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가득 담긴 잔에 에스프레소 샷과 우유를 붓는다. 코스터와 냅킨을 미리 올려둔 트레이에 물기가 묻지 않도록 놓고 진동벨을 누른다. 조급하지 않게 주변 정리를 하는 동안, 고객이 오지 않는다면 메뉴를 크게 말해 찾아가도록 한다. 아이스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안 오면 더 크게.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 목이 쉬도록 몇 번씩 부를 필요까진 없다.


“감사합니다.”


 애초에 이 고객님은 내내 카운터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부르지 않아도 되지만.


“하아.”

“왜 한숨 쉬어요.”

“맛있게 드세요.”

“얼버무리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고객님.”

“아-니-요.”


 생글생글거리는 얼굴이 얄밉다 못해 딱 한 번만 꼬집어 보고 싶은 마음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트레이를 들어 자리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웃는 그에게서 고개를 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정말 질리지도 않나. 자연스럽게 설거지로 이어지던 몸이 굳고 어깨가 늘어졌다. 이래도 괜찮을까. 툭툭 수돗물이 차갑게 튀었다.



 처음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에 속했다. 번화가에서 버스로 두 정류장 정도 떨어진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가게이다 보니 단골 장사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회전율이 낮은 가게의 점장으로 근무하면서, 오는 손님은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의 도서 모임과 금요일 오후의 아파트 반창회 단체 주문. 그리고 평일과 주말로 나누어지는 시간대 사람들. 패턴에 익숙해지는 건 금방이었고 그중에 그가 있었다. 주말 오후에 라떼 한 잔을 시켜놓고 조용히 공부하고 가는 얌전한 학생. 그게 첫인상이었다.

 아파트 단지와 가깝다곤 해도 학원이 거의 없는 동네여서 학생의 출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10대는커녕 20대까지도 방학이나 되어야 한 둘쯤 보일 만큼 고객 연령대가 높아, 스무디류 메뉴는 전부 빼고 건강음료로 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그가 왔다.


 그러니 나름대로 생소한 고객이었다. 혹시나 제 또래를 데려와 주진 않을까. 연령층이 고정된 건 안정감이 있다곤 해도 그만큼 새로운 고객을 끌어오지 못한다는 뜻인지라 그의 등장은 약간의 기대를 걸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리 잘 풀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하다는 지점에선 고마운 손님이었다. 새로운 레시피나 시험 삼아 만들어 본 디저트 류의 시식을 해주기도 하고, 전혀 깨닫지 못했던 가게의 단점을 콕 짚어주어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동료도 아닌데 일터에서 만나는 친구나 다름없게 된 게 잘못이었을까. 언제나처럼 가게에 들어온 날, 편지를 받았다. 고백이었다. 손으로 빼곡하게 적어 담은 마음은 절대 작지 않았다. 열아홉 살 아이에게 고백 편지를 받고 말았다. 그것도 스물다섯의 나이에.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의식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주변 친구들이 연애하며 크고 작은 고민을 나눌 때도 오롯이 자신에게만 매달렸다. 남들과는 다른 나. 그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책과 영화를 밥 대신 씹어 삼키며 바깥으로 쏘다니곤 했다. 인터넷 카페 따위에 가입해 여러 사람을 만나는 재미에 빠진 적도 있지만, 연애로 이어지진 않았다. 시시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집안 사정 핑계를 대며 뒷걸음질 치기 일쑤였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 여유라곤 없는 집의 외동으로 태어났으니 할 것도 많았고, 받는 압박도 컸다. 공부뿐만 아니라 집안일도 해야 하고 자기 앞가림도 철저히, 야무지게 해내는 ‘예쁜 착한 딸’ 그게 내 역할이었으니까. 연출자가 아닌 주제에 감히 이러쿵저러쿵 반기를 들지 못했다. 조용히, 조용히 기회를 기다릴 뿐이었다. 스무 살이 되면 내가 메가폰을 잡겠노라.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댔다. 대학교는 뒷전이었다. 그런 사치는 나중에 부려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돈이나 벌자. 앞가림 잘해야지. 학교에서 연계해 주는 기업 입사에도 관심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성적을 전교권으로 유지해야 하고 그럼 돈을 못 번다. 현실적으로 살자. 통장 세 개를 만들어 하나씩 채워나갔다.

 하나는 독립 자금, 하나는 여행 자금. 그리고 하나는 언제 무슨 상황이 되든 피해 받지 않을 정도의 액수만 넣었다. 졸업 직전이 되자 조금씩 기울던 가세가 더욱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세 번째 통장에서 뺀 전액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혹시나 발목이라도 잡힐까 두려워 일언반구도 듣지 않고 미리 싸둔 짐을 들고 나섰다. 일하는 곳에서 만난 선배 같은 언니들에게 배운 대로 통장을 더 여러 개로 쪼개고, 집을 구했다. 연락이 더는 오지 않을 때쯤 전화번호도 바꿨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되었다.




 그 뒤로 5년. 이력서를 넣기만 해도 아르바이트 정도는 바로 뽑힐 정도의 경력을 쌓다, 가게 하나를 맡지 않겠냐는 제안에 여기까지 왔다. 어설픈 연애도 해봤고, 짧은 동거도 했다. 하룻밤 즐기려다 만난 상대와 구질구질한 이별도 했다. 로맨스 코미디와 서스펜스, 인디 독립영화까지. 각종 분야를 다 섭렵해 본 인생이었지만 마음이 그득한 편지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당연히 거절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한참인, 그것도 열아홉인 상대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스무 살이었어도 거절했을 터다. 이렇게 썩어 문드러진 사람 좋아하지 말라고 꼰대처럼 설교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편지 속 진심이 무거웠다. 고작 종이 한 장인데 가슴엔 커다란 바위가 앉은 듯했다.


 고작 나 따위가 감히 자격이나 있을까, 그런 죄책감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편지 말미엔 언제나처럼 주말에 올 테니 그때 답변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그러니까 고백이 끝이 아니라 다음까지 생각한 거지? 며칠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기어이 컵 하나를 깨트리고 말았다. 위장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대단할 구석도 하나 없고, 다정하지도 못한-네가 본 건 다 영업용 스마일이었어!-내가 너무 좋다는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무거웠다. 미안해서 잠도 설쳤다.


 아무렇게나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오래된 편지지를 채우다 말고 전부 다 구기고 나서야 조금 후련했다. 그래, 이것도 다 경험이 될 거야. 알바 한창 할 때 그릇 왕창 깼던 기억 덕분에 설거지하면서 손 안 다치는 요령도 생겼잖아. 맞아. 그랬지. 이제는 아무리 무거운 그릇을 깨트려도 피는 안 보잖아.

 구겨진 종이를 모아 버리고 새 편지지를 꺼내 단출하게 적었다. 명백한 거절을 담은 봉투를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온 아이에게 건네주며 짧게 사과했다.



 아이는 그러고도 매번 왔다.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주말이 아니라 평일의 낮과 밤이 되어서도 왔다. 산뜻한 얼굴로 가게에 들어와선 불편한 기색 하나 없는 게 다행을 넘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나보다 더 어른 같네. 그렇게 전전긍긍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쯤. 나는 또 조용히 시작했던 시시한 연애를 정리하고 있었다.


“점장님, 1월 1일에 뭐 하세요?”


 이제 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나이와 외모를 한 그가 목도리를 풀어내고 카운터 앞에서 싱긋 웃었다. 새삼 새해가 가깝게 느껴졌다. 정말 올해가 끝나는 구나, 싶었다. 인사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음료를 준비했다. 이렇게 추울 땐 언제나 핫초코다.


“음, 글쎄요. 원래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하나 씨는요?”

“저 매년 보신각 타종 보러가요.”

“대단하다. 힘들지 않아요?”

“익숙한걸요. 재밌기도 하고요. 그런데 오늘도 가게가 조용하네요.”

“당분간은 더 그럴 거예요.”


 가게의 점장과 단골인 관계인데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하다니. 이상한 일임에도 나는 늘 모르는 척 계량컵에 우유를 붓는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년이면 스물 한 살 되는 거죠?”

“뭐예요, 갑자기.”

“세월 빠르다 싶어서. 교복 입고 왔던 게 어제 같은데. 웃기죠. 정작 내 나이는 생각도 안 하고.”

“꼭 우리 교수님처럼 말하네요. 점장님도 같은 이십 대면서.”

“아유. 이십대 초반이랑 중후반이 같나요.”


 작게 웃으며 결제를 기다리는데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 세상에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낯선 얼굴. 처음 보는 눈빛. 나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하나 씨?”

“저 지금도 점장님 좋아해요.”


 세상이 멀어져갔다. 핫초코 위에 올려질 마시멜로가 타들어 가 눅진히 녹아들 동안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아온 건지 그뒤로 수도없이 고백을 받았다. 좋아해요. 저랑 만나요. 저 진심인데. 역시 우리 점장님이 최고다. 우리 이렇게 잘 맞는데 그냥 사귀는 게 어때요. 툭툭 전해지는 마음은 절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진 듯도 했다. 나이 차이와 환경 따위를 들먹여도 그는 꿋꿋했다.


“이제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고객님.”

“그럼 말이라도 편하게 해주면 안 돼요?”

“지금도 편해요.”

“어휴.”


 언제까지 이런 입씨름을 하게 될까. 몸도 섞고 마음도 섞는 친구가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상황과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성격답게 이번에도 정확히 정곡이라는 과녁에 꽂히고 말았다. 그 뒤론, 지금처럼 구멍이 난 양심으로 흘러나온 말이 참방참방 손을 건드리곤 한다.


“나처럼 구제 불능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느리게 깜빡인 눈이 휘어진다.


“그러게요.”

“….”

“방금 거 조금 먹혔다, 그쵸?”

“늦었어요. 그만 가요.”

“당분간은 오기 힘든데.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마감 도와드릴게요.”

“무슨. 가서 과제나 하세요.”


 아직 개강도 안 했는데, 무슨 과제가 있어요. 늘어지는 걸 떠밀다시피 내보낸 뒤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지막 잔을 씻어낸 뒤 간판 불도 껐다. 마감 알바생이 미리 해둔 덕에 청소도 하지 않는데 자꾸만 손이 멎어 평소보다 늦게 문을 잠그게 됐다.



 자전거의 페달을 꾹꾹 밟아 돌리며 집으로 간다. 왜 거절하는데? 캄캄해진 길 위로 또 그 말이 떠올랐다. 거기에 대고 무슨 대답을 했더라. 거절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를 들었던 것 같다. 아마도. 뿌연 입김이 퍼지고, 목도리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리다. 겨울의 밤. 무수하게 지나다닌 길 위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

 나는 정말 왜 거절하는 걸까. 시간만 끌어대는 건 당연히 좋지 않을 것이다. 상대에게 괜한 기대를 품도록 하는 건 분명 나쁘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그 정도의 상식과 인정은 가진 채로 살아왔다. 그런데 왜 자꾸만. 왜.



 나조차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보다 더 상대에게 실례인 건 없겠지.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목도리 매무새를 다듬고 버릇처럼 장갑 낀 손을 마주친 다음 다시 페달을 밟았다. 내일이든 모레든, 다음에 만나면 정식으로 거절하자. 사과도 제대로 하자.

 이런 이상하고 애매한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순 없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귀 끝이 시려 와, 귀가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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