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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이틀 뒤 중요한 출장을 앞둔 아카아시에게 그의 회사가 선심 쓰듯 휴가를 준 덕분이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야 느긋하게 일어난 아카아시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지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몇 주 바빴다고는 하지만 도무지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가만히 있는 게 더 적성에 안 맞기도 하고. 결국 아카아시는 식사를 끝낸 뒤 집안을 대청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열어볼 일이 없어 먼지가 가득 쌓인 서랍의 구석구석을 닦다보니 지금껏 어디 둔지 몰랐던 추억의 물건들이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아카아시가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구식 핸드폰은 그 중 하나였다. 10여 년 전 아카아시가 고등학생일 때 사용하던 물건으로, 그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나 금세 다른 감정이 아카아시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카아시는 핸드폰의 뒷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청소를 하겠다고 나섰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핸드폰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작은 크기의 스티커사진, 보쿠토를 완벽히 떠나보낼 준비를 하던 아카아시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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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 코타로는 항상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게 빛이 나는 그 사람은 항상 많은 이들을 끌어 당겼다. 아카아시 케이지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후쿠로다니 배구부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한 이유였다. 전국 다섯 손가락에 손꼽히는 스파이커인 그의 경기를 보면서 아카아시는 언제나 그에게 토스를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기대를 품고 만난 그는 생각보다 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경기를 할 때뿐만 아니라 코트 밖에서도 보쿠토는 그의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끊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보쿠토를 철없다고 평했고, 그와 함께 다니는 아카아시에게는 언제나 고생한다며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에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이 더 좋았다. 저를 필요로 하는 보쿠토가 있다는 것은,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아카아시에게는 최고의 전개였다.


"아카아시, 오늘 시간 있지?"

"네."


보쿠토와 함께 배구를 하는 동안, 아카아시는 일주일 중 토요일을 가장 좋아했다. 평일보다 둘만의 자율연습시간이 길 뿐만 아니라, 연습이 끝난 뒤에는 둘만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주 토요일 약속은 둘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를 바탕으로 했다. 아카아시는 언제나 매주 토요일을 비워놓았다.


이번 토요일 역시 둘은 연습을 끝낸 뒤 자연스레 시내로 발걸음을 향했다. 필요한 것들을 사고, 맛있는 것들을 먹고, 화창한 햇빛을 받으며 나란히 길을 걷는 그 시간은 아카아시에게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나른하게 몸을 맡기면서도, 아카아시는 제 옆에서 걷고 있는 보쿠토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스티커 사진 찍어봤어?"


갑작스레 저를 불러오는 보쿠토에도, 아카아시는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평범하게 굴었다. 나란히 걷고 있는 둘의 오른 편에 스티커 사진 가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번 주만 해도 보지 못했는데, 아마 일주일 새 새롭게 문을 연 모양이었다.


"아뇨, 보쿠토 선배는 찍어보셨나요?"

"아니? 한 번도 없어!"


아카아시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보쿠토의 입에서 나올 말은 어쩐지 예상이 되었고, 아카아시는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아시, 우리 스티커 사진 찍자!"


대답 대신 제 얼굴로 꽂혀 오는 달갑지 않은 시선에도, 보쿠토는 마치 주인의 상냥한 손길을 기다리는 작은 짐승처럼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의 대답 없이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것처럼 구는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좋아요."


헤이헤이헤이! 한껏 신이 난 듯 먼저 스티커 사진 가게로 향하는 보쿠토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아카아시는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띠었다.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지만 아카아시 역시 보쿠토와 사진을 찍고 싶었다. 둘만의 스티커사진을 갖고 싶었다. 보쿠토에게는 보이지 않을 위치에 서서야, 그는 제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었다. 제 짝사랑이 쌍방으로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카아시는 만족했다. 적어도 그는 보쿠토에게서 대체될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카아시~ 얼른 와!”


보쿠토는 느릿하게 걸어오는 아카아시를 재촉하듯 불렀다. 보쿠토는 이미 기계 안에 들어가 아카아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해요.”라고 짧게 대답하며 아카아시가 기계 입구에 걸린 얇은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보쿠토는 미리 바꿔놓은 동전 중 마지막 동전을 기계에 넣었다. 아카아시가 처음 보는 장소를 둘러보며 신기해하고 있자,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아끌어 제 옆에 그를 세웠다.


“사진 찍는다!”


제 귓가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보쿠토의 숨결에, 아카아시는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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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아카아시는 저녁을 먹은 뒤 제 방의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카아시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스티커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얼굴과 포즈를 하고 있는 사진 속의 저를 보며, 아카아시는 가볍게 머리를 짚었다. 몇 번을 봐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찍겠다는 조건으로 보쿠토 몫의 사진까지 받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좁은 공간에 둘만 있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이 여러 번 있다고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건장한 두 명의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둘은 딱 붙어 포즈를 취해야 했다. 보쿠토는 뻔뻔하게 포즈를 취하며 아카아시에게 가깝게 붙어왔고, 아카아시는 점차 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낯선 느낌에 당황한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고, 사진기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모두 담아냈다.


“이건 어디에 붙일 수도 없잖아….”


아카아시는 손가락으로 사진 속 보쿠토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저와는 달리 보쿠토는 꽤나 멋들어진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사진 속의 보쿠토도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는 다음번에는 꼭 멋지게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그리고 각자의 핸드폰 뒷면에 붙이고 다니자는 보쿠토의 요청에도 자연스럽게 응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오늘도 그러자고 말한 사람이니, 다음번에도 그럴 것이다. 아마 다음 주 토요일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아카아시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 보쿠토와 아카아시 둘 만의 토요일이 다시 찾아올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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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쿠토 선배 여자 친구 생겼대!


찾아온 수요일, 수업 시간에 전달된 친구의 쪽지를 읽은 아카아시의 몸은 그대로 굳었다. 이번 주 토요일만을 기대하고 있던 아카아시에게는 청천 벽력같은 소리였다. 오늘 함께 등교할 때만 하더라도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던 보쿠토였다. 제게 얘기를 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기대를 했었다. 보쿠토에게 아카아시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카아시는 저를 향했던 보쿠토의 사소한 움직임과 흘러가는 한 마디를 모두 기억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매순간마다 기대하고 꿈꿨다. 어쩌면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지 않을까.

보쿠토와 아카아시, 둘이 주인공인 해피엔딩의 러브스토리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을 키워나가며, 보쿠토가 졸업할 때 고백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허황된 계획도 세웠었다. 짝사랑으로 만족한다고 했지만, 그건 말뿐이었다. 짝사랑을 하면서 그런 걸로 만족할 리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아카아시는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고,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보쿠토의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끔 노력했다. 나 혼자 만의 짝사랑이라면… 나는, 내 감정을 티내서는 안 된다. 복도를 걸으며 울컥하고 차오르는 마음에 아카아시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옆 건물에 위치한 3학년 교실로 가기 위해서는 건물 사이의 긴 복도를 지나야 한다. 아카아시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으러 가는 죄수처럼 보쿠토에게 향하고 있었다.


“아카아시!! 나 보러 온 거야?”


그리고 보쿠토 역시 평소처럼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 목소리, 나를 향한 시선. 그래서 아카아시는 그 짧은 순간 어쩌면 헛소문이 아닐까하는 기대를 했다.


“벌써 퍼졌나보네!”

“…진짜예요?”

“응! 나 여자 친구 생겼어, 아카아시!”


그러나 보쿠토가 주인공인 사랑이야기에 아카아시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보쿠토와 그의 여자 친구는 주연이었고, 아카아시는 조연이었다. 보쿠토 코타로가 가장 아끼는 후배이자 대체될 수 없는 주전 세터, 아카아시 케이지는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놀던 것도 이제 못할 거 같아! 미안해, 아카아시.”


악의 없는 그의 해맑은 얼굴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사랑했다. 그것이 아카아시를 더욱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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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는 대학 졸업 후 A광고회사에 취직했다. 아카아시가 그 회사를 목표로 한 이유는 분명했다. 여느 광고회사들과 달리 A회사는 스포츠 스타들만을 대상으로 광고를 제작했고, 스포츠계에서 그 회사에 대한 신망은 꽤나 두터웠다. 그리고 유명 배구선수인 보쿠토 코타로는 그 회사의 대표 모델 중 하나였다.


제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보쿠토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겠다고 다짐했음에도 그럴 수가 없었다. 배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회사를 선택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변명했지만, 아카아시는 제 솔직한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른 길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던 아카아시는 결국 ‘보쿠토 코타로’라는 빛을 향해 또다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아카아시는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보쿠토는 간간히 아카아시에게 연락을 해왔지만, 아카아시가 핸드폰 번호를 바꾸면서 그와의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보쿠토에 관한 소식은 배구부 선후배, 언론 매체 등을 통해 들을 뿐이었다.


「사흘 뒤 저녁시간에 시간 괜찮대!」

“보쿠토 씨랑 미팅 사흘 뒤로 잡아놨어요.”

“어어, 고마워. 역시 아카아시~”


그랬던 아카아시가 보쿠토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된 건 미팅을 위해 회사를 찾은 보쿠토와 우연히 만나면서였다. 밖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보쿠토와 마주쳤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꼭 드라마처럼, 다시 우연히 만나는 장면을 기대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지는 몰랐다. 아카아시는 들고 있던 커피를 떨어트릴 정도로 크게 놀랐고, 보쿠토 역시 놀라 큰 소리로 아카아시의 이름을 불렀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바뀐 휴대폰 번호를 받아갔고, 그날 이후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광고 팀으로 배정되었다. 보쿠토 팀에서 가장 신입인 아카아시는 그의 매니지먼트를 거치지 않고 보쿠토와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사원이었다. 자연스레 아카아시는 보쿠토와의 연락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럼 그때 봐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옆으로 미뤄두고 아카아시는 다른 업무를 시작했다. 일 얘기가 끝났으니 적어도 퇴근 시간까지는 그와 연락하지 않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제게 도망친다고 뭐라 해도 상관없었다. 당신의 사랑이야기에 있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조연뿐인 나는 그럴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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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나 결혼해, 아카아시!”


보쿠토는 미팅이 끝나고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던 아카아시를 붙잡았다. 그와 동행한 매니지먼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 둘만 남게 된 자리에서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에게서는 결혼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애초에 오늘 미팅에 올 필요가 없던 보쿠토가 굳이 왔을 때부터 기묘한 불안감을 느꼈던 아카아시였다. 막연했던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오자, 아카아시는 마치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얼굴에 얼얼함을 느꼈다. 보쿠토는 제 가방을 몇 번 뒤적이더니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달 뒤에 결혼식이고, 이건 청첩장이야! 직접 전해주고 싶어서 오늘도 고집 부려서 겨우 왔어.”

“…….”

“아카아시?”

“…고마워요. 결혼 축하해요, 보쿠토 선배.”


보쿠토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에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저 미소였다. 보쿠토는 여전히 아카아시를 사랑했다. 아카아시는 그게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젠 가야한다는 부름에 보쿠토가 그 자리를 떠나고서야, 아카아시는 울컥하고 차올랐던 그 감정을 맘껏 내뱉을 수 있었다. 다 식어버린 커피를 앞에 두고 펑펑 우는 그 모습은 너무도 처량했다. 아카아시가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그런 것들 앞에서 뿐이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한 남자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아마 사랑하는 이에게서 일방적으로 이별통보를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아카아시는 차라리 헤어지자는 말이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은 시작도 못해봤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러웠다. 너무도 듣기 싫었던 말이었지만, 그 소식이 보쿠토에게는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 역시 서러웠다. 그리고 그 와중에 보쿠토의 결혼식 날짜에 아무 약속이 없는지 확인했던 제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서러웠다.


그 이후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연락에 답을 하지 않았고, 회사에 요청해 담당하는 팀도 바꿨다. 보쿠토의 매니지먼트도 공식적인 루트로 연락하기를 원하는 눈치였기에, 아카아시의 팀 전환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보쿠토가 회사로 직접 쳐들어 올만도 했지만, 워낙 바쁜 스케줄일 뿐만 아니라 이젠 매니지먼트에서도 그의 고집을 봐주지 않는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보쿠토의 결혼식은 이제 2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카아시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보쿠토의 친한 후배로서 그 자리에 가야 하는 것은 마땅했다. 하지만 정말 축하할 마음도 없는 제가 그 자리에 가도 될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식장에서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보쿠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그 고민의 굴레에서 아카아시가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척해지는 아카아시의 모습에 회사 동료들은 그를 걱정했지만, 아카아시가 그들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불가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점심시간에 아카아시는 회사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문을 열자마자 아카아시는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 보쿠토팀에서 함께 일했던 히키다 코시였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히키다는 쉴 틈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같이 일할 때도 꽤나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바람도 쐴 겸 생각을 정리하러 옥상을 찾은 터라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했다.


“아~ 나도 보쿠토 씨 결혼식 가고 싶다.”

“…왜 안 가요?”


보쿠토 코타로가 결혼한다는 소식은 언론 매체를 통해 대문짝만하게 보도가 난 상태였다. 이 사람은 연애나 결혼이나, 조용히 하는 법이 없다. 아카아시는 괜히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보쿠토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다 초대를 받았을 텐데, 왜 못 가지? 아카아시의 물음에 히키다는 가볍게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아, 글쎄, 보쿠토 씨 결혼식 있는 날 돌아오는 출장이 잡혔지 뭐에요. 무려 나흘짜리!”

“…….”

“뭐, 급하게 서둘러서 갈려면 갈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힘들게 가고 싶진 않고. 아쉽긴 하지만…, 밥 진짜 맛있을 거 같은데.”

“…히키다 씨.”

“네?”

“그 출장 제가 갈 수 있으면, 제가 가면 안 될까요?”


아카아시는 도망갈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히키다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생기 넘치는 아카아시의 눈빛에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히키다가 맡은 출장은 아카아시의 팀에서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보쿠토의 팀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해당 팀은 보쿠토의 결혼 이후의 프로모션을 찬찬히 진행 중이었던 터라 그나마 가장 여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는 히키다의 출장이 원래 제 팀에서 맡기로 했던 일인 것을 알고 더욱 적극적으로 자원했다. 아카아시의 팀에서는 그나마 그가 가장 여유로운 편이었지만, 갈수록 수척해지는 모습에 팀원들은 그를 아예 출장목록에서 제외시켰었다. 그런데 그런 아카아시가 자원을 하니 회사에서는 해당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출장을 핑계로 보쿠토의 결혼식에 가지 않고, 이후 자연스럽게 인연을 끊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카아시는 노력했다. 제가 좋아했던 보쿠토의 모습에 하나씩 토를 달았다. 보쿠토는 그 정도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카아시는 제가 이전만큼 보쿠토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마음 정리는 생각보다 쉬웠다. 아카아시는 지금껏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바보 같다고 여겼다.


“…아.”


그러나 출장 이틀 전, 우연히 발견한 스티커 사진은 아카아시의 고요한 마음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에 꼭 뺨이 데일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는 제 생각이 어찌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보쿠토가 졸업하던 그 날, 아카아시는 제 핸드폰 뒤에 둘이 찍었던 스티커 사진을 한 장 붙였다. 짝이 없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였다.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에서 자신은 조연조차 못 되는 단역이 아닐까.


“잊을 수…있을 리가, 좋아하지 않을…리가 없잖아.”


고등학교 시절 아카아시의 수많은 눈물을 그대로 받았던 스티커 사진은 쭈글쭈글해진 채로 핸드폰에 간신히 붙어 있었다. 구겨진 사진 속에서도 그는 빛나고 있었다.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한다. 그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반했던 그 순간순간에 토를 달았던 제 머리와 입을 때렸다. 멍청한 새끼. 10년을 넘게 사랑해놓고 아직도 몰라? 아카아시에게 있어 보쿠토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그 약점을 놓을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책상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서둘러 청소를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깨끗해진 바닥 위로 몸을 눕혔다. 해야 할 것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으나, 하고픈 마음이 더는 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느껴지는 두통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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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로 진행되는 식이었지만, 결혼식장 주위에는 취재진을 포함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보쿠토는 멋들어지게 정장을 빼입고 결혼식장을 찾은 손님들에 인사를 했다. 언론에 드러내지 않아 비공개 식이지, 제 지인들이란 지인들은 모두 초대했기에 그 규모는 엄청 났다.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도 보쿠토는 눈으로 계속해서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청첩장을 직접 건네준 그 날 이후로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아끼는 후배, 보쿠토는 아카아시 케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이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바깥 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 게 확연히 보였다. 보쿠토는 설레면서도 점차 초조함을 느꼈다.


이젠 곧 식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아카아시는 오지 못하나 싶었다. 출장이 겹치는 바람에 못 올수도 있다고 아카아시의 회사 동료들이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와줬으면 싶었는데. 보쿠토는 아무도 없는 바깥 회장을 몇 번 더 둘러보다 신랑대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보쿠토 선배!”


그때 숨을 헐떡이는 익숙한 목소리가 회장을 울렸다. 보쿠토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았다. 온통 흰색뿐인 회장 속에서 검은 정장을 입고 뛰어오는 아카아시의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보쿠토의 눈에 아카아시가 보석처럼 박혔다.


“아카아시! 왔네!”


아카아시는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거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보쿠토는 그의 몸을 일으켜 세게 껴안았다. 훅하고 퍼져오는 보쿠토의 체향이 아찔했다. 아카아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 올까봐… 조금, 아주 조금 서운했어, 아카아시.”

“하아…, 보쿠토 선배 결혼식인데 와야죠. 그나저나 저 땀 많이 나는데 떨어지시는 게 좋을 걸요?”


보쿠토의 싫다는 단호한 대답에 아카아시는 별 말 없이 보쿠토에게 안겨 있었다. 식장 직원이 보쿠토에게 다가와 이제 가야할 시간이라고 얘기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에 기대고 있었다.


“그럼 갈게, 아카아시.”

“…잘 하세요. 축하해요.”


아카아시는 손을 흔들며 제게 뒷모습을 보이는 이를 배웅했다. 눈앞에 보쿠토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때에도 아카아시는 계속 손을 흔들었다. 식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들리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힘없이 손을 떨구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아카아시의 최선이었다.


아카아시는 전 날까지도 계속 고민을 했다. 나흘이 걸릴 일을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3일째 밤에 모두 끝냈다. 내일 첫 차를 타고 움직인다면 식이 시작하는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건 아카아시의 선택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사랑했다. 비록 저와 함께하는 삶이 아니더라도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만약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결혼식을 가지 않는다면, 바보같이 착한 보쿠토는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을 것이 분명했다. 오지 않은 아카아시를 탓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이후 제 결혼식 날을 떠올릴 때마다 아카아시가 오지 않은 이유를 추측하며 찝찝해 할 것이 뻔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럴 것이다.


아카아시는 자신을 사랑하는 보쿠토가 미웠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그 미워하는 감정마저도 사랑했다. 10년의 세월은 길었다. 이런 감정이 들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결혼식에 가기로 했다. 그의 러브스토리는 최고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원했다. 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보쿠토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카아시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아직 나를 사랑한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식장 바닥에 주저앉아 보쿠토가 떠나간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이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제가 발을 디딜 틈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아시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카아시의 정갈한 구두소리가 고요한 회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

오랜만에 쓴 글이라.. 조금 어색한 감이 있을수도 있지만, 재밌게 읽으셨다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큐 / 트위터 @jw81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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