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 BGM | 재생을 권장합니다
















37

3년 전



"미안해. 오랜만에 만나서 이러는 거, 못 할 짓이라는 거 아는데······. 온전히 내 탓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순서는 좀 잘못됐지만··· 다른 사람 통해서 듣는 것보다 내가 직접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왔어. 우리, 그동안 끝난 거나 다름없는 사이였으니까."

“···.”



팔짱을 끼고서 반응 없이 침묵을 지키던 지민이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끝난 거나 다름없는 사이였다니. 누구 맘대로, 대체 언제부터?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습관처럼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지민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오자, 지유는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지민아, 나··· 다음 주에 결혼해."



Rêve의 시작을 함께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더라. 근 1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으나 꾸준히 소통하며 교제를 이어가던 연인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 통화했을 때만 해도 그런 기색 보이지 않았잖아. 지민 주위의 열기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파리에 있어야 할 여자친구가 딸랑, 벨소리와 함께 오픈이 한 주 남짓 남은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간의 자초지종을 깔끔하게 생략하고서 다짜고짜 임신 소식과 결혼 예고를 한꺼번에 터뜨렸을 때,



지민의 얼굴에 싸늘한 비소가 어렸다. 책망의 시선이었으나 두 눈동자는 공허했다. 일방적인 통보가 떨어진 순간 가장 먼저 치고 올라온 것은 배신감도, 분노도 아닌, 어딘가 석연치 않은 상황에 대한 의문점. 그럼에도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잘 관리된 굽슬거리는 긴 머리칼을 등허리까지 늘어뜨리고서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은 지유의 모습은 확실히 낯설었다. 얼굴에 떠오른 어색한 미소에서는 괴리감마저 느껴졌다. 우린 이 정도 사이였던 건가. 의무감과 미안한 마음이 주가 되던 관계였으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헛웃음을 뱉어내는 와중에도 지민의 얼굴에선 냉기가 흘렀다. 그의 시선을 차마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던 지유가 고개를 떨구었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지민의 시선은 이내 문가에 서서 한가로이 상황을 주시하는 세리에게로 향했다.



"한세리."

"응, 지민아."



“넌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전에 말한 그 '피치 못할 사정'이 이거였어?”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너무 서운해하진 마. 절친 둘 사이에서 중립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



“너한테 서운할 이유 없어.”

“···.”



무미건조한 지민의 음성에 지유가 아랫입술을 자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랜 연인에게 예기치 않게 결별 통보를 받은 사람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세리를 응시하는 지민이 보였다. 지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만 가봐. 나중에 연락할게.”

“아, 그럴까. 지유야, 너도 일어나. 어깨 펴고.”



“너만.”

“··· 어?”



“김지유는 여기 두고 너만 가라고.”

“하지만 지유가 좀 이따가 부티크 예약이···.”



“양심이 있다면,”

“···.”



“지금 뭐가 우선인지 정도는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

“···.”



“내 말이 틀려?”

“······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 세리야.”

“지유 너···,”



지유의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위태로웠다.



“걱정 마. 늦지 않게 따라갈게.”

“··· 그래.”



못 미더운 시선으로 지유를 흘긋대던 세리가 결국 단념하고 레스토랑 문을 나섰다. 딸랑.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도 한참을 미동 없이 앉아있던 지유는 곧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몇번이고 확인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움켜 쥔 두 주먹은 하얗게 질린 채 그녀의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맞은편에서 나는 기척에 지유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싸늘한 빛이 역력한 지민의 시선이 낯설었다.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던 지유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그거 들으려고 남은 거니까 어서 끝내줘. 지금 갈 데가 있어서.”

“김지유.”



“···.”

“너야말로 나한테 할 말 없어?”



"···."

"난 지금 이 상황이 조금도 이해가 안 가거든. 날 납득시키기 전까진 못 가. 보낼 생각 없어."



“지민아···.”



‘내가 잘못했어. 네 옆에 있을 자신이 없어서 먼저 널 놓은 거야. 그리고···.’



제 안에 산더미처럼 쌓인 이야기들이 빛을 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영.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섣불리 말을 옮겼다간 지민 대신 선택한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것도.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고백을 지유는 끝내 목구멍 너머로 삼켜냈다.



‘ 똑똑하게 굴어, 김지유. 지민이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했다간··· 알지? ’



머릿속에 낙인처럼 새겨진 세리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귓가에 맴돌았다.



“··· 다시 말하지만 우린,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아- 그래?”



지민이 싸늘한 냉소와 함께 되물었다.



“그럼 좀 더 일찍 얘기해 주지 그랬어.”

“···.”



“너 때문에 괜한 시간 낭비할 필요 없게.”



서늘한 얼굴로 느릿하게 말을 잇는 지민의 태도는 몸서리가 날 정도로 차가웠다. 그 모습이 마치 너 없이도 난 아무렇지 않다 말하는 것 같아 울컥한 지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 이러는데···.”

“···.”



“너 같으면··· 너였다면, 네 옆에 있고 싶겠어···? 그 옆에서 버틸 수 있겠냐고.”

“···.”



“그날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잖아, 너. 난 대체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온종일 생각해도 답을 낼 수가 없더라. 네가 의무적으로 보살펴야 하는 존재?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고 너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강아지? 사방에서 압박하고 괴롭혀대는데도 확신 한 번 준 적 없었지. 빈말이라도 따뜻한 말··· 좋아한다는 말··· 해줬다면 그 정도로 암담하진 않았을 거야.”

“괜찮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 건 너야. 네 손으로 끝낸 관계. 이제 와서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 늘어놔 봤자 바뀌는 건 없어.”



울먹거리기 시작한 지유를 외면하며 지민은 부러 모진 말을 뱉었다. 하얀 뺨 위로 구슬구슬 흐르는 눈물을 본 지민이 테이블 아래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먼저 놓아버린 건 넌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어째서 또 울고 있는 거야.



“··· 그래, 의무감 때문에 내 옆에 있어 줬던 너나, 혼자 버티는 생활에 지치고 질려버린 나나. 우린 둘 다 피해자야. 그래서 난 내 결정, 조금도 후회 안 해.”

“피해자? 착각하지 마. 난 피해자가 아니야. 그리고 네가 너 자신을 피해자라 인지한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안 사실인데.”



“···.”

“네 말 듣고 보니까 난 정말 그동안 아는 게 얼마 없었네.”



“빈정대지 마.”

“아니,”



“···.”

“이젠 전부 납득할 수 있겠다는 거야. 이게 네가 원하던 거잖아. 그러니까 더는 나한테 미안해하지도, 후회하지도 말고 네 갈 길 가.”



“···.”

“···.”



“··· 그럼···.”

“너.”



“···.”

“··· 네가 결혼하는 사람은,”



“···.”

“괜찮은 사람이냐?”



목이 메어 고개만 끄덕이던 지유가 이윽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응. 과분할 정도로 나한테 잘해주는··· 좋은 사람이야.”

“··· 그래.”



지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또각, 또각. 문 쪽으로 한발 한발 내딛던 걸음이 일순 제자리에 멈췄다.



"지민아."

"···."



“너도 꼭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



“그 사람은,”

“···.”



“절대로 혼자 두지 마.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줘.”



‘그리고 그 사람이, 세리는 아니기를 바라.’



"본인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혼동하고 있나 본데,"

"···."



“네가 좋은 사람 만난 건 분명 축하받아 마땅할 일이지만,"

"···."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잖아?”

"···."



“주제넘게.”

"···."



가슴에 박힌 비수가 잔인하게 상처를 후벼팠다. 떨리는 등을 보이며 잠시 멈춰 서 있던 지유가 다시 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딸랑. 문이 닫히며 작은 알림 종이 울렸다. 그 벨소리를 신호로 지민은 덤덤한 척 붙잡고 있던 자신을 내려놓았다.



털썩.



“박 솊, 우리 2층은 이제 다 마무리··· 야! 지민아!”



나선형 계단을 걸어 내려오던 석진이 발견한 것은 홀 중앙에 쓰러져 있는 지민의 모습이었다.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지민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유효기한이라는 18개월을 이미 여러 번 넘겨온 그들이었다. 지유가 말한 대로 언젠가부터 무거운 의무감을 가지고 그녀를 대하기 시작했으나 관계의 바탕에는 분명 사랑이 있었다. 적어도 지민은 그렇게 믿었다.














/















유치원 시절부터 친구라고는 세리뿐이었던 지민의 세상에 새로운 누군가가 발을 들인 것은 그가 막 열네 살이 되던 해였다. 땅에서 솟았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느닷없이 등장한 김지유의 존재는 그에게도, 그의 주변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해야겠다며 갓 구운 빵이 가득 든 상자 세 개를 품에 꼭 안고서 낑낑거리며 걸어온 조그마한 여자아이. 첫 만남부터 지민을 둘러싼 고고하고 튼튼한 장벽에 미세한 틈이 생겼다.




「 근본이 없다니! 당장 내 빵들한테 사과해, 이 나쁜 놈아! 엉엉- 」

「 뭐, 뭐야. 너 지금 내 앞에서 우는 거냐? 알았어. 먹어줄 테니까 그만 좀 울어. 」



「 먹어줘-? 먹어준다고-? 흡, 됐으니까 이리 내! 그런 말 들으려고 만든 거 아니니까 내놓으라고! 어헝헝- 」

「 후······. 야, 땅꼬마. 어쩔 수 없어. 난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되는 몸이라고. 정 원하면 네가 내 기미 상궁 노릇이라도 하던가. 」



「 뭐얏-?! 」

「 프흣. 장난이야. 같이 먹잔 말이었어. 너무 많으니까. 」




학교 온실 내 테라스에서 함께 빵을 나눠 먹은 이후로, 지유는 언제 어디서나 둘뿐이던 지민의 학교생활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전학생일 뿐이었던 아이는 지민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지민과 세리가 다니는 사립학교는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탄탄대로로 뚫려있어 통칭 '골든 로드'라 불렸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정·재계 인사들의 자제가 아니고서야 꿈도 못 꿀 정도로 엄청난 등록금. 분기마다 납부해야 하는 터무니 없이 비싼 지원금과 기부금. 일단 '골든 로드'를 따라 교육과정을 마치면 인맥과 학연은 확실히 보장되었으나 재정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높은 문턱만 하염없이 올려다보다 뒤를 도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지유의 부모님은 독립 베이커리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원자재를 공급하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다. 나름대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믿어왔던 아이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자신의 가정형편이 다른 재학생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뿐인 딸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매 분기 허리띠를 졸라매며 등록금을 대는 부모님을 지유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새로 생긴 두 친구가 제게 더없이 든든한 지원군이자 언젠가 잡고 올라갈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 줄 거라 자신했다.


제빵사 출신 부모님의 영향으로 빵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지유는 입버릇처럼 자신의 두 단짝 친구들에게 종알거렸다. 언젠가는 꼭, 내 이름을 건 제과 브랜드를 만들 거야. 비슷한 목표와 꿈을 공유해서였을까. 지민과 지유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어린 나이에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수준이었으나 지민에게 지유의 존재는 아주 특별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집에서조차 일상처럼 금기시되는 요리에 관한 자신의 꿈과 열정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세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들어가듯 시나브로 그를 물들이던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지민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

「 왔다. 뭔데? 」



「 짠! 」

「 유치원생이 그린 거야? 」



퍽-!



「 아! 김지유, 날 그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

「 맞을 짓을 했을 때 맞는 건 당연한 거거든? 」



「 장난이었다고 이 깡패야. 」

「 자자, 일단 좀 봐. 여기가 바로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야! 」



「 ···? 」

「 내가 쭉 생각해봤는데···. 지민아. 나중에 우리, 같이 가게를 차리자. 지분은 딱 반반으로다가. 완벽한 동업자가 되는 거지. 」



「 풋. 무슨 가게. 빵집? 」

「 그러니까··· 우선 건물은 이렇게 커-다랗게 지어. 손님들은 1층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서 네가 만든 요리들을 맛있게 먹을 거야.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아담한 베이커리가 나와.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나가는 길에 갓 구운 빵이랑 예쁜 조각 케이크를 사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거든. 거기다가, 그 위층에 카페까지 있으면 진짜 딱 아니야? 아 참, 앞마당엔 무조건 초록초록한 잔디가 촘촘히 깔려있어야 해. 알았지? 」



「 이건 뭐야. 화장실? 」

「 화장실일 리가 있겠냐-! 유리 온실이야. 우리가 쓸 허브랑 찻잎을 직접 길러서 쓰면 좋잖아. 사이즈는 이 정도로 아담하게 짓고···, 」



「 찻잎? 」

「 응-! 3층 카페에서 쓸 거! 3층은, 벽 한쪽 면을 전부 통유리로 만들어 놓을 거야. 창가에 앉아서 차 마시는 손님들이 온실이 있는 예쁜 정원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근데 차는 그렇다 치고 커피를 내려야 하면··· 흠···. 어쩔 수 없다. 너나 나, 둘 중 하나가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야겠네. 」



「 이 바보가 또 김칫국부터 마시네. 그렇게 번거로운 구조로 지으면 손님들이 왔다가도 복잡해서 도망갈걸. 」

「 그런 말 말고 진짜 감상평은 어떤데? 솔직히 좋은 생각인 것 같긴 하지. 응? 」



「 글쎄. 그렇지만 뭐, 나한테 미리 동업 신청을 하는 것 자체는 꽤 똑똑한 발상인 것 같긴 해. 」

「 응-! 나 미리미리 박지민 찜 해 두는 거야-! 」




같은 시각, 두 사람의 사이가 좁혀지는 것을 어두운 얼굴로 지켜보며 까득, 이를 가는 이가 있었다. 지민이 지유에게 점점 스며들어 갈수록, 초장에 지유를 처리하지 못한 것에 짙은 회한을 가지고 있는 세리였다.



이제껏 그 누구도 감히 세리의 앞에서 지민에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여자애들 정도는 그녀 선에서 능숙하게 싹을 잘라버릴 수 있었다. 하물며 학교에서 손에 꼽는 사회 배려 대상자인 지유를 처리하는 것은 그녀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 쉽게 경계심을 풀었던 걸까. 지민이 지유에게 관심을 가진 순간, 세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민과 지유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진 지금, 이제까지와 같은 방법이 통할 리가 없었다. 뒤에서 은밀하게 일을 꾸며 상대의 평판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고 온갖 구설에 시달리게 만드는 세리의 특기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맹한 겉모습과 달리 이해가 빠른 지유가 매일같이 지민의 옆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탓이었다.



세리는 자신의 음험한 그림자를 지민이 언제까지고 깨우치지 못하길 바랐다. 지금은 '가장 가까운 친구' 타이틀이라도 지켜야 했으니까. 억지스럽게 매여진 거창한 정혼 관계에 지독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지민이 세리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명백했다. 지민에게 세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일에 신물이 난, 누구보다 털털하고 믿음직스러운 친구. 그러나 지민이 세리에게 허락한 위치는 딱 거기까지였다.




「 지민아. 우리, 지유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

「 뭐야, 너답지 않게. 」



「 아빠가 그랬어. 걔랑 어울리지 말라고. 그 애, 집에 빚까지 내면서 이 학교 다니는 거 알고 있어? 결과적으로 뭘 바라고 우리한테 접근하는지 너무 뻔히 보이잖아. 」

「 지유가 뭘 바라는데? 」



「 ···. 」



「 한세리. 너··· 어제 우리 둘이서만 본 정 가서 삐졌구나? 」



「 그럴 리가 없잖아. 」

「 다음번엔 너도 데려가 줄게. 맨날 요리 바보라고 놀리니까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지유만 데리고 간 거야. 」



「 그런 거 아니라니까. 」

「 나 참, 사람이 너무 인기가 많아도 피곤하다니까.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심통 부리지 마. 알았지? 」



「 ···. 」

「 얘 봐라, 대답 안 하네. 뭐냐? 천하의 한세리가 진짜 삐진 거야? 」



「 됐어. 앞으로 너랑 말 안 할 거야. 」

「 큭. 그래봤자 두 시간도 못 갈 거면서. 」



「 ··· 박지민 진짜 싫어. 」

「 나도 거짓말쟁이는 싫다- 앞으로 얘기 안 해야지- 」



「 ···. 」

「 ··· 진짜 하지 마? 」



「 ······. 」

「 진짜로? 」



「 너 짜증나! 」

「 하하하. 」




1년 후, 지민의 유일한 조력자였던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민은 프랑스 파리 행 비행기에 올랐다.



또다시 1년 후, 지민의 낡은 아파트에 처음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제 몸만 한 여행 가방 옆에 경직된 채 서 있는 사람은 지유였다. 1년 반만의 재회. 가장 즐거웠던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짧은 시간 뜨겁게 불타올랐다. 한편, 지민과 지유가 파리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하게 된 세리는 격분했다.



끝내는,




「 어떡해···. 나 어떡해 지민아···. 」

「 무슨 일이야.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 」



「 어허허헝······. 」

「 김지유! 」



「 공장이 완전히 넘어갔어··· 그래서 아빠가······ 아빠가···, 흡, 」

「 ······. 」



「 어떡하지···. 우리 아빠 어떡해···? 다 우리 때문이야. 널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그때 아줌마 말씀을 들었어야 했어. 왜 날 돌려보내지 않은 거야! 왜! 왜! 」

「 ···. 」




가슴팍에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작은 주먹. 힘없이 떨리는 어깨. 눈물범벅이 된 채로 오열하는 지유를 보며 지민은 끝없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민의 약점이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혼란스러웠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목메어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지민의 얼굴도 괴로운 마음에 점차 일그러졌다. 



요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지민은 요리가 좋아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성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
















무던한 예식장과 평범한 새 신부. 흰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신부 대기실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던 지민은 결국 단념하고 쓸쓸히 발걸음을 돌렸다.



“먼저 차에 가 있을 테니까 내고 바로 내려와. 이름은 적지 말고.”

“알겠습니다, 대표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주제에 식장까지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입술 끄트머리에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고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지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상계단 쪽이었다.



“수고했어요. 식 끝나고 확인하면 잔금까지 전부 들어가 있을 거야.”

“저··· 아가씨, 그럼 제 진급은 언제쯤···.”



“김 상무님. 제가 뭐라고 했죠?”

“···.”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했을 텐데. 조급해하는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싶진 않지만, 그것도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군지 봐가면서 해야지. 안 그래요?”



차분하지만 거만한, 삼촌뻘 되는 이를 익숙하게 제 발아래에 두고서 말을 이어나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어조는 분명 세리의 것이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지민은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내용에 멈칫하며 손을 뗐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기록을 남길 수 없으니 만나 뵀을 때 다 여쭙고 싶어서. 그럼 마지막으로··· 이혼 시 위자료 청구에 관한 것은 어떻게···,”

“목소리 안 낮춰요?”



철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철문. 그 뒤로 보이는 것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정장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끼워 넣고 서 있는 지민을 본 순간, 세리의 심장이 지하로 쿵 떨어졌다. 팔짱을 끼고서 한가롭게 지시를 내릴 당시 가지고 있던 여유는 모두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무슨 얘기가 오고 갔더라···? 침착함을 잃어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지민에게 고정하면서도 세리는 방금 전 나누던 대화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캔했다.



“지민아.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요즘 들어 유난히 지유 얘기를 자주 한다 했는데."



"난···."



“너였어?”



“···.”

“대체 왜.”



“······ 내가 손 놓고 가만히 있었대도 너랑 지유는 안됐을 거야.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관계였어.”

“진 여사 코스프레라도 해보려는 심산이었던 거야?”



“그 애는, 김지유는, 죽어도 네 옆에 있을 만한 그릇이 못 돼.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걸 왜 너만 모르는데?”

“그러는 너는.”



“나만큼 너한테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어.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옛날부터 네 짝이었던 건 나였으니까. 그때부터 네 옆을 지켜온 것도 나야, 기억해?"

“아, 당사자 의견 반영 없이 고고하신 분들께서 정해놓은 그 엿 같은 정혼 말하는 건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누구랑 똑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거 보니까··· 역겹네.”



“뭐···?”

“이게 네가 각오하던 그림이었지. 그렇게 원한다니 들어줄게. 오늘부로 넌, 내 인생에서 아웃이야.”



“박지민, 정신 차려. 김지유가 먼저 널 배신한 거야. 어머님께 PJ 베이커리 분점 받는 조건으로 너 포기한 거라고!”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

“그렇게 생각하면 네가 한 일에 정당성이 생기는 것 같지.”



벗어날 틈이 보이지 않아 점점 더 조급함을 느끼던 세리가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리의 얼굴을 지켜보던 지민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혀. 그러니 착각 말고 꺼져. 계속 봤다간 그 가증스러운 목을 비틀어 버릴 것 같으니까.”

“너··· 어떻게 그런 말을,”



“그리고 당신,”



눈치를 보며 비상구에서 벗어날 타이밍만 재던 흰 턱시도 차림의 남자가 흠칫하며 지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생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하고 싶다면 어디 한 번 이혼해봐. 가만 안 둘 테니까.”



보금자리라 일컬을 수 있는 집다운 집은 아주 오래전에 잃었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사랑과 믿었던 우정을 하루아침에 상실한 그날, 지민은 예정에 없던 파리 행 비행기를 띄웠다.



이제 더는 남은 것이 없는 텅 빈 이 나라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수도 없이 다짐하면서.
















필수 BGM | Bistro Fada (반복 O)
















3년 후 



“한동안 못 쉬었다고 항의하는 건가? 머리가 안 돌아가? 그걸 대체 무슨 정신으로 받은 거야.”

— ··· 죄송합니다.



“후···. 이 집사님 때문이겠지.”

— ······ 죄송합니다. 대표님.



“됐어. 그래서 차는.”

— 주차장 마무리가 아직 덜 돼서 일단 Notre Pain 근처 도로변에 세워뒀습니다. 마무리 되는대로 제가 픽업을,



“그냥 둬. 내가 직접 공항으로 끌고 갈 테니까. 인부들 나가면 보고하고 내 차는 호텔로 가져와.”

— 알겠습니다, 대표님.



귀찮게 됐군. 지민의 신경질적인 손길에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이 사방으로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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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의 나이에 난생처음 파리에 발을 디딘 지민은 시내 구석자리에 위치한 작고 입소문이 많이 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가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시작했다. 종일 맨손으로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오물 처리와 뒷정리가 남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간 지민은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이른 새벽, 오들거리며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스튜디오라 부르기도 민망한 낡은 아파트는 본가의 제 방에 딸린 욕실보다 작았다. 요리의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 없는 급여로 매주 한 번은 꼭 식자재를 사러 나갔다. 건강관리는 사치. 부실하게 먹고 대부분의 수면시간을 잡아먹히며 그렇게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악착같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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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일을 병행할 수 있게 된 이후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한 소규모 요리 대회에서 어렵지 않게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지민은 제게 주어진 기회의 폭을 조금씩 넓혀갔다. 해가 지나면서 그가 참가하는 경연 대회의 규모도 점점 더 커졌다. 대회를 나가는 족족 금상을 거머쥐는 셰프 Jimmy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요리의 스펙트럼이 넓고 기본을 지키면서 독창성과 맛을 포기하지 않는 패기 넘치는 젊은 셰프. 그가 지휘하는 4인 팀이 독일에서 개최된 요리올림픽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난 후, 지민은 주 무대였던 파리로 돌아왔다.



특급호텔 총주방장으로 스카웃되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지민은 우연한 기회로 국제 행사 만찬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으며, 열렬한 호평을 따라 엇비슷한 의뢰들이 밀려들었다. 지민은 얼마 후 안정적인 호텔에서의 직책까지 내려놓았지만, 당시 지유를 혼자 둘 수 없었던 탓에 한동안 어떤 일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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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Rêve를 오픈함과 동시에 깊은 상처를 안고 돌아온 파리에서, 지민은 저를 원하는 부름에 쉴 틈 없이 응답했다. 몸을 한계치까지 혹사시킴으로써 마음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흘러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취월장한 실력과 높아진 네임밸류. 세계 각지의 오성-칠성급 특급호텔들이 1년 365일 러브콜을 보내오는 탓에 일주일 이상 한 나라에 체류하는 법이 없었고, 간단한 자문 한 번에 몇억씩 만지는 것은 이미 예삿일이 된 지 오래였다. Jimmy가 체류하며 자문하는 기간 동안 호텔들은 그의 이름으로 홍보하며 식도락가들과 관광객들을 그야말로 끌어모았으니 누구에게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각종 요리 경연 대회에 최연소 공식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것을 여러 번 제안받았으나 단 한 번도 수락한 적은 없었다. 다른 이들의 요리를 평가하는 것보다 본인의 요리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이 제 적성에 더 맞는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다른 나라에서 아침을 맞는 생활에 익숙해졌을 즈음, 지민은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열심히 쓰고 신나게 즐기며 세계 곳곳을 유랑 중인 아버지를 만났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처음 보는 아들에게 한량 같은 아버지가 지나가듯 흘린 말은, 지민의 앞으로 남겨진 외할아버지의 유산이 꽤 된다는 것이었다. 부모의 모든 유산과 상속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각서에 서명한 후 집에서 도망쳐 나올 당시엔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회사의 지분과 듣도 보도 못한 계좌 여러 개를 포괄하는 어마어마한 유산이었으나 파리 부촌에 위치한 대저택 외에 그가 딱히 손을 댄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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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젊은 셰프 Jimmy의 이름이 상승기류에 안정적으로 접어들던 바로 그 무렵부터, 지민은 분기마다 달갑지 않은 선물 공세를 받기 시작했다. 그중, 세리의 부친이 철마다 보내오는 최고급 커스텀 세단과 한정판 슈퍼카 선물은 열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음에도 매번 빠지지 않고 그를 찾았다. 여러 번 거절당한 경험을 토대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인지, 이번에 택한 방식은 이전과 달랐다.



‘이 집사님을 이용해서 상하 자식을 구슬렸겠다···.’



조금 성가시게 되었을 뿐, 바로 수속을 마치고 사람을 써 돌려보내면 되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건 또 뭐야.’



흉물스러운 노란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된 금색 페라리를 보기 전까진.



자세히 보니,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은 스포츠카의 매끄러운 금빛 차체에 그어진 기다란 홈이 눈에 들어왔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나. 이 상태로는 바로 돌려보내는 것도 무리잖아. 한 손으로 차 이곳저곳에 붙은 포스트잇을 뜯어내며 다른 손으로는 종이에 써진 번호를 눌렀다. 첫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에서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민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 NO FRENCH! NO MONEY!



이 여자의 정신 상태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까, 라는 생각부터 경찰에 신고 전화부터 남길까, 라는 생각까지. 의식의 흐름은 불규칙하게 흘러갔다. 전화를 걸기 전에는 귀찮으니 못 본 척 제 선에서 해결하자는 마음이 컸으나, 이젠 괘씸해서라도 그냥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상대의 태도에 어리둥절해 있던 지민은 주변 행인들의 웅성거림을 듣고서 다시금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슈- 당신 차를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저 여자예요.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저만치서 앳된 얼굴의 단발머리 여자가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놀라서 동그래진 토끼 눈. 연보라색 후드티. 어디서 구르다 온 건지 제대로 흙투성이가 된 무릎. 가방은 또 왜 저렇게 너덜너덜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꾀죄죄한 몰골로 나타난 여자를 본 지민은 그저 착잡할 따름이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던 수화기 너머 인간의 정체가 바로 저 조그마한 여자애였다는 건데. 지민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최소한의 상식을 가지고 전화를 받았다면 적당히 합의하고 넘어갔겠지만 여자의 염치없는 태도를 겪은 지민에게 선처의 의지는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과연 내 앞에서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파리 유치장에서 24시간을 보내고 난 후엔 세상에 둘도 없는 공손한 사람이 되고 싶어질 거다.



오전에 시장조사를 마치고 구매한 식자재를 상자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과정에서 사용한 비닐 끈이 마침 주머니 안에 남아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한국인이냐 묻는 어벙한 얼굴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면 볼수록 괘씸한 인간이네. 절대 풀 수 없도록 단단히 묶을 생각이었으나 까슬한 재질의 끈을 버티기엔 많이 약해 보이는 여자의 피부가 신경 쓰여 매듭짓기는 그만두었다.



“수리비 갚는다니까 왜 범죄자 취급하냐고요! 지갑도 도둑맞아서 가뜩이나 서러운데!”



시종일관 비릿하고 냉소적인 비소만을 보이던 지민이 일순간 포커페이스를 잃었다.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여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을 땐 절로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 모로 봐도 지유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눈물 흘리는 모습만큼은 어째서 옛 연인의 그것과 꼭 닮아있는 건지. 자신의 울음에 유독 약했던 지민을 누구보다 잘 알아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울상부터 지으며 매달리던 그녀와, 알면서도 못 이긴 척 들어주던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라 지민은 눈을 감았다.




유치장 맛을 보여주겠다던 삼엄한 계획을 곧바로 접어버린 것도, 


저택 수리 마지막 날이라 비울 예정이던 호텔 방으로 무작정 여자를 데리고 간 것도, 


여행 첫날부터 이런저런 사고에 휘말리고 있는 주제에 겁도 없이 혼자서 한 달씩이나 파리에 체류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신경이 거슬린 것도,


축 처진 채 영혼 없이 앉아있는 여자에게 말도 안 되는 고용 제의를 해버린 것도, 


당당하게 제 제안을 거절하고서는 차 안에서 경계심 없이 곯아떨어졌다는 비서의 보고에 충동적으로 여자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우는 얼굴이 제가 아는 누군가와 겹쳐 보일 때마다 안쓰러운 감정이 차올라서. 나라도 거둬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








평범한 고용계약서를 얼토당토않은 내용으로 둔갑시켜 서명을 받은 날을 시작으로, 박지민이 한 달간 관찰한 오여주는 이랬다.




김지유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첫날의 울먹이는 얼굴은 호기심과 동정심을 자극했고,


독창성을 뛰어넘어 난해하기까지 한 패션 센스는 모든 옷을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생김새도, 말투도, 하는 행동까지 전부 어린애인 주제에 스물아홉씩이나 먹었다는 여자보다 네 살이 어리다는 사실은 애시당초 인정할 생각도 없었고,


불퉁한 목소리로 작게 구시렁대다가 혼자 뜨끔해서 제 눈치를 볼 때마다 터지는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음식이 가득 담긴 조그마한 입을 꼭꼭 오물거리며 한 입 한 입 행복해하는 해맑은 얼굴에 처음 요리를 시작했을 때의 설렘을 느꼈고,


매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투명하디 투명하게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신선했고,


쭈굴거리는 모습이 몸에 밴 것 같다가도 태생이 다혈질인 탓에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로 바락바락 외칠 때면 계속해서 짓궂게 굴고 싶다는 가학적인 욕구가 몸속 깊은 곳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으며,


밤마다 재워준답시고 들어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면 여자의 조그만 입술만 멍하니 바라보다 이야기의 내용은 전부 까맣게 잊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문득 저 자신이 미친놈처럼 느껴져 그런 생각 따위 한 적 없다는 자기최면을 걸어 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








여주가 저택에 발을 들인 지 2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봐, 오여주.”

“··· 라고 말했··.”



“정신 차리고 2층으로 올라가. 나 참, 날 재우러 와서 네가 먼저 잠들면 어쩌겠다는 거야?”

“흐음-”



침대 옆 의자에 녹아내리다시피 앉아서 상모돌리기를 시작하는 여주를 애잔하다는 듯 바라보던 지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러나 졸음이 쏟아지긴커녕, 정신이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당최 도와주지 않는군.”



뒤쪽에서 "푸우··· 푸우···." 하고 들려오는 여주의 숨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거 되게 시끄럽네. 오던 잠도 멀리멀리 달아날 판이었다. 후···. 베개로 두 귀를 단단히 막고 있던 지민은 곧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오여주. 정신 차려.”

"···.



여주가 앉아있는 의자를 툭툭 밀던 지민은 이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쯧. 완전히 곯아떨어졌군. 지민은 당장이라도 이 비서를 부를 심산으로 침대 옆 협탁 위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폭.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열심히 헤드뱅잉을 이어가던 여주의 머리가 침대에서 반쯤 일어난 지민의 가슴팍 위로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것 봐. 호시탐탐 나한테,”

“··· 보고 싶었어.”



쇄골께에서 더운 숨을 뱉어내는 여주를 밀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얇은 잠옷 사이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물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지금, 울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눈물범벅이 되어 저를 올려보는 처연한 얼굴이 묘하게 자극적이라 그런지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 울리고 싶다. 머릿속에 짧게 스쳐 지나간 속삭임에 지민은 자신이 이토록 가학적이었던가 의문했다.



“···.”

“······ 짜로···.”



“잠버릇이 상당히 나쁘네.”

“··· 했는데···.”



“일어나. 오여주.”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지, 내내 흐릿하던 여주의 눈동자가 조금 확장되었다. 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손에 꼭 들어오는 작은 어깨를 가볍게 그러쥐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간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일절 묻지 않겠어.”

“······.”



“들었으면 이제 그만,”

“진짜로 사랑했단 말이야, 이 나쁜 새끼야-!!!”



딸꾹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란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멱살을 단단히 쥐고서 물기 어린 목소리로 바락바락 소리치는 여주의 얼굴은 실로 공포스러운 수준이었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여주의 잠꼬대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를 엄청난 힘으로 지민을 침대 헤드에 밀어붙인 그녀가 지민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비스듬히 포개며 막을 내렸다.



‘······ 뭐야?’



따뜻하고 부드러워 감이 좋은 입술이었다. 잡아먹을 기세로 입술을 부딪친 것치고는 닿아있는 시간만 점점 길어질 뿐 그 이상의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살며시 밀어내자 저항 없이 밀린 머리가 베개 위로 툭, 떨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지민의 눈에 색색 숨소리를 내며 평온하게 잠든 여주의 모습이 비쳤다. 허. 자고 있어? 의자에 하반신을 걸친 채 상반신만 불편하게 침대 위로 엎어진 우스꽝스러운 자세였다. 이걸 어쩐다. 지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몸을 침대 위에 똑바로 눕히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널따란 침대 중앙에 대자로 눕혀진 여주는 얄미울 정도로 아무 근심 없이 쿨쿨 잠을 청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여주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민의 눈 밑엔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술 표면에 남아있는 온기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해보려는 듯, 엄지손가락을 가져와 제 입술 위를 가볍게 훑은 지민의 시선이 자연스레 여주의 분홍빛 입술에 닿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무심코 뻗은 손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나아갔다. 말랑한 감촉이 손끝에 닿기도 전, 입술 새로 웅얼웅얼 흘러나오는 잠꼬대에 정신을 다잡고서 재빨리 손을 거둬야 했지만.



그때까지도 지민은 깨닫지 못했다. 그날 밤, 눈물 짓는 여주를 보며 단 한 번도 지유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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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에 호출하는 일을 지양하는 지민이 새벽 3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품은 채 침실로 들어서던 이 비서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어, 왔어? 이 여자 좀 데리고 올라가.”

“······?”



침대 옆 걸상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박 대표와 커다란 침대를 독차지하고 누운 여자. 그녀가 딱한 사정을 가진 한국인 관광객의 신분으로 저택에 입성한 지 2주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온종일 저택 곳곳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녔으니 피로가 쌓이는 것이 당연할 테지만. 어째서. 어떻게. 박 대표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있는가. 무엇보다, 누군가가 피곤해 보인다는 이유로 지민이 제 침대를 베풀어 주는 사람이었던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두툼한 눈두덩이 주변을 채우는 저 다크서클은 또 어떻고.



처음엔 제 고용주가 답지 않게 동포애에 힘을 써보려는 것인가 하는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보니 이건···. 계단을 오르던 상하가 슬며시 웃음 지었다. 상대가 누가 됐건 응원하고 싶어지는 상황이었다. 지민과 같은 집에서 나고 자라며 그의 인생 대소사를 빠짐없이 함께한 상하로서는 지민이 하루빨리 옛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절실히 바랄 뿐이었다.
















필수 BGM | 악토버 - With you (반복 O)


















“뻔하죠. 타이틀은 이별 여행이었어요. 와서 이런 마음 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려고. 다 털어버리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단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밤이면 밤마다 수면제에 의존해 억지로 잠을 청하던 저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12년간 교제한 연인에게 제대로 된 이유도 듣지 못하고 헤어졌다는 이야기에는 익숙한 연민이, 헤어질 때가 돼서야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며 자조적으로 웃는 얼굴에는 쉽게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 차올랐다. 이건 부러움인가. 아님, 경외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대신, 미련이 없는 척 모진 말을 쏟아내는 대신, 차라리 분이 풀리도록 화라도 내봤더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는 대신, 이 여자가 하는 것처럼 누구라도 붙잡고 제 감정을 호소했더라면 지난 3년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까.



투명한 와인으로 살짝 축여진 물기 어린 분홍빛 입술이 작게 호선을 그린 순간 줄곧 그에 시선을 두고 있던 지민의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미치겠군. 또 이러잖아. 여주 몰래 한숨을 내쉰 지민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암전된 시야 속에서도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향이 상큼하니 디게 좋네요.”



나른한 음성에 눈을 뜬 지민은 홍조가 든 뺨을 한 손에 쥐고서 꼴깍꼴깍 투명한 와인을 넘기는 여주를 다시 한참 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 주장하던 여주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허리에 짚고 사나운 강아지처럼 왕왕거리자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 지민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순간부터 눈에 띄게 힘들어졌다. 이 여자 앞에서 웃음을 숨기는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어제였던가. 2주 전 그날 밤이었던 것 같기도. 처음 이 여자를 만난 날, 내가 이 여자의 앞에서 웃음을 숨겼었던가. 가중되는 혼란 속에 지민은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얼랄라? 남의 허리는 왜 막 만지고 그런대? 나 같은 건 건드릴 생각도 안 든다면서.”

“허. 부축해 줘도 난리네.”



몸에 힘도 제대로 안 들어가는 주제에 말은 한마디도 안 지지. 이렇게 톡톡 쏘아붙일 여력이 남아있다는 것에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지민이 피식 웃었다. 침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줄곧 날 선 시선으로 여주를 내려다보던 지민은 일순 제 목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레 축 늘어져 제게 몸을 기대오는 여주 때문이었다. 번뜩 정신이 들었을 땐 사방이 자극이었다. 부축하느라 그러잡은 가는 몸 선이. 제 품 안에 꼭 알맞게 들어오는 아담한 몸체가.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청포도 향기까지.



큼, 숨을 들이마신 지민이 급하게 제 품에서 여주를 떼어냈다. 예고 없이 매트리스 위로 내동댕이쳐진 여주가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붉어졌을지 모를 얼굴이 신경 쓰여 한 팔로 앞을 가리며 되묻자 여주가 근엄한 얼굴로 대답했다.



“박지민 씨 재수 똥이라고요.”



하하하.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리는 지민의 눈매가 길게 접혔다. 온전히 즐거움에서 비롯된 미소를 마지막으로 지어 본 것이 언제인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지금, 이 여자는, 오여주는 꽤 오랫동안 제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지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분해.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게 감정을 숨김없이 전부 드러내면,



더 괴롭히고 싶다고.



“박지민 씨는 항상 이상해요.”



그래. 나도 오여주 옆의 내가 이상하다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내가 놔준다고 마음먹었을 때 얌전하게 자다가 아침에 조용히 떠나.”



계속 옆에 있다간 절대로 놓아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곁에서 두고두고 울리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지금 얌전히 안 자면 어떻게 되는데요?”



지민의 눈썹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2주 전부터 줄곧 그를 괴롭히던 작고 도톰한 입술이 다시 신경 쓰이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그락불그락하며 씩씩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당돌한 말을 뱉으며 저를 올려보는 동그란 눈이 더없이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취한 사람이야. 허튼짓 그만두고 나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속삭임들은 무시했다. 지난번 자다가 내 입술을 덮친 것에 대한 복수라고 해 두지.



짧게 입술만 가져다 대려던 지민의 시도는 곧바로 좌절되었다.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는 감도 좋은 입술. 닿자마자 더운 숨과 함께 밀려 들어오는 청포도 향. 손끝에 닿아오는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살결. 제 어깨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오는 가느다란 팔. 고도의 인내력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몸은 이미 오래전 침대에 눕혀진 채 제게 탐해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이성의 끈을 붙든 끝에 입술을 떼어낸 순간, 바로 앞에서 빛나는 여주의 곧은 시선과 마주할 수 있었다. 홍조로 발갛게 물든 솔직한 볼과 말할 때마다 살짝씩 닿아오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매료된 지민이 입 안쪽 살을 잘근 씹으며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쩔래. 이게 내 답인데. 이래도 얌전히 안 잘 거야?"



말하는 동안에도 손에 닿은 따뜻한 살결을 은근하게 쓰다듬는 손길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여주가 어떤 답을 주던, 참는 것은 이미 선택지 밖이었다는 것을 지민은 인지하고 있었다.



“······ 잠은, 비행기에서 자면 되는데.”



기다리던 대답을 기점으로 그가 다급하게 입술을 부딪치며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몸을 겹쳤다. 아래에 알맞게 자리한 작은 몸이, 적극적으로 제 등을 감싸 안는 행동 하나하나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를 붙잡고 있는 몸의 움직임부터 잇새로 나오는 작지만 달뜬 신음 소리까지,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각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제는 정말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음에도 끝낼 수 없었다.



제 머리를 품 안 가득 끌어안은 매끄러운 팔이 남긴 이름 모를 감각을 느끼며 보드랍고 여린 살결 위로 연신 붉은 반점을 남겼다. 자그마한 손이 그의 머리칼을 잡아 쥐었다가, 헝클였다가, 다시 끌어안았다. 새벽 내내 이어졌을 관계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여주에게서 살짝 빗겨난 곳에 체중을 내려놓은 지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닿아오는 더운 숨결에 다시금 아래가 뻐근해져 왔으나 가까스로 인내할 수 있었다.



“오여주.”

“······.”



“내일,”

“······.”



“듣고 있어?”

“으응······.”



“여덟 시는 너무 이르지?”

“네······.”



“내가 직접 데려다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푹 자둬.”

“···.”



색색. 대답 대신 가슴을 덥히는 작은 숨소리.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누워 잠이 든 여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민이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붉어진 눈가와 촘촘한 속눈썹 사이사이에 아침이슬처럼 맺혀있는 눈물방울이 소름 끼치도록 만족스러웠다. 촉. 감은 눈 위에 가볍게 키스한 지민은 곧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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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지민은 여주의 자리에 남겨진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오여주.

놓아주고 싶었는데, 놓아주려 했는데, 이젠 너무 늦었어.



기다려. 

반드시 찾아내서 끝까지 날 책임지게 만들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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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신성한 토요일 한낮부터 피곤에 절여진 육신을 이끌고 출근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개탄스러운데 말이지.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지난주에 장소 컨펌 할 때만 해도 본사 옥상이었던 창사 기념일 행사장이 맞선 남녀들의 핫스팟이라 불리는 선셋 플라자 호텔의 3층 연회장으로 바뀐 걸까. 좋지 않은 기억들만 차고 넘치는 이곳에 일적인 용무로 발을 들이게 되니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쉣쉣해졌다. 알뜰하기로 소문난 우리 사장님 인생관이 한 주 사이에 욜로로 바뀌기라도 한 건가. 입사 후 매년 회사 옥상에 모여 조촐하게 축하하고 넘어가던 기억이 떠올라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진지한 고민에 빠져있던 내게 답을 준 사람은 비닐 팩으로 싸인 식탁보 뭉텅이를 잔뜩 이고 연회장으로 들어오던 인호 씨였다.



“아아- 그거요? 호텔 측에서 파격가에 장소를 빌려주겠다고 했다나 봐요. 컨펌 다 끝난 다음에 사장님이 따로 노티를 주시는 바람에 팀장님 혼자 수습하셨다고 들었어요.”

“파격가라니, 왜요?”



“오 대리 님도 참, 그것까진 제가 모르죠. 아, 근데 그런 얘긴 들었다. 그동안 발표하려고 벼르고 있던 사안들을 오늘 다 터뜨린다고 일부러 큰 장소를 빌리신 거란 말이 있더라고요.”

“발표? 그냥 매해 하던 창립기념일 축하 파티 아니었어요···? 난 왜 다 처음 듣는 얘기 같지?”



“하- 우리 오 대리님 진짜 소문에 느리시네. 귀 좀 주세요.”

“···.”



(소근) 사장님 자녀분이 우리 회사 다닌다는 건 들어보셨죠.”

“사장님 자녀분··· 초등학생 아니에요···?”



(소근) 아무튼, 오늘 공식적으로 밝히실지도 모른대요.”



급격히 밀려오는 헛헛함. 갑자기 인생살이가 덧없게 느껴졌다. 이번 행사를 메인으로 주최한 두 팀 중 하나에 소속되어 있는데 난 어째서 아는 게 하나도 없을까. 알겠다. 그동안 사회성이 너무 결여된 채로 돌아다닌 거야. 그러니 들은 게 1도 없지. 



“인호 씨는 그런 얘길 어디서 듣고 오는 거예요?”

“저야 뭐,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서 다 말해주시더라고요.”



청량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하는 인호 씨에게 "아, 그러시구나." 하고 대꾸하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나도 저렇게 패기 넘치던 시절이 있었지. 한숨을 푹푹 쉬며 테이블을 부서별로 하나하나 세팅하고 있을 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길쭉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휘적휘적 걸어 들어오는 김남준이 보였다. 얼씨구. 각 잡힌 검은 턱시도에 평소 잘 쓰지도 않는 안경까지? 김남준 오늘 스타일에 힘 좀 썼는데.



컨셉을 젊은 CEO 쯤으로 잡은 듯 보이는 김남준의 모델 핏에 감탄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칵테일 파티에나 어울릴 법한 톡톡 튀고 세련미 넘치는 의상들을 쫙 빼입고 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만 모르는 드레스 코드가 있었던가. 그럼 평소처럼 오피스룩을 입고 온 사람은··· 뭐야, 정말 나뿐이야···? 뭔가 개밥에 도토리가 된 기분인데. 흐리멍덩한 얼굴로 쓸데없는 걱정에 빠져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우당탕! 둔탁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꺄아-! 팀장님 괜찮으세요-?”



“아, 네. 전 괜찮습니다. 일들 보세요.”



호들갑스러운 세연 씨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뒤집어진 의자 옆에 넘어져 있는 김남준과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태블릿을 보니 견적 바로 나오네. 앞에 안 보고 걸어 다니다가 또 고꾸라졌나 보고만. 쯧쯧. 스타일에 힘만 잔뜩 주면 뭐 하나. 각 잡힌 턱시도 따위, 저 덜렁거리는 행동력 때문에 금방 나가리가 되어버릴 텐데. 하여간 어지간히 칠칠찮아요. 몰래 숨죽여 큭큭거리고 있는데 무릎을 털고 일어난 김남준이 내 쪽으로 성큼 걸어와 나직이 속삭였다.



“오여주 인성 봐라. 넘어진 사람 걱정은 못 해줄망정 비웃어?”

“흥. 그러게 누가 걸어 다니면서 문학소년 컨셉질 하래? 으휴, 등신.”



“와···. 여러 의미로 대단한 인성이다 넌 진짜···.”

“푸훗. 그래, 어디 다친 덴 없으세요, 팀장님?”



“됐다 그래. 이미 늦었다.”

“근데 어쩌냐. 거기 무릎 있는데 다 구겨졌다.”



“뭐 어때, 상관없어. 근데··· 넌 얼굴 상태가 왜 그래.”

“대낮부터 이게 웬 시비지···? 싸우자고?”



"아니, 진짜로. 장난치는 게 아니라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피곤해 보일 수밖에. 요즘 보잘것없는 내 아홉수 인생에 극심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거든. 1일 1걱정거리가 생기는 수준이랄까.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라 아주 죽을 맛이란다. 근데 이걸 뭐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가장 무난한 답을 하기로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말도 마라. 얘기가 좀 긴데··· 우리 엄마 아부지, 완전 옛날 사고방식에 사로잡히신 분들이라 여자가 서른 돼서 혼자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줄 아시거든?"



"··· 그래서?"

"응. 그래서 2주째 선 자리가 거-의 줄줄이 소시지 급이야. 백퍼 장담하는데, 오늘도 이거 없었으면 지금쯤 같은 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여덟 번째 맞선남이랑 마주 앉아 있었을걸?"



"뭐?!"

"아, 깜짝이야! 목청 좀."



"선? 선을 봤다고?!"

"어. 그냥 구색 맞추기로 보는 거야. 혼자 살면 절-대 안 나가겠지만··· 사정상 본가에서 출퇴근해야 돼서. 찍소리라도 할라치면 엄마한테 실시간으로 쪼이거든."



"······."

"암튼, 그것 땜에 요즘 내 정신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괜히 영양가 없는 장난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넌 어떻게 됐어? 올해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 뭐, 고백하는 거?"

"응."



"아직."

"쯧. 그렇게 몸 사리다가 이도 저도 안 된다, 이 미련한 인간아. 시간이랑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몰라? "



"··· 너 말이다,"

"···?"



"오늘 끝나고 시간 돼?"

"그렇긴 한데··· 왜?"



"밥 사라."



밑도 끝도 없이 밥을 사라니. 너무 단호해서 단호박인 줄. 저리 당당하게 말하니까 "물론이야." 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가자미눈을 뜨고 노려보자 김남준이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너 옮기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 근데 그 누구누구는 모르는 척하고 입 싹 씻더라."



하이고, 벌써 일주일도 훨씬 넘은 일 가지고 친구 사이에 그렇게 쩨쩨하고 쪼잔하게 군다 이거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구시렁대다가 결국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신 내가 먹고 싶은 걸로 먹어야지.



"좋아. 그치만 메뉴는 내가 고를 거야."



"그러던가. 메뉴는··· 사실 나한테 아무 의미 없으니까."



메뉴에 의미가 없긴 왜 없어. 쟤가 진짜 큰일 날 소리 하네. 운 좋은 줄 알아라, 김남준. 이 오여주 님이 메뉴 선정 아주 기가 막히게 해주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만 믿으라 큰소리를 떵떵 치자 김남준의 입꼬리가 둥근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양 볼에 정석적으로 폭 패인 보조개를 보며 난 여느 때처럼 그 보조개가 참 부러웠더랬다. 근데 저 녀석 너무 과하게 실실거리는 것 같은데···? 동네 바보 형도 아니고 왜 저렇게 실없이 웃어대는 거야. 웃음 바이러스에 걸려버린 김남준을 보고 금세 우리 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팀원들을 보며 난 잽싸게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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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개회사가 끝난 후 팀별로 나눠 앉아 화기애애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약식 뷔페 캐더링 서비스는 맛이나 비주얼 면에서 양호한 축에 속했기에 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깨끗하게 비운 디저트 접시를 치우고 혼자서 치즈 테이블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때 홍보실 채 팀장님이 은밀하게 다가왔다.



“··· 네? 화환이 빈다고요?”

“응. 어떡하지, 여주 씨. 사장님이 개인적으로 주문하신 건데 큰일이야.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는 찾아와야 할 텐데.”



“아··· 근데,”

“우리 팀원들은 지금 다 짬이 안 나서 그런데···, 미안하지만 여주 씨가 대신 좀 찾아오면 안 될까? 김 팀장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내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할 수는 없었다. 행사에서 기획을 담당한 우리 팀과 다르게 외적으로 큰 축을 담당하는 홍보팀 전원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떨떠름한 얼굴로 꽃 배달 업체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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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자로 선셋 플라자 호텔 아닙니까?

“네, 맞아요. 3층이요.”



— 못 받으신 거 확실해요? 아침에 이미 배달 완료된 걸로 나오는데.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다시 한번 확인 부탁드릴게요. 지금 그것만 도착을 안 해서요.”



— 후···. 기다려보세요.

“···.”



딸깍,



— 여보세요.

“아, 네!”



— 아무래도 호텔 측에 물어보셔야 할 것 같은데. 호텔 정책 때문에 로비까지만 배달했다고 하네요.



후···. 이런 잣 같은 상황을 봤나. 들고 있던 치즈 접시를 그릇 수거함에 내려놓고서 시끌벅적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로비에 문의해본 결과, 호텔 최상층의 연회장으로 운반된 수많은 화환들 사이에 끼어 들어갔을 지도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답이 돌아왔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요-" 라는 형식적인 답변에 욱해서 “실수한 인간보고 찾아오라 그래!” 하며 난동을 부리고 싶었지만 애써 성질을 죽이고서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내 촉이 말했다. 그 축하 화환은 분명 200퍼센트 확률로 엉뚱한 연회장으로 운반됐을 것이라고. 개탄스럽게도 그걸 손수 찾아와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내가 되겠지.



딩-



묵직한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호화로운 연회장의 입구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금가루가 뿌려진 듯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넓고 호화로운 실내. 우리 회사가 대관한 3층 연회장과는 문 사이즈부터 이미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와, 여긴 뭘 하는 곳이길래 이렇게 화려해? 정교하게 조각된 화강암 기둥 옆에 멍하니 서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을 때, 까만 선글라스와 정장을 갖춰 입은 덩치··· 가 아니고 경호원처럼 보이는 멀대 같은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초대장 확인하겠습니다.”

“··· 네? 아··· 전 초대받아서 온 게 아니라 잘못 배달된 화환을 찾으러 온 거거든요.”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이어 피스를 누름과 동시에 등 뒤에서 언젠가 한 번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분 초대장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분'이라니, 설마 나?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멋을 낸듯한 줄무늬 정장 차림의 김한철이었다. 가만.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지? 뒤이어 눈에 들어온 것은 김한철의 오른손에서 팔랑거리는 낯익은 모양의 카드 한 장. 저건 분명······ 시발. 젠장. 맙소사. 하늘이시여. 돈을 잔뜩 처바른 이 사치스러운 연회장에서 열리는 행사가 정녕 박지민의 약혼식이라고? 뭐 이런 개뼉다구 같은 우연이 다 있지? 



김한철에게서 등을 돌리고 연회장 입구 앞에 세워진 화환의 문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죄지은 것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처럼 조급한 마음에 손이 덜덜 떨렸다.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화환만 아니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이 자리에서 증발해버리고도 남았지. 일단 심호흡부터 하자. 후···. 괜찮아. 침착해.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십분 가라앉히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찾는 것을 찾아서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훗. 안 온다 어쩐다 하시더니 결국 오셨네요. 여기서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여주 씨.”

“저 여기 온 거 아니거든요. 도대체 PJ 호텔 두고 왜 여기서 이런 거창한 행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간단합니다. 이 호텔도 PJ 그룹 산하에 있거든요."

"누가 김한철 씨한테 물어봤대요?"



“아 참. 그날은 잘 들어가셨습니까? 선 자리에서 누구한테 바람맞은 건 그날이 처음이라 마음이 좀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만큼,”

“저기요. 죄송한데 안 궁금해요. 그것보다 화환,”



“···?”

“잘못 배달 온 화환 어딨는지 알아요?”



“······ 아.”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한철.



“절 따라오세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서 김한철을 따라 연회장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 사람들은 왜 대낮부터 실내를 이렇게 어둡게 해놓은 거야?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세 걸음 정도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 안 어딘가에 박지민이 있다 해도 어둠 속에서는 날 발견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초조함은 가시지 않았다. 다급해진 난 인파를 뚫고 나가는 김한철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찾았다. 저기 있네요.”



내 앞에서 멈춰선 김한철이 옆으로 한걸음 물러서며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난, 김한철이란 인간의 말을 믿고 따라온 것을 절실히, 아주 절실히 후회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남자가 가리킨 곳은 어두운 연회장 내에서 가장 환한 곳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백색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세차게 내리쬐는 홀의 중심부. 칠흑 같던 어둠은 중앙의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이들의 집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 여유로운 폼으로 서 있는 익숙한 뒷모습은 분명 박지민의 것이었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가장 가까웠던 우리의 거리는 현재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뒤집어진 세상에 혼자만 거꾸로 매달린 듯, 온몸의 피가 머리 쪽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서로를 마주 보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히며 입을 맞추는 두 남녀. 제 허리를 감싸는 손을 단단히 틀어쥔 여자가 다른 팔로 그의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깊숙이 입맞춤을 이어가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혀 와 질끈 눈을 감고 돌아섰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쳤어, 오여주···? 여기서 울면 안 돼. 정신 차려.



“어? 여주 씨!!”



그대로 돌아서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아니, 이 상황에선 달아났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지. 사장님의 축하 화환에 대한 것은 이미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기다렸다는 듯 주둥이를 벌리는 커다란 귀빈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후에도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숨을 진정시키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심호흡을 계속했다. 눈을 감아도, 머리를 흔들어도, 시야에 각인된 잔상은 지독하게 남아 나를 괴롭혔다.



파리 저택에서 본 그 정혼자라는 여자였어. 당연한 거야. 오늘이 약혼식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마음 싹 다 비우고 보내주기로 다짐까지 했으면서 약혼녀랑 키스하는 것 좀 봤다고 쫌생이처럼 굴지 마. 속으로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라 끊임없이 되뇌면서도 얕은 의식의 한편에서는 방금 본 상황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박지민의 어깨를 빈틈없이 끌어안은 뱀처럼 가는 팔과 그에게 입을 맞추면서도 내게서 거둬지지 않던 날카로운 눈동자가 아직까지 눈앞에 선연했다. 우아한 남색 미니 드레스와 조명을 받아 반짝이던 연분홍빛 다이아 귀걸이. 잔머리 하나 나오지 않도록 머리칼을 위로 틀어 올려 기다란 목선을 드러낸 그의 약혼녀는 내가 봐도 공주님처럼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밋밋한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에 검은 슬랙스를 받쳐 입은 나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도망쳐 나온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조차도 제대로 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는 박지민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서? 아님, 그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결단코 섞일 수 없는 배경을 등진 채 멍청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답을 내리기도 전에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누가 볼세라 손등으로 대충 쓸어내고 문이 열리자마자 정면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바보 같은 오여주가 여태껏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내내 원맨쇼를 하며 층수를 누르지 않은 탓에 엘리베이터는 3층이 아닌 1층으로 내려왔다는 것.



로비의 정경이 눈에 들어올 즈음이 되어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뒤늦게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은, 오늘 아침 내가 대충 꺼내 신은 하이힐이 하필이면 대학 시절 구매해서 신발장 안에만 고이 모셔둔 탓에 삭을 대로 삭은 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퍽-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이어서 오른손과 양 무릎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뭣 같은 아홉수. 내 인생도 여기서 쫑인가 보구나. 사람이 가장 붐비는 황금시간대에 호텔 로비 한가운데서 하이힐 굽이 부러져 대자로 엎어져 본 경험이 있는가. 아니라면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주 딱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하고 아팠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미동 없이 엎드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관절 부분에서 시작된 생생한 고통이 점차 주변부로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로비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누군가는 나를 위해 구급차를 불러주겠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아야···. 오른손은 그새 고통에 잠식되어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아픔이 부끄러움을 넘게 되니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얼굴을 간신히 들어 왼팔 위에 파묻고서 눈을 감았다. 그때, 웅성거림을 뚫고 들려온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오여주!”



걱정이 물씬 묻어있는 자상한 목소리.



“넌 정말···. 하여간에 내가 눈을 못 뗀다. 나한테만 뭐라고 할 게 아니라니까.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아, 팍팍하기만 한 이 세상에 김남준처럼 좋은 친구를 둔 나는 진정 행운아다. 분명 고마워,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는 김남준의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터진 눈물샘에 정당성을 보이기 위해 한 팔로 아픈 무릎을 끌어안아 보였지만 스스로를 속일 순 없었다. 



뼈가 산산이 조각난 듯한 고통에도, 공공장소에서 원치 않은 몸 개그를 하고 말았다는 수치감에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김남준을 보자마자 봇물 터지듯 쏟아진 이유는, 위선투성이에 염치라고는 찾을 수 없는 나의 바람이 산산조각난 탓이었다. 조금 전 연회장을 뛰쳐나오며 내딛던 발걸음 하나 하나에 깊이 스며들어있던 미련과 박지민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 잡아주기를 남몰래 바라던 바로 그 간절함이 깨져버린 것이다. 



언제나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밀어내고 또 밀어내도 계속해서 내게 부딪쳐 오는, 그런 한결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금방 나를 찾아 줄 거라,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나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여주야? 정신 차려 봐. 오여주!”



정신을 잃기 바로 직전엔,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맞춰오며 점점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연신 내 이름을 부르는 눈앞의 남자가 박지민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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