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편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현장에 나갔다가 차에 치인 연우정은 병원에 실려 가 눈을 뜹니다. 21살의 연우정은 기숙사에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눈을 감았다가 뜨니 난데없이 병원이었어요.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현장에 같이 있던 이정한 수사관. 처음 보는 남자는 자신을 다짜고짜 "검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연우정은 말없이 상황을 파악해요. 꿈인가? 하지만 지나치게 생생하죠. 기숙사에 올라가는 길에 사고라도 당했나? 여러 생각이 흘러가는 사이 연우정은 이정한 수사관에게서 사고 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대충 자신의 상황을 유추합니다.

찾아온 의사는 오른팔 골절과 경미한 타박상 외에 문제는 없다고 말합니다. 연우정은 일부러 입을 다물어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떤 약점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정한 수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연우정은 제 옷으로 추정되는 재킷을 뒤져 명함 하나를 찾아냅니다.

검사 연우정.

검사. 연우정은 명함 속 단어를 읊조리다가 헛웃음을 흘려요. 

연우정은 이정한을 따라 검찰청으로 돌아갑니다. 호칭 하나 실수할까 봐 최대한 조심하다가 일주일 병가를 내기로 합니다. 사실 한 달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분위기를 보아 하니 일주일도 무리인 것 같았어요.

나가려는 길, 김지연 실무관이 말합니다.


"검사님 그러고 가시면 지호가 놀라겠어요."



2.

주차장에 도착해 연우정은 차 키를 눌러 제 차를 찾습니다. 비싼 차 같은데. 아무래도 은사의 선물인 것 같죠.

무거운 부담감이 머리를 짓누르는 가운데 운전석에 앉은 연우정은 핸드폰을 켭니다.

2020년.

2020년이에요. 믿기지 않아 연우정은 한참이나 숫자를 내려다봅니다. 발밑이 훅 꺼지는 기분이에요. 자신이 검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현실이 와닿아요. 자신은 지금 너무 긴 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긴 시간을요.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하지만 꿈이라는 가정보다는 가능성 있는 추측이에요. 연우정은 한참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가 집주소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비게이션에는 집주소가 찍혀 있었어요.

출발하기 전, 연우정은 핸드폰을 듭니다. 지금 이 상황을 말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김사랑, 장희망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있을까요?

통화 기록을 살피던 연우정은 멈칫합니다.


<김지호>


낯선 이름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면 김지연도 '지호'라는 이름을 언급했지요. 그 뉘앙스가 마치 집에 가면 놀랄 거라는... 그러니까 마치 같이 사는 것을 전제하는 듯한.

연인? 설마 결혼이라도 한 걸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

연우정은 문자함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일찍와?」

「일찍 가도록 해 볼게.」 

「왜. 일찍 보고 싶어?」

「아는거묻지마」


내가 이런 식으로 문자를 했다고? 

연우정은 대화를 살피면서 미간을 찡그립니다. 연인이라고 해도 믿을 대화를 보니 머리가 복잡하지만, 일단 출발하기로 해요.



3.

집에 무사히 도착한 연우정은 정확한 주소를 모른다는 걸 깨닫고 고민하다가 김지호의 번호를 누릅니다.


[어.]


연우정은 멈칫합니다. 남자 목소리 아닌가?


[검사님?]


남자 목소리 같은데. 

검사님? 왜 나를 이렇게 부르지? 혹시 동료일까요? 아주 친한 동료라서 동거를? 그렇게 생각하면 김지연 실무관이 '지호'라고 친근하게 부른 게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아니면 알고 보니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라든가.

제 성격이 많이 바뀐 걸까요.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20대였던 자신이 30대라고 하니 뭐... 이해는 안 가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문자는 뭐... 자신이 유난히 치근덕거리는 것 같긴 하지만 또 막역한 사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것 같고요.


"어, 나 지금 밖... 주차장인데."

[응.]

"문이... 안 열려서. 나와서 좀 열어 줄래?"

[알았어.]


전화가 끊깁니다. 연우정은 차에서 내려 아파트 앞에서 멀거니 서 있습니다.

같이 산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습니다. 그 정도 사이라면... 지금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는 와중, 이쪽으로 다가오는 키가 크고 예쁜 남자 한 명이 눈에 띕니다.

자신과는 관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시선을 끄는 얼굴을 바라보는데, 남자가 경악하며 다가옵니다.


"검사님, 뭐야? 팔 왜 그래?"


아. 얘야?

성큼 다가온 남자가 거리낌 없이 연우정의 다친 팔을 조심스레 쥡니다. 그를 살피는 눈에서는 걱정과 염려가 뚝뚝 떨어졌어요.

  

"팔 왜 이래?"

"그냥... 교통사고."

"교통사고? 어쩌다가?"

"일하다가..."

"왜 전화 안 했어? 차는? 차 혼자 운전하고 왔어?"


졸지에 혼이 나게 생겼습니다. 겨우 팔 하나 다친 거 가지고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것이나 걱정이 어린 눈이 영 어색해요.


"그냥, 뭐."

"검사님, 생각이 있어?"

"....김지호."

"왜."


역시 얘가 김지호가 맞네요. 아, 그래. 얘랑 막역한 사이구나. 어쩌다가 만난....

잠깐. 

자신의 기억은 20대 초반이지만 자신은 30대입니다. 하지만 이 애는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연우정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충격을 받습니다. 나이대를 생각해 봤을 때 친구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내가 이 아이를 후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검사님?"

"...어."

"일단 들어가."


연우정은 김지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갑니다.

연우정은 김지호의 행동을 천천히 살펴요.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안을 활보하는 모습이 어색하고 이상합니다. 물 한 잔을 따라 온 그가 연우정을 소파에 앉힙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괜찮냐, 얼마나 아프냐 묻는 김지호를 빤히 바라보던 연우정은 한숨을 삼킵니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이 적응이 되지 않고 머리가 무거워요. 은근한 짜증도 솟아 그는 김지호의 말을 가로막습니다.


"내가 피곤해서."

"......."

"지금은 좀 쉬고 싶은데."


김지호가 입을 다물고 연우정의 표정을 살핍니다. 연우정은 신경 쓰지 않고 일어나요.


"씻고 좀 자야겠다."


소파에서 일어난 연우정은 잠시 주변을 둘러봅니다. 자기 방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니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일단 위치상 화장실일 것 같은 곳의 문을 열자 다행히도 욕실이 나옵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데 김지호가 따라 들어오는데요. 뭐냐는 듯 쳐다보자,


"팔 그래서 혼자 못 씻잖아."

"혼자 할 수 있어."

"혼자 뭘 어떻게 하겠다고."

"할 수 있어. 나가."


목소리에 다소 날이 섭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낯선 상황에서 본인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아요.

김지호의 표정이 굳네요. 그대로 나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문을 쾅 닫고 그 앞을 지킵니다. 


"혼자 못하기만 해 봐."


오기가 잔뜩 어린 말에 헛웃음이 흘러나옵니다. 이 새끼는 뭘까? 그러고 보면 30대인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태도 또한 너무 스스럼없습니다. 

후원하는 아이가 맞나? 뭐, 우습게도 형, 동생이라도 하기로 한 건가?

짜증이 났지만 대거리하기도 귀찮아서 연우정은 옷을 벗고 팔이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해서 씻습니다.

흘긋 눈을 돌리자 아까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눈이 자기를 보고 있어요.

이거 봐라?

연우정은 씻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눈깔이 저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몰랐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적당히 거리를 뒀어야 해요. 하지만 나눴던 문자나 김지호의 태도를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자신이 김지호를 후원하는 관계였고 집에서 거둬 먹일 정도로 도와줬다면 김지호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운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건 미래의 자신이에요.

다 씻고 나자 김지호가 큰 수건을 들고 성큼 다가옵니다. 연우정은 일부러 가만히 두고 보죠. 김지호가 그의 몸을 닦아 주고 자연스레 헤어 드라이어까지 꺼내는데 그것까진 참지 못하겠어요.

김지호의 손에서 드라이어를 뺏자 김지호가 연우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미간을 찡그립니다.


"많이 아파?"

"...말했잖아. 피곤하다고."

"....알았어."


어쩐지 시무룩해진 낯이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면이 있어요. 김지호가 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말리고 가운을 찾아서 입고 나옵니다. 

김지호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연우정은 그를 흘긋 보고 안쪽에 방이 두 개 있는 곳으로 갑니다. 한쪽의 문을 열고 슬쩍 보자 제 방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방의 문을 열자 그보다 큰 방이 나왔어요.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요. 기숙사에 살다가 이렇게 넓은 방에 있으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괜히 몸을 뒤척이며 천장을 올려다봐요.

이 집은 뭘까. 자가일까. 그렇다면 성공했네. 검사라고 했지. 검사가 됐구나. 

눈을 뜨고 나니 자신은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잘됐네. 좋은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불쑥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은 뭘 위해 달려왔던 걸까요.

멍하니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김지호가 들어옵니다. 김지호는 연우정을 살피듯 보더니 침대 위에 올라와 그의 옆에 누워요.

연우정은 눈가를 찡그립니다. 이쯤 되면 뭔가가 이상하죠. 자신이 김지호를 정말 허물없는 형제처럼 대한 걸까요.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김지호의 팔이 마치 자신을 끌어안을 것처럼 다가옵니다. 연우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 내요.

싸한 정적이 찾아옵니다. 김지호는 마치 충격을 받은 것처럼 연우정을 바라봐요.

연우정의 머릿속이 복잡해져요.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집에까지 들인 데다 이렇게 친하게 구는 사이라면 말해도 괜찮을지 몰라. 

하지만...

눈앞의 남자애는 너무 어려 보여요. 단순히 외모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21살의 자신보다 더 어린 느낌이에요. 미자 딱지는 뗀 걸까. 자신을 후원해 주는 어른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말을 해 봤자 불안만 가중시킬 뿐이죠.

일단 내일 병원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왜 그래?"


김지호는 정말 서럽습니다. 뜬금없이 다치고 들어와서 놀라고 걱정되는 마음은 가득인데 연우정은 날을 세우고 있으니. 연우정은 기분이 안 좋은 날이 있어도 그게 절대 김지호를 대하는 태도로 드러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맥주 한 캔을 들고 김지호의 어깨에 머리를 대며 이러한 일이 있었다 조곤조곤 말하면서 김지호의 서투른 위로를 받곤 했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보자마자 보듬어 주기보다는 왜 다쳤냐, 왜 혼자 운전했냐 등 따지기만 한 것 같아요. 

김지호는 깁스한 팔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울컥 올라왔던 서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우정의 눈 위로 손을 덮습니다.


"귀찮게 안 할게. 자."


연우정은 헛웃음을 삼킵니다. 이러고 자라고? 잘 수 있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낯선 남자애의 기척을 느끼며 연우정은 금세 잠에 빠져듭니다.



4.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깬 연우정은 눈을 뜹니다. 


"검사님, 밥 먹어."


아침에 눈을 떴는데 룸메이트가 아닌 웬 예쁜 남자애가 자기를 깨우는 상황이 어색합니다. 안타깝게도 꿈이 아님을 깨달은 연우정은 한숨을 삼키며 밖으로 나와요

식탁에는 아침상이 준비되어 있죠. 연우정은 상을 둘러보다가 앉아요. 식사를 준비하는 게 아주 익숙해 보이는 김지호를 살핍니다.


"먹어."


손이 불편한 연우정의 식사를 김지호가 성심성의껏 돕습니다. 연우정은 그걸 지켜보며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요.

이상한 예감이 머리 위를 덮칩니다. 어쩌면.......

김지호의 따뜻한 시선이나 사근사근하게 챙겨 주는 행동이 어색하면서도 거북해요. 하지만 마냥 싫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연우정은 얌전히 밥을 먹은 뒤에 병원에 가기로 합니다.

혼자 가려고 했으나 김지호가 따라와요. 혼자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네요. 솔직히 성질대로라면 한마디 하고 싶지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올 때 미래의 자신이 좆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함부로 들쑤시지 않기로 합니다.

진료실에는 혼자 들어가서 기억 상실에 대해 말하고 추가 검사까지 받았으나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말밖에 듣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연우정은 덤덤하게 밖으로 나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에서 김지호는 연우정의 팔을 쥐어요.


"아팠겠다. 사고 낸 사람 누구였어?"

"검사님은 그래도 왼손 조금 쓸 줄 알잖아."

"검사님 낫기 전까지는 내가 오른쪽에 앉아도 되겠네."


김지호는 내내 종알댑니다. 생긴 건 차갑고 말도 잘 안 할 것같이 생겨서는 별 쓸데없는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데 그게 귀찮으면서도 조금 귀여워요.

집 앞에 도착해서 김지호는 연우정의 옷자락을 붙잡아요.


"커피 사서 산책하고 가자."


내가 이런 것까지 장단 맞춰 줘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날이 좋아서 순순히 따라갑니다.


"나 청포도 에이드. 검사님 아메리카노 마실 거지?"

"어, 샷 추가해서."

"왜?"

"응?"

"그거 왜 추가해?"

"....?"

"어릴 때 커피 너무 진하게 마셔서 속 다 버렸었다며. 지금 아프니까 그렇게 마시지 마."


나이 들어선 그냥 먹나 보지. 밍밍해서 어떻게 마시지? 

연우정이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정보를 곱씹는 사이 김지호가 멋대로 아메리카노를 시켜요.

둘은 음료를 들고 밖으로 나와 집 앞 산책로를 걷습니다. 

아메리카노는 생각보다 마실 만했어요. 연우정은 말없이 걷는 김지호를 흘긋 봅니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 

이상하지. 아무래도 이 관계는 이상해.

하지만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자꾸만 긴장이 풀리려고 해요. 남들 앞에서는 항상 보여지는 제 모습에 대해 생각하고 꾸며냈었는데, 지금은 그냥...




5.

하루하루 지나며 연우정은 김지호와 자신의 관계를 확신합니다. 일단 너무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지호랑 지내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자기 얘기는 거의 안 하고 그냥 대충 맞장구만 해 주고 적당히 사근사근하게 굴어 주니 들킬 염려도 없었죠.

게다가 낮에는 김지호가 학원을 가서 혼자였기에 크게 신경 쓸 일도 없었습니다. 

연우정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이 집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쓸데없이 많다는 걸 깨달았고, 김지호와 자신의 흔적(예를 들면 거실 서랍장에 당당하게 놓인 콘돔과 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갑을 뒤져 성인임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어떻게 새파랗게 어린 남자애랑?

솔직히 미래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후원 관계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사이에서 발전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그리 적절해 보이지는 않네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동거를 하고 있다면 미래를 생각했을 텐데, 어떻게 저 애와? 뭘 기대했길래? 뭘 믿었길래?

이유가 있었겠지. 자신이 확 돌아 버린 게 아닌 이상...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납득도 되지 않았고, 미래의 일에 제 의지가, 그러니까 21살 현재 연우정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허무했어요.

김지호와의 생활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때때로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챙긴다는 사실이, 한눈에 듬뿍 보이는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죠.

하지만 일주일은 끝나가고 있고, 기억은 언제 돌아올지 요원합니다. 언젠가 돌아오겠지. 하지만 태평하게 생각하기에는 당장의 검사 자리가 불안해요. 지금으로선 그쪽의 생리도 자신의 입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잘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의 자신이 곤란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요.

김지호와의 관계도...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같이 지내면서 김지호는 꽤 사랑스러운 아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사랑스러운 감정과 사랑한다는 감정은 달랐습니다. 20대 초반 남자애의 감정을 감당해야 하는 건 자신에게도, 그리고 김지호에게도 그닥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섣불리 어떤 결론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프고 날이 선다는 걸 느끼고 있는 와중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김지호와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습니다. 틀어 놓은 TV에서는 마침 로맨스 영화가 나오고 있었고 흐르는 노래가 좋았어요.

김지호가 흘긋대는 게 느껴집니다. 가만히 무시하고 있는데 그가 제 손을 잡아요. 그리고 손바닥에 입술을 가져다 대려는데.... 연우정은 손을 뺍니다.

티가 난다는 건 알고 있지만요. 눈앞의 김지호는 제 취향도 아니고, 남자인 데다가, 욕정도 느끼지 않는 상대와의 스킨십은 아무래도... 거슬립니다.



6.

김지호는, 자존심이 상했어요.

언제부터였을까요. 묘하게 연우정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졌죠. 뭐라고 콕 짚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기분.

대화를 하는데도 묘하게 중간이 빈 느낌. 자신을 보는 눈은 묘하게 건조한 듯하고, 무엇보다 스킨십을 족족 피합니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걸까요? 하지만 연우정은 이런 식으로 사람 피 말릴 스타일은 절대 아닙니다.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예외였죠. 


"하고 싶어."


김지호는 선전포고를 하듯 말을 던져요. 연우정이 눈가를 찡그리며 묘하게 웃습니다. 연우정의 멀쩡한 손목을 잡아당기지만, 그는 힘으로 버팁니다.

울컥하고 화가 나지만, 일단 참습니다.


"아파서 그래? 아니면 무슨 일 있었어?"

"......"

"아님 뭐. 불만 있으면 말을 해."


연우정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상해요. 눈앞의 남자는 내 검사님이 맞는데, 자꾸 낯선 기분이 들어요.

그럴 일이 없는 걸 알아요. 아는데... 절대 그럴 일은 없는데...

김지호는 연우정을 노려보며 도발하듯 묻습니다.


"나한테 질리기라도 했어?"



6.

눈물이 고인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사람의 가슴속으로 멋대로 들어와 심장을 거칠게 쥐어짜려는 듯한... 

건방지고, 예쁘고, 제멋대로인 눈.

생각해 보면 말이죠. 왜 잤는지는 알 것 같기도 해요. 이렇게 생겼는데... 한 번쯤은 동하지 않았을까요?

연우정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합니다. 어차피 연인 사이라면, 어차피 기억이 돌아올 거라면. 뭐, 상관없지 않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확률에 대해 계산해 봅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나중에 돌아올 때를 대비해 김지호와의 관계는 유지해야 해요. 왜냐면, 김지호와 같이 살기까지 하면서 곁에 두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미래의 자신이,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의 자신이 엿먹지 않으려면... 우리는 연인이어야 합니다.

연우정은 김지호의 목덜미를 쥐어 봐요. 부드러운 살결을 손끝으로 느끼며 입을 맞춥니다. 

멈칫하던 김지호가 이내 화답합니다. 이상하게도, 마치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맞닿은 입술이 익숙하게 느껴져요. 연우정은 제게 입 맞추는 김지호를 응시합니다. 상기된 낯을 보자 몸이 달아오르고, 성별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돼요.

그렇게 전희를 거치고 영차영차도 하고 나서... 이제 삽입을 생각하고 있는데, 김지호의 손가락이 불쑥 아래를 침입하려 합니다. 연우정은 퍼뜩 김지호를 밀어내요.


"뭐야?"

"뭐가?"


어리둥절한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합니다. 연우정은 방금 김지호가 뭘 하려고 했는지 더듬어 보다가 은근한 충격을 받아요.

내가? 쟤한테 하는 게 아니라? 쟤가 나를?

왜?

연우정은 너무 황당해서 한마디를 던집니다.


"네가 나한테 박았다고?"


아. 흥미가 떨어졌어요.

21살의 연우정은 그렇게 많은 경험을 거치지도 않았고, 그렇게 또 개방적인 사람도 아니었거든요.



7.

새삼스레.

마치 그 사실을 처음 안 사람처럼.

김지호는 묘한 위화감에 연우정을 빤히 쳐다봅니다. 이상한 불안이 가슴속에 돌고,  속이 술렁거려요.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엉망진창일 겁니다.

연우정은 김지호의 낯을 훑습니다. 그는 이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어요.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

"사실, 사고를 당했을 때... 눈을 뜨고 나서."

"......"

"너는 내 기억에 없었어."


21살의 연우정은 여전히 말을 잘합니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단지 사실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자신이 없는 연우정이라니. 연우정의 현재에 자신이 없다니.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돌아올 겁니다. 연우정은... 연우정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자신을 불안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김지호는 자신이 무슨 기분인지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는 채로 연우정의 옷을 입혀 줘요. 연우정은 무슨 생각인지 김지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맞춥니다. 하지만 김지호가 서둘러 물러나자, 연우정은 그를 끌어당겨요.


"하던 거 마저 할까?"


언뜻 달콤하게 들리는 속삭임. 조금 전까지는 내가 어떻게 너에게 박히냐는 듯 물었으면서, 지금은 마치 순순히 그렇게 해 줄 것처럼 뒤로 눕습니다.

하지만 김지호는 그냥 연우정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해 줘요. 연우정이 눈썹을 까딱입니다. 저런 습관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가슴이 뛰어요.


"왜?"


어딘지 퉁명스러운 물음에 김지호는 멍하니 연우정을 응시하다가 묻습니다.


"검사님은 지금, 검사님한테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

"검사님은 나한테 아무런 생각도 없고..."

"......"

"괜찮아. 돌아올 거야. 검사님이라면 그럴 거야."


막연한 두려움을 삼키며 김지호는 희망을 뱉어 냅니다.



8.

연우정은 좀, 정말 이상하게도 짜증이 났어요.

김지호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고, 미래의 나나 지금의 나나 나인데. 

김지호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감정적으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거죠.

자기 취향도  무시하고 순순히 원래 하던 대로 맞춰 주겠다는데.

이상하게 건드리고 싶단 말이죠. 저렇게... 올라오는 감정을 꾹 참으려는 낯을 보니 말이에요.

연우정은 김지호의 손목을 잡아당기고 키스합니다. 수동적으로 키스를 받던 김지호는 연우정의 손이 들어오자 그를 밀어 냅니다. 연우정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물어요.


"왜."

"나 안 해도 괜찮아."

"거짓말하네."

"거짓말 아니야. 검사님은 지금 어차피... 나 안 좋아하잖아."


갑자기 선을 긋는 듯한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연우정은 도발합니다.


"순진하게 굴지 마. 그거 내 취향 아니야."

"......"

"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취향인 게 하나도 없는데. 무슨 자신감이야?"


도발은 성공합니다. ^^b



9.


신세계를 맛본 연우정은 곤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납니다. 눈을 뜨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김지호가 있어요.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던 김지호의 얼굴이 흔들립니다. 그는 연우정을 안으며 말해요.


"검사님, 미안해. 검사님 지금 아픈데..."


어제의 섹스에 대한 사과. 아픈 건 팔뿐인데.

짜증이 나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연우정은 김지호를 밀어 냅니다. 그딴 말 듣고 싶지 않아요.



10.

그렇게 서로 데면데면 냉전기 아닌 냉전기를 보내다 (급전개)

김지호가 학원에 간 사이 연우정은 집 이곳저곳을 돌아봅니다. 노란 앨범에 채워진 사진을 보고, 내가 샀을 리 없는 소품들을 살피고, 그간 나눴던 문자들을 보고...

그러다 김지호 방에 들어가요. 책상 위 책꽂이에 얇은 책 같은 게 하나 있길래 무심코 꺼낸 연우정은 멈칫합니다.

가족관계증명서가 있었어요.

연우정과 김지호의 이름이 있는.

연우정은 그걸 하염없이 내려다봅니다. 


"검사님?"


김지호의 시선이 연우정과, 그가 들고 있는 앨범에 번갈아 향합니다.

둘은 오래도록 눈을 마주하고, 이윽고 연우정이 초연한 낯으로 정적을 가릅니다.


"넌... 나를 믿었어?"


김지호는 보다 단단해진 얼굴로 대답합니다.


"응."

"뭘 믿고."

"검사님은... 검사님이니까."


연우정의 시선이 다시 앨범으로 향합니다.


"그럼... 나는. 너의 뭘 믿고."


정적이 꽤 오래 갑니다. 연우정은 고개를 들고 김지호를 응시해요.

김지호는 말할 듯 말 듯 여러번 입술을 벙긋거립니다. 두 눈이 흔들리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아요. 귀는 또 새빨개졌습니다.


"나는, 나는 검사님..."

"......"

"나는... 영원할 거라고.... 그게 내 전부였어. 나는, 그걸 약속했어."


살면서 이토록 진솔하지만 터무니없는 말을 또 들을 수 있을까요.

연우정은, 긴 시간이 지난 후의 자신을 순간 이해했습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겠지.



11.

그날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21살의 연우정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21살의 연우정은 여자 친구를 사귀어 봤는지(이때 김지호 살짝 열받습니다.), 둘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렇게 날이 새도록요.



12.

귓가를 간질이는 손길에 김지호는 눈을 뜹니다.

검은 눈이, 깊고 따뜻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아.

내가 아는 연우정이야.

울컥 솟는 감정을 가라앉히는데, 연우정이 이마에 입 맞추며 속삭입니다.


"불안하게 해서 미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연우정의 약속을 손에 쥐고, 김지호는 그의 품에 안깁니다.



<끝>






BL 작가 선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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