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모래가 튀는 백사장을 걸었다.

 

 

 

***

 

 

 

불타오를 듯 빨갛지만 온기를 품었다고 하기엔 매섭다. 붉은 것은 빛깔일 뿐이요, 담고 있는 것은 피곤함이었으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엔 속뜻을 알 수 없는 불쾌함과 아득한 시간이 넘실거린다. 신의 피가 채워진 붉은 눈동자가 이른 아침의 햇빛아래 눈썹 그늘이 진 채로 몇 번 눈꺼풀 속에 감추어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눈두덩이와 뺨을 쓸며 잠시 손바닥에 머리를 기댄 길가메시는 그 상태로 몸을 일으킨 채 잠을 깬 뒤로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햇살이 비치는 넓은 창가의 한가운데에 선 채 침상을 가릴 만큼의 그림자를 드리운 멀린은 잠에서 깨어난 길가메시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신의 피를 잇고 있다고 한들 정해진 수명으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었기에 그가 평범하게 잠에 들고 아침에 깨어나는 모습 정도야 특별할 것도 없을 일이었으나, 멀린은 그를 처음 만난 이래로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 따위를 고집처럼 지켜보길 원했다. 우르크— 낯선 과거의 땅 위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운 순간이다. 비록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다 한들 그가 심심치 않게 찬사의 수식어까지 붙여가며 말하는 것엔 거짓이 없었다. 처음엔 조바심에, 그리고 그 조바심에 비어져 나오는 초조함에, 지금은 아름다운 것을 구경하는 마음에 그러하다. 내버려두면 제 자신이 인간인 것도 잊고 한계까지 움직일 사람이라는 것도, 만난 첫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러했다. 멀린은 그를 감상하는 것과 더불어 어쩌면 감시하고 있음도 부정하지 못했다. 적어도 눈길이 닿는 동안에는, 보기 좋은 것을 감상하는 것으로 위안삼아 원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수고 정도야 감수할 만 할 일이다. ‘모든 것은 미래를 위해.’ 멀린은 한참이나 말이 없이 침상 위에 머물러 있는 길가메시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모든 것은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위해.’

아침에나 잠시 구경해볼 법한 표정으로 하여금 멀린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곤 했다. 지금도 마침 그런 때였다. 잠 들 수 있었으나 휴식을 취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꿈을 보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개운해보이지는 않네, 길가메시 왕. 자주 있는 일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일어난 뒤로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길가메시는 마치 처음부터 멀린의 기척을 알고 있었다는 듯 불쑥 튀어나온 말에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곧이어 몸단장을 위한 시종들이 들어오고 세숫물에 손을 담글 때 까지도 시종일관 눈앞의 마술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던 그는, 마지막 장신구를 귀에 걸칠 때 즈음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쓸데없이 옥좌에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온다 한들 이 몸을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니 뭐, 볼 수 있는 곳에 찾아간다 하더라도 딱히 봐주지는 않았는 걸.”

 

의중을 알면서도 받아치는 말에 귀찮음을 가득 담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단내가 풍긴다. 당장에라도 그것을 뱉은 입술을 베어 물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과실의 향기였다. 길가메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몸에 흐르는 태생의 기운을 완벽히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유혹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는 확신에 가까운 답에 멀린은 그저 마음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저 왕에게 유혹이라니 가당키나 할까. 부리는 것이라면, 그건 또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의 그라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랬기에 더더욱 멀린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방 안 곳곳에 지워지지 않는 가득한 향내며, 그 발원지인 몸 자체였다.

처음 그 난리를 피우고 난 뒤 며칠이 또 지난 뒤였다. 길가메시의 예견대로, 혹은, 예견하지 않아도 멀린이 알았던 대로 우르크엔 이 시점으로부터 머나먼 미래의 인간이 찾아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둘러 보낸 길가메시는 핑계 이상으로 더 분주히 움직이며 그때와 비견해서 전혀 나아지지 않았을 과도한 업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길가메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양 행동하고 있었으나, 세상의 끝 구석에 살면서도 생전 맡아본 적 없었던 그의 향기는 그때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멀린의 코끝에서 느껴지는 한은 그랬다. 아주 작은 잔에 불룩이 솟을 듯 아슬아슬하게 가득 담긴 진귀한 술과도 같다. 길가메시의 체력이 한계에 달할수록, 그의 마력이 바싹 메말라 붙을수록 그것들은 주저 없이 흘러넘치기 위해 작정하는 것 같았다. 바닥에 금이 간 잔처럼, 혹은 과하게 쏟아 부어 내리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넘치듯 아슬아슬할 때가 될 때마다 멀린은 도리어 안달을 부리며 그를 끌어당기곤 했다. 흐르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아깝다. 혹여 누가 받아 마시기라도 할까 욕심이 나기도 했다. 치렁치렁한 옷자락과 머리칼로 가려본들 다른 이들의 눈에서 모습은 감출지언정 지울 수는 없을 그득한 향기였다. 그럴 때마다 혀끝이 뻣뻣했다. 침이 고여 턱 아래가 뻐근하기도 했다. 식도락에 의의를 둔 적은 없었으나 색욕이 곧 식욕처럼 찾아왔다. 태생의 이유를 들어도 설명할 수 없을 식탐과도 같다. 그 뒤로 또 몇 주 멀린의 식욕은 야금야금 그 배를 채우는 것으로 달래어지곤 했다. 머금고자 하면 한 밤을 가득 채워 마음껏 취하려는 그를, 왕은 솜씨 좋게 명령과 허락이라는 두 가지 혀 놀림 하나로 그를 불러들이곤 하는 것이다. 마치 길들여지는 것과도 비슷했으나, 알아차리고 있음에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럽다고 해야 할지, 몽마로서의 최상의 식사를 맛보는 것에 거부할 의지는 이미 바닥을 기다 못해 내던진 뒤였다. 지고의 왕은 평소의 행동 그대로를 담아 그저 손짓할 뿐이었다. 이변을 알아차린 후 근심이라도 느는 것일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오히려 그는 상황 자체를 덤덤하게 받아들인 채 필요할 때 마음껏 활용해먹기까지 했다.

고약한 성미다. 고약하고, 향기롭고, 아름답고, 그랬기에 독했다. 바싹 메말라 가는 주제에도 바스러지며 향기를 뿌리는 꽃과 같았다.

 

“뭘 멍청하게 서 있느냐, 무엄한 놈.”

“멍청하게라니, 감상하는 건데.”

“웃기지도 않는 얼굴을 하고서 대꾸 하나만큼은 청산유수로구나.”

 

얼굴? 멀린의 되물음에 왕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심술궂게 찌푸린 인상에 대조적으로 보이는 입 꼬리의 웃음이다. 오늘 아침의 그는 딱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것엔 서슴없다. 바라보는 시선은 매섭기 그지없었으며 — 물론 그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쏘아본다 한들 멀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동시에 재미있는 것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멀린은 왕의 시선이 향한 제 얼굴의 뺨을 슬쩍 긁어보다가, 제 옷 매무새를 휘휘 둘러보고는 또다시 대꾸했다.

 

“왕도 내 얼굴이 꽤 마음에 들어?”

“…….”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이 돌아왔다. 정말 극과 극의 표정이다. 길가메시는 늘 상 이런 식이었다. 남의 기분은 헤아리지도 않으면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대한다던가, 바쁘다는 것을 투덜거리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손수 해결 한다던가 등의. 모순이다. 때로는 폭정을 일삼았다가도 어진 왕으로 기록에 남은 것처럼. 그 반대의 경우는 많이 들었지만 이런 경우도 또 드물 것이다.

냉정하다고만 보기엔 노기는 전혀 없을 사나운 눈초리를 마주하고도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즐거웠으므로, 멀린은 그대로 헤벌쭉 웃어보였다. 짙은 향이 났다. 발끝 아래 꽃들이 일순간 한 뼘씩 치솟고는 곧 얌전히 가라앉아 나풀거렸다. 꽃잎들이 간지럽다. 고양이의 꼬리와도 같이 놀라서 펄쩍 뛴 것 마냥 저들끼리 소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와글와글 떠드는 것 같다. 그 소리들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도대체 왜? 멀린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자 하는 일을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도 모를 길가메시가 우두커니 서 있는 멀린의 멱살을 잡아채고 있었다. 잡히고 나서야 알았다. 코가 맞닿을 거리까지 붙들려 당겨진 얼굴이 오도 가도 못한 채 길가메시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아니, 향기를 맡았으니 그는 일단 한 번 깊이 숨을 들이마셨음이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입을 꽉 다물어버린 바람에 뱉지 못한 숨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길—” 무마할 요량으로 불러 보려했던 이름이 그대로 쑥 말려들어갔다. 제 입속이 아닌, 눈앞에 선 아름다운 사람의 입술 안으로.

얽히고설키는 혀가 달았다. 잠깐 당황했던 것은 잠시일 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기에 멀린은 갑작스레 제 입안으로 밀고 들어온 길가메시의 혀를 감아올리며 그대로 머금었다. 향유를 입 안에 들이 붓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혹은 잘 익은 과실을 입 안 가득 머금는 맛이라고 해야 할까. 밀려들어온 체온은 뜨끈했으나 취하는 체취는 달고도 시원했다. 언제든 물고 베어도 질리지 않을 달콤한 맛이었다. 먼저 달려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길가메시의 움직임은 갈증이라도 난 듯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재촉마저 숨기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멀린이 갈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간간히 오가는 숨소리마저도 삼켜버릴 듯이 집어삼키며 멀린은 길가메시의 목 뒤를 받친 채 제 숨을 불어넣었다. 맛있는 것을 받아 마시는 대가일 뿐이다.

 

“응, 음…….”

 

여린 살과 살이 맞닿는 곳으로 부터 전해진 마력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한참 이어진 입맞춤 동안 길가메시의 움직임이 느긋해져갔다. 도리어 조금 더 조급해진 쪽은 멀린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잖아? 제 생각을 직접 들려주기라도 한 양 내친김에 뒷목을 받치고 있던 멀린의 손이 슬금슬금 등을 훑었다. 그렇지? 길가메시 왕. 동의를 구할 요량으로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을 때였다.

 

“엚?”

“…….”

 

상대의 입술을 머금은 채로 내 뱉은 의문형이 우스꽝스럽게 씹힌 채 뭉개졌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기대에 찬 눈을 뜨고 바라본 곳엔 예의 평소와 다를 바 없을 왕의 붉은 눈동자가 멀린의 얼굴을 똑바로 향해있었다. 아침나절 바라보았던 그 눈빛과 다를 것 없을 냉정하고도 올곧은 눈동자였다. 처음부터 이쪽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묘한 조소와 유열마저 담고 있다. 영문을 모른 채로 싸늘한 눈을 마주한 채 굳어버린 멀린에게서 길가메시가 몸을 물렸다. “후, 후하하하!” 잠시간 짧은 웃음소리도 이어졌다. 엥? 멀린은 이번에야말로 발음이 씹히지 않은 의문형의 맹한 감탄사를 고스란히 내뱉어버렸다.

 

“어……, 이걸로 끝?”

“그럼 뭐가 더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가, 색마.”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길가메시는 멀린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채로 팔짱을 꼈다. 정말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너무하네! 당연히 이쪽은 성심성의껏 마력 제공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음의 준비라고 했느냐? 네놈이 그런 일에 마음까지 다잡을 정도로 심사숙고하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 마력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그래서 먼저 요구한 거 아니야?”

“마력은 방금 넘겨주지 않았느냐.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만. 아니라면, 뭔가가 부족한 것은 이 몸이 아니라 네놈이렷다?”

 

그거야 제대로 알고 있을 것 아니야? 무어라 투정을 부린 들 봐주는 것 없이 그대로 제 볼일을 위해 걸음을 물릴 상대란 걸 알았기에 멀린은 그저 대꾸 없이 한숨만 쉴 뿐이었다.

 

“뭐, 덕분에 덤으로 재밌는 것을 보았으니 충분히 만족한 아침이라 치지. 칭찬해주마.”

“아니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칭찬이라고 해봤자…….”

“흠, 모르겠느냐? 참 재밌는 얼굴이었다만.”

 

탁자 위에 놓아둔 갑주를 오른손에 채우고, 그 손으로 딘기르를 잡아들고 나서야 길가메시의 눈앞엔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멀린이 서있었다. 명명백백 한껏 토라진 척 연기하고 있는 표정을 오늘은 너그러이 넘어가주기로 한다. 대신에 조금 놀려먹는 것으로 죄 값을 받아내고.

 

“네놈의 얼굴이 마음에 드느냐 물었지. 딱 하나 있긴 하구나.”

 

열 가지는 되어야 하는 거 아냐?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치겠노라 마음먹었던 멀린의 심보는 그 다음 자신을 향한 길가메시의 얼굴을 마주하고 뚝 그쳐버렸다. 왕이 웃고 있다. 그의 웃음은 시끄러운 것부터 소란스러운 것 까지, 아무튼 종류는 많았지만 어쨌든 요란했을 법한 모든 것이 섞여있기 마련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그저 조용히 자신을 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애달픈 것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양, 어리석은 것을 어여삐 여기기라도 하는 양, 숱한 인간들의 누군가가 지어보기는 했어도 그는 결코 얼굴위에 올리지 않았을 것과도 같은 그런 미소가 서려있다. 누군가 그렇게 웃어보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형태의 미소가 멀린을 향한 적 또한 없었다. 저런 종류의 웃음을, 표정을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이라고 말했더라? 안타깝게도 감정을 학습하기만 한 인간 형태의 몽마에겐 알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치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멀린은 무심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뭐지?

 

“흠, 좋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보질 못하니 코를 잃은 개와도 같지 않느냐. 네 놈은 물에 비친 제 자신의 모습도 본 적이 없다더냐? 갈증이 난 바람에 찾은 물가에서 내려다 본, 지금 네 꼴이 어떤 모습인지.”

 

고민 따위는 별달리 할 일도 없던 세상 끝 몽마에게 우르크에서 던져진 낯선 난제였다.

 

 

 

***

 

 

 

“으으으으으으으으음…….”

 

길게 늘어지는 한숨과 함께 지나가던 모든 이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들 속에서도 한가하게 복도 창턱에 걸터앉아 턱을 괘고 있는 미형의 남자가 그 시선들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숱한 사람들의 오가는 시선도 아랑곳 않고 그는 또 한 번 푹 한숨을 쉬었다. 창틀에 함께 놓인 물 한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고개도 한번 갸웃거린다. 물 잔엔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물 잔을 바라보던 멀린은 곳 손에 받쳐 들고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작은 흔들림과 함께 그곳에 담긴 얼굴 또한 이리저리 움직인다. 일렁이고 흔들린다 한들 비추고 있는 모습은 제 자신의 얼굴일 뿐이었다. 잠시 뚫어져라 물질을 바라보던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명색이 마술사답게 그는 손짓 하나로 원래는 없었을 형상을 눈앞에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허공이 열리며 잠시 빛이 떠오른 듯 했다. 파문을 일으키며 작게 빛나는 것엔 물잔 속의 물에 비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얼굴이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과도 같다.

 

“저어어어언혀 모르겠네.”

 

허공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멀린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돌려보다가 잠깐 뽐내기라도 하듯 포즈마저 취해본다. 턱 아래 손을 받쳐보기도 하고, 제멋대로 치렁치렁 기른 머리를 쓸어 넘기며 턱을 치켜들기도 하고, 정면과 측면 어드메의 각도로 고개를 틀어보기도 했다. 그저 한번 슥 둘러보고 지나갔을 시선들이 웅성거림을 함께 담았다. ‘왕이 내리신 명령에 바쁜 것 같더니 드디어 미쳤나봐.’, ‘아니야, 원래도 조금 이상해 보였어…….’ 등의, 험담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것들도 함께 새어나오는 것이 다 들렸음에도 멀린은 멈추지 않았다.

 

“내 얼굴이 뭐 어떻다는 거지?!”

 

큰 소리로 의문을 가득담은 혼잣말이었으나 숨죽이며 바라보는 이들에겐 거의 외침과도 같이 들렸다. 잠시 또 허공이 뚫어져라 제 얼굴을 보던 멀린이 고개를 휙 돌렸다.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방금까지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인파속으로 던지는 시선이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어쩐지 자신을 향해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휙 돌아가 다시금 서둘러 제 갈 길로 발을 놀리기 시작한다. 마치 처음부터 저 곳에 이상한 청년이 없었던 것이라는 양, 절대적 의지를 담아 봤던 곳으로부터 꼿꼿하게 얼굴을 돌린 채 누구보다 빠른 걸음걸이로 자리를 피하는 사람이 여럿…….

‘역시 내 얼굴에 문제가 있나!’ 벌떡 일어선 멀린이 좀 더 본격적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무엇인지 그런 멀린의 시야 속에 석판을 감싸들고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는 시두리가 눈에 들어왔다. 멀린은 냅다 손을 휘저었다.

 

“시두리!”

“멀린.”

 

역시 시두리! 시두리만큼은 피하지 않을 줄 알았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방긋 웃으며 일어서려는 그에게 시누리는 단 한발자국도 다가오지 않았으나, 멀린은 마치 그녀가 기다려주기라도 한 양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 얼굴 어때?”

“……정상이군요. 그럼.”

“대답이 모호해! 그보다 방금 그 앞에 침묵은 뭐야?”

 

질문을 던지기가 무섭게 돌아온 답변이었지만 멀린은 괜한 꼬투리를 잡으며 그녀를 붙잡았다. 때 아닌 중에 제법 다급한 몸짓이었지만 껴안은 석판만큼이나 처리해야 할 많은 일을 생각하고 있던 시두리에겐 이유를 딱히 생각해 줄 여유가 없었다. 보아하니 또 평범한 시민이 알 수 없는 범위의 엉뚱한 일이려니. 시두리는 작은 한숨을 담으며 멀린에게 말했다.

 

“빈둥거리고 계시는군요. 왕께서 직무를 내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 딱히 없는데. 아니 그렇다고 없었던 건 아니고, 할 일 없는 게 아닌 걸.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오히려 날 부려먹고 있는 왕님이 더 놀고 싶어서 난리였는데.”

“왕은 항상 그러시지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보고 있는 누군가처럼 지나치게 용안을 살피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래시진 않지만.”

 

뒷말이 지나치게 생략되어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자랑을 했다고? 아니 사실, 자랑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그 왕님이 평소 자기 자랑을 안 하는 건 아니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중에 시두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유도 없으시고…….” 뒷말을 잇는 말끝이 살짝 흐려진다. 냉정히 말하면서도 와중에 그녀는 잠시 왕의 일상을 염려한 것이 분명했다. 정확히는, 여유가 없는 그의 모든 일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알고 있다 한들 절대 느슨하게 풀어둘 수 있는 지난 반년 남짓의 빡빡한 시간을 헤아리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 불러 세웠지만 생각해보면 별 거 없을 궁금증이었으며, 도리어 성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충복 하나에게 걱정거리를 덧대어준 기분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며 그 심중을 다 헤아리기엔 멀린 스스로 그녀가 가진 감정들을 제대로 공감할 수는 없어도, 그 이유는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뭐, 길가메시 왕은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사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아니잖아? 여차하면 여기저기 빠져나가기도 하고—”

“마치 왕께서 어디 놀러가기라도 하신 것처럼 이야기 하시는 군요. 늘 무리하시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면 잠깐의 외출이 아니라 휴식을 청하셨겠지요. 오히려 그런 쪽이라면 저야말로 반길 일입니다만…….”

“뭐어, 여차하면 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시두리.”

 

걱정스러웠던 시두리의 얼굴이 또 한 번 의심으로 뒤덥혔다. 두 차례 가늘게 뜬 눈을 마주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허공을 향해 시선을 피한 것은 멀린이었다.

 

“왕이 무리한다면 나도 이것저것 방법이란 건 알고 있고.”

“당신이 말한 방법 말입니다만, 왕께서 원하시는지 아닌지는 선택사항이 아니겠지요. 부디 적당히 하시길.”

 

굳이 상세하게 이야기 하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구체적으로 설명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어째 되게 신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어련하실까요. 시두리는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받아치기는 했으나 그녀는 여기 있는 이 궁정마술사란 자가 짧은 시간 내 왕의 곁에서 자신이 모르는 범위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왕은 결코 필요 이상의 전력을 낭비하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쓸데없는 인력이란 두고 있지도 않는 법이었다. 애초에, 우르크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하나를 결코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다.

 

“……움직이신다 한들 다 가지고 계신 뜻이 있으시겠지요.”

“응, 리츠카랑 마슈랑 같이, 오, 이런.”

 

짐짓 덜컥 나쁜 짓이라도 한 것 마냥 멀린은 입가를 감추며 손사래를 쳤다. 별 반응도 없이 한숨을 쉬는 시두리를 보았으나 그녀의 한숨이 과연 왕의 돌발행동에 관한 한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말해버렸네? 나중에 왕님 돌아오시면 가감 없이 잔소리 팍팍해줘.”

“멀린. 당신은 거짓말엔 능숙하지만 연기는 형편없다고 왕께서 말하셨습니다.”

“둘이서 그런 이야기까지 해? 그리고 나정도면 꽤 잘 하는 편 아냐?”

“’평소대로라면 성가실 일이지만 지금은 보고 있을 수도 없으니 자리에 없을 때 마다 욕할 기회가 있다’라고 하시더군요.”

 

자리에 있어도 욕하잖아! 숱하게 보고 들었던 사나운 눈초리와 맹렬한 비난들을 떠올리며 멀린은 억울하게 속으로만 외쳤다. “길가메시 왕의 수하들은 다 이런 식이야?!” 그나마 온건파라고 느꼈던 시두리조차도 멀린에게는 가차 없다.

 

“왕께선 오늘 자리에 계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말도 없이 나가신 것을 보아하니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와서 쫓아가본다 한들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으셨으니 제게 말씀 없이 동행하신 것이겠지만. 그럼 저는 다른 준비를 하러 이만 가보겠습니다. 적당히 빈둥거리도록 하세요, 멀린. 아, 그리고.”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려던 시두리가 우뚝 멈추어 섰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무언가를 고심하며 멀린에게로 시선을 던지는 얼굴엔 곧바로 말하지 못할 근심이 매달려있다. 적어도 인간이 가진 생각만큼은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에 익숙했던 멀린이었기에, 또한 같은 것을 늘 다른 이유로 한 자리에서 줄곧 바라보고 있는 공통된 모습이 있었기에, 멀린은 시두리가 어떤 걱정을 안고 말하기를 주저하며 서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입 밖으로 직접 꺼내보지 못할 진심의 여러 가지 종류를 멀린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든, 애정이든, 충의든, 그 모든 것을 아울러 한 데 모아 덩어리진 슬픔이든, 혹은 걱정이든 간에.

 

“시두리, 길가메시 왕이 걱정되는 거야?”

“……왕께서 오늘 별 다른 기미는 없으셨습니까?”

“으음, 글쎄. 알다시피 왕은 늘 피곤한 걸. 늘 무리하고 말이지. 시두리와 내가 이렇게 걱정을 해도 거기에 호응해 줄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야. 알아차리고 잔소리를 얹었다고 해도 휙 나가버렸을 테지. 아니면 미처 전달하지 못한 사항이라도 있어? 돌아왔을 때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라면 뭔가 물어볼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건 아닙니다만……. 평소와는 다르셨기에.”

 

빙글빙글 마주보며 웃고만 있는 멀린에게서 잠시 시선을 내리고 시두리는 눈을 감았다. 지난 늦은 밤을 떠올린다. 병사들이 물러가고 등불 몇 만 밝혀진 채 어른거리는 옥좌에 앉은 왕을 이유로, 시두리 또한 오랜 시간 동안 그 곁에 머물러 있는 평범한 한 때였다. 거의 모든 이가 잠든 한 밤중, 사실 왕의 정무를 거든다 한 들 그 시각의 시두리는 그의 손을 덜어줄 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 그는 그저 시시때때로 옥좌 근처에 쌓아올려진 석판을 정리하며, 때때로 빈 잔에 물을 채우기도 하며, 등불에 얼룩져 어둡게 그늘진 왕의 안색을 시시각각 살펴보는 정도였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비워졌던 물 잔에 물을 채울 무렵, 시선은 여전히 무수히도 많은 석판의 어딘가에 두고 있던 왕이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로 들어 올리려던 순간, 와르르 쏟아졌다. 그 찰나 시두리는 들고 있던 물병을 거두지도 못한 채 황급히 왕을 불렀다. 마치 몇 근은 나가는 것을 들어 보인 것 마냥 길가메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왕이시어? 재차 두어번 부른 뒤에야 물 잔으로 옮기던 손을 도로 거두고 이마를 짚어보는 왕의 얼굴빛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납처럼 굳어 눈가를 쓸어보는 손끝이 새하얘진 얼굴만큼이나 바래져있었다. 왕이시어,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결국 하루를 마무리 할 최선의 한마디를 전하는 말에 길가메시는 그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바로 옆을 지키고 선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왕은 짧다면 짧을 정적을 두며 말했었다.

시두리, 칼데아의 마스터 녀석이 알려준 것을 기억하느냐?

 

“—그것뿐이야?”

“글쎄요. 기억하느냐고 다시 한 번 더 물어보셨습니다만. 이렇다 할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뭘?”

“백기라고, 이것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하얀 깃발. 멀린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둔 척 시두리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우지 못한 수심을 입 꼬리에 걸쳐둔 채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으래……. 별로 설명도 해준 게 없고,  왕이 그렇게 말했다면, 일단 기억해두면 될 일 아닐까? 그것 뿐이라면 달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우리 왕님을 걱정하는 건 이해하고 있어. 시두리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왕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야. 무리한 이후로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그래. 줄곧 끝도 없는 계단을 쉴 틈 없이 걸어가다가 이번엔 계단도 없는 가파른 돌산을 오르는 기분이겠지. 메소포타미아에 내가 생각하는 그 정도의 가파른 곳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비유 상으론 그렇단 거야.”

 

우르크에 불려오던 날을 기억한다. 무한한 삶을 살고 있는 멀린을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조건을 비틀어 소환해버린, 유한한 생명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 존재는 알고 있으나 마주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눈부신 황금빛의 인간이 다 죽어가는 몸을 하고서도 버티고 서 있던 모습을 보았다. 멀린은 그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닥쳐올 수 있으나 억지로 물린 채 끝끝내 다가올 죽음을 그러안고 버티는 인간의 냄새이기도 했다. 삶과 죽음을 함께 품고 있다. 수백과 수천 수세기를 지나며 쌓아 올린 인간의 억지보다도 더한 것들을 안고 있는 남자였다.

 

“그래도 왕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갈 거야. 그저 계단이 없어진 것일 뿐이거든. 요컨대 왕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단 말이지. 이쪽이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왕은 발걸음을 거두는 일이 없을 거야.”

 

그게 황혼을 맞이하는 언덕 끝이라도. 멀린은 더 이어가려던 말을 눌러 멈췄다. 그가 바라보는 황혼은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 같은 광경일까, 혹은 얼룩져 번지는 붉은 것들과도 같은 모습일까.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그런 것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멀린.”

“그런 것 ‘만’이라고 하는 걸까? 뭔가 더 말하고 싶을 땐 하는 것도 괜찮을 텐데, 시두리. 이 마술사가 도움이 될 일은 별로 없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와, 상처받았어! 있는 힘껏 상처받은 표정을 연기하는 멀린을 두고 시두리는 잠시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이번엔 제 가슴께의 석판 쪽으로 향했다.

석판을 바라보던 왕의 얼굴, 자신을 향하던 왕의 눈동자, 입을 열어 말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 그 안엔 사람이고 인간이기에 볼 수 있었던 것이 분명 있었다.

 

“왕께서는 비탄하셨을까요.”

“길가메시 왕이? 그러니까 그건, 슬픈 것을 이야기 하는 건가?”

 

인간의 감정이다. 멀린은 오늘 아침 마주했던 길가메시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떤 표정이었는가는 감히 맞추어 볼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제 주제엔 지나친 소리를 말씀드렸군요. 잊어도 괜찮습니다, 멀린.”

“응. 수고하라고, 시두리.”

 

저 멀리로 사라지는 시두리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인 멀린은 곧이어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물어보려던 것을 묻지도 못한 채 어째 혼만 잔뜩 난 기분이었다. 곧 그는 다시 일어선 자리에서 창턱에 기대어 앉은 채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다른 때였으면 앉은자리에서도 이것저것을 구경했을 테지만 지금은 여의치 않다. 그나마 조금의 의문을 달랠 대화상대가 생겼다고 생각했거늘, 그 마저도 아주 잠시였다. 시두리는 왕의 부재에도 문제없도록 왕을 대신해 해야 할 일들을 부리나케 처리할 것이며, 그 밑을 따르는 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멀린은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 부터 성벽을 시작해 시장을 스치며 각자 나름의 고분 분투하는 모습들을 지나친 차였다.

 

‘그러고 보면 시두리는 평범한 사람이었지.’

 

머나먼 미래를 지내는 인간들은 알 수도 없을 신대 인간들의 생명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인했다. 마법과 요정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굳건한 정신력을 가진 기묘하게도 강한 자들이 살아가는 시대였으나, 실상 멀린의 눈엔 신대의 인간 모두가 정해진 수명을 지고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단순히 살아가는 햇수의 단위만을 따지는 것을 아니지만 그들의 정신력 자체를 높이 치하한다. 시간의 오차를 이용해 본디대로라면 볼 수 없었을 현재라는 시간에 관하여, 멀린은 바라볼 미래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지금을 지켜보는 것에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 끝까지 쥐어짜내 현재를 버티고 있었다. 개중에는 한계를 넘어 그 정점에 자처한 채 움직이는 왕이 있다. 그런 왕을 두고, 그 또한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이라 말 할 수 있는 다른 인간이 있다.

멀린은 잠시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비탄이라고 했던가.

찾아올 일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것은 곧 슬픔일까. 활기차게 움직이는 이들은 땀과 함성으로 그 슬픔을 태우는 것일까. 그들은 그저 열기를 품고 있을 뿐이다. 웃음, 노동, 농담과 맛있는 음식들 따위로 시간을 불처럼 일으켜 빛내고 사라진다. 멀린은 그 불꽃의 그을림을 따라가는 존재였다. 흔적을 짚고 얼룩과 재를 묻히며 그들의 체취를 맡아갈 뿐이었다. 일으키는 불꽃의 발화점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었기에 멀린은 곧 관찰하고, 학습했다.

 

슬픔을 알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이다. 슬픔은 인간의 것이며, 인간은 슬픔을 태워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이고, 그렇다면,

스스로를 태워 움직이는 자에게 슬픔이란 무엇일까.

 

 

 

***

 

 

 

“그나저나 괜찮으려나, 길가메시 왕은.”

 

날씨는 좋았다. 한동안 맑을 것을 짐작할 수 있을 하늘은 조금 먼 외출을 하기엔 나쁘지 않을 때다. 아침이 다가오는 시간까지 침소에서 죽은 듯 잠만 잘 것 같더라니 어느 샌가 부리나케 채비를 하고 바깥으로 나선 그였다. ‘시두리에게는 절대 엄금이니라.’ 라고 명령인지 농담인지 결의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제법 무겁게 이야기 하긴 했으나 이미 어긴 것 같았고 — 이 부분을 멀린은 아주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 그보다는 방을 나서기 직전까지 오갔던 그와의 대화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물어본 건 분명 나였는데 이상한 문제나 내주고 말이지…….”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에도 인정사정이 없는 왕이었다. 반은 인간, 반은 몽마, 스스로 인지하기에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어버린 멀린은 결국 아침부터 머릿속을 맴돌았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포기하기로 했다.

 

“내 얼굴이 어떤 꼴이냐니, 무슨.”

 

이미 한참 전에 띄워둔 허공의 거울에 시선을 던지며 멀린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잘 생긴 마술사 오빠 그대로인데 말이야.”

 

결국 멀린은 길가메시가 말하는 것들의 그 어느 것도 알아낼 수 없었으며, 아무리 궁리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그의 표정이 담고 있던 것들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빨리 납득해버렸다. 그러나 그것들이 결코 아쉽거나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멀린은 아침나절 있었던 왕과의 시간을 떠올리기로 했다. 떠올리고, 대화를 되뇌며, 오만한 왕의 표정을 기억하는 것. 신기하게도 그 시간만큼은 멀린에게 있어서 세상을 구경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안겨준다. 그는 이 느낌을 인간들이 말하는 단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단 하나만큼은.

 

“즐거움이겠지…….”

 

확신하며 중얼거렸지만 어쩐지 개운하지만은 않은 단어였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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