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이었다. 단과 건은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건이 침묵을 깼다. 나, 유학 준비하려고. 단은 바삐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건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열심히 해.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말투였다. 어디로 가는지 안 궁금해? 건이 물었다. 프랑스 아니야? 아니, 영국으로 가. 웬 영국? 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직은 불어보단 영어가 편해서, 우선은 영어권으로 가려구. 어차피 프랑스랑 가까우니까 여행도 갈 수 있고… 얼마나 오래 있는데? 건은 손을 맞대고 손가락을 굽히고 펴고를 반복했다. 학교 다니고.. 가능하면 거기에 정착할 생각이야. …그렇구나. 응. 그 날 단과 건은 평소와 같이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날 이후 단과 건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함께 독립영화를 보고, 밥을 먹으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화방에 가서 물감을 골랐다. 가끔씩 식당에서, 카페에서, 길을 가다가도, 유학 준비는 잘 되어가? 하고 물으면 뭐, 그냥 그렇지. 하고, 건은 대답했다. 그 이상은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건은 자신의 선택에 미련이 없었고, 단은 그런 건을 믿고 존중했다. 그렇기에 둘은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와 같이, 단과 건은 그저 그런 사랑을 했다.

시간은 흘러 꽃이 피고, 다시 지고,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종강을 앞둔 단과 건은 함께 사진 수업의 마지막 과제를 위해 산에 올랐다. 아, 덥다. 단이 손으로 뜨거운 햇빛을 막으며 말했다. 그러게. 벌써부터 이러면 7월에는 얼마나 더울까. 건은 단의 반대쪽 손을 잡아주었다. 건의 손은 항상 차가워서, 겨울이면 단이 그의 손을 녹여주곤 했다. 7월에는 영국도 한국만큼 더울까? 단이 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그렇지 않을까. 단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뭐, 그 땐 아직 한국에 있을 테니까. 건이 손 잡고 버티면 되겠네. 음, 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종강하면 바로 출국할 거 같아.

단은 걷던 발을 멈추었다. 갑작스럽긴 하지. 건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네. 잠시 침묵. 잘 다녀와. 건강 잘 챙기고. …응. 단은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계속했다. …우리는, 단이 고개를 들어 건을 보았다. 어떻게 되는 거야? 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되기는. 단은 다시 흙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렇게 되는 거지.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 그 날의 촬영은 어쩐지 마음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 단과 건은 그 날 찍은 사진들을 전부 삭제해버렸다.

이후 단과 건은 매일같이 만나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다시 밥을 먹고, 카페에 가며 종일을 함께했다. 건의 유학에 대해서는 둘 모두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출국하기 바로 전날조차도. 출국 당일, 단은 건과 함께 공항에 가기로 했다. 덥지. 건이 단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괜찮아. 단은 그대로 건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건은 단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단과 건은 말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어느새 열차는 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체크인을 해놓았기에 건은 금세 짐을 부치고는 단에게 돌아왔다. 밥이라도 먹을까? 그래. 단과 건은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공항 밥 오랜만에 먹어. 단이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비싸구, 맛은 그냥 그렇구. 그렇게 말하는 단을 보며 건은 웃으며 답했다. 그런 게 매력이라면 매력이지. …어디론가 떠나기 전에만 그렇지. 단의 대답에 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미안해. 단은 건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미안해. 단은 아무렇지 않다고만 생각했던 스스로에게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괜찮아. 이해해. 괜찮아… 건은 단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이후 침묵 속에 식사를 마친 단과 건은 출국장 입구 앞에 섰다. 이제 가야하지? 슬슬 그래야지. 건은 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아니야. 금방인데, 뭘. 건은 단의 눈을 바라보다 안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응. 당연하지. 건은 조심스레 단을 품에 안았고, 둘은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았다. 단은 이번에는 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녕. 그렇게 말하는 건의 눈동자는 일렁이고 있었다. 잘 가. 단은 평소와 같은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건은 여권을 꺼내 들고 출국장 입구로 향했다. 단은 그런 건의 뒷모습을 보며 속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뒤에 섰다. 왜인지 그가 선 줄이 유난히 빠르게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내 건의 차례가 오고, 그가 결국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단의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건이 떠났다.

단은 그대로 주저 앉아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날 것과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짧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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