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와 설정이 다릅니다.

* 캐릭터 붕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장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단어선택에 문제가 느껴지신다면 반드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피드백 바로 하겠습니다. 









'추락의 후유증입니다. 척추신경의 문제로 시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창준이 들은 소리는 그 말 한마디였다.



뿌연 자신의 눈 앞. 빛이 많이 들던 시야는 점차 어두워졌다. 


창준은 눈을 감았다.







창준은 눈을 떴다. 

어차피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며칠째 반복되는 악몽이다.

눈 앞에 시목이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

자신은 멈추지 않고 뒷걸음질을 친다.

잡지 말기를.. 아니 잡아주기를 바랐던 걸까.





연재가 왔다간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지만.

울음이 섞인 소리, 비명소리, 원망하는 소리

내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실제였을까.

창준은 연재의 고통까지 껴안을 자신이 없었다. 

난 왜 죽지 않고 살아난걸까.






여섯 달 정도 창준의 정신은 온전하지 못했다.
척추 부근에서 자리한 고통과 시각적 부자유.


그는 더 이상 청와대 수석이 아니었다.

추락사고의 후유증을 겪는 범죄자일 뿐.



시간의 흐름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여섯 달이라는 시간도 퇴원할 때가 되었다는 간호사의 음성으로 짐작해볼 뿐이었다.

이제 그는 검찰에 소환될 것이었다.

아무리 다치고 아파도 그에게 지워진 죄는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을 휠체어에 태우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아마 검찰에 소환되는 듯했다. 창준은 그렇게 짐작했다.

차에 태워진 그는 한참을 이동해서 휠체어에 자신을 옮기는 손길을 느꼈다. 생각보다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촬영하고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가끔 병실에 난입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착한 것처럼 휠체어의 움직임이 멈추고 휠체어를 밀고오던 사람이 자신을 들어서 의자에 앉혔다.

그렇지만...계속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공간에 의문이 떠오른 창준이 물었다.


"저..여기가 어디죠? 검찰청입니까?"


답이 없었다. 창준은 다시 물었다.


"..검찰청 아닌가요. 당신 누구죠?"



창준의 손바닥에 글씨가 쓰여졌다. 창준이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여러번 같은 글씨가 쓰여졌다. '납치'


납치? 납치라고? 나를 누가? 왜? 의문이 떠올랐지만 창준은 침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목적이 뭔가요?"


또 다시 글씨가 쓰여졌다. '치료'
치료라.. 자신의 치료인 것인지..아니면 납치를 한 이 사람의 치료가 목적인 것인지. 창준은 의외의 목적에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자신을 쉽게 들 정도면 남자일 듯 하지만 여자일수도 있다.


"당신 말은 안하나요? 아니 할 수 없는 겁니까."


손바닥에 엑스자가 쳐졌다. 이 사람의 목소리는 알 수 없겠군. 창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할 생각이죠?"


손바닥에 쓰여진 글씨는 너무 의외라서 창준은 여러 번 느껴야했다. '반말'


"내가 당신에게 반말하라고요?"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원래 아는 사람이었던건가. 내가 하대할 수 있는 사람들. 여러 명이 떠올랐지만 그 중에 자신을 납치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하긴. 자신도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뛰어내릴 사람이 아니었겠지. 창준은 쓰게 웃었다.




"알았어. 반말하지."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 사람은 자신을 특별히 묶어두지는 않았다. 앞이 안보이는 사람에게 그런건 필요없다는 건가. 척추부근이 아파 달릴 수도 없긴 했다. 그 사람은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화장실과 침실을 알려주었다. 창준은 더듬거리며 집안의 지리를 익혀나갔다.

보름쯤 지나 창준은 더 이상 부딪히지 않고 침실에 누울 수 있었다. 그동안 그 사람은 창준에게 점자책을 가져다 주었고 라디오를 틀어주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통해 자신이 진짜 납치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에게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일까.
나 자신의 치료가 목적인걸까. 아니면 이 사람의 치료.


그의 성별부터 짐작할 수가 없어서 창준은 잠들기 전 새로 알아낸 사실에 대해 떠올려보곤 했다.


- 그는 힘이 세다.
- 나보다 먼저 일어나고 나보다 늦게 잠든다. (사실 잠을 자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 그는 규칙적으로 밥을 하고 먹는다.
- 그는 아침에 내 머리를 감기고 말려준다.
- 그는 나보다 어리거나 어렸거나 아래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창준은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인지 잠이 아닌지 모를 꿈에서 깨어났다.
또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병원에서 벗어나고는 처음이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것이 그 사람에게 들렸던지 인기척이 느껴졌다. 창준은 강하게 씻고 싶었다. 병원에서도 샤워를 할 정도로 거동이 편하지 않았기에 자주 샤워를 하지 않는 것에 꽤 익숙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이 기분은 도저히 씻어내지 않곤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몰랐지만.. 체면을 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씻고 싶어. 샤워...하고 싶어."


손바닥에 알았다는 듯 톡톡 두드림이 있었다. 그 사람은 천천히 자신의 옷을 벗겼다. 뒤늦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느릿한 손길에 자신이 안달날 지경이었다. 차라리 빨리 벗겨버리지. 손은 속옷에 이르러 꽤나 망설이더니 창준을 알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도 같이 벗는건가. 창준은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을 씻겨주려면 이 사람도 같이 젖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준은 약간 안심이 되었다. 자신에겐 어차피 보이지 않지만 덜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손길은 창준을 일으켜 세우더니 샤워실로 데려갔다.


뜨거운 물이 창준의 몸에 내려왔다. 손바닥에 물의 온도가 괜찮은지 묻는 것에 창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만이지. 창준은 물을 마음껏 느꼈다. 창준이 충분히 물을 적시고 나자 손바닥에 톡톡 하는 손짓이 있었다. 그리고 샤워기를 자신이 사용하는 듯 했다. 창준은 가만히 그 사람이 쓰는 것을 기다렸다.


창준이 인기척을 따라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 사람이 놀란 것인지 샤워기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났다. 이내 주워서 사용한 것 같지만.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순간 잊었나보다. 그의 행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창준은 살짝 웃었다.


그 사람은 물을 끄더니 거품을 내서 창준에게 묻혔다. 손길이 생각보다는 부드럽네. 거품은 창준의 등에서 어깨, 팔을 따라 움직였다. 가슴에서 약간 멈칫하던 손길은 배를 타고 창준의 중심에서 멈췄다. 감상...하는건가. 창준이 시선이 민망해질때쯤 천천히 손이 움직여 허벅지와 엉덩이로 향했다. 그 손길이 더 민망해서 창준은 혹시 중심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생각했다. 그 사람은 창준의 몸에 거품을 다 일으켜놓고는 한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창준은 자신의 중심부에 일어났을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역시... 창준이 말을 꺼내서 사과를 하려할 때 그 사람이 손에 샤워볼을 쥐어주었다.


"내가..해주면 돼?"


손바닥에 톡톡 신호가 왔다. 창준은 처음으로 그 사람의 몸에 손을 대었다. 얼굴이 이 쯤인가. 키는 자신보다 10cm정도 차이나는 듯 했다. 얼굴에 손을 대도 가만히 있는 그 사람 덕에 창준은 천천히 손가락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쓸었다. 눈썹이 숱이 많고 짙었다. 콧대는 높고 매끈했고 광대는 특별히 발달되지 않은 고운 얼굴. 입술부근에서 까끌한 수염이 느껴졌다. 남자구나. 턱선을 타고 그의 얼굴이 다 느껴졌다. 창준은 그리곤 천천히 목을 타고 거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어깨를 지나 등과 가슴. 배. 창준이 자세를 낮추자 남자는 몸을 약간 떨기 시작했다. 창준도 역시 중심부근에 다다르러 멈칫했다. 하지만 남자만큼 지체하지 않았다. 자신은 안 보였으니까. 남자의 중심도 자신처럼 일어나 있었지만 그 사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발등까지 빠르게 거품을 옮겼다.


"다 했어."


남자는 알았다는 듯 샤워기의 물을 틀어 창준의 몸에서 거품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꼼꼼한 성격인가봐. 그의 손길은 섬세하게 창준의 몸 이곳저곳을 쓸어내렸다. 아까보다는 빠른 손놀림에 창준은 이 남자가 그새 적응이라도 한 것인가 궁금해졌다. 창준의 몸을 다 씻어내리고 남자는 자신이 직접 자신의 몸을 씻었다.


샤워가운까지 알뜰하게 둘러주곤 남자는 창준을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말렸다.


창준이 다시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곤 남자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아까 생각하던 목록에 하나를 추가할 수 있었다.
- 이 사람은 남자다.


사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추가해야하나 했지만 씻을때 묘한 긴장감이 풀리자 창준은 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침이 되어 식탁 앞에 앉자 그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자신에게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손길이 떨리는 것을 감지한 창준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이 이런 어색함을 남기리라는 것은 잠에 들면서 생각했던 바 였다.


창준이 밥을 먹고 점자책을 펼치자 평소라면 다른 방으로 갔을 그가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창준은 얼추 한글 자모를 익힌 상태였다. 이걸로 긴 대화가 가능할까.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있어?"


손바닥에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나 한글 읽을 수 있어. 손가락 거기에 하나씩 가져다 놔. 틀리면 세번 두드리고."


알겠다는 듯 톡 하고 손을 두드렸다.


"왜 말을 안 하는거야? 못하는거야?"

'ㅁ ㅗ ㅅ ' 천천히 그가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못 하는 거라고... 나처럼 사고로 그렇게 된거야. 아니면 선천적으로?"



'ㅅ ㅏ ㄱ ㅗ'



"혹시 나를 납치한게 그 사고와 관련이 있나."



'ㅇ ㅑ ㄱ ㄱ ㅏ ㄴ'



"나를 원래 알던 사람이었나."



'ㄱ ㅡ ㄹ ㅓ ㅎ ㄷ ㅏ'



"그럼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나."



남자는 한참동안 창준의 손을 잡기만 하고 있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말해도 돼. 하고 싶은 말...있나?"



'ㅇ ㅙ ㅈ ㅓ ㅇ ㅣ ㅂ ㄴ ㅣ ㄲ ㅏ'







"왜 저입니까"

"내 마지막 소임이 너였어."

창준의 머릿속에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너였니. 황시목.



"시목..시목이니. 황시목."



손이 힘겹게 창준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ㄴ ㅔ '



창준은 손을 뻗어 시목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까칠한 얼굴. 넌 왜 목소리를 잃었니. 창준은 마음속의 미안함이 밀려왔다. 나 때문이니. 내가 니 앞에서 떨어져서.



"너..너여야만 했지. 이렇게 말을 잃었을 줄은 몰랐구나."



시목의 입술이 움직였다. 창준이 쓰다듬었지만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난 눈을 잃고 넌 입을 잃었구나."



창준은 시목의 어깨를 더듬어서 짚었다. 어젯밤에 만지던 게 너 인줄 알았으면 더 다정하게 어루만질 것을. 창준은 자신이 넘긴 짐을 떠안은 후배가 안쓰러웠다.



"머리랑 상관있는거니."

'ㅅ ㅓ ㄴ ㅌ ㅐ ㄱ ㅈ ㅓ ㄱ ㅎ ㅏ ㅁ ㄱ ㅜ ㅈ ㅡ ㅇ'



선택적 함구증이라..



" 치료가 너의 치료를 의미한거니? 시목아."



'ㄷ ㅜ ㄹ ㄷ ㅏ'



"둘 다? 너랑 나 둘 다?"



시목은 그렇다는 듯 어깨를 짚은 손을 어루만졌다. 창준은 시목의 손을 잡아당겼다. 시목이 천천히 끌려왔다. 시목의 등을 감싸 안으며 창준은 울었다. 시목이 창준의 등을 토닥였다. 창준이 침대로 시목을 끌고왔다. 그리곤 침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같이 자자. 널 혼자 자라고 두기가 그래."



시목이 침대에 눕는 소리가 나자 창준도 그 옆에 누웠다. 더듬거리며 시목을 찾아낸 창준의 손이 시목의 얼굴을 계속 쓰다듬었다.



"내가 니 얼굴을 다시 못 볼 줄은 알았는데,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네."



시목은 창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옆에 있으니깐 좀 위로가 된다고 말하면 이기적일까? 나 사실 납치라길래 마음 속으로 무서웠었나봐."



'미안해요' 손바닥에 글씨가 써졌다.



"날 이렇게 데려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지? 내일 점자로 써줘. 읽을게."



'네'



"나 말이야. 어제 민망했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벌거벗으려니 말이야. 근데 너라니깐 괜찮은 것 같다. 하긴 너도 민망했겠다. 선배 옷 벗기고 너도 벗고..."



'좋았어요'



뭐가 좋아. 라고 묻기엔 창준은 뻔뻔스럽지 못했다. 아마 제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고 시목도 그랬을 것이다. 무슨 의도로 말한건진 몰랐지만 미묘하게 선후배사이의 선을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창준이었다.



시목의 얼굴에선 눈이 감겨진 것이 느껴졌다. 잠에 든 걸까.

이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은 편안하다. 창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들었다.





다음날에도 여지없이 시목은 먼저 일어나서 아침상을 차려두었다.

언제나 성실하지. 황시목.



밥을 다 먹은 창준 앞에 시목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아침에 적어둔 모양이었다.



창준은 오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손 끝으로 시목의 마음을 읽어내려갔다.





선배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저는 그 날 밤 집에서 이명으로 쓰러졌습니다. 평소보다 심한 이명이라 응급실에 갔고, 그 다음날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진단하길 '선택적 함구증'이라고 했습니다. 일시적이 될 수 있는 증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선배님이 주신 일을 했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3개월이 지나도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선배님이 병원에 계시다는 건 알았지만 찾아간 적은 없었습니다. 선배님이 나아간다는 소식 대신 저에게 선배님이 시력을 잃으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저는 그 때 선배님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목소리를 잃은 제가 선배님을 만나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을테니 퇴원하실 때 만나야겠다고. 그렇게 3개월을 더 참았습니다. 제가 잠시 잊었던 것은 선배님도 검찰에 소환될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을 제가 납치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요. 선배님이 점자를 익히시고 저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왜 저였습니까. 왜 제 앞에서 떨어지신겁니까. 전 선배님을 붙잡으려고 몇 번이고 달렸습니다. 그런 꿈을 꾸곤 했어요. 하지만 매번 결말은 같았습니다.

반 년 동안 선배님 생각만 하며 지냈습니다. 선배님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답을 주세요. 기다려왔습니다.













생각보다 솔직하고 적나라한 글이었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창준이 두 어 번 글을 더 읽어내리는 동안 시목이 곁에 앉았다. 

그가 답을 기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때 내가 니 앞에서 그런건.  내 마음이 약해질까봐. 흔들릴까봐 그랬다.  너 보는 앞이 아니라면 도망갔을지도 몰라."



창준이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나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했지? 나도... 너와 있고 싶어. 연재에게 돌아가면 난 내 자신을 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너한테는 괜찮을 것 같아."



시목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준은 손을 뻗어 시목의 입가를 매만졌다. 입모양이 어떤건지 읽고 있는 창준에게 시목이 천천히 다가왔다.


시목의 입술을 창준은 읽을 수 있었다.


'사랑해요.'


아마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그 다음엔 시목의 입술과 창준의 입술을 구분 할 수 없었다.










몇 개월이 더 지나고 연재가 찾아왔다.


"돌아가요. 당신."

"난 안 돌아가. 연재야. 여기가 내 집이야. 난...당신 남편 더 이상 아니야."


연재의 울음이 느껴졌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던 사람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다. 


"당신이 얼마나 든든했는데..."


"연재야.

이연재.

나 더 이상 당신의 든든한 버팀목 되어 줄 수 없어. 

이 모든 것...당신에게 말하지 않고 나 혼자 결정해서 미안해."



연재는 아무 말 없이 창준의 곁에 앉았다가 사라졌다.


그 날 밤,  시목은 창준을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도망 안 가. 시목아. 창준은 시목을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1년 후 -


창준이 시목을 깨워 말했다.


"나 꿈을 꿨어. 꿈 속에서 니가 노래하고 있더라. 난 그런 너를 보고 있고.

참 행복했어. 그리고 눈을 뜨니까 니 모습이 안보이는거야. 그래서 내가 니 얼굴을 쓰다듬었지.

꿈 속에서 본 얼굴 떠올리면서. 너 웃었어. 웃으니까 더 예쁘더라. "


시목이 창준의 품에 안겨왔다.


"그래, 사실 이대로도 좋아.

나도 알아. 우리 다시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거.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그래서 행복한거겠지, 시목아."











* 생각보다 수위가 높아져서 당황한 글입니다. 성인을 걸까하다가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둡니다.(문제가 되면 전환하겠습니다.)

* 캐릭터 이입이 어려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난 소재를 써보고 싶어서 다소 무리하게 이야기를 끌고 갔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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