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愛憎)


W. 율이




6.




꿈을 꾸었다. 영이 못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은이 바라보고 있는 꿈이었다. 아니, 바라만 보았나, 다른 여인까지 곁에 끼고 저를 비웃는 꿈이었다. 어찌 그리 물에 빠져 있는 것인가. 네가 그리 허우적대는 동안 나는 다른 여인을 품에 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 은의 입술이 퍽 가벼이 움직였다. 물에 빠져 숨을 못 쉬는 고통 따위가 아니었다. 은의 마음이 다른 여인에게 향하였다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매우 생생했기에 영은 후에도 문득 이 일이 꿈이 아닌 것 같았음을 느끼곤 하였다. 영이 괴로운 소리를 내며 겨우 깨어났을 땐, 깊은 새벽녘이었다. 



"누구 없느냐!"

"예, 마마."



영의 소리에 침소를 지키던 궁녀 하나가 답했다. 



"전하께서는 돌아오셨는가."

"예, 마마께서 침소에 들고 얼마 후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돌아오셨구나···."



영이 답답하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나 돌아오셨다는 답을 들었음에도 마치 거대한 바위 하나가 들어차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은이 이토록 미울 수가 없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은의 잘못인가 하면서도 그 얼굴을 떠올리면 참으로 가슴이 쓰려왔다. 그러다 보면 왜 저의 연심만 이리도 커져가는 건지, 왜 조금도 접히지 않는 것인지 제 마음을 탓하여 보기도 했었고, 또 그러다 보면 더는 은을 사랑하지 않겠다 과분한 다짐도 해보았으나 소용없다는 걸 이제는 영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영에게 은은 지독한 사랑이자, 족쇄였던 것이다. 



"다시 침소에 들지 않으시옵니까."

"가슴이 답답하여 바람이라도 쐬어야겠구나."

"바람이 찹니다. 겉옷을 준비하겠나이다."



궁녀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가자 영이 그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누군가 있다 간 자리에 조금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고작 궁녀 하나가 나간 자리에도 여운이 느껴지는데, 은이 들었던 마음의 자리는 얼마나 크게 느껴지겠는가. 그 사랑이 비록 채워지지 않는 반쪽임에도 불구하고 들어낸 후의 통증을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기에 이 지독한 연심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인가. 


연모한다 말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은에게 제 마음을 어찌 완연히 드러내 보였겠느냐마는 수줍게 제 마음을 고백해보았던 적은 수두룩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은의 시선을 받아본 적 없었기에 더욱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영이 궁녀가 준비해 온 겉옷을 걸치고 바깥으로 나가자 여전히 까만 암흑이 하늘을 뒤엎고 있었다. 궁녀가 든 등불과 하늘의 별빛 외에는 아무 곳에도 의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영은 걷고 있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뿐이었는데 어느새 도달한 곳이 대전 앞이었던 것이다. 영을 알아본 병사들이 예를 갖추었다. 전하께선 아마 침소에 드셨겠지요. 영이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들은 자가 없었기에 돌아오는 답 또한 없었다.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잠든 은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 또 담아 닳아 없어질 만큼 제 가슴에 새기고 싶었지만 오롯이 제 마음뿐이었기에 그리 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영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차디찬 바람이었다. 찬 바람이 영의 목덜미를 기분 나쁘도록 스쳤다. 문득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궁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도 찬 바람은 불어왔으나 냉기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영이 놀란 눈으로 제 앞에 드리운 형상(形狀)을 다 훑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먼저 닿아왔다.



"늦은 밤중에 여기서 뭘 하는 것이오."



그것은 아까 궁녀가 사라진 곳에 남은 온기 같은 것도 아니었으며, 영이 수없이 상상해온 은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던 기운이 이리 무정(無情)할 수 있나 싶을 정도의 냉기였으니 영이 뒤로 살짝 물러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은의 곁에 아무런 호위조차 따르지 않은 것이 영의 눈에 매우 거슬렸다. 이 옥체가 어떤 옥체인데 그 흔한 내관도, 병사도 따르지 않고 이리 홀로 있는가. 밤중에 홀로 다니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찌하시려고··· 영이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고 답했다.



"조금 답답하여 산보를 나선 것뿐입니다."



여느 때와 같은 맑은 음성이었지만 묘하게 울적한 기분을 담아낸 말투였을까. 허나 그런 것 따위 알 리 없는 은이 이어 물었다. 



"그것도 이리 밤중에."



역시 영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것일까, 어디가 답답하냐 물을 법도 했지만 애초에 그런 물음 따위 기대한 적 없는 영이었기에 은의 답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그의 냉정한 심기가 자신 때문에 더 상할까 염려되는 마음만이 들 뿐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신첩은 다시 중궁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하여 정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밤중에, 그것도 은과 이리 사적인 대화라도 나눌 자리가 흔치 않았으니 미련이 남지 않았다 하면 거짓이겠으나, 은에게 더 미움받고 싶은 생각 따윈 일말이라도 없었으니 그러한 것이다. 그랬는데, 그런 영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뜻밖에도 은의 답이었다. 



"아무리 궁 안이라 하여도 이리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니 앞으로는 그러지 마시오."



여전히 전과 다르지 않은 냉담한 말투였지만 그 속뜻이 따뜻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생각하여 영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것이다. 영의 행동에 은이 그녀를 또렷이 응시했다. 새어 나온 소리는 없었지만, 그 눈빛이 어쩐지 더 할 말이 있는 것이냐 묻는 것 같이 느껴졌다. 



"주제넘는 물음이오나, 혹 전하께 한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난 용기인 것일까. 허나 물음에 돌아온 것은 잠깐의 정적(靜寂)이었다. 이어 은이 말하라 답하지 않았다면 영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하께선··· 왜 늦은 밤중에 홀로 계시는 것입니까."



은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이것뿐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어쩐지 튀어나온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제 마음속에서도 차곡차곡 정리하여 온 수많은 질문들이 입을 넘지 못하여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다. 왜 저를 이리도 미워하시는 건지, 궁 바깥에 정말로 다른 여인이라도 생긴 것인지, 어찌하면 저를 조금이라도 돌아봐 주실 것인지- 허나 그 어떤 것도 지금의 영으로서는 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고작 이런 물음 따위가 저에겐 주제 넘는 게 되어야 하는 건지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중전은···  신경 쓸 필요 없소."



돌아온 답은 영에게 꽤 익숙한 것이기도 했으며, 여전히 가혹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껏 부풀어왔던 일말의 기대 따위가 무너지는 기분이다. 조금의 따스함에 걸었던 기대의 결말이 이러한 것이었나. 그렇다면 쉬이 무너질 온정에 속아 걸지 않았을 기대였다. 그러면서도 헤실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지금껏 은에게 박혀온 영의 모습이리라. 



"그렇습니까."



그리 답하며 내어 보인 영의 미소는 다른 이가 보면 매우 기괴한 것이었으나 은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으니 그 또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예를 갖추고 돌아가는 영의 모습이 무척 차분하면서도 올곧은 몸짓이었기에 은은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좇고 있었다. 늘 먼저 돌아섰던 은이었기에 영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그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제가 모질게 대했다 하여 축 쳐져 있었다면 더 보지도 않을 모습이었다. 허나 영이었다. 영이었기에 저리도 곧은 걸음을 내딛는 것이겠지. 그리하다 중궁전에 달하면, 제 침소에 들어 은의 눈길이 닿지 않을 때쯤이면 쉬이 무너져 눈물을 쏟겠지. 한 번도 보지 않았을 영의 모습이었지만 왜 이리도 세세하게 그려지는 것인지 은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은은 그 눈물이 싫었다. 본 적도 없는 것이 싫다니 어찌 그리 우스운 말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럼에도 확고히 들어서는 그 마음은 한 번도 부정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태생부터 자신은 저 아이와 연이 아닐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무엇보다 윤만형의 여식이다. 함양군의 일을 생각하면 치를 떨 정도로 싫은 대비 윤씨와 윤완의의 조카였고 그러하니 그녀가 내보이는 미소마저 저를 지독히도 붙잡을 족쇄처럼 느껴진 것이다. 영은 은에게 그러한 존재였다. 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사랑할 수 없을 연이기에 그렇다고 답할 것이었다. 어디에도 없을 악연이었다. 



"전하! 호위도 마다하고 대체 어딜 갔다 이제야 돌아온 것이옵니까!"



은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궁정(宮庭)에서부터 쭉 따르며 대체 어딜 갔다 이제 돌아온 것이냐며 유례없을 잔소리나 해대던 고내관이 계속해서 여쭈었다. 중전도 같은 것을 물었었다. 허나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매정한 답만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은이 그 물음에 홍련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나리의 존함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말하겠습니다.'



어찌 그런 당돌함이 있나. 넘어지려던 그녀를 붙잡았을 때 마치 그 모습이 꼭 중전과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이 아주 틀렸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너무나도 다른 성정이었다. 취객을 피해 도망치던 중이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에서도, 허나 기생이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말하던 그녀의 모습에서도 영과 닮은 구석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없었다. 기생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헌데 그 말을 들으면서도 홍련이 안쓰러워 보였던 연유는 무엇인가. 취객에게 도망쳐야 하는 삶을 살면서도 연화관에서의 삶이 제 긍지라고 답하던 여인이다. 허나 그런 것 따윈 은에게 신경 쓸 것이 안 되었다. 그저 홍련을 제 곁에 두고 싶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라면 제가 너무 서두르는 것인가. 영과의 악연 따위와는 다른 것이었다. 우연이 만든 인연이었다. 



"답답해서··· 산보를 나선 것뿐이다."



은의 묘한 대답에 고내관은 문득 중전마마를 떠올렸다. 어딜 가느냐고 물을 때면 언제나 산보를 가려던 중이었다고 답하던 영이다. 그것은 고내관이 아는 만큼 영도 알고 있었고, 또 은도 알고 있었다. 은의 말로는 세자빈 때도 그러하였다 했다. 마치 함께 걸어 주겠다는 은의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지 언제나 그렇게 답하곤 하였다. 



"중전마마를 만나신 것입니까."



고내관이 조심스럽게 묻자 은의 눈길이 매섭게 닿았다. 중전마마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돌아오던 일관된 반응이었기에 고내관도 그리 놀라진 않았다. 



"중전은 산보를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다."

"예··· 전하. 헌데··· 무엇이 그리 답답하셨던 것이옵니까. 혹 잠행을 나갔을 때 심기가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인지요."



그리 묻는다고 해도, 그저 여인과의 일이었다. 밖에서 만난 기생의 삶이 안쓰러워 그랬다고 답하면 과연 예 그렇습니까 전하··· 하며 마음도 같을 것일까. 분명 속으로는 여인 때문이었나 하고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아까 중전에게는··· 


뒤늦게야 흘릴 영의 눈물을 조금이라도 상상하기 싫었기 때문일 테지.



"그저, 그 삶이 안쓰러워서··· 그 눈물이 안쓰러워서 그러했다."



은의 뜬금없는 어구에 고내관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이내 혼잣말이었다는 듯 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도통 누가 안쓰럽다는 것인지 고내관으로선 알 수 없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조금 뒤면 정전에 들 시각이었다. 은과 마찬가지로 한숨도 못 잔 고내관이 아직은 짧은 밤을 조금 탓하고 있었으리라. 



"전하, 대비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허구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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