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가벼운 입맞춤이 난생 처음인 것도 아니다. 그동안 만났던 여러 명의 남자들과 그보다 더한 것들, 그러니까 이를테면 키스나 섹스 같은 것도 다 해 봤던 석진이다. 그런데 오늘만큼 입술이 화끈거린 적이 없었다. 꼭 매운 음식을 먹고 난 뒤의 느낌 같기도 하고, 달콤한 케이크 같은 것들을 질리도록 먹은 뒤의 느낌 같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새콤하고 짭짤하고 씁쓸한, 사람의 미각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맛들이 뒤섞인 복합적인 여운이다.

막을 새도 없었고 막을 수도 없었다. 초저녁의 버스 정류장.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녀석은 석진을 급습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석진은 잘 알고 있다. 녀석은 우발적으로 석진에게 입맞춤을 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철저한 계산 하에 움직인 것도 같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석진은 내 사람이다. 김석진의 입술은 내 것이라고 공인 받는 걸 노린 건지도 모른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엄청난 일을 벌이고 난 뒤 녀석에게선 연락이 없다. 석진은 저녁 내내 태형의 메시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그런 엄청난 짓을 벌일 때에는 후폭풍도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데 태형은 소식이 없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는 것일까. 아니면 후회라도 하고 있는 걸까.

 

석진은 아무래도 자신이 열아홉 살 소년에게 농락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문득 분한 마음이 들어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씩씩거린다.

 

 

“감히... 그래 놓고 톡도 없어....”

 

괘씸하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석진이 아니면 하늘이 곧 무너질 것처럼 굴던 녀석이다. 그렇게 대단한 애정을 자랑한 주제에 입을 꾹 다물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열 살이나 어린 놈에게 희롱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은 석진을 일어서게 만든다. 결국 석진은 외투까지 챙겨 입고 있다.

태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석진은 잘 안다. 태형은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수시로 보고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다른 날 보냈던 메시지를 통해 보건대, 그는 지금 스터디 카페에 있을 것이다.

석진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밤 10시.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부모님이 놀란 눈으로 석진을 본다. 석진은 좀처럼 이 시간에는 외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가냐?”

“애 잡으러”

 

“무슨 애?”

“사고 쳐 놓고 잠수 탄 놈 하나 있어. 잡으러 가”

 

“너네 반 애 사고 쳤냐?”

“응”

 

“아이고 저런... 무슨 사고?”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뭐? 설마 폭력?”

 

폭력은 폭력이다. 심장을 함부로 채찍질 했으니 말이다. 석진은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말만 남긴 채 밖으로 나간다. 태형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예약된 고객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스터디 카페 문 앞에서, 석진은 누군가 드나드는 사이에 출입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도착한 지 채 5분이 안 되어 학생들 몇 명이 나오는 틈을 타 잽싸게 안으로 들어간다. 석진은 우선 휴게실과 마주하게 된다. 휴게실에는 역시 몇 명의 학생들이 나와 테이블에서 간식을 먹고 있다. 휴게실을 사이에 하고 좌우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갈라져 있다. 이 녀석은 오른쪽에 있을까 왼쪽에 있을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누군가 석진을 보고 흠칫 멈춰 선다. 석진은 누군가 자신을 쳐다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재빨리 그리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태형이 아니었다. 태형이 아닌 석진의 반 다른 학생이다. 오히려 태형의 소재를 쉽게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석진은 아이를 붙잡았다.

 

“쌤 여긴 웬일이세요?”

“어. 태형이 좀 찾으려고. 태형이 여기 있어?”

 

“김태형이요? 잠시만요. 데리고 나올게요”

“어”

 

다행이다. 태형은 아직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가보다. 아이는 석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놀란 것 같기는 해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누군가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게 보인다. 정수리만 보아도 누군지 확실히 알 것 같다. 태형이다.

태형은 제 친구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서 놀라운 사람과 눈을 마주친다. 석진이 여기까지 찾아 오리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꽤나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석진은 태형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괘씸하다.

쭈뼛거리는 듯 싶다가 석진을 향해 묵묵히 걸어나오는 태형. 그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가득하다. 그 표정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석진은 쉽게 알 수가 없다. 왠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설마 여기까지인가? 저 녀석은 고작 이게 전부였나?

 

“여기 어떻게....”

“그래도 다행히 공부하고 있었네”

 

“.......... 저녁은 먹었어요?”

“응. 너는”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을 먹었느냐고 묻는다. 천성이 다정한 건 틀림없다. 석진은 태형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마냥 바라보기만 한다. 불안감을 느낀 태형이 석진에게 먼저 용무를 묻는다.

 

 

“근데 여긴 왜....”

“할 얘기 있어. 시간 되면 나가자”

 

“네?”

“넌 나랑 할 얘기 없어?”

 

“............. 가방 챙겨서 나올게요”

“응”

 

 

언제나 당당하고 쓸데없다 싶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고작 입맞춤 한 번으로 풀이 죽어 있다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원래대로 뻔뻔해지라고 이 자식아, 그래야 내가 덜 민망하잖아. 확실히 석진의 입장을 읽는 데에는 아직 서툴다. 태형은 자리로 돌아 가 짐을 챙겨 나온다.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영 기운이 없는 것 같다.

 

“공부 많이 했어?”

“뭐 그냥 저냥....”

 

“나가자”

“네”

 

 

터덜터덜, 마치 풀기가 다 빠진 종이처럼 태형은 석진의 뒤를 따른다.

 

 

 

 

 

 

 

 

“마셔”

“............”

 

“뭐, 독이라도 탔을까봐?”

“무슨 말이 그래요”

 

“어서 마셔”

 

카페에 가서 음료를 테이크 아웃해서 나왔다. 물론 카페 안에서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는 있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엿들을 게 겁이 나기도 했다. 그 카페는 스터디 카페 건물 1층에 있는 곳이라 석진의 학교 학생들이 많이 드나든다. 그래서 석진은 태형을 데리고 근처의 공원으로 나왔다. 밤 늦은 공원은 한적하다. 간혹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지만 대개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다. 껍질을 벗겨 놓은 하얀 배의 속살 같은 가로등들만 태형과 석진을 내려다 본다.

태형은 석진이 사 준 커피를 조금 입에 대 본다. 그러면서 석진의 눈치를 살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석진은 당장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않는다. 태형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를 알고 싶어서다.

 

“할 얘기...뭔데요?”

 

한참의 침묵 끝에 꺼낸다는 이야기가 도로 석진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말 눈치를 채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을 모른 체하고 싶은 것일까.

 

“진짜 몰라?”

“.....................”

 

“진짜 모르냐구”

“............알겠어요”

 

 

다행히 눈치가 아주 없는 놈은 아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래 알면 말해 봐. 내가 왜 이 시간에 널 찾아 왔을지. 가로등 불빛을 담은 석진의 눈동자가 태형을 향해 반짝거린다.

 

 

“내가 연락 없어서... 화난 거죠”

“아네. 근데 왜 안 해”

 

“.................”

“고작 용기가 그것뿐이면서 지금까지 나한테 들이댄 거냐 너?”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면 뭔데”

 

 

평소에는 코끼리도 때려 잡을 것처럼 기세등등하다가 꼭 중요한 순간에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럴 때마다 석진은 사실 힘이 빠진다. 태형을 향한 감정이 막 싹을 틔우고 잎을 부풀리다가도, 그가 여전히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렇다. 태형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대응 방식이 아니다.

 

“뭔가 계속... 얼떨떨해서요”

“네가 했잖아. 이럴 줄 모르고 했어?”

 

“네....”

“뭐?”

 

“누구랑 뽀뽀한 거... 처음이란 말이에요”

“하....”

 

“손도 안 잡아 봤는데....”

 

 

석진은 놀라운 사실과 맞닥뜨린다. 김태형 정도면 당연히 누군가와 교제해 본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요즘 아이들은 꽤나 파격적이니 키스나 혹은 섹스까지도 해 봤을 거라는 가정은 늘 석진의 뇌리에 있었다. 그러니 태형의 행동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꼭 난생 처음인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태형의 고백에 석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연애 안 해 봤어?”

“나 쌤이 첫사랑인데요”

 

“진....짜?”

“네”

 

“그럼 손도 안 잡아 봤고 뽀뽀도....”

“사귄 사람이 없는데 그런 걸 어떻게 해 봐요”

 

“와우.....”

“처음이 원래 이런 거예요....?”

 

“....................”

 

미안, 사실 나는 처음이 잘 기억이 안 나 - 이 말을 했다간 태형의 눈이 뒤집힐 것 같아서 참는다. 그래, 처음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서툴고 힘든 법이니까. 세월이 지나면 조금씩 그 의미가 희석될지언정 당장은 무척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그것도 모르고 석진은 태형이 자신을 농락한 거라 믿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쌤”

“............. 니가 그렇게 말을 하면 내가 뭐라고 해...”

 

“기분 나빴어요....?”


아니, 전혀. 난 아직도 입술이 화끈거리는데. 넌 아니야? 석진은 태형과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자신이 태형의 담임이란 사실을 자꾸 잊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상기한다. 일부러 떠올린다. 그래도 쉽지 않다. 자꾸만 자신이 태형의 담임이라는 사실을 내던지고 싶다.

 

 

“................아니.....”

“다행이다....”

 

“야, 넌 그러면서 나한테 그럼 그렇게 뻔뻔하게!”

“...............”

 

“후... 난 네가 그런 줄도 모르고”

“화 났었어요?”

 

“그래 임마! 네가 그냥 뽀뽀 한 번 해 보고 튄 줄 알았잖아 이 자식아!”

“............그랬구나.....”

 

“넌 그러면서 무슨 나랑 결혼을... 결혼은 뭐 소꿉놀이 하는 거냐?”

“그러게요. 장난이 아니네... 후... 뽀뽀도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다른 건...”

 

“다른 건 뭐 임마! 누가 뭐 해 준대?!”

 

이제야 녀석은 긴장을 풀고 웃는다. 경직되었던 표정이 스르르 풀리면서 원래의 개구진 웃음이 비친다. 석진도 그제야 마음을 한 시름 놓는다. 그래, 김태형이 그럴 리 없지. 지금까지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순박한 모습이 변할 리 없다는 것에 크게 안도한다.

 

 

“이런 줄도 모르고 내가... 하.....”

“실망..이에요? 뽀뽀도 처음이라서?”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너 아직 앤데 당연한 건지도...”

“당연한 게 아니긴 해요. 내 친구들은 뭐.... 할 거 다 해 봤던데”

 

“진짜...?”

“최민규는.... 아 여기까지만”

 

“말 안 해도 대충 알겠다. 걘 여자친구랑 사귄 지 2년 넘었다며”

“그래서 그 새끼가 맨날 나 아다라고 놀린단 말이에요”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노무 시키들이 말하는 거 봐”

 

 

태형을 만나러 오길 잘 했단 생각이 든다. 만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석진은 밤새 그를 의심하며 혼자 앓았을 것이다. 태형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이 석진에게 뭘 잘못한 건 아닌지. 그래서 외면 당하는 건 아닌지. 오히려 석진보다 더 애를 끓였을 것이다. 봄밤의 적당한 습도를 머금은 포근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싼다. 눈을 돌려 보니 옆에는 장미 덤불이 있다. 하얀 장미, 붉은 장미가 한 데 어울려 선명한 태양 아래에서는 꽤 찬란한 광경을 만들어 낼 것 같다.

이대로 계속 태형과 함께 앉아 있고 싶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다. 석진은 먼저 몸을 일으킨다.

 

“가자, 데려다 줄게”

“내가 데려다 주고 갈게요”

 

“시끄러. 나이는 내가 많아”

“남편은 난데요...?”

 

“야 난 네 부인 하겠다고 한 적 없어 아직”

“뭐... 곧 될 것 같은데”

 

“쓰읍”

 

태형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온 것 같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키득거린다. 그래, 이게 네 모습이지. 나는 이런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거지 - 석진은 새삼 자신이 좋아하는 태형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꾸밈 없고 솔직한, 그래서 때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것이 녀석의 본질이다. 적당히 자극적이며 적당히 능청스럽다.


“잠깐만요”

“왜?”

 

일어서려는 석진의 팔목을 태형이 잡아 끈다. 석진은 도로 벤치에 주저 앉아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다시 끌어 앉혀진 석진을, 태형은 아까보다 한층 더 깊어진 눈빛으로 응시한다. 다시 분위기가 묘하게 변색되고 있다. 석진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려 한다. 바로 그때, 태형이 아까보다 훨씬 더 용감한 행동을 감행한다.

이번에는 태형의 입술이 석진의 입술에 아주 오래 닿고 있다. 지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석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고 잠시 머물러만 있던 태형이, 슬그머니 자신의 뜨거운 혀로 석진의 입술을 벌려 열기 시작한다. 석진은 몹시 당황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태형의 체온이, 그리고 자신을 향한 마음이 갑옷이 되어 자신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모든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두드러지게 떨고 있다. 무척 떨면서도 석진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석진은 자신의 입술을 벌려 젖히려는 태형에게 저항을 할까, 아니면 그대로 그에게 자신을 내던질까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다. 석진은 곧 순순히 자신의 입술을 열어 태형을 맞아 들인다.

달고 따뜻하다. 조금 전 마신 커피의 잔향이 섞여 은은한 품격마저 느껴진다. 태형의 떨리는 손이 석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쥔다. 석진은 그 손으로 전해지는 태형의 떨림을 고스란히 전신으로 느낀다. 그리고 직감했다. 평생 이 녀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태형이 시험을 친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 치르는 시험이다. 학교 내신 시험이라고 해 봐야 태형에게 남은 사실 상의 기회는 두 번. 그러니 이사장도 석진도 사실 내신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이사장도 전에 석진에게 말했듯 11월에 치를 수능 점수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험이 태형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조금, 아주 조금의 향상이 있어야 남은 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석진의 담당 과목인 국어 시험을 치는 날. 시험 종료를 알리는 마지막 종이 울리고서야 석진은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잠수했던 사람처럼 막혔던 숨을 터뜨린다. 차마 시험이 어땠느냐고 묻지는 못할 것 같다. 태형이 먼저 이야기를 해 준다면 다행이고, 만일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성적이 나올 때까지 묻지 않을 작정이다.

 

그날 밤 공원에서의 키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석진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지 않는다. 키스는 달콤하고 황홀했다. 그리고 석진은 그러한 키스를 다시 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뭐 어때. 몇 달 뒤면 졸업인데. 석진에게 이런 용기를 갖게 한 건 확실히 태형의 힘이다. 서툴지만 착실하고 진지했던,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진정이 녹아 있었던 키스는 매력적이었다.

 

 

“석진 쌤”

“아 네”

 

“오늘 저랑 같이 저녁 식사 하실래요?”

“아.....”

 

“오늘도 선약 있으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남준이 다시금 석진에게 저녁 식사 약속을 청한다. 태형이 미리 말했었다. 형이 곧 고백을 할 거라고 말이다. 석진은 이 약속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이왕 기회가 찾아 온 김에 남준에게 거절 의사를 확실히 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럼 저녁 같이 먹어요”

 

남준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애를 태웠을 것이다. 태형의 말이 맞다면, 그리고 남준이 자신을 확실히 좋아한다는 다른 선생님들의 말이 맞다면. 그의 즐거운 기분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을 하니 미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더 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그에게는 무례일 것이다.

문제는 태형이다. 남준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러 간 걸 알면 태형이 노발대발할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남준이 석진에게 무슨 말을 할지 가장 잘 아는 건 태형이다. 석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태형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후에 벌어질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다.

 

 

[나 네 형이랑 저녁 먹기로 했어. 확실히 거절하려구.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해. 내일도 시험이잖아]

 

 

석진은 태형이 필요로 하는 의미를 짧은 메시지에 고루 담아 두었다. 나는 적어도 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는 나의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내가 남준을 단 둘이 만나는 건 결코 그의 마음을 받아 주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오늘 확실한 거절의 뜻을 표할 것이다. 나는 지금 오로지 너에 대한 생각만 한다 -

 

그런 석진의 내막을 모르는 남준은 무척 들뜬 얼굴이다.

 

 

“뭐 좋아하는 거 있으세요? 어디로 갈까요?”

“어... 쌤이 알아서 정해 주셔도 돼요”

 

“정말요? 그럼 제가 골라서 나중에 톡으로 보내 드릴게요”

“네”

 

“그럼 나중에 봐요”

“네네”

 

석진은 남준에게 별다른 시선도 주지 않고, 그의 물음에 따뜻한 대답을 하지도 않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어쩌다 사촌 형제의 관심을 똑같이 받게 되었을까. 확실히 운명은 장난꾸러기가 맞다. 아직 태형에게선 답이 오지 않았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수거했던 폰을 돌려 주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린다. 물론 수거했던 각자의 폰을 돌려 주는 건 담임인 석진의 일이다.

 

 

 

 

 

 

 

 

 

 

[알겠어요.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요. 오해 안 할게요]

 

녀석은 꽤나 어른스럽고 담대한 반응을 보였다. 석진은 태형이 울분에 가득 차 지난번처럼 자신의 손목을 쥐고 어디론가 끌고 갈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녀석은 이번엔 달랐다.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제법 쿨하게 답을 했다. 종례 시간에 폰을 나눠 준 직후 태형과 석진은 한 번 시선이 마주쳤었다. 태형은 폰을 켜자마자 석진의 메시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눈동자가 흔들릴 줄 알았는데 석진은 오판을 했다.

그의 심리를 추측해 보건대, 아마 그날 키스를 한 이후 석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게 분명하다. 일방적인 감정이 아닌 서로 오가는 감정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메뉴판 한 번 보세요. 뭐가 괜찮은지”

“아 네”

 

지금 석진은 남준과 마주 앉아 있다. 저녁 노을이 남준의 뒤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 붉은 기운이 남준의 얼굴에 더해져 그는 더욱 들떠 보인다. 석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가 건넨 메뉴판을 받는다. 꽤 가격이 나가 보이는 레스토랑이다. 부유한 집 아들이니 이 정도 가격은 부담스럽지 않을 걸 알면서도, 어차피 거절할 것에 대한 값어치가 이렇게 비싸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전 이걸로 시켜도 될까요”

“더 비싼 거 드셔도 되는데”

 

“이게 먹고 싶어서요”

“네 그렇게 주문할게요 그럼”

 

그는 과연 이런 식으로 몇 사람이나 유혹하는 데에 성공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그는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 호감을 보이고 다가서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가 보인 행동들을 보면 그렇다. 선뜻 깊이 다가서지 못하고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엿보였었다. 남준 정도의 조건이라면 굳이 자신이 애써 나서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맛있게 드세요”

“네. 맛있게 드세요”

 

주문한 음식은 생각보다 금세 나왔다. 어색한 침묵이 길지 않아져서 좋았다. 앞에 음식이 놓이면 아무래도 어색한 분위기는 조금 나아질 수밖에 없으니까. 남준은 스테이크를 썰어서 가지런히 석진의 접시 위에 올려 둔다. 억지로 쥐어 짜낸 매너는 아닌 것 같다. 평소 그의 행동에도 언제나 바람직한 매너는 배어 있었다.

석진은 남준이 썰어 놓은 고기를 조심스럽게 찍어 올려 맛 본다. 김남준이라는 남자는 꼭 이런 맛이다. 굉장히 고급스럽다. 빈틈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매일 스테이크를 먹고 살기는 힘들 듯, 석진에게도 남준은 매일 곁에 두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다.

반면 태형은 어떤가. 톡톡 튄다.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기에 적당한 긴장감을 늘 갖게 한다. 그러면서도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엉성함도 지니고 있다. 상큼한 과일 같은 남자다. 아직 조금은 덜 익었지만 구미를 당기게 한다. 훗날 무르익으면 절정의 달콤함도 겸비할 것 같은 그런 녀석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택해야 하는가. 누가 더 매력적인가. 답은 하나다.

 

 

“석진 씨”

“네”

 

“저랑 진지하게 만나 보지 않으실래요?”

 

 

음식을 다 먹은 후에나 뱉을 줄 알았는데 남준은 생각보다 성급하다.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나온 고백에 석진은 조금 당황했다. 그 당혹감이 얼굴에 비쳤는지 남준은 멋쩍게 웃는다.

 

 

“제가 너무 갑자기 들이댔나요”

“아....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대강 눈치는 채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뭐... 그렇긴 합니다”

 

“................. 한때의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정말 오래. 깊이 고민했어요”

 

석진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역사는 꽤 유구하다. 석진은 3년 전에 이 학교에 왔다. 처음엔 기간제 교사였었다. 훗날 공채 시험에 합격해 이 학교의 정교사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년. 남준은 처음엔 그저 인품 좋은 직장 동료로 다가왔었다. 남준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석진이 깨달은 건 2년 전 쯤이었다. 그러니까 남준은 오늘의 고백을 위해 2년 여를 견뎌온 것이다. 나름 눈물 겨운 순애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동안 남준에게 다른 만나는 사람이 있었는지는, 석진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남준의 말대로, 오늘의 고백이 결코 설익거나 섣부른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석진이 답을 해 주어야 할 차례다.

 

 

“그럼 제가 답을 드려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내색은 하지 않아도 남준은 지금 무척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산만하게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남준도 최대한 상처를 받지 않고, 태형과의 관계도 의심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거절할 방법을 생각은 해 보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어쩐지 눈앞이 캄캄하다.

 

 

“남준 씨, 저는요”

“..................”

 

“나랑 사귀어”

“.................?”

 

“석진 쌤 나랑 사귄다고 형”

“김태형 너 여길 어떻게....”

 

“그러니까 형. 미안한데 그만 마음 접어 주라”

“태형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당연히 내일 시험을 위해 스터디 카페에 틀어 박혀 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걱정 말라고. 나는 당연히 남준의 고백을 거절할 거라고 안심까지 시켜 놓았었다. 태형도 걱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던 녀석인데, 여기에 나타났다.

태형은 대뜸 석진의 손을 잡아 올리더니 남준에게 보란 듯 두 손을 맞잡아 보인다. 놀란 남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마치 석진에게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태형아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쌤. 어차피 형 고백 거절하려고 한 거잖아요”

 

“.......................”

“맞잖아요. 나한테도 그렇게 말했고”

 

“...................맞아”

“석진 씨?”

 

“죄송합니다. 전.. 그 고백 못 받아요. 보시다시피....”

“.......................”

 

“형, 들었지?”

 

석진과 태형이 동시에 퍼붓는 공격에 남준은 방패 하나 없이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고 있다. 그는 아무래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준은 태형을 너무 얕잡아 보았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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