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들의 이름, 배경, 나이는 국가나 실제 인물과 관련이 없습니다. 창작물 속의 설정입니다.)


“그래서. 저를 이곳까지 데려오신 이유가 뭐죠?”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나를 떠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아서요. 제 의지가 하나도 반영되어 있지 않은 이 만남에서 제가 예의바르게 행동할 이유도 없잖아요. 저를 억지로 데려오신 것부터 이미 그것을 각오하신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죠?”

“하하. 당돌한 사람이군, 여주 양은. 내가 이리 여주 양의 앞에 앉아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이 나라의 대통령인데 말이야.”

“상관없습니다. 대통령이든 뭐든, 제게는 별 가치 없으니까요. 오히려 이 나라를 위험한 전장으로 만든 장본인이신 것 같아 기분이 몹시 나쁜데요.”

 

여주의 날카로운 말에도 대통령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여주는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지만. 여주는 제 앞에 놓인 물을 벌컥, 들이킨 후에 큰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탕-!

 

“시답잖은 말장난은 그만하고 본론을 좀 꺼내시죠? 분명히 빨리 끝내신다고 했습니다.”

“허허, 좋다. 네가 그리 원한다면 본론을 이야기해주지. 물론 너는 똑똑한 사람이니 이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손에 들린 작은 리모콘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스크린이 내려오며 우리나라 지도가 띄워졌다. 곳곳에 붉은 점들이 가득한 그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던 여주가 물었다.

 

“..이건, 지금까지 나타난 좀비바이러스 감염자들의 분포도잖아요.”

“그래. 여주 양이라면 알 줄 알았지. 보거라. 대부분의 바이러스들이 수도권과 최초 발생지인 경상북도에 몰려 있는 것을. 그건 외국인 유입이 많은 수도권과 최초발생지인 경상북도로부터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네. 그런데 이게 저를 부르신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음..여길 한번 보렴.”

 

대통령은 경상북도 중에 유일하게 바이러스 표시가 없는 지점을 가리켰다. 여주는 온몸의 털이 삐죽, 서는 것을 느꼈다.


거긴..

 

“그래. 네가 사는 곳이지. 이곳이 바이러스의 최초 발생지임에도 더 이상 바이러스가 나타나지 않아. 설마 바이러스들이 다른 곳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물론이죠. 그곳만 감염자가 발생하지 않는 건..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 감염자를 제거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리고..”

 

여주는 이를 빠득, 갈며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겹치자 대통령이 입 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너와 동생들이지.”

“.....”

 

대통령의 말이 맞았다. 여주와 가족들이 사는 동네는 대한민국의 좀비바이러스 최초발생지로서 바이러스가 다시 나타날 확률이 다른 곳보다 많았다.


그렇기에 여주와 동생들은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 듯, 동네를 돌아다니며 좀비를 발견하면 처리하고 있었다. 최초발생지이니 반드시 어딘가로부터, 바이러스가 유입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최초의 좀비를 죽인 것이 자신들이었으니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만큼은 자신들이 지켜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정든 동네는 자신들이 지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덜미가 잡힐 줄이야..역시 세상은 불공평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된 그 일을 증거삼아 누군가를 구속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사람이 있는 한. 세상은 계속 불공평할 것이었다.

 

“흐음..분명히 살아남기 위해 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 비서에게는 그렇게 모질게 ‘우리가 왜 국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냐’고 말해놓고서는 정작 그 동네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이리 나선단 말이지..그렇다면 너는 정말 네가 원하는 이들만 구한다는 것인가? 그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은데.”

 

대통령이 서늘한 얼굴로 빈틈을 찔러왔다. 여주는 꽉 쥔 두 손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느꼈다. 여주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야 저희가 최초의 좀비를 죽인 이상..최소한의 책임은 져야한다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미 한번 무기를 든 이상 저희가 손을 댈 수 있는 곳만큼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수도권과 나라에는 저희 말고도 도와줄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쪽 말대로 저는 되게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돕고 싶은 사람만 돕거든요.”

“그렇다면 더 의문이 생기는구나. 너는 분명히 네 의지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일에 네 목숨과 동생들의 목숨과 미래를 걸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대가도 없이 그들을 위해 네 미래와 목숨을 걸고 있지. 앞뒤가 안 맞는데, 설명해줄 수 있나?”

“......”

“국가를 위해 헌신할 생각도, 국가를 구할 영웅도, 좀비 살상용 무기도 되기 싫다면서 행동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고, 영웅이 되어가고 있지. 그런데도 너는 우리의 초대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솔직히 말해보렴. 나라를 구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에 놀아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싫은 것이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 네 의지가 아닌 다른 이들이 시켜서 하는 것 같은 그런 행동들이 어색하고 싫은 것이겠지. 아닌가?”

 

정곡을 찔린 여주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국민을 이용하려는 국가에 협조하는 것이 싫었고, 무조건 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그 조직에 자신의 목숨과 미래를 거는 것이 싫기도 했지만 가장 싫었던 것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야 한다는 것. 그들의 명령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싫었다. 말 그대로 여주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자신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것이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걸 알았지만 그래도 여주는 자신이 직접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 다른 것들을 그 무엇보다도..싫어했다.

 

“다 아셨군요. 네.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정의로운 척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영웅이 되는 것과 스포트라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러니 더더욱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는 없어요. 그 자존심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저는 이 나라를 싫어하는 걸요. 위기의 순간,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꺾이지 않은 여주에 헛웃음을 터트린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하하하, 그래. 나라에 의해서 움직이는 영웅이 아니라 네 스스로 국민의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말이구나. 누군가의 통제 없이 네 스스로 움직이고 싶다는 것이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네 표정만 봐도 안다. 능구렁이 같은 의원들을 대하는 대통령이 그 정도를 파악 못하겠나? 어른스럽게 굴어도 아이는 아이인 거란다.”

“..그래서요? 아무리 제 더러운 면을 밝히시면서 협박하셔도 저는 국가의 영웅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아쉬울 쪽은 그쪽일 텐데요.”

 

여주는 그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여주는 자존심이 강한 만큼, 의지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설득되는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흐음..그래. 네 말이 맞다. 어쨌든 네게 매달려야 할 이는 우리들이니. 그렇다면..제안을 하지.”

“..제안?”

“한시가 급하니 말이다.”

 

대통령은 제안을 하겠다며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여주었다. 다섯 개의 혜택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첫 번째. 네가 우리 조직에 들어온다면 조직의 리더자리를 주마. 그 인재들을 전부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다. 또한 대통령인 나를 독대할 수도 있지. 그리고 네가 들어온다면 네 동생들은 조직에 들어오지 않아도 좋다. 또한 국가에서 만든, 국가조직이니 월급은 물론 가족들의 안위도 보장해주겠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서든, 업무를 위해서든 숙소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가장 좋겠다만 원한다면 가족들도 함께 살 수 있도록 네 전용 독채를 마련해 주지.”

“두 번째. 국가는 그 조직에 대해 최소한의 개입만 하겠다. 필요한 것들은 충족해주되 개입은 최소한으로 하겠다는 말이다. 즉, 그 조직은 국가조직이긴 하나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조직이 된다는 것이지. 네 말대로 네가 국가와 국민 사이에서 국민을 선택한다고 해도 존중해주겠다. 다만 그것이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국가를 노린 것이라면 예외다. 그리고 너 또한 최소한의 절차와 룰은 지켜야겠지. 작전 후에는 보고를 올리고, 조직을 위해 필수적인 개입이나 필요한 변화는 인정하고 그에 대한 협조를 해주어야 한다.”

“세 번째.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조직을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 사실 너만 한 인재가 없으니 네가 있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래도 네 의사를 존중해주지.”

“네 번째. 따로 좀비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하면 연구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겠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좀비들을 많이 상대하다보면 아는 것도 많아질 테지.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우리도 좋고 너도 좋은 것이니 딱히 혜택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하지만 좀비바이러스가 빨리 사라져야 하니 이 정도는 이해해주면 좋겠구나.”

“다섯 번째. 네가 바라던 대로 네 의지로, 영웅이 될 수 있게 해주겠다. 이 제안은 철저히 내가 멋대로 한 제안이고, 너는 이것을 받아들인 것뿐이니까. 절대 나라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게 해주겠다. 너도 이걸 가장 원할 테지. 너는 네가 원해서 영웅이 되었고, 그 영웅의 자리를 내려놓을 때도 네 의지로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네가 끝까지 남아 좀비들을 전부 해치우고 싶다고 해도 얼마든지 존중해주마.”

 

다섯 가지의 제안 아닌 제안을 전부 말한 대통령은 자세를 바꾸며 여주를 흘깃, 바라보았다. 여주는 그 제안들을 곱씹으며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래도 싫습니다.”

“..! 뭐?”

 

이번에는 여주가 그를 당황시켰다. 사실, 이 제안은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인재도 아닌 그저 재능이 좀 있는 여자아이를 위해 이정도로 많은 혜택을 주다니.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주는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걸지 않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이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을 해주셨는데, 거절해서요. 하지만 제 의사를 존중한다고 하셨죠. 그러니 시작도 하지 않으려는 제 입장을 헤아려주세요. 저는..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저에게는 영웅으로의 삶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니까요.”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무례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여주에게 좋은 조건을 다섯 개나 달면서까지 여주를 스카우트 하고 싶어 한 사람이었으니 조금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가족들도 함께 살게 해준다고-”

“그렇지만 그건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뭐...?”

“영웅이 되면 칭송받을 거고, 분명 좋은 것들이 더 많겠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고, 하루하루 손에 피를 묻히며 힘겹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건 제가 못 버틸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오늘.’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 제 모습 그대로, ‘내일’을 보며 ‘오늘’을 살아갈 거예요. 그럼..”

“하지만 네가 오늘 그 좀비들과 싸우면, 많은 사람들의 내일이 지켜지는 것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너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냐? 오늘을 살아내며 너의 가족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내일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다고?”

“...네.”

 

여주는 그 대답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여주의 단호한 모습에 대통령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무언가를 전송했지만 말이다.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정도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

 

여주는 약속대로 집까지 데려다준 그 남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정말로 번복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그쪽까지 이런 걸 물어보다니..정말 끈질기네요.”

 

귀찮은 물음이었지만, 여주는 홀가분한 마음 때문인지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집으로 들어가려던 여주를 그 남자가 붙잡았다.

 

“잠깐..”

“네?”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그 남자는 여주의 손에 자신의 휴대폰을 올린 뒤,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깔끔한 흰 바탕의 메모에 적힌 것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철학자가 말할 것 같은 몇 문장이었다.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늘을 살아내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는 오늘을 살아내는 영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영웅은 그 누구보다 강하지만 내일을 보며 오늘을 살고 싶은 사람이다..”

 

여주는 이 문장들을 읽고는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은 뒤에 엷게 웃었다.

 

“그분께서 그 문장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남자는 오른쪽 눈에 흉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흉터를 빤히 바라보는 여주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처음으로 웃은 그 남자가 말했다.

 

“이 흉터는 몇 년 전. 술만 마시면 흉기를 휘두르던 국회의원으로 부터 그 의원의 아이를 구하다가 생긴 것입니다. 채찍을 휘두르던 그 의원과 아이의 사이에 끼어들어 아이를 구하면 눈에 흉터가 생길 것을 알았지만 너무 어렸던 아이의 미래를 위해 뭐라도 하자고 다짐했었지요.”

“.....”

“여주 양. 여주 양은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많은 사람들을 구한 영웅입니다. 그러니..저희와 손을 잡으면 안 되겠습니까.”

 

여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꾹, 깨물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 꼭 저여야만 하는 거죠? 다른 이들이 많을 텐데요. 저보다 더 강하고..더 정의롭고..알량한 자존심도 없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할 이들이..있을 텐데 왜 저한테..”

“그것은..여주 양께서 가장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가지고 계신 정의감을 잘 아실 테니까요. 여주 양. 본인의 내일과 모두의 내일을 지켜주는 영웅이 되어주십시오. 여주 양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분께서도 여주 양을 데려오려고 애쓰시는 것이겠죠. 물론 여주 양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오늘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저희는 여주 양이 필요합니다.”

“저는..아직 잘 모르겠어요..제가 그럴 수 있을지..영웅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그게 저와 가족들의 미래를 지키는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불확실한 것에 제 미래를 걸 수 없어요. 저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말이에요.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여주 양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만 더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여주 양의 정의감이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결국 여주 양을 움직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웅은 아무리 부정해도 영웅이라면서요. 그럼.”

 

그 남자는 끝까지 그의 말을 전하고, 여주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채로 사라져버렸다. 여주는 제 손에 남은 그 남자의 전화번호를 바라보다가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리무진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현관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면서 얼마나 걱정한줄 아냐면서 눈물을 보이는 가족들의 품에 안기면서도 여주는 소용돌이치는 제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여주의 속에서 두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여주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서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영웅일까?”

 

**

 

[세-상에! 진짜로? 진짜 그랬단 말이야?]

“응. 그랬어.”

[그래서? 거절한 거지?]

“그래. 거절했어.”

[다행이다, 야. 그거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야. 잘했어. 잘했어, 여주야.]

“...나도 알아.”

 

다음날. 귀신같이 걸려온 주아의 전화를 받은 여주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국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물론 제안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몇 가지 제안을 받았고, 거절했다. 라고만 했을 뿐이다. 분명히 잘한 일이고, 자신과 가족들에게 더 좋은 일인 텐데 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주아의 잘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아서 떨떠름하게 대답한 여주였다. 지금 자신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주아가 알지 못했으면..하고 바라면서.

 

‘주아가 뭐라고 생각할까..결국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이 한 말에 흔들리는 나를 보면서..그 사람들한테 결국 놀아나는 거냐면서 욕하지는 않을까? 아니,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실망하겠지..어쩌면 죄책감을 가질지도 몰라. 자신이 그 말을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진짜 아닌데..’

 

어제. 그 사람들을 만난 후부터 계속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여주는 주아의 명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던 굳은 다짐은 어디가고 그 사람들의 달콤한 제안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으니까.

 

[여주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미안..좀 피곤해서.”

 

여주는 주아의 저를 부르는 목소리 덕에 겨우 그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하긴, 어제 그 사람들 만나고 왔다고 했지. 그 사람들 진짜 웃긴다? 스토커 짓에 이어서 이젠 납치? 신고하자. 어? 신고하자..!]

“..됐어. 이미 끝난 일이고 대통령인데 신고가 통할 리가 없잖아. 보아하니 나 말고도 다른 인재들 열심히 설득하는 것 같던데. 벌써 몇 명은 수락한 모양이고.”

[그렇지. 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건을 걸었다곤 하지만. 어쨌든 반쯤은 수락한 것 같더라. 하아..그 사람들도 참..그런 위험한 것에 자기 목숨을 걸고 싶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다른 생각이 있는 거겠지.”

[응?]

“아니..지금 상황만으로도 피곤한데 굳이 그 사람들의 의중까지 알고 싶지 않다는 의미야. 나랑은 다를 테니까. 어쩌면 정의감과 애국심이 넘쳐나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으음..그래. 근데 여주야.]

“응..?”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한 여주에 주아가 요상한 소리를 내더니 대뜸 여주를 불러왔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든 여주가 팔을 쓸었다.

 

[이건 내 감일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여주, 너. 조금 흔들리고 있지?]

“어, 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냥 조직에 들어오라고 했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테니, 나라를 위해 일해 달라면서 말이야. 그 사람이 그런 제안을 한 건 너뿐이었어. 네가 제안의 내용까지는 말을 안 해줘서 그 제안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나는 여주 너를 잘 알잖아. 의지가 강한 사람이고 절대 꺾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한번 마음이 넘어가면 걷잡을 수 없는 사람인 거. 나는 잘 알아, 여주야.]

 

자신의 속을 정확히 꿰뚫어본 주아에 여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주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 거, 안하고 그냥 살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본인이 원하면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여주 네가 마음이 바뀌었으면 그대로 가는 거지. 다른 사람 말 듣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잖아. 그쪽에서 너랑 가족들의 안위도 보장해주겠다고 했다면서. 매달리는 건 그쪽이라고?]

“하지만..그래도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어. 분명히 참 좋은 조건인데..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건지..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렇구나..]

“..있잖아, 주아야.”

[응.]

“그 대통령이 나를 데려다준 그 남자한테 이런 말까지 전해달라고 했어.”

[무슨 말?]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늘을 살아내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는 오늘을 살아내는 영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영웅은 그 누구보다 강하지만 내일을 보며 오늘을 살고 싶은 사람이다.”

[..? 설마 그게 너라고?]

“그래. 나보고 이 문장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했어.”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 두 마음이 충돌하고 있어..영웅이 되는 게..확실하게 나와 가족들을 지키고 모두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면..그런 확신이 든다면 망설이지도 않았을 거야. 자존심 세울 것이 아니라는 건 이미 깨달았고, 나도 영웅이 되어 보고픈 마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확신이 없으니까 어느 것도 선택할 수가 없어..나..어떡해야해..?”

 

언제나 스스로 답을 찾아내던 여주가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답을 물었다. 주아는 답을 주는 대신 힘을 북돋아 주었다. 본인도 모르는 답을 타인이 알려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여주야. 네가 선택하는 것이 정답이야.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여주, 너잖아. 그러니까..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게 정답이 될 거야. 아무도 뭐라 말을 보태지 않을 거야.]

“..정말 그럴까.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애초에 내가 그럴 재목인지도 모르겠고..그런 엄청난 일을 담을 그릇이 되는지도 모르겠는 걸..나 말고도 더 뛰어나고 좋은 사람이 있을 텐데..내가 정말 필요할까..?”

[그 증거가 있잖아, 여주야. 그 사람들이 너를 원하는 거. 그 사람들이 너를 이렇게 원한다는 건 그들에게, 이 나라에 네가 꼭 필요하다는 증거야.]

“......”

 

주아의 마지막 대답을 들은 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주아는 그것이 결론에 다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으니 마지막 결정은 당사자의 몫이었다. 그리고 여주의 곁에는 그 결정을 존중해줄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녀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아무 상관없이 그녀를 품어줄 것이다. 주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리고 그날 밤. 어둠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주아와의 통화 후, 머리가 터져라 홀로 고민하던 여주는 결국 눈물을 흩뿌리며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자, 그 통화 이후에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여주 때문에 안절부절 하던 가족들이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여주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나 말이야.

 

“...그 조직에 들어갈게.”

“정말로..?”

 

하주가 물었다.

 

“응.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는데..도저히 안 되겠어. 나는..스스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게 맞는데..그 많은 사람들을 무시할 수가 없어졌어. 이미 이기적이지만 더 이기적이게 굴 수가 없어, 이제. 그러니까..나는..내가 좋을 대로 할 거야.”

“..그래. 알았어. 누나의 선택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그래, 여주야. 우리도 너의 결정을 존중할게. 틀림없이 많이 고민해서 내린 결정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뜻대로 하렴. 너는 강한 아이니까 잘 해낼 거야.”

“네..분명히 그 사람들한테 놀아나기 싫다고 생각했는데..그것과는 별개로 그 많은 사람들을 구할 힘이 있는데도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 그 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그 사람들과 다른 것이 뭘까 싶어서..그럴 바엔 차라리 사람들을 구하기로 했어요. 내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걸 믿고 들어갈 거예요.”

“.....”

“미안해요, 나 혼자 결정해서..정말 미안..”

 

여주의 그 말을 끝으로 가족들은 여주를 끌어안았다. 홀로 힘겨운 싸움을 해냈을 여주가 너무 가여웠다. 그리고 또 이 작은 등 뒤에 많은 책임을 지게 될 미래가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그렇기에 이 작은 몸이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나.”

“응..? 아, 하주야.”

“누나. 나도 있어.”

“여준이? 여준이, 너까지..둘 다 이 늦은 시간에 왜..”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두 동생들이 여주의 방에 찾아온 것은. 울다가 잠에 들었던 여주가 벌떡, 일어났다. 동생들은 여주 앞에 서서 자신들의 권총을 꺼내 여주에게 건넸다.

 

“응..? 이건 뭐야?”

“.....”

“아, 조직 들어가서 쓰라고? 근데 아무래도 조직에 들어가면 더 좋은 무기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져가. 너희도 너희 몸을 지켜야지. 그리고 부모님도..나는 아무래도 바쁠 테니까.”

 

장난스러운 말을 하며 픽, 웃은 여주가 권총을 다시 돌려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동생들은 그 권총을 가져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응..? 왜 그래..

 

“누나.”

 

하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주는 여주의 손에서 권총을 가져가선 잘 내려놓은 뒤에 그 손을 꼭, 잡았다.

 

“우리도 같이 가자.”

“..뭐?”

“그래, 누나. 우리도 같이 갈래. 누나만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잠깐만, 얘들아. 너희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어? 죽을 각오로 매일을 좀비들하고 싸워야 하는 거야. 너희가 그걸 할 수 있어? 너희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라. 괜히 조직이겠어? 지금 괜히 나를 따라서 충동적으로 들어가면 위험하단 말이야. 어?”

“아니야.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야, 누나.”

 

다급한 여주의 말을 끊은 하주가 여주의 손을 놓고 무릎을 꿇어, 여주와 눈높이를 맞췄다. 우린 정말 누나랑 같이 가고 싶어. 누나가 모두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조직에 들어간다면 우리도 그 책임을 함께 나눠질게.

 

“하주야..하지만..”

“누나. 최초의 좀비를 죽인 건 누나만이 아니야. 그곳에 나도 함께 있었다는 거, 기억하지?”

“응..그렇지만 너무 위험한데..너랑 여준이를 그런 곳에 끌어들일 수는..”

“왜? 누나. 내가 말은 안했지만 나도 누나랑 같은 핏줄이거든? 잘할 수 있어..!”

 

여준도 하주와 같이, 그곳에 가겠다며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굳은 의지를 나타냈다.

 

“하아..정말로 갈 거야? 내가 조직에 들어가면 너희는 부모님을 지켜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그게 맞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나를 홀로 전쟁터에 보낼 수는 없어. 최초의 좀비를 죽인 것 때문에 누나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라면 그 책임, 나도 같이 질게. 나도 최초의 좀비를 상대한 사람이니까.”

“나도. 원래 백짓장도 나눠들면 낫다고 하잖아? 나도 누나랑 같이 갈게.”

 

다시 한 번 하주와 여준에게 ‘자신과 같이 갈 거냐.’고 물은 여주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희도 내 결정을 존중해줬는데, 나라고 멋대로 번복하게 할 수 없지. 알았으니까..후회하지 마.

 

“당연하지.”

“절대로 안 해. 설사 그 조직에 들어가서 힘들어진다고 해도 누나를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덜 힘들 거라고 생각해.”

“그래..내가 포기할게, 포기..! 어휴..”

 

단호한 동생들에 두 손 두 발 다 들며 포기를 외친 여주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두 동생들이 자신을 따라 전쟁터라 나가겠다고 하는 상황인데도 웃음이 나왔다. 전보다 마음이 편한 것도 자신과 함께 할 이들이 있다는 것 때문이겠지. 여주는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물러설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어.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으니까. 그렇다면..한번 맞서보는 수밖에.’

 

**

 

“예상하신대로 만 하루만입니다. 그리고 동생들도 함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남자의 휴대폰이 징- , 소리를 내며 울리고 선글라스를 쓴 그 남자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담배를 손에 쥔 대통령은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아 끄며 중얼거렸다.

 

“..거봐라. 내 예상이 맞았지. 영웅이 될 사람은 어떻게든 되게 되어있다니까. 우리는 그 마음을 조금만 자극시키면 되는 거지.”

“......”

“비록, 고생하긴 했지만 결국 해냈군. 나쁜 짓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존망을 위해서라면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고한 척 굴어도 결국 아이는 아이인 거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대통령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보기위해 창가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래..나머지들은 최초의 좀비를 죽인 그 아이가 들어온다면 전부 들어오겠다고 했으니..이제 모든 것이 잘 되겠군. 파헤치고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 실마리가 들어날 거야. 그렇게 될 때까지 그들이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지.”

“길고 긴 싸움이 될 거다. 모두 준비하지. 내일 그 아이를 데려오면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 될 테니까.”

 

대통령의 말에 그 주위에 있던 선글라스를 쓴 그 남자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 알겠습니다.”

 

끝.

꿈꾸는 일은 즐겁다. 얼렁뚱땅 굴러가는 글방 주인장 & 초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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