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차, 7일차


 평소보단 느긋하게 준비하고 나서 몽마르트 언덕으로 갔다. 검색하면서 각오는 했지만 오르막길과 계단이 이어져서 힘든 길이었다. 어제 밤에 잘 자고 새벽에도 뒹굴거리며 누워있다가 천천히 나오긴 했지만 다리 피로가 완전히 풀리진 않아서 으으아악 주글것 같다 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역시 어제 노틀담 종탑을 포기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거기를 올라갔다간 점심까지 침대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른다.


 올라가는 동안엔 구글맵이 안내한 언덕 뒷 길을 써서 악명높은 소위 사인단이나 팔찌단을 만나진 않았다. 사인단은 공익적인 목적으로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하며 정신을 빼놓은 사이에 소매치기하거나, 아니면 신분증을 제시해달라고 해서 여권과 지갑의 위치를 노출시키게 하면 그 사이 동료들이 소매치기를 하도록 만드는 애들이고, 팔찌단은 처음엔 공짜라고 하거나 혹은 아무 말도 없이 손목에다가 자르지 않으면 뺄 수 없는 팔찌를 채워둔 뒤 팔찌값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꼭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유럽여행 중에는 지갑 위치를 노출할 때는 늘 주의해야한다고 한다. 주변 소매치기에게 바로 이 가방! 여기를 소매치기 하시면 됩니다! 하고 정보를 흘리는 모양새가 돼서.


 쉬어가며 계단을 오르다보니 언덕 위로 하얀 샤크레쾨르 대성당이 보였다. 사진 찍고 계속 계단을 올라가서 도착했다. 


 입장 대기자는 서너명 뿐이라 성당엔 금방 들어갔다. 나보다 앞서 들어간 할아버지가 수반에 손을 씻길래 나도 따라해봤다. 실제로 신도들이 있는 곳이라 주위가 좀 시끄러워지면 직원이 정숙하라고 말하며 다녔다. 성당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라 천천히 눈으로만 구경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기억이 좀 흐릿한 감이 있다. 이래서 여행지에선 사진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지 싶다. 금박 입힌 성화 위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이 들어온 모습이 멋져서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아까웠다. 동그란 돔 안 쪽을 장식한 천장화에도 금박이 입혀져있었다. 


 성당 앞 광장으로 나오니 파리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사진도 찍고 계단을 조금 내려가니 할아버지 한 분이 하프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하프치곤 작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앉은 키만 했다. 여기서 하프를 보게 될 줄은 당연히 몰랐다. 잔잔하고 편안하게 연주하시길래 앉아서 듣다가 팁 박스에 동전도 넣었다. 나도 악기 연습 열심히 해서 저 나이엔 길거리 버스킹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 연주자가 돼야하는데... 


 하프 연주를 듣고 있는데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숙소 주위 골목에 경찰이 깔려서 출입을 통제한다고 했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가서 물어보니 용의자 어쩌구할 뿐 자세한 건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원래 숙소로 돌아가 쉬다가 몽파르나스 타워로 갈 예정이었는데 뭘할까 고민됐다. 


 하프 연주를 더 듣고 어디로든 일단 걸어다녀보자, 하고 계단을 또 마저 내려가다가 사인단과 팔찌단을 만났다. 계단이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 지점에서 양쪽을 하나씩 마크하고 있었다. 이미 관광객들은 얘네가 어떤 애들인지 알고 있는지 말거는 걸 무시하고 재빠르게 지나쳐갔다.


 계단 아랫쪽에는 싸게 기념품들(대체로 I LOVE PARIS라는 문구가 들어가는)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뭐 사고 싶은 게 없나 기웃거려봤지만 그다지 끌리는 게 없었다. 그냥 근처 크레페 집에 들어가서 오렌지맛 술을 넣은 크레페와 커피를 주문했다. 프랑스 카페는 물을 적게 탄 아메리카노 같은 커피를 파는데 이 정도 농도가 더 맘에 든다. 크레페는 언뜻 봐선 정말 별거 없이 맨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나온 것처럼 생겨서 좀 당황했었다. 하지만 먹으면 오렌지와 알코올향이 화악 코를 찌르고 커다란 설탕 입자를 씹는 느낌과 단 맛이 함께 느껴져서 맛있었다. 완전히 알콜이 날아간 건 아니라 살짝 술기운 오르는 기분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아예 새로운 곳으로 갈까, 아니면 갔던 곳에 한 번 더 가볼까 고민하다가, 비가 내려서 제대로 쉬지 못했던 튈르히 정원에 다시 가서 멍뎅하게 쉬다오기로 했다. 크레페를 다 먹고 메르시라고 인사하자 직원들이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다. 좀 웃긴 기분이었다.


 튈르히 정원은 날씨가 좋으니 정말 쉬기 좋은 곳이었다. 여기저기 벤치와 의자들이 놓여있는데, 의자들 등받이가 반쯤 누우라는 듯 뒤로 젖혀져있는 게 정말 맘에 들었다. 여기에 늘어져 앉아서 햇살 받고 있으면 무지 기분이 좋았다. 걷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있다가, 앉아서 E-book을 좀 읽다가, 다시 일어나서 걷다가 또 앉다가 함. 그러다보니 문득 오르세가 생각났고 잠깐 갈등하다가 또 가기로 했다. 이쯤 되면 내 영혼은 오르세 박물관에 있다.


 다리를 건너는 길에 앉아있던 남자가 날 불렀는데 그냥 직감이라 확신할 순 없지만 용건이 있다기보단 눈 앞에 동양인 여자 지나가니까 불러보는 느낌이었다. 일단 돌아보니까 프랑스어로 뭔가 말하다가 나 프랑스어 못한다니까 걍 인사함. 뭐지.

 

 금방 도착한 오르세는 놀랍도록 입장 줄이 짧아서 금방 들어가 미술품들을 또 보고 이번엔 나중에 조각상들을 빙글빙글 자세히 보는데 중점을 두고 구경했다. 다시 봐도 멋졌다.


 해질 쯤 몽파르나스 타워로 야경을 보러갔다. 구글맵이 알려주는 지하철 입구로 갔더니 지상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 밖에 없어서 근방에 다른 입구가 없나 찾아 헤맸다. 에스컬레이터 역주행은 권장할  게 아니란 걸 구글맵은 알아야한다. 


 몽파르나스 타워 고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한 쪽에 있는 조그만 화면이 몇 초만에 엘리베이터가 56층까지 주파하는지 카운트하고 있었다. 올라갈 때는 기억 안 나지만 내려갈 땐 40초 안 되게 걸렸던 것 같다. 조금 무서웠다. 56층에 도착해서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무슨 파노라마 어쩌구해서 80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를 가볍게 봤다. 그러고보니 몽파르나스 타워는 굉장히 고층인데, 어떻게 파리에서 이런 고층 빌딩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에만 특별 허가라도 났나 싶어서 대충 검색해봤는데 나오지 않았다. 물론 구글에다가 영어로 치면 안 나올 정보가 있겠냐마는 굳이 그렇게까지 힘겹게 알고 싶은 정보는 아니었다.


 돌아오는 시간대가 마침 퇴근시간이라 지옥철을 경험했다. 내 근처에서 인파에 짓눌리고 있던 노부인 한 분이랑 눈이 마주쳤다. 날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지으셨음. 대충 아이고 오늘도 지하철은 이 난리지만 어쩌겠어요? 그냥 그러려니 합시다, 기분 좋은 저녁 되세요. 정도 되는 긴 문장을 함축해놓은 듯한 제스쳐와 미소였다. 나도 저에게 웃어주셔서 고맙구요 오늘도 지하철은 난리지만 힘내시구요 좋은 저녁 보내세요. 라는 뜻을 담아 웃었다. 그렇게 해석됐길 바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숙소에 와서 뻗음. 



 이제 파리에서 보고픈 건 다 봤고 열차 예약한 날도 왔다. 파리를 떠나는 날이었다. 여행 초기 계획 잡을 땐 스위스 베른으로 갈까 했지만 기차 환승도 많고, 좀 더 따뜻한 데로 가고 싶어 다음 목적지는 니스로 잡았다. 같은 나라 안이라고 해도 여섯 시간 가까이 떼제베를 타고 가야했다. 


 사람들이 파리 지하철이 에스컬레이터와 리프트가 잘 돼있다고들 하는데 그건 정말 역 따라 다르다. 샤틀레 역이나 파리북역 같은 역들이야 잘 돼있지만, 내 숙소가 위치한 조그만 역 같은 경우에는 죄다 계단이었다. 힘겹게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자꾸 계단에 캐리어 바퀴가 부딪혔다. 부디 20일만 더 살아있어줬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귀국해 집에 오는 그 순간까지 튼튼했다. 이 자리를 빌어 나와 함께 고생해준 캐리어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파리 리옹역에서 떼제베 플랫폼을 찾아 잠깐 헤맸지만 내가 A4용지 한 장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걸 본 프랑스인이 저 쪽으로 가면 된다며 날 도와줬다. 내 망충한 여행에 늘 관심과 친절을 기울여준 프랑스 국민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해야겠다.

 유레일패스도 개시하고 내가 탈 열차가 온다는 2번 홀로 이동했다. 이 곳의 기차 시스템은 내가 탈 열차가 몇 번 선로에 도착할지 20분 전까지 가르쳐주질 않는 신비주의 시스템에, 플랫폼은 무지막지하게 길었다. 내가 탈 열차칸을 찾는 법도 특이한데, 열차 순서라 1번부터 순차적인게 아니라, 이 숫자는 마구 뒤섞여있고 플랫폼 입구에 이 숫자가 알파벳Y 칸에 정차해있다는 식이다. 아무래도 열차가 붙어있다가, 중간에 행선지에 따라 갈라졌다하다보니 숫자가 마구 뒤섞이는 게 아닐까 추측만 해봤다.


 내가 탈 열차 칸은 저어어어쪽 거의 맨 끝이라 사람들을 헤치고 걸었다. 내 앞에 가는 백인 하나가 담배를 신나게 태우며 걸었고, 인파 때문에 추월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바람이 내 쪽으로 불었다. 유럽에서 정말 많은 간접흡연을 했다. 


 열차에는 짐을 올리는 선반이 열차출입구 근처에 따로 마련돼있었다. 객석 위 짐칸은 작고 좁아서 캐리어를 올릴 수도 없었다. 다들 그냥 선반에 캐리어를 턱턱 올리던데 누가 들고 튀기 딱 좋아보였다. 심지어 내 자리는 열차 출입구랑 한참 멀리 떨어져있는데다가 창가 자리라, 누가 다음 역에서 여유롭게 자기 물건인양 내 캐리어를 들고 하차한들 난 알수조차 없는 자리였다. 다행히 누군가가 열차에서 캐리어를 묶어두는 용도로 자전거 체인 열쇠를 챙기라고 해서 챙겼다. 그 글만 봤을 땐 내 다리에다가 묶어놓기라도 하라는건가, 했는데 그 선반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납득이 됐다.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고 자물쇠를 이용해 선반에 묶었다. 


 마음 편하게 자리에 앉고나니 다들 얼마나 인간을 믿길래 이런 식으로 짐을 보관하는건지 궁금해졌다. 네이버에 떼제베 캐리어 하고 검색했더니 실제로 캐리어 날치기가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 적혀있었다. 다들 인간을 믿는다기보단 자기 캐리어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멍 때리다가 자고 일어나니 열차가 숲을 지나치고 있었다. 창밖으로 끝없이 낙엽숲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산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은 와닿아도 숲에서 길을 잃는다 하면 머리에 음... 하는 생각 밖에 안 들었는데 이젠 숲에서 사람들이 길을 잃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열차가 시속 260을 돌파하자 창문에 묻은 빗방울이 가로로 흐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러고나니 이젠 또 평야지대가 끝없이 나왔다. 지평선 너머까지 평야였다. 한국과는 주어진 환경부터가 다른 나라라는 게 너무 실감이 났다. 


 가끔은 강도 지나가고 또 평야를 보고 하다보니 열차가 주거 지역에 들어섰고 시속 300에 가까웠던 열차도 조금 느려졌다. 그렇게 여섯시간 달려서 니스에 도착했다. 


 민박집 가는 길은 친절하게 설명돼있고 가까워서 찾기 쉬웠다. 트램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가 내가 어벙해보였는지 짧은 영어로나마 나를 도우려고 했다. 필요한 도움은 아니었지만 다음에 나보다 어벙한 여행객을 마주쳤을 때 기분좋게 도우려하길 바라며 내가 내릴 정류장이 몇 정거장 뒤인지 새겨듣는 시늉을 했다. 


 숙소엔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불안한 소음과 함께 움직이는 좁고 특이한 리프트였다. 나 한몸과 캐리어가 측면을 보고 서면 꽉 들어차는 면적에 원하는 층에 도착하면 내가 직접 문을 밀어서 열어야했다. 처음엔 설마 이렇게 생긴게 엘리베이터는 아니었음 좋겠어서 민박에 연락해 물어봤는데 그게 엘리베이터라고 했다. 아무튼 그 날 오후에 보수를 했다고 하니 안전할 거라 믿기로 했고 실제로 내가 체크아웃할 때까지 안전했다. 


 열차에서 과자 쪼가리나 좀 까먹었을 뿐이라,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민박 호스트분에게 가까운 맛집과 메뉴를 추천받고 나섰다. 


 날씨가 선선하길래 야외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걸 후회하게 되는데, 큰 화분으로 구분해놓은 건너편에서 (결론적으로 가게 밖이지만 화분을 사이에 두었을 뿐 결국 내 옆인 곳에서) 현지인 여자 셋이 담배타임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시킨 봉골레 링귀니가 나오기 전엔 사라졌다.

 

 링귀니는 커다란 나무 보울에 담겨 나왔는데 김이 오르는 오일 파스타 면 위에 동그란 조개와 홍합이 한가득 얹혀있었다. 열심히 조개를 까먹었지만 슬슬 배가 부를 쯤에도 조개와 면이 남아있었다. 결국 조개만 까먹기 시작했는데도 조개는 여전히 남아잇었다. 이러다간 점원들이 캐셔 점검을 완료할때까지도 외로운 해달 마냥 조개살을 발라내고 있을 것 같아 조개 정복도 포기했다. 


 다 먹고 돌아오는 길에 구글맵이 입구의 위치를 무시한 길 안내를 하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 구글맵은 에스컬레이터 역주행은 위험하다는 것과 인간은 벽을 뚫고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단 걸 좀 더 신경써야한다. 라고 임시 일지에 썼었는데 알고보니 1호점과 2호점 중 한 곳이 영업을 중단했는데, 그 영업을 중단한 곳으로 나를 안내했던 거였다. 마구 헤매다보니 숙소로 처음 찾아오는 길에 봤던 건물이 나와서 다행히 국제 미아 신세는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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