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세라면 금황궁도 사흘안에 무너지겠네."

"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흑선이 중얼거리자 금령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외쳤다. 

"...어떻게든 정체를 숨기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아니면, 귀계에서도 힘을 쓸 수 있는 신이라거나..."

소요가 의문을 제기하자 홍연이 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정체를 숨기고 들어간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다. 우리는 심장이 뛰고 있으니 죽은 척 위장을 할 수도 없고, 무슨 수를 잘 써도 평범한 인간 쯤으로 보일 뿐인데 만약 발각된다면 놈들에게 산 채로 먹히게 될 테지." 

완전히 궁지에 몰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이미 귀계로 흘러갔다 파악되는 은류가 살아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허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남는 선택지는 천계의 멸망, 아니면 백호신과 싸워 그를 봉인시키는 두 가지의 방향일 뿐일 것이다. 어느 쪽이던 사라진 은류를 찾는 것보다 배로 고생하게 되는 결과가 아닌가.

"뭐... 귀계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걱정이 몰아치는 가운데 청단이 중얼거리자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뭔데요?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요."

금령이 재촉했다.

"전부 잊고 있었나? 나와 황하, 그리고 흑선은 애초부터 신과는 다른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나 귀신은 아니야. 나참, 우리의 본 모습은 원래 태산보다 큰 용이라고. 용족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신통력을 사용할 수 있지. 워낙 신성한 일족이니 당연한 일이다만."

"뭐야?! 왜 여태껏 말을 안 했어?! 그렇다면 네가 가면 되는 일이 아니냐!"

홍연이 청단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내가 힘을 쓸 수 있었다면 당연히 먼저 나섰겠지. 아니,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귀계로 쳐들어가 모든 것을 도륙 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청룡신이고, 나의 신통력은 모두 청룡궁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귀계에선 힘을 쓸 수 없다."

청단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비통한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 둘은 어때?"

금령이 황하와 흑선을 보며 물었다.

"...난 천계에서 벗어날 수 없어. 벗어난다고 해도 한 시진이 한계야. 그 후로는 강제로 송환되어 버리니 도움이 될 리가 없지."

"....."

침착하게 말하는 황하와는 달리 흑선은 무섭게 표정을 구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화가 난 백호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에 금령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구태여 답을 듣지 않아도 이는 완벽하게 싫다는 신호였다. 애초에 은류와 흑선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구출 임무를 맡기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고, 흑선도 끝까지 거절을 해 보일 것이다. 금령은 일찍이 포기하고 너무 화를 내지 말라며 흑선을 다독였다.

"주작궁과 백호궁... 청룡궁에도 보좌를 하는 용이 있을 텐데."

소요가 말했다.

"아니... 걔도 도움이 안될 텐데, 100년 넘게 처리해오던 일이 모래바람에 싹 날아가서 불을 지르려는 걸 말리고 오는 길이다."

홍연이 대답했다. 이 자리에 없는 적룡을 떠올린 듯 고개를 저어 보였는데, 확실히 성격이 더럽다 소문이 난 적룡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인 데다 날아간 일을 다시 처리해야 하므로 이 일에 불려오기엔 맞지 않는 이인 듯 싶었다.

"백호궁의 백룡은 태풍이 심해진 이후로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연락이 닿는다 해도 그의 성격상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설 리 없을 테고, 설령 천계가 멸망한다 해도 그 순간까지 배 터지도록 웃으며 온갖 감상평을 날릴 자니까."

황하가 백룡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 령영도 가기 싫어할 테지. 착한 아이지만 이런 일에는 크게 맞지 않아. 며칠 전 내가 무리하게 일을 시키는 바람에 몸져누운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은류와 그리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령영은 청단을 보좌하는 청룡의 이름이었다. 청단이 말하자 금령이 이어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대제는 천계에서의 입지가 너무 좁죠. 입지가 좁아 터진 것도 모자라 미움을 받고 있으니 이런 난리 통에도 그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하나 없네요. 사실 전 지금 이 상황도 기적같아요. 아무리 천계가 망할 위기라고는 해도 예전 같았으면 대제에게 관심 하나 주는 신이 없었을 테니..."

"....만천성은?"

"!!!!"

소요가 가볍게 내뱉은 말에 청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반쪽짜리 용이긴 하나, 그 또한 실력이 아주 훌륭하다! 실력은 물론이고 타고난 힘마저 따라올 자가 없으니 귀계로 향한다 해도 귀신들을 박살 내면 박살 냈지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뭐? 만천성? 설마 그 제운사의... 아니, 제정신이에요? 그런 성격 나쁜 사람한테 이런 부탁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요?"

금령의 말에 소요가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성격이 까칠하긴 했으나 그렇게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무나도 예민한 반응에 의문이 차올랐다. 만천성은 실제로 소요를 위한 마차도 불러주었고, 그가 가르쳤다던 제자들은 모두 심성이 고와 사흘간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비록 귀신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곤 하지만 결코 사악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지금 이런 상황엔 그의 유일한 벗이라는 충사가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테지.

"아니... 확실히 말을 꺼내 볼 가치는 있다. 내 동생은 은류와 사이가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어. 부탁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거야. 홍연! 전령조를 좀 불러다오!"

청단이 말하자 홍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이윽고 작은 종달새와도 같이 생긴 붉은색의 불새가 나타나 홍연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전령조는 홍연만이 가지고 있는 특기로 작은 부리에 쪽지를 물려주면 일각이 채 되지 않는 빠른 순간에 원하는 상대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청단은 직접 찾아가 만천성의 얼굴을 보는 대신, 전령조를 통해 소식을 전하려는 듯 붓과 종이를 꺼내 손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천성아, 천계가 망하게 생겼다.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심하게 간략한 문장이었다. 허나 금황궁의 있는 이들 중 아무도 청단의 글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단은 제가 쓴 글을 한번 본 뒤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흐뭇하게 웃으며 전령조에게 쪽지를 물려주었다. 전령조는 작은 불꽃을 휘날리며 공중에서 두어번 돌아 사라졌는데, 답장이 돌아온 것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제대로 된 답을 받은 건지도 의심 될 만큼 순식간에 돌아온 전령조는 어쩐지 파들파들 떨며 책상에 쪽지를 내려놓았고, 청단은 좋은 답이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에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종이를 힘차게 펼쳤다.

[경 축]

"????"

종이를 펼친 모든 이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청단은 다른 답장이 없는지 종이를 몇 번이고 뒤집어 본 후, 전령조를 추궁했으나 가녀리고 작은 불새는 억울하게 삑삑거릴 뿐 이외의 다른 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설마 천계가 망하게 생겼다는 것을 축하한다는 것인가. 몹시 생략되어 있었지만 온갖 축하가 담긴 듯한 짧은 단어에 소요는 작은 감탄을 내보였다. 하지만 청단은 이런 답장이 온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다시금 심기일전해 붓을 잡은 그는 다급한 마음을 담아 진중하게 글을 써보였다.

[천성아, 이 형을 좀 도와다오. 너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청단은 다시금 전령조를 통해 쪽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일각이 좀 넘는 시간이 걸려 답장이 왔다.

[척추 뽑아먹히고 죽어라.]

"...."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진심을 담았으나 더 심해진 대답에 쪽지를 본 모든 이들은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청단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싫은가보다..."

"그게 아니잖아! 앞뒤 이야기를 다 잘라먹고 본론만을 말하니 누가 좋아하겠느냐!" 

홍연이 성을 내며 소요에게 종이와 붓을 내밀었다. 

"네가 대신 쓰거라! 적어도 저 무식한 놈 보다는 낫겠지!"

청단의 글솜씨를 뼈저리게 느낀 홍연의 선택이었다. 소요는 무덤덤하게 붓과 종이를 받아들였다. 워낙 천계를 싫어한다 들었으니 다시 글을 써봐야 무슨 소용일지 의문이 들었으나 홍연은 소요의 한참 윗 선배와도 같은 사람이었으므로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생명신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제대로 된 정황을 알 수는 없으나 귀계로 흘러들어간 것이라 판단되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반려를 곁에 두지 못한 백호신이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으니 천계의 존망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현재 위기에 몰린 신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대밖에 없으니 도움을 간곡히 요청합니다.]

적어도 청단 따위가 쓴 것 보다는 훨씬 나은 글에 금령과 홍연, 흑선이 박수를 쳤다. 전령조를 통해 다시금 쪽지를 보내자 이번엔 반 시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이 걸려 답이 왔다. 

[제운사로 와.]

몹시 짧기는 했으나 이번엔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왔다! 청단은 왜 소요에게만 상냥한 답이 오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만천성의 답장을 들여다봤으나 그저 하얀 종이에 그 답이 적혀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어. 일이 어떻게 풀릴지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생명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면 백호신의 기분도 나아지겠지." 

"그렇다면 빨리 소식을 알려. 더는 몰아치는 태풍 속에 갇혀있기 싫으니까. 아직까지 입안에 모래가 가득한 기분이군..."

황하의 말에 흑선이 까칠하게 대답했다. 청단은 다시금 붓을 들어 백호에게 보낼 쪽지를 적었다.

[네 반려 찾는걸 도와주마. 금황궁으로 와라.]

전령조는 이번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령조가 백호에게로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섭게 창틀을 때리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는 백호가 청단의 쪽지를 보고 분노를 누그러뜨렸다는 의미였다. 까끌까끌하며 허공을 떠돌던 모래도 잠잠하게 바닥으로 가라앉았으며, 한눈에 봐도 날씨가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작은 햇빛이 돌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변화에 흑선은 입꼬리가 꿈틀거렸는데, 다시 현무궁으로 돌아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기쁜 것 같았다. 

쾅-!!!

모두가 창밖을 바라보며 조금씩 맑아지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할 때, 금령의 거처에 달려있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아니, 사실은 이미 반쯤 부서졌다고 여기는 것이 맞겠지만 의외로 상식적인 행동에 금령은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전령조에게 쪽지를 받은 우백호가 한달음에 금황궁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원래라면 지붕을 뚫고 들어오거나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리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문을 열어 보이다니? 심지어 은류도 없는 상황에 이리도 제정신을 조절한 것은 칭찬해야 마땅할 일이다. 백호는 너덜거리는 문짝을 움켜잡으며 물었다.

"나도 은류를 못 찾았는데, 너희가 어떻게 돕게."

반려인 나도 실마리를 못 잡았는데, 너희 같은 놈들이 어떻게 행방을 알았느냐. 와 같은 말투였다. 청단은 넉살 좋게 웃으며 백호를 끌어다 의자에 앉혔다.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나 적어도 지금의 백호는 모두를 쳐서 죽일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금령은 이에 안심한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하와 흑선의 뒤로 숨어 보였다. 

청단과 홍연은 백호를 붙잡아두고 지금까지 나온 추측을 줄줄이 읊었다.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전부 들은 백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은류가 내 능력 밖을 벗어난 적은 없었지. 귀계... 로 통했다는 이야기는 꽤 신빙성이 있군."

"그렇지! 그럼 이제 내 동생한테 가서 그걸 도와달라..."

"하지만 귀계에서도 은류를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백호의 물음에 모든 이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귀계에도 은류가 없다면 죽었다는 소리 밖에 더 되겠는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백호의 면전에 내뱉었다간 유일하게 멀쩡한 금황궁은 가루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한 사람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청단 또한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것인지 은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에둘러 말하며 그를 살살 달랬다. 

"흠,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그를 꼭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선 내가 천성에게 가서 일을 도와달라 할 테니..."

"나도 간다."

백호가 청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 넌 반려가 없는 몸이 아닌가. 인간계로 향하는 건..."

"....."

백호가 인상을 찌푸리자 홍연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에이! 뭘 그런 것을 따지고 그러느냐! 반려가 없어도 인간계로 향할 수는 있으니 그냥 다녀오거라! 다른 곳도 아니고 청단의 동생이 있는 곳인데 위험한 일이 벌어질 일도 없겠지! 게다가, 만천성은 청단이 아니라 소요 너를 부른 것이니 셋이 함께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

확실히 청단과 만천성이 싸우지만 않는다면 제운사에서 문제가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나 벌어질지도 모를 싸움을 막기 위해 소요는 청단을 떼어두고 가고 싶었으나, 지금의 사방신들 중 확실한 반려가 있는 존재는 청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함께 걸음을 하고 싶어 하는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저 대책을 마련하러 가는 것 뿐이니 별일 없겠죠. 이번엔 무탈하게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날씨도 맑아졌으니 저는 현무궁에서 그간 밀린 일들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소요는 지금껏 인간계에 발을 들인 횟수가 단 두 번이었는데, 두 번 모두 연홍서를 마주쳤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흑선이 고개를 숙이며 격려의 말을 보냈다. 

"다녀오거라! 이번에는 돌아올 때 맛있는 것도 좀 사 오고 말이다!"

늘상 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홍연이 말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찬가지 신세인 황하가 말했다.

"뭐?! 나는 왜 안데려가요?! 나도 갈래요!"

금령이 흑선의 뒤에서 불쑥 나오며 펄쩍 뛰었지만 흑선은 금령의 어깨를 짓누르며 웃어 보였다.

"어딜 가, 너는 나랑 일 해야지. 현무궁 지붕이 뒤집히면서 날아간 일들은 모두 네가 부탁했던 것들이니 같이 수습하는 게 옳지 않겠어?"

"뭐라고?! 이건 말도 안 돼! 현무! 저도...!"

금령이 발버둥 쳤지만 소요는 죽은 눈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포기하고 일에 집중 하라는 뜻이었다. 금령은 이번에도 흑선에게 일을 모두 맡긴 채 도망을 갈 심산이었으나 이미 천계에 남을 사람과 제운사로 내려갈 사람이 반씩 나누어져 있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인 듯싶었다.

"안돼에에에에에에!!!!"

금령의 기나긴 외침을 뒤로 하고 백호와 소요, 청단과 풍강은 금황궁을 나와 제운사로 향했다.

***

"늦었군."

네 사람이 제운사의 뒤뜰에 내려앉자 만천성이 말했다. 땅에서부터 시작해 제운사의 계단을 전부 오르기엔 시간이 없었으므로 바로 하늘에서 뛰어내려 목적지에 안착한 것이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아이들이 수련하고 있는 틈을 타 몰래 걸음을 한 것이었는데, 만천성은 이를 귀신같이 알고는 네 사람이 착지할 곳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천성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내가 분명히 이 망할 자식은 떼어놓고 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청단의 이야기에 만천성이 소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전에 소요가 제운사를 떠날 때 검연이 전했던 말이었다. 소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사방신 중 반려와 함께 있는 이가 청룡 밖에 없었습니다."

"흥."

소요의 말에 만천성이 짧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만천성은 날카롭게 눈을 떠 보이며 백호를 응시하기 시작했는데, 이 뒤로 이어진 말은 청단과 풍강, 그리고 소요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 정도로 기가 세고 놀라운 것이었다.

"넌 나이가 몇인데 네 반려 하나 챙기지 못하고 이 사단을 만들어? 감정 조절도 못해서 천계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너희들이 사는 곳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

백호는 표정을 무섭게 구겼지만 만천성은 백호의 표정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제야 소요는 청단과 만천성이 피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살기어린 백호의 표정을 보고 싸우자며 덤벼들던 청단과 팔짱을 끼고 무심하게 눈을 깜빡이는 만천성. 세상 어딜 가도 이런 담력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표정을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잡을 것 같군.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만천성이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백호는 주먹을 꽉 쥐고 참아 보였다. 부들대는 모양새는 정말이지 그 거대한 키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무엇이든 앞뒤 분간하지 않고 화가 난 듯 행동해 보이는 백호였지만 지금 여기서 만천성과 싸우게 되면 도움을 줄 유일한 존재가 사라진다. 백호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백호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무능하게 화만 낼 줄 알았던 너만 할까...."

만천성은 팔짱을 낀 채 받아쳤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 풍강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고, 청단과 소요는 한숨을 쉬며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싸움이 나겠군. 한 판 붙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하니 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청단이 불안해하는 풍강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항상 싸움만을 찾던 청단은 이상하게 만천성의 앞에선 신중하고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 조금이나마 형 된 사람의 면모를 보이려는 것인지 의젓한 행동에 소요는 눈을 깜빡일 수 밖에 없었다. 청단이 얌전하다고 여겨질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너희를 직접 돕진 않을 거다. 그 대신 도와준다는 이들을 몇 불렀으니... 알아서 잘해봐."

만천성이 백호에게서 등을 돌리며 말했다. 

"??? 네가 아니면 대체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는 거냐."

"...."

만천성은 청단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소요가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설마 충사... 독각은 아니겠지요."

"그 녀석에 대해서 좀 알아챈 모양이군, 유감이지만 아니야."

청단의 물음을 무시하던 만천성은 소요의 질문에는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다.

"직접 나서지 않으려는 이유는 뭡니까."

"...열흘 후면 검연의 생일인데 그때 제운사를 비울 수는 없으니까."

결국은 애제자의 생일을 직접 축하해주는 것을 놓칠 수 없어 대신 도와줄 사람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체 무엇을 얼마나 거창하게 준비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만천성다운 이유였다. 새침하고 만사에 관심 없는 고양이인 척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제자를 사랑한다. 소요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할 뿐이었다.

만천성이 네 사람을 데리고 앞서 걸음을 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평소 길을 잘 찾지 못하던 만천성은 바닥에 붙여진 표식을 보고 모처럼 길을 헤매지 않은 채 적당히 목적지를 찾았다. 제 스승을 위해 표식을 꾸며놓은 아이들은 전부 수련 도중인 것인지 응접실로 향하는 도중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째서인지 복도는 썰렁하고 음산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왜인지 소요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뒷목이 쿡쿡 쑤시며 아려오는 느낌에 온 몸이 쑤실 지경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소요를 발견한 청단이 등을 토닥여주며 괜찮냐 물었지만 딱히 설명할 길이 없는 불안감이었기에 소요는 고개를 슬그머니 저을 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왔어?"

만천성이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음색이 귓가를 때렸다. 앞서 응접실에 걸음을 내디딘 만천성과는 달리, 소요는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뒤를 이어 걸어오던 청단과 백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칠흑 같은 검은 단을 덧댄 신발, 그 위로 팔락이는 붉은 색의 도포, 금실을 박은 무늬와 고귀함이 흘러넘치는 몸선은 비단 촉금에 휘감겨 수려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붉은 비단의 위를 덮은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은, 마치 핏빛의 강을 실로 만들어 굽이쳐 놓은 것 마냥 온갖 윤기를 낸다. 온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커다란 호박색의 보석을 박아넣은 눈동자는 또 어떻던가, 동공의 결이 보일 것 마냥 투명한 노란빛은 소요가 가장 마주하기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소요는 그제서야 제 뒷목이 아려오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운사의 응접실 한 켠에 앉아 있는 것은, 여유로운 웃음으로 턱을 괴고 앉아있는 붉은 빛의 염왕이었다. 오랜 밤 소요의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바로 그 파렴치한 존재!

"또 만났네요. 현무신."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응접실에 자리를 잡은 연홍서는 눈을 휘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소요에게 말했다. 


홍소백류만 씁니다. 가뭄에 콩나는 연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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