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의 서브커플인 지혜와 윤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입니다!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넌 잘 지냈어? 이야기는 들었어, 너 이번에 사업 시작한 거 잘 된다며."

"그냥 그래. 요즘 다들 어렵잖아. 너는 그래서 요즘... 뭐해...?"

"놀아. 나 위자료 많이 받았잖아."


지혜의 답에 당황한 인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전업주부로 산 것이 10년이었고, 이혼을 하고 나니 할 일이 없어진 것을 굳이 꼭 짚어 듣고 싶어하기에 말을 한 것이었다. 


"그래...? 아니, 나는 혹시 일하고 싶을까 봐. 그럼 우리 회사 한 번 나와보라고 그런 거지."

"돈 떨어지면 한 번 나갈게. 언제든 가도 괜찮은 거지?"


지혜가 제 손에 들려있던 와인잔을 흔들어 향을 맡았다. 동창 모임에 이런 고급와인이 나온다는 말인가. 향을 맡다가 입을 대자 인지가 눈치를 살피며 제게서 멀어졌다.


"그럼 다음에 꼭 연락해줘."

"그래."


와인이나 실컷 마시고 가야겠다. 지혜는 와인잔을 비워냈다. 그러자 지나가던 종업원이 와인잔을 부지런히 채워주고 지나갔다. 지혜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금 꼴깍이며 와인잔을 비워냈다. 혼자서 한 병쯤 비워냈을까... 슬슬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제게 입을 대고 싶었던 친구들은 모두 입을 대고 지나갔고, 날카로운 말을 뱉어내며 제 성질을 쏟아낸 것도 충분했다. 마음이 헛헛한 것이 얼른 집에 가서 편안하게 눕고만 싶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조용히 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넓은 호텔 안에서 그를 딱 마주했다. 타이밍도 참... 무료하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혜는 자연스레 스쳐 지나가려 했으나 결국 한 마디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이지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여전히 다정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지혜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냥 지나가면 될 것을 습관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그 것도 그럴 것이 저는 이미 꽤 취한 채였다.


"벌써 가나?"


대답이 없는 저에게 묻는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제 말에 꼭 대답을 할 것이라는 확신. 그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저는 입을 열고 있었다.


"어."

"와."


진득한 사투리. 여전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많다. 십여년만에 만났는데 왜 벌써 가냐는 질문을 어제 만난 사람처럼 하고 있다. 지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피곤해서."


알 것 같았다. 꽤 시달렸겠지. 이지혜가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 역시 묻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그렇게 도망치듯 결혼을 했고, 십년을 살았으면 잘 살 것이지... 왜... 그래, 왜 라는 질문과 그래도, 라는 질문. 제가 그렇게 물은 자격이 없었으나 궁금했다.


"데려다줄게."

"네가 왜."

"술 마싰네, 이지혜."


내 얼굴만 봐도 아는 거 여전하구나. 얼굴색 하나 안 변했을 텐데... 


"너 사투리 여전하다."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하나."

"여전해, 이윤호."


지혜는 헛헛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군대에 있다더니. 짧게 자른 머리가 그의 매끈한 얼굴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니도 여전하네. 하나도 안 변했네."


픽 웃는 윤호의 얼굴 역시 여전했다. 소년 같은 미소, 걸쭉한 부산 사투리까지. 그리고 저 눈빛. 너만 본다는 그 눈빛. 그거 때문에 꽤 결혼 후에도 기억이 났었다. 저 미소가 기억이 꽤 오래 남았지.


"차 가지고 왔어?"

"군인이 차가 어딨노. 택시 타고 가자."

"어디로."

"니 원하는 데로."


치, 지혜는 허세 가득한 윤호의 말에 그제야 웃었다. 


"나 차 가지고 왔어."

"차도 몰 줄 아나."

"이윤호. 나 지금 몇 살이야?"

"열여덟살. 이지혜 지금 열여덟 아이가."


장난스러운 윤호의 말에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지혜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윤호 역시 곁에 섰다. 오랜만에 챙겨입은 정장인듯 꽤 유행이 지난 패턴이었다. 하지만 윤호의 얼굴은 깊이가 생겨있었다. 그런 촌스러운 정장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을 만큼 눈매에 깊이가 생겨있었다.


"이윤호는 몇 살인데."

"내는 서른다섯살."


피식 웃는 모습이 멋들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혜는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따라오려고?"

"모셔다드려야지."

"안 들어가 보려고?"

"어데를."


윤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지혜를 힐긋 바라보았다. 지혜가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이내 문이 닫혔다.


"동창회 온 거 아니었어?"

"지겹구로 무슨 동창회."


치, 정장까지 챙겨입고 와서는 무슨 동창회냐니. 


"이윤호."

"차도 몰고 다니고, 다 컸네. 이지혜."


건들거리며 하는 말에 지혜는 고개를 숙이고 윤호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은 구두를 신은 윤호의 성격이 많이 변한 듯 보였다. 늘 정리가 잘 안 되던 윤호였는데...


"너 아직 군대에 있어?"


띵, 하고 문이 열렸다. 윤호가 지혜를 바라보았다.


"어."

"오래 있네."

"와, 그만두고 나오까."

"그런 소리 아니잖아, 실없긴."


지혜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나섰고, 윤호가 뒤를 따랐다. 실없는 소리만 하는 제가 정말로 열여덟살의 멍청한 이윤호로 돌아간 듯했다. 


"내가 차 몰아도 되나."

"너 아니면 누가 몰아, 지금."


지혜가 열림 버튼을 누른 차는 삐까뻔쩍한 흰색의 외제 SUV였다. 


"이게 니 차가."

"어. 막 몰아도 돼."


열쇠를 윤호에게 건네고서 지혜는 조수석 문을 열어 올라탔다. 어리벙벙한 윤호가 열쇠를 받아들고서 서 있다가 급하게 운전석에 올라 섰다. 새 차인 것처럼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듯한 핸들을 붙잡은 윤호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데로 가꼬."

"집에 가서 한잔 더 할래?"


지혜의 말에 윤호가 미소 짓고 있던 입가를 굳혔다. 무슨 의미인지쯤은 충분히 알아들을 나이였다. 


"주소나 찍어봐라. 집에 가게."


지혜는 윤호를 보며 내비게이션에 집 버튼을 눌렀다. 이내 맑은 기계음이 들리고 윤호는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지혜는 그런 윤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도 편안하니까, 그래서 나이가 들었는지도 잊을 만큼 윤호는 여전했다. 장난기 많고, 밝고, 강하고 그리고 편안했다.


"이윤호."

"어."

"잘 지냈어?"


많이도 들었던 말이었다. 제가 먼저 꺼낸 적은 오늘 중 단 한 번도 없던 말이 저절로 툭 튀어나왔다. 궁금했다. 이윤호는 어떻게 지냈을까.


"내?"


윤호가 힐긋 지혜를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지혜의 얼굴도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힐 뻔했다. 어쩜 저리도 그대로일까. 철이 안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제 눈에 콩깍지가 씌인 탓일까. 이지혜는 여전히 예뻤다. 장난처럼 뱉었던 말은 진실이었다.


"잘 지냈지."

"어떻게 지냈는데."

"만날천날 사내새끼들이랑 부대끼면서 살지, 뭐."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군대에서 못을 박겠다며 특수부대에 입대한다고 했었지.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그 타이밍이 너무 오묘해서 오해할 뻔했었어. 혹시 나때문인가 싶어서.


"니는 괜찮나."

"나? 이혼한 거때문에?"

"어."

"속 시원해. 이미 지긋지긋했었어."


이미 몇 해 전부터 삐걱거리던 사이였으니까, 그와 처음부터 맞지 않았고, 욱하는 마음에 선을 보고 결정한 사이라서, 그래서 이혼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 마음을 먹을 때까지, 마음을 먹고 나서도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이혼을 하는 동안에도 늘 숨이 막혔어. 끔찍하더라고.


"그래 말해도 되나."


내가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윤호는 해주는구나. 쉽게 말하면 안된다고.


"뭐, 어때. 이미 끝난 사인데."

"매너 아이지. 그래도 십년을 살았는데."


가볍기만 한 주제에. 나보다 훨씬 가벼운 주제에. 이윤호 연애하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렸는데. 삼개월에 한 번씩 여자를 갈아치운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십년 결혼생활이 뭐라고. 


"그럼 뭐라고 이야기할까."

"그러게. 그냥 잘 끝냈다 카면 되지, 뭐."

"너무 가식적이야."


지혜의 대꾸에 윤호는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뱉었다.


"니가 속 시원하면 됐지, 뭐."


지가 들쑤셔놓고 맨날 저만 점잖다. 그래놓고 결국에는 제 편을 들어준다. 지혜는 입을 삐죽였다.


"휴가 나온 거야?"

"어, 휴가."

"언제까지?"

"이번 주 금요일. 와."

"그냥."


윤호 역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른하게 풀린 눈빛, 비죽이 내려가는 입매 그리고 횡설수설하는 손짓까지. 딱 봐도 꽤 취해있었는데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집으로 갔을까. 운이 좋아 만나서 다행이지. 여전히 겁이 없다, 겁이 없어. 지혜는 더 말이 없었다. 슬쩍 옆자리를 보니 눈을 감고 있던 얼굴에 긴장이 풀려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그냥 눈만 감은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윤호는 오래 시선을 두지 못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윤호는 복잡한 감정에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지혜의 이혼 소식이 먼저였고, 동창회가 나중이었다. 급하게 휴가를 낸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부대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제가 결코 긴 연애를 할 수 없는 그 이유를 마주하고 싶었다. 아니, 그전에는 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 그래, 이지혜가 보고 싶었다. 기집애가 성격이 더러워서 늦게 시집갈 줄 알았더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훌쩍 가버렸다. 그래서, 그래서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저를 옥죄일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도망친 곳에서 십년이나 보냈다. 이지혜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아이가 없어서 이혼을 했다는 소문, 남자가 바람을 피웠다, 이지혜가 바람을 피웠다. 소문만 많았지 그 어느 것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뭐꼬, 도대체."


그런데 동창회에 나와서 술을 있는 대로 마시고는 힘없이 걸어 나오는 지혜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으응...? 뭐라고?"


순간적으로 잠이 든 듯 지혜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제가 입밖으로 소리를 낸듯했다. 


"아이다, 좀 잤나."

"어디야, 지금...?"

"아직도 가는 길."

"나 잠깐 잤지."


지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술을 잘 마시기는 했지만 늘 술 취하면 어디든 머리만 대고서 깜빡깜빡 잠이 들던 지혜였다.


"어. 니 진짜, 아무 데서나 자는 거 여전하네."

"내 차에서 자는데 왜 아무데나야."


몇 번 잔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흘려듣는 지혜를 보며 참 많이도 술자리를 따라다녔는데... 헛짓이었지, 헛짓. 다 헛짓거리했었지.


"딴 데서는 안 잤나, 니가."

"왜 옛날이야기를 꺼내. 밖에서 술 마신 것도 진짜 오래간만이구만."


지혜의 아무렇지 않은 말에 윤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십년 지났으니 많은 것은 변해있었다. 강산도 변했고, 저도 변했고, 지혜도 변했을 것이었다.


"지금은 어디서 복무해?"

"인천."


인천이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구나. 해군을 갔다고 들었는데, 인천에도 부대가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 키가 크고, 몸도 좋았지만 더욱 다부져 보였다. 지혜가 입을 다물자 윤호 역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할까...  지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까... 고민스러웠다. 


"바다 많이 보겠다."


지혜의 말에 윤호가 피식 웃었다. 실없는 게 저만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마이 보지."

"수영도 많이 해?"

"하긴 하지."

"너 수영 잘 했었나?"

"살라고 하지, 살라고."


뻔뻔한 윤호의 말에 지혜가 피식 웃었다. 늘 저런 식이었다. 운동도 전부 잘하면서 져주고, 어지간한 시비는 전부 넘어가고, 결혼한다는 저를 좋아하면서 말리지도 않고... 


"다음에 한 번 면회나 갈게."

"면회는 무슨. 출퇴근하거든요."

"아, 정말?"


정말 몰랐던듯 지혜의 습관이 툭 튀어나왔다. 매일 아, 정말? 물으며 생각에 빠지고 나서 뒤늦게 웃곤 하던 버릇이 있었다.


"와아 몰랐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면 되나."

"어어. 들어가면 돼."


윤호는 부드럽게 지하로 들어섰다. 지혜가 알려주는 비어있는 자리에 주차를 하고 나서 윤호는 깔끔하게 시동을 껐다. 지혜는 제 가방을 챙겨 들고 문을 열고 내렸다. 윤호는 그런 지혜를 바라보며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자."


꽂지도 않아도 될 열쇠를 굳이 준 지혜에게 다시금 돌려주자 저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지혜의 시선이 천천히 저를 훑는 것도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서 이 정도면 됐다. 매너라면 이 정도면 되었다. 윤호가 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혜가 손을 뻗어 열쇠를 받아들었다. 


"운전 잘 하네."


주차장에 마주 서고 보니 제가 구두를 신었음에도 꽤 올려다봐야했다. 하기야 대학 시절에는 나란히 걸을 때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먼저 드가라. 드가는 거 보고 가께."

"같이 들어가."


지혜의 말에 윤호는 아무 말도 없었다. 참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집까지 들어오라고 할 만한 사이였던가. 저와 지혜가.


"안 드갈란다."


윤호의 말에 지혜의 시선이 어물거리며 얼굴을 훑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 함부로 드가지 말라고 배워서."

"내가 너한테 여자냐. 너 다른 여자한테는 그러지 마. 괜히 민망하겠다, 제안 한 번 했다가."

"여자지. 드가라."


단호한 윤호의 말에 지혜는 어물쩍 넘어가려던 것이 민망해졌다. 별 다른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윤호를 보내고 싶지 않아 붙잡았는데... 저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것은 또 뭐며, 저를 꽤 민망하게까지 만들었다.


"야, 이윤호."

"와. 혼자 드가기 무서워서 카나."


그렇다기보다 얼마 전에 이혼을 한 여자가 남자 동창에게 전화번호를 물을 수도 없고. 거리를 꽤 두고 있는 탓에 민망하기만 했다.


"카면 엘리베이터 타자. 집 앞까지 가주께."


지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던 윤호가 지혜를 지나쳐 앞장섰다. 그런 게 아닌데... 또 집 앞까지 가준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윤호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구두 끝으로 툭툭 찼다. 


"이윤호."

"어."


이 차가운 기운이 묻어나는 공기의 온도를 어떻게 이해할까.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 십년만에 만난 동창생으로서 대화도 잘 했는데. 왜 이렇게 굳어있는 건데.


"화났어?"

"안 났다."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니는, 아무한테나 집에 같이 가자카면 어짤라카노."


꽤 화가 난 모양이었다. 걸쭉한 사투리가 강하게도 터져 나왔다.


"왜 들어가기 싫은데. 네가 아무나야? 우리가 일이년 친구였어? 십년만에 만났으면 친구 집에서 술 한잔할 수도 있는 거지. 사람 민망하게 거절이나 하고, 지가 화내고."


지혜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먼저 언성을 높였다. 늘 이런 식이다. 이윤호가 긁었는데 나만 이렇게 화를 내게 된다. 지혜를 바라보는 윤호의 얼굴이 굳었다가 풀렸다가 다시금 굳었다.


"내한테 니가 여자라서 카는갑지."


띵, 익숙한 소리가 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행히 아무도 타고 있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봤다면 잔뜩 화가 난 지혜와 어이가 없는듯 저를 바라보는 윤호를 봐야만 했을 것이었다. 윤호는 아무 말 없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리도 분위기가 삭막한데도 데려다준다는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인지... 지혜가 짜증스레 구두소리를 크게 내며 뒤이어 탔다.


"몇 층."

"21층."

"높이도 사네."


혼잣말 같은 윤호의 목소리에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들어보아도 버튼을 누르고서 계기판만 보는 시선때문에 눈이 마주치치 않았다.


"이윤호."

"오늘 푹 쉬고 나중에 연락하자."

"내 번호도 모르면서..."


빈정거리는 지혜의 목소리에 결국 윤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지혜야말로 왜 화가 난 것일까.


"알려주면 되지. 내려서 알려도. 연락할테이까."

"싫어. 안 알려줄 거야."


먼저 묻지도 않은 번호를 제가 알려줘야 하나. 지혜는 입을 삐죽였다. 왜 이렇게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걸까. 윤호는 잔뜩 심통이 난 지혜의 얼굴을 보고 나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뿔이 제대로 나셨네, 뿔이 제대로 나셨어.


"이지혜."

"너한테 나 여자라며. 흑심있어 보여서 주기 싫어."

"아아, 흑심."


윤호의 낮은 목소리가 엘리베이터에 울리고 이내 작은 진동이 일고 문이 열렸다. 윤호는 아무 말도 없이 먼저 발을 옮겨 내렸다. 지혜가 따라내리자 앞장서라는 듯 힐긋 바라본다.


"지금 내 들어가면, 니 분명히 후회한다."

"됐어. 이미 기회는 사라졌어."


심통이 났다. 참나 그렇게 제게 아무것도 못 하던 이윤호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를 줘도 잡지를 못한다. 지혜가 발을 옮겨 제 집 현관문 앞에 섰다. 윤호는 입을 꾹 물고 뒤를 따랐다. 타닥타닥 발걸음 옮기는 소리와 또각거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이지혜."

"그만 좀 불러. 내 이름 이지혜인 거 잘 알고 있으니까."

"내일 점심 묵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추었다. 


"집 앞으로 올게."

"차 없다며."

"니 차 있잖아. 좀 얻어타자."


장난스러운 윤호의 목소리에 지혜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 뒤를 돌았다. 윤호가 지혜를 안듯이 등을 감싸고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주었다.


"언제 올 건데."

"몇 시에 오꼬. 이지혜가 오라는 시간에 올게."


참나. 사람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환장을 하게 만드네. 지혜가 입을 삐죽였다. 윤호가 한참 동안 지혜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열두 시 반까지 와. 차 앞으로."

"그래."


윤호의 답이 들리고 나서야 지혜는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짝 문이 열렸을 뿐인데 방금 맡았던 지혜의 체향이 집안에서 밀려 나오고 있었다. 


"푹 쉬고."


끝까지 다정한 윤호의 말에 지혜가 머뭇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오께."


윤호의 말에 지혜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후... 띠리리,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지혜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쳤어, 정말. 왜 들어오라고 했었는지, 윤호가 왜 들어오지 않았는지... 숨이 막혔다. 가쁜 숨을 내쉬고 나서도 여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윤호 진짜. 아, 이윤호 진짜. 지혜는 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지혜가 들어가고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호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벨만 누른다면 지혜가 문을 열어줄 것이었다. 들어가서 함께 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저는 실수를 할지도 몰랐다. 약해진 지혜의 마음 사이로 제가 밀고 들어가고자 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비겁하고 싶지 않아 겨우 참아야했다. 그제야 윤호는 쥐고 있던 주먹을 놓았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만큼 꽉 쥐고 있었다가 놓자 이제 손에 피가 도는 듯했다. 여전히 사람 쥐락펴락 잘 하네. 윤호는 쓴웃음을 짓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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