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선과 손길을 떼어놓고 무작정 앞만 보며 걸었다. 토도로키를 벗어나자마자 온몸을 감돌았던 상쾌한 기운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레이는 빠져나가는 그의 온기와 평안을 잡기 위해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순식간에 모든 평온이 빠져나간 레이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외로움과 익숙한 고통이었다. 


오늘 이렇게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도 빌어먹을 아버지가 어제 기어코 교육을 감행했기 때문에 피곤함을 동반한 통증은 다시 찾아왔다.


진통제와 닿았어도 곧바로 모든 통증이 가시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레이는 이 지옥이 끝나려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꽤 오랜 시간 그와 접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자신에게나 토도로키, 그에게나 제일 좋은 방법은 그 교육이라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었지만, 당분간은 그럴 수 없었다.


레이는 여전히 기분 나쁜 아버지의 시선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별로 소용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제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미친 것 같았는데.'



그나마 약간의 이성은 남아있는지 한계치를 넘어서는 일은 없었지만, 또 뭐 때문에 기분이 나빴는지 평소보다 정도를 모르긴 했다.


레이는 이제는 친구 같은 통증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 레이는 오늘 경기장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서둘러 찾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몇몇 사람이 말을 걸어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때때로 정도를 모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아키바 레이님! 아키바가의 능력을 한 번만 사용해주세요! 제 아이가 아픕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일은 아버지나 병원을 찾으시면 해결해 드릴 겁니다."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요.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단 말입니다. 당신도 아키바가의 사람이잖아! 그 능력. 한 번 사용해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사람이 많은 곳에 늘 대동했던 경호원도 없는 데다 이런 사람을 학교 행사장에서 만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레이는 순간 조금 당황했다.


아픈 아이의 아버지인지, 다급하게 매달리는 그가 조금은 안쓰러웠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아픈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에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노력이었는지 아이의 아버지는 레이가 금세 뒤를 돌아 사람들 틈으로 섞이자 더 따라오지는 않았다.



레이는 동정심도 공감 능력도 평범한 사람만큼은 가지고 있었지만, 학습능력 또한 우수했다. 다시 불행한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괴물은 아이가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의 기억을 지우겠다고 말했던 사람에게 다시 빌미를 던져줄 수 없었다.


뒤에서 절규 어린 남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레이의 귀를 타고 흐르는 누군가의 절망이 곧 그녀의 기분을 극도로 나쁘게 했다. 레이는 다시 속이 메스꺼웠다. 힘이 있어도 도와줄 수 없는 현실이 저주스러웠다.


레이는 치밀어오는 욕지기를 참았다. 당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서 토하고 싶었지만, 곳곳에서 계속 느껴지는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의 달라붙는 시선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이 절실했다. 아무도 없는, 아버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이럴 때마저 그 가주라는 자리가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평판을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냐, 아냐. 나에게 가주 자리는 중요해야 해. 꼭 차지해야 해.'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7살 이전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 레이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잔상이라고 해야 하나 집념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알 수 없는 의지력은 "왜?"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레이가 사람들을 피해서 걷다가 어딘가로 통하는 계단 앞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관중석으로 들어가는 계단 중 한 곳인 모양이었다.


멀리 들려오는 소리를 제외하면 근처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고. 레이는 층계에 주저앉아 좀 쉬기 위해 계단에 발을 디뎠다.



"아."



그때였다. 정제되지 않고 오로지 파괴만 원하는 것 같은 불같은 사람을 만난 것은.


초면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능력과 다르게 그의 눈은 항상 얼음처럼 차갑고 소름 끼쳤다.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직업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을 봐온 레이가 판단하기에 엔데버는 무슨 이유로 히어로 노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직업적 사명보다는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엔데버를 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저런 눈을 하는 것들끼리 왜 아버지가 된 건지. 신은 무슨 이유로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는 것들에게 그런 역할을 준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이는 말세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지.


저런 눈을 한 사람이 가족에게 잘할 리 만무했다. 신문에서 엔데버에게 자녀가 있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저 사람의 자식 또한 참 안타깝다고 그때는 생각했는데.


과거의 그를 회상하며 레이는 엔데버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저 자신을 흘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계단을 마저 내려오는 그는 시선을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아무튼 레이를 스쳐 지나갔다. 


아까까지 복잡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줌마가 그의 부인이라는 것 그리고 토도로키 쇼토가 엔데버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하나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들에게 들었던 불행했던 사정까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이 많은 사실은 레이의 마음을 부채질했다. 레이 아줌마가 그런 웃음을 짓는 게 싫었고, 토도로키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싫었다.


그리고 토도로키가 우는 게 싫었다.



결국 레이는 수많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저기요. 엔데버."



레이는 자신의 부름에 돌아보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 몇 년 전에 본 그 눈빛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짧게 마주쳤는데도 살짝 오한이 들었다. 아, 물론 아키바 에이지, 자신의 빌어먹을 아버지를 봤을 때보다는 덜했지만 말이다.



"아이를 당신의 분풀이로 쓰지 마세요. 당신의 도구도 아닐뿐더러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 줄 이유도 없으니까요."



뜬금없이 자신을 붙잡고 설교를 해대는 그것도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 딸뻘 되는 애가 이런 얘기를 지껄이는 것을 그는 못마땅한 눈을 하고 지켜보았다. 손을 잔뜩 움켜쥐며 부들부들 떠는 꼴을 보니 꽤 열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반대입장이었다면 주먹부터 꽂았을 텐데.'



아까보다 크기를 더 키우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자신이 공격받을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레이는 태연했다.


도가 지나친 말을 한 이유 반 정도는, 히어로를 표방한 그가 자신을 때리지 않으리라는 것에서 온 객기였고 또 반쯤은 그저 화풀이였다.


아이라고, 그저 어리고 약하다고, 그저 아버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지 말아야 했다.


레이도 지금은 원하는 바가 있어서, 바라는 게 있어서 숨을 낮게 쉬고 눈치를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아버지의 면전에 이 말을 던져주고 싶었다. 



"정 하고 싶으면 본인이 열심히 하시면 되잖아요. 자기가 못하니까 내 아이에게라니 너무 추잡하지 않아요?"

"지금 네가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아키바 소녀?"



첫 마디만 하고 그만두었다면, 아마도 엔데버는 화가 났어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겠지만, 그 언젠가 벤치에서 소리 없이 울던 토도로키를 떠올린 레이는 끝끝내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엔데버는 정말 진심으로 열 받았는지 가던 걸음을 돌려 성큼성큼 레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계단 위에서 올마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것과 달리 성으로 불렀다. 믿음직스럽지만 조금은 바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정치적인 것까지 이용하다니 꽤 하는 사람이잖아?'



레이의 안에서 올마이트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갔다. 레이의 성을 들은 엔데버는 다가오는 것을 멈췄지만,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올마이트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레이는 "아, 실례 제 소개가 늦었군요. 아키바 레이입니다."라고 말하며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는 엔데버는 더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럴수록 더 해사하게 웃는 레이였다.



"참고로 댁이 도구 취급하는 아드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죠. "



레이의 날카롭게 벼려진 말에 올마이트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지만, 레이는 부러 더 꿋꿋하게 얘기했다. 신분이 들통난 마당에 더 숨길 것도 봐줄 것도 없었으니까.



"제가 아키바가의 유일한 후계라는 것도 그리고 아키바가가 이 나라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도 알아 두셨으면 좋겠네요."










***










"저 사람에게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방법을 물어봤다고요?"

"음- 혹시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아까 엔데버에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올마이트와 함께 비어있는 선수 대기실로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돈된 선수 대기실을 꽤 오랜 시간 훑어본 뒤 아무런 도청 장치도 카메라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 자리를 마련해 올마이트와 마주 앉았다.


안부 인사로 시작된 대화는 곧 계단 아래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올마이트가 기세를 잡았다. 그때의 상황을 봤을 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은 레이였고, 그녀가 시비 거는 상대는 엔데버였으니까.


당장 싸움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흉흉했던 분위기, 그리고 레이 앞에 서있던 흉흉한 엔데버 때문에 올마이트는 처음으로 레이 앞에서 말 안 듣는 환자가 아닌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위엄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왜 그런 장소에 있으며 엔데버와 무슨 대화를 했길래 그 지경이 되었냐는 올마이트의 훈계의 시작은 종국에는 왜 올마이트야말로 엔데버와 있었냐 질문으로 새어버렸고, 다시 흐름은 레이에게 왔다.


다만 이 일련의 대화에서 레이는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올마이트는 친절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전후 사정을 들은 레이는 올마이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혹시 제정신이세요?"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레이는 자신의 환자에게는 말을 가려 할 줄 알았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과 잔소리를 뒤로 넘기고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아 레이는 올마이트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저 사람이나, 제 아버지나 같은 부류의 인간이에요. 그런 거 남들에게 묻지 말고 그냥 미도리야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뭔지 그와 함께 고민해주세요. 대화도 많이 하시고요."



마치 처음 제자를 키우는 선생님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의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자는 처음 키워보는 거 맞지 참.'



레이는 그가 다 적을 때까지 소파에 기대서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가 필기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은 아니었다.



"다 쓰셨어요? 이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고요. 제가 선생님을 찾은 이유는....."



올마이트가 필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품 안으로 수첩과 펜을 집어 넣는 것을 확인한 레이는 자세를 바로 하고 주위를 살핀 뒤 최대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입이 말랐다. 하지만,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제가 입원했을 때, 얘기하시던 거 찾으셨는지 알고 싶어서에요."

"증거 말이냐?"

"네. 아키바 에이지가 올포원과 내통했다고 하셨잖아요."








마음의 바다(心海)에서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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