.

김독자는 문득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음.

이건 모두 그 얼굴이 너무나 인상 깊기 때문일 거야. 응. 그렇지그래. 김독자가 그렇게 자기를 설득시키면서 초코 우유를 마셨지. 그때, 똑똑하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어.

“누, 누구세요?”

“유중혁이다.”

“쿨럭!”

켈록, 콜록. 김독자가 크게 기침을 했어. 초코 우유가 입가로 흘러서 팔로 닦아냈지.

“문 열어라.”

누가 보면 꼭 유중혁이 이 방 주인인 줄 알 거야. 이 방문이 열린다는 게 당연하다는 말투였으니까.

“콜록, 잠, 잠깐!”

김독자는 유중혁 말투에 대해 짜증 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제 주변을 치우느라 바빴지. 초코 우유가 튄 책상을 닦다가, 쌍화탕이 눈에 띄었거든. 이걸 어디에다 숨길까 고민하다가 책상 위에 늘어놓은 쌍화탕을 우르르 책상 서랍에 대충 밀어 넣어 발로 밀어 닫았음. 그리고 다시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 문을 열었음.

복도의 찬바람이 훅 밀려와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또 잔기침을 내뱉었음.

“그놈의 감기는 아직도 앓고 있나.”

“콜록, 뭐야? 또, 쌍화차 주러 왔냐?”

“병든 닭도 너보다는 건강할 거다.”

“시비거냐?”

김독자가 입을 삐죽이자 유중혁의 미간이 꾸깃거리지, 김독자가 그 살벌해진 표정에 괜스레 뒷걸음질 침. 그런 김독자의 한쪽 어깨의 유중혁이 손을 올렸음. 김독자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했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중혁은 그대로 그 한쪽 어깨를 밀고 방안으로 몸을 넣음.

“들어간다.”

“뭐, 뭐 뭐? 야! 잠깐!”

이라고 외칠 때 이미 방안에 들어와 버린 유중혁이었음.

제 기숙사 방과 위치도 같기에 역시나 딱 아는 그 방 평수, 방 구조였지. 아마 아무것도 없는 책상 말고 그래도 적지만 물건이 채워진 저 책상이 김독자 것 일터고 그 근처가 생활 반경이겠지. 유중혁이 긴 다리로 몇 번 걷지 않아 그 자리 앞에 선다.

처참한 생활습관이 그대로 반영된 책상 위와 그 밑에 쓰레기통에는 삼각김밥의 껍질과 컵라면의 흔적, 초코 우유의 잔해들이 널려있었지. 유중혁이 쯧하고 혀를 찼음.

“쌍화탕은 다 먹었나?”

“그, 그럼.”

“근데도 그 모양인 건가.”

“…뭔 모양인데.”

“거울을 봐라.”

김독자는 제 얼굴을 슬그머니 만져보았어. 딱히 좋아하는 얼굴도 아니지만, 막 엄청 하자 있다고(?) 생각한 얼굴도 아닌데. 아 물로 저 얼굴에 비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 말을 한 상대가 유중혁이라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또 이해 당해버림.

유중혁이 이리저리 김독자의 생활패턴을 파악하고 그 주변을 보다가(먹은 흔적 외에는 생각보다 깔끔했음). 살짝 열려 진 서랍에 눈이 향하지. 드르륵.

“야 거긴..!”

김독자가 손을 뻗기도 전에 유중혁은 이미 내용물을 다 봐버린 상태지. 달그락달그락. 안에 있는 쌍화탕 병들이 서로 부딪치며 맑은소리를 냈음.

“다 먹었다고?”

“하…. 하하…. 저기, 중혁아?”

김독자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다급하게 유중혁을 부름. 김독자의 부름에 유중혁이 눈썹이 또 꿈틀대지. 저기엔 지렁…이라기에는 너무 잘생겼으니까 용 한 마리가 살아 있는게 분명해. 맨날 꿈틀거리니까. 그니까 이렇게 포스도 쩔고. 김독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헤실 웃지.

“멀쩡하게 다섯 개가 다 있군.”

“그게 말이야. 중혁아.”

김독자는 일단 유중혁의 팔을 붙잡음. 근육 아닌 부분이 어딜까 싶을 정도로 탄탄한 팔이 잡히지.

“들어봐 중혁아? 내가 먹으려고 했어. 정말이야. 생각해봐 네가 챙겨준 건데 후환이 무서워서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근데 입에 딱 넣는 순간 이건 나랑 안 맞겠다는 느낌이 딱 온 거야. 가뜩이나 감기로 힘든데 위장까지 아플 수는 없지 않아?”

“입은 잘만 놀리는군.”

김독자의 열띤 변명에 유중혁이 콧방귀를 픽 끼지. 그렇지만 나쁜 표정은 아니었음. 김독자 성격상 안 먹었으면 버렸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에 고이 모아둔 모습이 꽤 맘에 들었거든. 김독자의 입은 아무래도 쓰레기인 모양이고. 운동하면서 미꾸라지 즙이니, 흑염소 즙, 무슨 간 요리이니 이니 온갖 괴식을 맛은 봤던 유중혁으로서는 그리 보일만 했음.

“스무 살 넘어서까지 편식인가.”

“못 먹는 거거든.”

“알레르기인가?”

“아, 아니.”

편식이 맞는군. 유중혁이 다시금 덧붙였고 김독자는 눈을 슬그머니 피했음. 무단침입도 쟤가 했고, 방을 뒤진 것도 쟤가 했고, 물 뿌린 것도 쟤가 했는데 왜 맨날 자신은 쭈글거리게 되는지 이해가 안 감.

“맨날 이런 쓰레기만 먹으니까 감기가 안 낫는 거다.”

“나름 먹고살 만해.”

“그러니 죽지 못해 살고 있지 않나.”

유중혁의 턱이 김독자를 가리키자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앙다물었음. 나 왜 혼나고 있지? 근데 또 막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그런 건 아니었어. 약간 시무룩한 김독자의 모습을 눈 아래로 보다가 유중혁은 서랍에 있던 쌍화탕을 하나 꺼내지. 꽈득하고 뚜껑을 가볍게 열고서 유중혁은 그것을 김독자에게 내밀어.

“먹어라.”

“…아…. 이거 맛 존나 없….”

“역시 못 먹는 건 아니군.”

예리한 자식. 김독자가 눈을 흘겼음. 유중혁은 이리저리 도망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머리통을 향해 다시금 병을 내밀었지.

“자.”

“꼭 마셔야 하냐?”

“원한다면 씹는 환으로 된 것도 있다.”

김독자가 아연한 표정으로 유중혁을 올려다봄. 무슨 전생에 한약방이라도 차린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임. 뭐가 자꾸 튀어나와.

“그건 맛있냐?”

“쓰다. 하지만 그게 더 효과는 좋긴 하지.”

쓰다. 쓰대. 흠. 김독자가 세상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남을 거 같은(일단 운동을 감내하고 있으니까) 유중혁을 바라보고는 빠르게 그나마 쌍화탕의 맛이 낫다는 사실을 유추해 냄. 정말 먹기 싫지만, 유중혁이라면 그 순간 환을 가져와 제 입에 넣을거 같은 불안감에 김독자는 병을 받아들지.

“차라리 이걸 마신다.”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지. 김독자는 잠시 침을 삼키고는 병을 두 손으로 쥐었음. 천천히 병의 입구에 다가서자 알싸한 한약 내음이 퍼짐. 으으…. 눈을 꼭 감고 주둥이에 입을 넣고 들이킨다. 미묘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음. 끔찍한 맛에 입을 떼려고 했는데 병의 뒷부분을 유중혁의 손이 막고 있었음.

“세 번 나눠 마셔라.”

김독자가 울상이 되어서는 열심히 세 번 나눠서 쌍화탕을 삼켜. 그리고 마지막 모금을 마시자마자 입을 떼고는 으에, 헥…. 으웩….거렸지. 목 너머서부터 냄새가 물씬 올라왔음. 막 토할 거 같은 건 아닌데 그냥 뭔가 입에 남는 잔향이 껄끄러웠지.

“노력이 가상하군.”

“으으…. 그 칭찬 반납해라.”

칭찬같지도 않은 말에 진저리를 치는 김독자에게 유중혁이 피식 웃으면서 손을 내밀지. 칭찬하더니만, 손을 내밀어. 뭐야. 내가 개야?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위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얹었음.

“네놈 손 따위를 왜 올리지?”

“그럼 뭔데.”

“담배 내놔라.”

“뭐?”

“금연해라 김독자.”

아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래. 김독자가 설설 손을 빼고는 몸을 뒤로 뺏어. 그래 쌍화탕까지야 호의로 준 건 데다가 안 먹어서 미안하기도 하다 이거야. 근데 금연은 뭔데? 흡연자에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새끼는? 그날의 복수라면, 방에서 담배 피운 적 그 뒤로 한 번도 없는데?

“방에서 이제 담배 안 펴. 임마.”

“안다. 그러니 맨날 밖에 나가서 비 맞은 개새끼처럼 벌벌 떨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

“개새…?! 근데 그걸 보고 있었냐?!”

“책임져 주겠다.”

뭔 대사야 그건? 마치 막장드라마에 흔히 나올듯한 대사를 들은 김독자는 눈을 땡 그래졌음. 그리고 그 토끼 눈으로 유중혁과 눈을 맞춤.

“뭐, 뭘?!”

“네놈 감기 말이다.”

“거기에 책임이 왜 나와?!”

“내 책임이니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기도 뭐하고, 맞는다고 하기도 뭐한.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와 허약한 제 몸이 원인이지만 유중혁이 물세례를 한 게 시작이기도 하고…. 일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음.

“책임지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지. 김독자.”

이 드라마의 장르는 어디로 향하는가. 전반적인 대화의 흐름이나 어감상으로는 프러포즈 클리셰와 비슷한데 내용은 천지 차이였지. 누가 듣는 이에게는 살벌하게 다가오는 대사를 읊겠어. 이 흐름으로는 김독자는 분명 제 흡연 줄을 빼앗기고 말 거야. 그의 눈이 흘긋 문밖으로 향한다.

“그래 근데 중혁아….”

타닥.

김독자는 말을 하다 말고 바로 몸을 돌렸음. 그리고 아픈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속도로 방에서 도망쳤지. 뒤에서 말도 없이 유중혁이 다리에 힘을 주어 바닥을 박차는 게 들렸지. 묵직한 소리가 살벌했음. 빈 복도를 그렇게 둘의 달리는 소리가 채웠지.

뭐, 그리고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뒷목이 채였고, 데롱데롱 들려서 방에 돌아왔음. 그리고 침대에 얌전히 앉혀진다.

“도망치지 마라.”

“헉…! 쿨럭! 안 될 건 알았는데, 일단 해봤다.”

어차피 저 피지컬에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던 김독자였음. 김독자가 뛰느라 가빴던 숨을 되돌리면서 연신 또 잔기침을 내뱉자 유중혁이 근처에 놓여있던 물을 내밀지. 김독자는 물끄러미 그걸 보다가 물을 받아들었음.

이상하게 매너가 좋아.

그래 솔직히 말해서 완전 불쾌하고 싫지 않다는 게 너무 어이없고 웃겼음. 웃기게도 아까 유중혁이 김독자라고 불렀을 때 얼굴에 티는 안 냈지만, 내심 그 입에서 처음 불리는 세 글자 제 이름에 놀랐던 건 사실이야. 거기다가 본인 성격답게 성까지 붙여 부르는 게 그다웠지. 그래서 그런가…? 정말 담배를 막 몸을 수색해서 가져가도 엄청 짜증 나고 그럴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담배를 골초처럼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중독되어 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김독자는 훅 줘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그것만은 무리일 듯해 이 고지식한 남자에게서 담배를 사수할 머리를 굴리지.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찾음.

“중혁아. 그거 아냐?”

김독자가 유중혁을 올려다보고는 첫 만남 때처럼 싱긋 웃지. 그가 웃자마자 유중혁의 눈썹이 또 꿈틀거렸음.

담배 그거 생각보다 가격이 나가고, 난 방금 막 담배를 샀기에 한 갑이 남았으며, 난 자금 상황이 좋지 않은 형편이고, 그런 가난한 형편의 나의 유일한 인생의 MSG가 담배라는 사실을 김독자는 매우 매끄러운 문장으로 읊었음. 그것은 나긋나긋하며 어찌 보면 시를 듣는듯했음.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의 표정이 복잡하게 되어갔음. 마지막으로 김독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

"이래도 뺏을거냐?"

턱 유중혁의 제 미간을 짚었어. 뭐랄까 유중혁이 보기에도 김독자의 삶은 재미나 흥미 거리가 1도 없어 보이긴 했거든. 가끔 독서실에서 딴짓이라고는 제 핸드폰을 이리저리 넘겨 보는 게 전부인데. 그것도 심드렁한 얼굴일 때가 대부분이었음. 이렇게 열정적이게 무언가를 지키려는 모습도 처음보고. 제 몸 하나도 지키려는 의욕이 없는 놈인데…. 유중혁은 조금 물러서주기로 함.

"그럼 이렇게 하지."

유중혁이 제 얼굴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고치지.

“처음부터 뺏을 생각은 없었다만."

뺏진 않았지만 도망가는걸 잡아오긴 하고, 내놓으라고 당당히 선언하긴 했지만. 그래. 그렇다고 해라. 김독자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어.

"대신 감기 낫기 전까진 하루에 한 개비만 펴라.”

“응?”

“잘됐다. 그 한 갑 다 피기 전에 감기 낫게 해주지.”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일방적인 통보냐. 내 몸이 무슨 숙제야? 그리고 보통은 좀 말이 다르지 않아?? 김독자 ???하며 혼란에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유중혁은 그럼 되었다는 듯이 시원해 보였음.

"쌍화탕도 먹었고 몸도 데웠으니 이불이나 덥고 일찍 자라."

마지막으로 유중혁은 그렇게 또! 통보를 방을 빠져나갔음.

김독자만 또 어안이 벙벙해져서 혼자 남은 방안에서 허허 헛웃음을 내뱉는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 박힌 담배를 꺼내서 멍하니 수를 세어봄. 15개비. 숫자도 어쩜 딱 맞는지. 오늘이 토요일이니 다음다음 주 일요일이면…. 아니 그 전이구나, 그 전에 감기가 나을 거래.

잘됐기는 뭐가 잘됐는지.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팍 담배를 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지.




#03


유중혁은 선언한 그 날 이후로 정말 작정한 듯이 김독자의 생활을 건들기 시작했음.

그중 하나가 식사였음. 유중혁은 누군가를 못 먹여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모양이야. 그는 김독자의 삼시세끼를 다 챙겼지. 아침부터 문을 두들겨 잠을 깨워서는 밥을 먹이고 가는 건 예삿일이오, 점심도 같이 먹었어. 그러다 점심을 같이 못 먹는 날엔 학식을 챙겨 먹으라고 당부만 하고 갔다가 김독자가 팔랑팔랑 편의점으로 향하는 것을 보더니 그 다음부터는 이를 갈면서 부득불 점심 도시락을 챙겨줬음. 저녁도 이하 동일.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만들어 오는 것인지 궁금해 물어보니 “식당 주방을 빌렸다.”라고 대답함. 거기가 빌릴 수 있는 곳이었어?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어느 날 같이 들린 식당에서(훈련하고 시간 좀 나면 쉴 것이지 굳이 또 챙기러 왔다) 아주머니들이 유중혁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모든 줄거리가 다 이해돼버린 김독자였음. 저거 아줌마들 마음속에 스타요 예비 신랑감이라고. 아주머니가 챙겨 먹으라고 갖다 주는 샐러드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감사합니다만 하길래 김독자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쯧쯧거렸음.

“이럴 때는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하는 거야, 중혁아.”

“감사는 충분히 표했다. 잘됐군. 채소도 먹어라.”

콱 유중혁이 김독자의 식판 위로 샐러드를 놔줬음. 김독자 얼굴이 꾸깃해졌지. 묵묵히 식사를 하는 동안 샐러드가 줄어드는 일은 없었음.

“채소 안 먹나.”

“…아니 채소까진 먹는데.”

“그럼?”

유중혁이 당장이라도 샐러드를 퍼서 입에 넣을 태세로 물어보지. 솔직히 채소도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먹긴 먹는 김독자였음. 삼각김밥 다음으로 먹기 편한 건 언제나 샌드위치니까 문제는.

“……토마토.”

“토마토?”

“그거 싫어해.”

유중혁이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김독자를 보았음. 어쩌라고. 김독자가 입을 삐죽 내밀었지. 유중혁은 한마디 말보다는 식판에 놓인 세 개의 토마토 중 두 개를 가져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음. 고로 하나는 꼭 먹으라는 말이었지. 김독자가 울망거리며 슬쩍 올려다보니 눈썹이 꿈틀거리리는 거야. 큽…. 김독자는 쓴 눈물을 삼키면서 작은 토마토 하나를 꾸역꾸역 씹었음. 으으…. 이상해. 셔. 향기 구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유중혁은 이번에 깐 쌍화탕을 내밀었지.

“한 번에 끝내는 게 낫다.”

너도 이게 나에게 고통인 걸 잘 알긴 하는구나. 개새…. 김독자가 눈을 흘기면서도 어느 사이엔가 데워져 있는 따뜻한 쌍화탕을 들이켰음.

이제 쌍화탕은 제법 익숙해져서 그 맛이 싫지 않아졌지.


*


덜그럭덜그럭.

김독자가 움직일 때마다 어깨에 멘 에코백에서 플라스틱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지. 한쪽 어깨가 무거워서 김독자는 어깨가 이대로 빠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음. 가방 안에는 또 어디서 튀어 나온지 모르겠는 쌍화탕과 이단 도시락이 들어있었지.

“오늘도 도시락 먹어요?”

“아, 네.”

김독자는 독서실 근처에 있는 지금은 운영 안 하는 카페테리아 자리에서 도시락을 꺼냈지. 직원이 지나가면서 그걸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음. 유중혁이 싸준 도시락이었음. 김독자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 바빠보이는 유중혁에게 이젠 학식 잘 먹겠다고 인증샷도 찍겠다고 했음에도 그는 도시락이 감시하기 편하다며 매일같이 싸주고 있었음. 감시란다 감시….

“누군지 몰라도 참 정성이네. 부럽다.”

김독자는 직원의 오해를 굳이 정정하진 않았음. 이걸 챙겨주는건 사내새끼에요 라고 말해봤자 뭐 더 오해가 나아질거 같지도 않고.

“그런가요.”

“저는 식당에서 점심 먹고 올게요. 그럼 밥 잘 먹어요.”

“네, 다녀오세요.”

김독자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보온 도시락을 열기 시작했지. 이거 수능 때도 안 써본 건데 근래에 익숙해진 게 어이가 없어. 뚜껑을 열자 김과 함께 따뜻한 밥이랑 반찬 국들이 나오지. 딱 정갈할 정리된 게 누군지 성격이 보인다 싶었음.

“혼자 바쁜 척 다하더니 만들 시간은 있었나 보네.”

김독자가 익숙하게 햄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음. 싱거워. 간이 딱 맞음에도 괜히 그렇게 중얼거렸지. 이럴거면 편의점 삼김이나 먹겠다고 불만불평하며. 절대로 요 이틀째 바빠진 탓이 유중혁의 1:1 직접 케어를 못 받아서 이렇게 속이 꼬이는 건 아니었음. 정말이야.

작았던 위장이 유중혁의 케어 덕분인지 커지긴 커졌는지 이전이었으면 남길 양이었는데 이젠 다 먹은 김독자야. 물론 배는 불러서 영 소화가 안 되는 기분이긴 했지만. 쌍화탕까지 원샷 때려주고 그릇도 화장실에서 씻어와서 멍하니 있자니, 담배가 땡겼지.

김독자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담배가 가능한 구역까지 비척비척 걸어나감. 추운 공기에 옷깃을 여미면서 담배랑 라이터를 찾았지. 연기를 붙이고 크게 들이마시자 시린 공기가 같이 들어와 작게 잔기침을 했어. 확실히 낫기 했어. 목이야 따갑고 아프지만, 이전처럼 허리를 굽혀가면서 멈추지 않을 기침은 나오지 않았거든. 후―. 김독자는 담배연기를 뱉었지.

‘담배가 맛이 없어졌어.’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를 그대로 꺼버리고 건물로 들어왔음.


*


김독자도 피치 못하게 일찍 돌아와 일을 시작했음. 웹소보기도 조금 지겨워진 터였고, 직원분이 돌아오셨음. 그녀는 자차가 있는 친구 동료와 자주 점심을 먹으려 시내로 가는 모양이었음.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김독자에게 손을 흔들었지.

“아! 김독자 학생.”

“네?”

“저번에 감기약 찾지 않았어요?”

“콜록, 네 그랬었죠.”

“지금은 약은 먹었어요?”

“아―. 그 쌍화탕이요.”

그녀가 김독자의 말에 쌍화탕? 하고 물음표 띈 중얼거림을 뱉더니 고개를 저었음.

“아플 때는 진짜 약을 먹어야지. 아직 상비약 안 먹은 거죠?”

김독자가 얕게 튀어나오는 기침을 겨우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몇 번 찬 그녀가 익숙한 로고의 상비약 갑을 꺼내지. 그녀는 친절한 미소를 띠고 김독자에게 그걸 건네주었음. 그리고 선뜻 받지 않는 김독자에게 ‘받아요. 받아~. 괜찮아.’ 하면서 재촉하듯 흔들기까지 했지.

“내가 독자 학생 기침이 유독 안 떨어지는 게 맘에 걸렸어.”

“아, 고맙습니다.”

“그거 점심 먹고 30분 이내에 먹으면 된대요.”

자신을 위한 선의에 김독자는 결국 하얀 손을 뻗어서 그것을 받았지. ‘그거 효과 좋다고 그러더라.’ 덧붙이는 말에 연달아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김독자는 바로 그것을 먹진 않고 제 가방에 밀어 넣었음. 상대방의 친절은 고맙고, 그리도 찾았던 과학과 화학 효과의 극단인 상비약이 손에 들어왔고, 심지어 제 돈도 안 쓰고 무료로 받은 것인데도 왠지 그리 기쁘진 않았지.

오늘은 어쩐지 일이 일찍 끝났음.

방학도 시작되고 중반이 되어가는 중이고, 찾아오는 손님은 유독 적었지. 오늘따라 맘을 크게 쓰기로 한 건지 직원도 김독자에게 두 시간 일찍 퇴근해도 된다고 말해놓은 상태였음. 원래라면 바로 기숙사로 들어가서 뒹굴었을 테지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퇴근길에서 김독자는 캠퍼스 안내판 앞에 다리가 멈췄지. 해가 떨어질 때쯤에 유중혁이 훈련 마무리한다는 걸 들었었거든. 아마 딱 이맘때지 않을까 싶었음.

기숙사로 들어가기 위한 직진 코스가 있고 그리고….

김독자는 잠시 그 안내판을 뚫어지게 보다가 앞으로 몇 발자국 걷더니 발을 획 돌려 오른쪽으로 꺾었지.

김독자는 학과가 학과이니만큼 캠퍼스 중앙에서 별로 벗어난 적이 없었음. 솔직히 그리고 체육과는 대부분 소리도 소리이고 기구나 설비때문에 외곽으로 빠지는 편이었는데. 그걸 생각을 못 했음. 가뜩이나 넓은 캠퍼스를 쌩으로 가로지른 경험은 없었는데 김독자는 짜증을 내면서도 이미 움직인 것을 무를 생각은 없었음.

그렇게 천천히 체대관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고 김독자가 건물이 시야에 보인 순간 마침 익숙한 오라를 풍기는 이가 스포츠 백을 가로 메는 게 보였지. 기쁘긴 한데 막상 보니 팍 팔을 흔들면서 중혁아~!를 부르는 친한 짓은 하기가 어려웠지.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가 반갑게 유중혁에게 다가갔어.

김독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발을 멈췄지. 하늘거리는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가 딱 보기에도 아름다운 미인이었음. 그녀는 유중혁과 친한 듯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를 띄운 채로 다가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지. 유중혁이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음. 친한 관계라는 게 빤히 보였지. 유중혁 성격상 자기랑 친하지 않을 사람을 근처에 둘 거 같은 놈도 아니니, 분명 유중혁과 가까운 사이 일거야.

그녀가 가방에서 제법 묵직한 박스를 꺼내 건넸고, 유중혁은 익숙하게 받아서 가방에 넣었음. 선물인 거 같았음. 김독자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것을 지켜보았지.

‘아무래도 빠져줘야겠지.’

제 분수를 잘 아는 김독자는 그렇게 왔던 길을 가뿐히 뒤돌았음.


*


유중혁은 언제나처럼 이른 저녁에 기숙사로 돌아왔고, 익숙하게 김독자의 방을 먼저 들렸음. 근데 공허한 소리만 울렸지. 또 숨는거 같아서 몇 번 더 두들겨 보고 그랬지만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김독자는 정말 방에 없는 모양이었음.

유중혁은 얼굴을 구겼지. 이 뺀질거리는 하얀 낯짝의 소유자는 또 어디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인지. 그렇다고 행동반경이 넓은 놈도 아니고, 버스를 타고 나갔다 올 정도로 기력 넘치는 놈도 아니니까 근처에서 또 적당히 쳐 박혀 있겠지.

유중혁의 예상대로 김독자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음. 언제나 담배를 피우던 기숙사 앞이 아니라 기숙사 뒤에 있었을 뿐. 조용하고 어두운 대신 산과 바로 마주한 곳이라 을씨년스러운 데다 추운 바람이 매서운 곳이어서 겨울에는 잘 안 가는 곳이라 들었는데, 거기에 놓인 벤치에 앉은 김독자는 어두운 그늘에서 혼자 빛나는 듯한 하얀 얼굴을 한 채로 멍하니 담배를 태우고 있었음. 꽤 오래 있었는지 코끝과 양 볼이 빨갛게 터 있었지. 김독자의 발치에 담배 몇 개비가 떨어져 있었음.

“하루에 하나 아니었나.”

“아.”

김독자는 멍하니 피우던 담배를 문 채로 유중혁을 돌아보았음.

“몇 개째지?”

“글쎄.”

몇 개째 피었더라. 앞으로 몇 개 더 펴야 되더라. 담배 개비를 입에 문 채로 김독자가 중얼거리자 길게 매달려있던 재가 파스스 바람에 날렸지. 유중혁이 성큼 걸어가 그 입에서 담배를 빼냈어. 그리고 바닥에 팩 버리고 발로 비벼 꼈지. 김독자는 그걸 모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음. 마치 저리될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금연 약속하지 않았나.”

“한 적 없어.”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는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지. 담뱃갑을 찾았음.

“감기 낫겠다고 하지 않았나.”

“넌 뭐 약속 맡겨놨냐. 한 적 없다니까.”

“…”.

“약속이 한 쪽이 하자고 해서 되는 거냐. 같이 하는 거지. 나도 그 정돈 안다고.”

오, 하나 남았다. 돛대. 김독자는 담뱃갑 안에 굴러다니는 그 한 개비를 보다가 고요한 유중혁에게 그제야 고개를 돌렸지. 유중혁의 긴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듯이 김독자 손에서 담뱃갑을 가져갔음. 분명 안에 있는 한 개비를 보고 몇 개를 핀 지 계산하는 눈 사이로 골이 패였지.

“금단증상인가.”

“그럴 리가.”

“…그래 피는 건 봐주겠다. 그래도 여긴 감기가 심해지기 딱 좋다.”

금단증상 아니라니까. 김독자는 아무렇지 않게 내밀어 진 유중혁의 손을 바라보았음. 그래 이게 문제야. 잘생긴 새끼가 쓸데없이 자상하기까지 한 거. 그러니까 이렇게 얽혀버린 거지. 딱 질색이란 말이야. 김독자는 제 아랫입술을 앙물었음.

생각해 보니 이렇게 된 게 억울해. 아니, 억울한가? 솔직히 그렇지 않지. 억울할 게 뭐 있겠어, 기대할 것도 없었는데. 시작부터 이상한 관계였고, 일방적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책임지겠다 했고 그냥 책임을 당한 거니까. 딱 그 정도였겠지. 딱 그 정도고 멋대로 흔들린 건 자신 뿐이고. 얜 그냥….

“유중혁, 하루에 하나씩 딱 그 정도랬지?”

김독자가 기척도 없이 일어나 유중혁의 손에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뒤로 던졌음. 하얀 담배가 바닥에 튕겼지.

“감기도 거의 다 나았고. 이제 괜찮은 거 같아.”

“…”

“네 덕분이다. 고생했어.”

김독자는 유중혁의 어깨를 탁탁 털어냈음.

“욕 봤다. 임마. 고마워”

김독자는 작게 미소를 지었고, 유중혁은 눈은 그것을 보고 크게 떠졌음. 유중혁을 스쳐 그대로 지나가려는 김독자의 손목을 잡았음. 김독자는 손목을 빼기보다는 슬쩍 고개를 돌렸음. 유중혁이 그 하얀 얼굴에 띄워진 미소가 굉장히 단단하며 동시에 금방 휙 지워질 것처럼 보였지. 마치 처음 만난 날의 그 미소와 같았음.

“그때 그 표정이군.”

“내 표정이 뭐.”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참을 때 표정.”

김독자가 눈을 깜박거렸음. 입꼬리가 살짝 떨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지.

“말해라.”

“없어.”

“언제나 혀에 기름칠한 듯 잘만 말하더니 오늘은 입을 딱 다무는군.”

“난 원래 과묵해.”

“안다.”

생각이 말보다 많고. 말하고 싶은 것은 말하지 않는 놈이며, 참는 것을 누구보다 잘하는 놈이라는 거.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를 이제 잘 알았음. 유중혁이 픽 웃으며, 김독자의 손목을 살짝 놔줬음. 아프지 않게 잡혔던 손목임에도 그 손목이 저릴 듯 뜨거워서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그 손목을 만지지 않도록 조심했지.

“여기 이대로 서 있다가는 감기 걸린다.”

유중혁은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거야. 그건 자기만 보니까.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제 볼 안쪽을 잘근 씹었음.

“어차피 며칠로 끝낼 거였잖아.”

“…”

“불쌍한 게 눈에 띄었던 것도 알겠고, 네놈 성격도 잘 알겠고.”

김독자는 목구멍이 조여들어서 숨을 삼켰음. 누군가 충동 어린 손을 내미는 것도 가져가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음.

“사실 굳이 네 책임도 아니고. 이제 안 챙겨줘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김독자는 그렇게 말하며 오래 입어서 약간 닳은 제 야구잠바의 소매를 끌어내렸음. 손을 손목을 가리고 싶었음. 분명 가만있지 못할 거 같았으니까. 살짝 짧은 소매 때문에 고개를 내린 김독자는 이내 제 보풀이 일어난 소매를 보고 그것조차 숨기고 싶었음.

어디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는 거 같으니까.

쿨쩍. 김독자는 괜시리 눈과 코가 아려왔음.

감기 탓인 모양이야.

유중혁이 작게 한숨을 쉬는 게 들려왔음. 곧이어 유중혁이 자신의 져지를 벗었음.

“헛소리하는 군 김독자.”

펄럭이며 김독자의 어깨 위로 제 져지를 얹고 유중혁은 옷 두 팔의 소매를 꽉 묶었음. 목을 졸라 죽일 셈인지 콱콱하며 묶음을 조이는 소리가 제법 컸음. 물론 어깨를 두른 정도지만 워낙 기세가 살벌해서 김독자는 제 목이 조여지는 기분이 들었지. 어깨가 막 움찔거리며 움츠러들었어. 얘 나 죽이려나 봐.

“15일이 잘됐다고 했던 이후는 그날 이후로 내가 경기에 나가기 때문이다.”

“뭐?”

“가면 며칠간 갔다 오니. 그동안은 널 감시할 사람이 없지 않나.”

“…갔다 온다고?”

“그럼 앞으로 모른 척 할 거라 생각한 건가.”

김독자가 눈을 슬쩍 옆으로 굴렸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모른 척 하려던 건 네놈이겠지.”

“…아닌데.”

“거짓말은 잘도 하는군.”

꽉. 묶음을 당기는 그 손길에 김독자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음. 정말 좀만 더 땡기면 목까지 매듭이 올라올 거 같아.

“근데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뭐가.”

“네가 왜 날 챙기는지.”

김독자는 괜히 유중혁이 만들어 준 매듭에 숨기듯이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음. 등 뒤로 따끈하니 유중혁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고, 향이 나는 것도 같고. 속이 간질거리고 얼굴이 따끈히 달아오르는데 이 간질거림과 온기의 이유를 모르니 불안한 거야. 요 며칠 항상 그랬지.

“나도 모른다.”

유중혁이 담담히 말했음.

“타인한테 관심 가지는 것도 관심 주는 것도 싫어한다.”

“나 말하는 거냐…? 너 말하는 거냐?”

“입은 절대로 안 다무는군.”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와락 미간을 구기며 눈을 흘기는 게 보였음. 기가 센 것인지 기가 약한 것인지. 유중혁은 소매를 잡던 손을 놓고서는 그 소매 안에 파묻힌 김독자의 얼굴을 잡아 들어 올림. 김독자가 싫은 듯 조금 버텨보았지만 역시나 안되자 순순히 고개를 들어 올림. 불편한 듯이 눈은 여전히 옆으로 슬쩍 피한 채였지.

김독자의 볼은 겨울바람에 맞은 탓인지 차가웠음. 뭔가 말하고 싶은지 우물거리는 붉은 입술이 보였지.

유중혁은 순간 충동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하고 싶어졌지.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테고 망설였을 테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있어 충동적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 김독자의 얼굴을 조금 더 들어 올린 채로 유중혁을 고개를 내렸음.

옆으로만 피하기만 하던 김독자의 눈이 오늘 처음으로 유중혁에게 제대로 맞닿았음. 정말 살짝 닿았을 뿐이었음. 꾹 찍어누르듯 닿은 입술은 가장 얇은 피부를 가진 탓인지 유중혁의 체온이 예민하게 닿아왔지. 화끈 얼굴과 머리에 열이 돌았음.

“너, 미친! 너..!”

“담배 냄새가 심하군.”

유중혁은 혀를 찼음. 잔뜩 찌푸린 얼굴은 김독자의 입술에서부터 올라온 향이 정말 맘에 안들은 모양이야. 아니 그럴 거면서 왜 입술을 비벼대고 지랄이냐며 김독자가 억울해 하기도 전에 유중혁은 고개를 한 번 더 내렸음. 이번에는 움찔 김독자가 먼저 반응했음.

흡.

김독자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음. 놀라서인지 꽉 닫힌 입술 위로 아까처럼 유중혁의 입술이 닿았지. 김독자랑 달리 약간 거슬거리는 입술이 몇 번 그 위를 더듬다 확연히 촉감이 다른 무언가가 입술 사이를 더듬었음. 김독자가 놀라 움찔거리자 그것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유중혁의 엄지손가락을 볼을 쓸었지. 그 덕인지 조심스럽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유중혁이 파고들었음. 입술도 뜨겁다고 느꼈었는데. 서로의 체온이 직접 닿는 점막은 뜨겁다 못해 녹아내릴 거 같았지. 퍼부어지는 뜨거움을 받아들이다가 머리가 핑 돌 때쯤 유중혁은 떨어졌음. 휘청거리는 김독자를 익히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이 유중혁은 김독자를 끌어 제 품에 안았지.

김독자는 그 품에 안겨서 뛰고 있는 유중혁의 심장 소리를 들었음. 이게 빠른 것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소리 하나는 크다고 생각했지.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픽 미소를 지었음. 너 나 좋아하냐? 이딴 이야기를 해야 할 타이밍인 건 알겠는데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좀 영 껄끄러웠음.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게 있었음. 김독자가 살짝 몸을 떨어뜨리고 유중혁과 눈을 마주하지.

“중혁아. 너 곧 경기라고 하지 않았느냐?”

“맞다.”

“너 감기 옮으면 어떡하냐?”

방금 굉장히 서로 삽질을 하다가 극적으로 키스해놓고 처음 나오는 말이 감기 걱정이라니. 유중혁은 순간 어이가 없어져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김독자가 제법 진지한 표정인 것을 보고 픽 하고 코웃음을 쳤음.

“네가 앓은 감기 따위 내가 앓을 리가.”

“재수없….”

재수없긴 하지만 또 정말 그럴 거 같아. 김독자는 언제처럼 같은 유중혁의 말에 헛헛 웃음을 터뜨렸지. 언제 나와 같은 유중혁이라 웃기다고 해야 할지 원래 처음부터 우리가 이런 관계였던 건지. 김독자는 주머니에 소매에 숨겨놨던 손을 쏙 빼서 유중혁에게 내밀어.

“중혁아.”

“뭐지.”

“나 배고파.”

뻔뻔한 그 말에 유중혁이 작게 한숨을 픽 내쉬면서도 김독자의 손을 쥐지. 차가웠던 아까랑 다르게 손에 온기가 돌아와 있었음.

“안 그래도 쌍화차 더 받아왔다.”

“받아왔다고?”

“오늘 오후에 받았다.”

“그거 쟁여…아니, 사는 거 아니었냐?”

“공산품 따위 믿지 않는다. 한의학과 친구한테 부탁해서 받고 있었다.”

“설마 그 여성분이….”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이 여성? 하고 재차 물어봄. 김독자가 그것에 급하게 ‘아, 아니아니’하고 다급하게 덮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지. 유중혁이 상황의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음.

아악―! 김독자가 한 손으로 빨개지는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지. 유중혁이 계속해서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렸음. 뭐 어쩌라고. 뭐. 김독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간질거리는 코에 엣취!하고 재채기를 했지.

“혼자 청승떨다 감기가 심해졌군.”

“아 몰라. 헷치!”

김독자가 제 소매로 코를 문댔지. 유중혁이 제 손을 가져가 제 주머니에 넣어두고 어깨를 감싸는게 느껴졌음. 쿡쿡 웃는 소리 따라 떨림이 닿는 곳으로부터 퍼졌지. 쿨쩍. 김독자는 괜시리 흘러나오는 코를 들이마셨지.

이제 겨울방학도 얼마 안 남았고, 겨울 기숙사에 지낼 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이 감기는 떨어지지 않을 거 같았음.


fin

잡덕. 내가 보고싶은걸 연성함. 제 취향이지만 같이 좋아해주신다면 그걸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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