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니엘아."
"…어?"
"나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갔냐."
"내가 니네 집 안까지 고이 모셔서."
"아…."
"와 그라는데."
"그때 내가 뭔 말실수 안 했냐…?"
"…."


생각보다 긴 침묵에 재환은 적잖이 당황했다. 뭔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은 게 너무나도 확실하게 드러나 버린 다니엘을 보며 재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별말 안 했다."
"…."
"그냥 계속 니 혼자 말하다가 갑자기 말 안하드만."
"혼잣말로 뭐라고 했는데?"
"…생각은 별로 안 나는데, 그냥 니 웃긴 일 있었던 거 말하면서 깔깔 웃었던 것 같은데."


딱 보면 거짓말이다. 얼굴에 떡하니 쓰여 있다. 그러나 차마 재환은 말로 꺼내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   *   *





"…."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중간고사 날 이후 처음 찾아온 재환네 반의 정적이었다. 오늘은 기말고사 날이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시끄러운 게 더 이상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설령 소란스럽다고 해도, 그건 서로의 성적을 확인하느라 그럴 것이라고. 재환은 교탁 앞에 멀뚱히 서서 생각했다. 시끄럽던 아이들도 오늘만큼은 차분했다. 시험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학생들이 다급하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함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신명 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단 0.1초 만에, 아이들의 탄식 소리가 모든 반에 무겁게 깔렸다.


"스트레스 너무 받지 말고, 편하게 시험 봐! 끝나면 내가 치킨 쏜다."


원래 이런 말에는 소리 지르며 환호해야 할 아이들인데, 모두 풀이 죽어 겨우 짜낸 것 같은, 힘없는 함성만이 들렸다. 재환은 눈 밑이 퀭한 학생들을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며 반을 떠났다. 시험 시간 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서둘러야 했다.





*   *   *





오늘은 시험 3일 차, 마지막 날, 마지막 교시. 다니엘은 걸음을 재촉하며 예비종 치기 3분 전, 우진네 반으로 들어갔다. 시험 날만큼은 체육복이 아닌, 단정한 수트 차림으로 들어간 다니엘 또한 다급하게 책을 훑고 있는 학생들을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았다. 최대한 빨리 시험지를 나눠주기 위해 6장씩 분리해두고, OMR카드에 도장을 다급하게 찍어놓았다. 그래야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볼 수 있을까, 에서 나오는 마음이었다. 빨리 나눠준다고 해서 불안함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걸 다니엘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들이 최대한 편하게 시험 보기를 바랬다.


"자, 모두 책 집어넣어라."


예비종이 치고, 다니엘은 OMR카드를 줄마다 나눠주며 적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지막까지 한 글자라도 더 보려는 아이들의 다급한 눈길이 눈에 밟혔다.

시험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다니엘은 빛의 속도로 시험지를 재빨리 나눠주었다. 마지막 날 마지막 교시의 과목은, 수학이었다. 언뜻 봐도 복잡해 보이는 문제에 다니엘이 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교실에서 울려 퍼지는 사각사각 연필심 소리만이 고요한 학교를 감쌌다.





*   *   *





수학 시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치고, 뒷사람이 일어나 OMR카드를 걷어나갔다. 대부분 아이들의 얼굴에는 미소 꽃이 만발하기 시작하면서 참을 수 없는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물론 우진을 포함해서. 비록 '수학'이라는 중요 과목을 망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중 몇은 울고 있었고, 나머지는 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수학 시험을 잘 본 것 같다고, 우진은 생각했다. 중간고사 때 또한 100점을 맞았기 때문에, 이번에 100점을 맞는다면 교과우수상도 노려볼 수 있었다. 우진은 제 주위로 시험지를 들고 우르르 달려 나온 친구들과 함께 답을 맞혀보기 시작했다.


"1번에 3번, 2번에 4번…. 오 맞았다!!"
"야야, 뒷장 좀 넘겨 봐."


하나씩 생기는 빨간 동그라미에 우진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웃음도 잠시, 옆에서 우진의 시험지를 보고 채점하던 한 친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 이거 아니지 않아?"
"응? 그럴 리가."
"이거 지름 구하는 건데?"


…뭐라고? 지름?! 어?! 반지름이 아니야?! 우진은 다급하게 문제를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문제를 풀 때는 반지름이라고 읽혔던 게, 지금 읽어보니 똑똑히 지름이라고 나와 있었다. …말도 안 돼. 우진의 멘탈은 급속도로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리가 없어. 지름일 리가 없어…. 우진의 다리는 힘이 풀려 그의 무릎은 결국 바닥에 쿵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나 일어날 수 없었다. 간절하게 원했던 교과우수상이 날아갔기 때문에. 울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우진의 불투명한 눈에서 갑자기 한 줄기 엷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야, 박우진! 너 왜 울어!?"
"야야, 울지 마. 왜 우냐, 시험도 끝났는데!"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우진은 입술까지 깨물어가며 눈물을 멈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끝을 볼 때까지 나올 것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우진은 손으로 눈물을 계속 훔치며 옆에서 다독이던 친구들에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너희끼리 밥 먹어라. 나 쪽팔려가지고 급식실 못 가겠다."
"에이, 그래도. 오늘 밥 겁나 맛있는 날인데…."
"오늘 놀 때 뭐 사 먹지 뭐. 여기 있을 테니까, 먹고 와."


진짜 괜찮아? 엉. 나 이 상태로 못 나가. 애들 다 놀려. 우진은 애써 웃으며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 우리 진짜 간다. 더 울지 말고. 알겠어. 우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친구들은 각자 떠들며 급식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우진은 한참 동안 훌쩍이다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충격받아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하아…. 지름…."


운 게 더 이상 티 나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얼굴을 씻고 말리며 우진은 계속 후회했다. 한참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진은, 이제야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듯 한결 담담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어, 우진아! 시험 잘 봤어?"


…박지훈 쌤이다.


"뭐, 우진이 너는 걱정 안 하니까. 시험 끝나서 좋겠다. 난 이제부터 고생 시작인데…."
"…."
"어, 박우진, 우진아! 너 왜 울어!"


아씨, 안 울려고 했는데…. 우진은 결국 다시 왈칵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지름 문제를 낸 장본인인, 지훈 앞에서. 우진은 너무나도 서러웠다. 왜, 왜! 반지름으로 안 내시고 지름으로 내셨어요…. 이제는 소리까지 내며 펑펑 우는 우진을 보던 지훈이 더 당황할 지경이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우진을 꼭 안으며 달래주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네. 지름으로 내가지고 우진이를 울리다니, 내가 미안해…."
"흐읍…, 아니에요 쌤…. 제가, 흐어, 제대로, 못, 본 거죠…."


우진은 지훈의 포근한 품 안에서 계속 훌쩍였다. 지훈은 그런 우진을 이해했다. 이번 학기에 수학 교과우수상을 한 번 타보겠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 우진이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교과우수상이 큰 의미로 작용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우진은 간절히 원했다. 이유는 우진만이 알겠지만, 아마도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교과우수상을 받는다는 건 그 과목에서는 완벽하다는 걸 의미하니까.


"…쌤."
"응?"
"죄송해요."
"아니야, 지금 되게 힘들잖아, 우진아."
"…."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내가 지름으로 문제 내서 그런 거잖아."


어느 정도 멈췄다고 생각했던 우진의 눈물이 다시 흘러나왔다. 지훈은 그런 우진을 더 꼭 안아주었다. 작은 손으로 머리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우진이 다시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지훈은 한동안 우진을 계속 품에 안았다. 점심을 먹고 올라오던 재환이 이렇게 애틋한 사제 간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진이 수학쌤 잘 만났네. 재환이 반 층 아래 계단 구석에서 몰래 지켜보던 중, 천천히 교무실의 문이 열리고는 쭉 뻗은 긴 다리가 약간 튀어나왔다.


"지훈…."


이걸 어떡하나, 둘이 꼭 껴안고 있는 장면을 다니엘이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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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라월입니다!! 너무 늦게 돌아왔죠ㅠㅠ 더 열심히 글 쓰겠습니다…. 글도 못 쓰는 사람이 연재 텀도 길면 안 되죠!! 저조차도 허용 못 하니까요, 최대한 자주자주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화엔 갑자기 다른 스토리가 튀어나왔죠ㅋㅋㅋ 약간 당황하셨을 법도 한데, 지금 배경은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진이가 사실 공부를 엄청나게 잘하는 학생인데요, 여기에서 우진이가 학업우수상을 간절하게 원하는 걸 이해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ㅠㅠ 제가 잘 못 풀어내서ㅠㅠ

사실 제가 우진이와 같은 케이스를 겪었습니다ㅋㅋㅋ 제 경험에서 나온 스토리에요 ㅠㅠ 지름을 반지름으로 읽었다는 걸 시험이 끝나고 나서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그 좌절감이란…. 전 정말 땅이 무너지는 줄 알았거든요. 저도 그거 맞았으면 수학은 만점이었는데 ㅠㅠ 그렇다고 제가 수학 쌤 품 안에서 울지는 못했지만요ㅋㅋㅋ 한 번 울어보고 싶긴 했어요. 그러면 선생님께서 어떤 반응을 해주실까, 궁금하기도 했구요. 또 위로 받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거든요. 친구들은 어떻게 보면 재수없다고도 하잖아요. 겨우 하나 틀렸다고 운다고. 자기는 그냥 다 틀렸는데. 그러다보니 더 기댈 사람이 필요했던 것도 같아요.

그럼 여기서 질문!! 다음 화에서 다니엘은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맞추셔도 되고 안 맞추셔도 되고…. 어쨌든 정답은 다음 화에 나오겠죠? ㅎㅎ

제 글을 항상 좋아해 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글 쓰겠습니다!! 그리고 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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