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경고? 휴학? 가지가지하네.’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어째서 소중한 사람은 쉽게 상처를 주는 걸까. 내게 가족이라곤 엄마 밖에 없었다. 엄마도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엄마는 무슨 말을 해야 나를 아프게 할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타인 앞에선 무감각 일변도로 감정이 없는 척 연기할 수 있었지만 엄마를 앞에 두면 방어기제가 허물어졌다. 엄마의 말에 쉽게 아파하고 걸핏하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뱃속에서 직접 낳아 키워준 사람은 자식에 대해 너무할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전혀 몰랐다. 엄마는 자신의 감정도 추스르기 버거워 남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공부를 안 한 걸 아프단 핑계대지마.’

엄마는 언제나 우울증이 변명이라고 했다. 아픈 게 아니라 게으른 거며 멍청한 거라고 했다.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해 철저히 부인했다. 보다 못한 삼촌이 억지로 상담을 받게 해도 약을 꾸준히 먹지 않았다. 그러면서 약의 효과가 없는 건 자기가 멀쩡해서 그런 거라고 우겼다.

엄마의 증상은 감정이 급속도로 일변하다가 모두 태우고 재만 남긴 뒤 구석에서 머리를 쥐어 잡고 엉엉 우는 거였다. 나는 그런 엄마가 싫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사소한 일에 소리를 지르고 신경질을 부리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아 어떤 일에도 둔감하도록 노력했다.

덕분에 무기력해져갔다. 만사에 의욕이 없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내가 하는 일은 뭐든 실패였다.

엄마는 원인이 내게 있다고 했다. 노력을 하지 않고 적극적이지 못해서 기회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다그치고 몰아붙였다. 엄마가 없는 지금은 그 지긋지긋한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이것은 꿈이다.

‘어쩌다가 너 같은 애를 낳아서….’

꿈이란 걸 알아도 상처였다.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내가 삼년 전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자살했다. 바로 이 빈 집에서, 본인이 어릴 때 살던 집으로 돌아와 목을 매는 것을 택했다. 마치 연어가 나고 자란 강을 찾아 헤엄치듯 회귀했다. 다른 사람들이 지칠 때 고향을 찾는다면 엄마는 아예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사라졌으면서 아직도 꿈에 찾아온다.

삼년 전에 죽은 엄마는 나의 대학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엄마의 자살 직후 급속도로 엉망이 된 삶과 올해 초에 받은 학사 경고와 휴학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꿈에서 나를 다그쳤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빈 집에서 화를 내고 야단쳤다. 꿈속의 엄마는 어렸을 때처럼 무섭고 거대한 어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도 그저 나약한 사람이었음을 안다. 장례식장에서 본 엄마는 세상이 무서워 작게 쪼그라든 한 명의 인간에 불과했다.

딸인 나도 엄마와 별 다를 바 없다.

“엄마, 여기보다 거기가 좋아? 그럼 나도 따라갈게.”

삐걱 하고 낡은 쇠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이 들려온 쪽으로 창밖을 내다 봤다.

남자아이가 황급히 문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러워 잠에서 깼다. 삼촌이 박하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전기가 아예 나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젯밤과는 달리 날이 훤했다. 방금 정신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밝은 세상이 새삼스러워서 조심스레 눈꺼풀을 깜박였다. 어둠에 겨우 익숙해진 눈이 고생이었다.

“하민아, 들어와서 상 차려!”

숙모가 바깥을 향해 외쳤다. 개가 사납게 컹컹대는 소리와 삼촌의 ‘어어, 어어’ 하는 겁먹은 목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개가 할머니에게 얌전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부스스 일어나 느린 동작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이불을 개어 한 쪽에 밀어놓고 베개를 올려두었다. 어젯밤 물난리가 난 집안 정리가 끝나자 박하민은 너무 늦었으니 여기서 자라고 했다. 자신은 큰 방에서 할머니와 엄마와 함께 자겠다고 하자 삼촌도 본인이 소파에서 잘 테니 나는 작은 방을 쓰라고 했다. 빈 집도 비가 샐테니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졌다. 어제 점심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이다.

닫혀있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거실 상에 물병과 수저를 놓던 박하민이었다.

“일어났어?”

열려진 창으로 흘러들어온 오전의 빛이 눈부셨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고 있었다. 태양빛이 박하민의 뒷머리에 닿아 산산이 부서졌다.

자다 일어난 얼굴을 보자 박하민이 웃었다. 양 쪽으로 강아지처럼 쳐진 눈꼬리가 보기 좋게 굽어졌다. 무릎을 굽힌 박하민은 좌식 상 위에 오인분의 수저를 놓고 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

“정신 차리게 물 마실래?”

말을 듣고 보니 아직 세수도 하기 전이었다. 박하민의 얼굴은 금방 씻고 나온 것처럼 뽀얬다.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숙모가 자랑하는 좋은 피부를 그대로 물려받아 스킨만 발라도 볼이 매끈매끈했다. 언젠가는 자취방에서 씻고 나와 로션을 바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기도 똑같은 브랜드를 쓰고 싶다고 했다. 같은 향기가 나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지는 못하게 막았다. 숙모에게 들킬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하민아, 누나 일어났으면 화장실에 있는 엄마 로션 쓰라고 해라.”

“들었지?”

얼굴을 가리고 욕실로 향하자 뒤에서 박하민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습관적으로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욕실에 불이 들어왔다. 아침에 두꺼비집을 다시 올린 모양이었다. 숙모는 할머니와 함께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최근 들어 숙모를 대하기가 점점 껄끄러웠다. 외숙모는 무슨 일이든 아들을 우선으로 생각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엄마라는 존재는 외숙모와 같을지도 모른다. 비정상적인 엄마를 가진 나는 박하민이 은연중에 부러워서 어렸을 때는 숙모가 탐탁지 않았다.

엄마가 자살하고 나서 삼촌과 외숙모는 나에게 많이 신경을 썼다. 멀리 사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자주 전화해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생활비에 보탬이 되라며 계좌로 돈을 보내줬다. 그런 내가 박하민과 하지 말아야 될 짓을 하고 있으니 두 사람을 배신한 셈이었다. 처음에는 박하민이 먼저 좋아했으니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고삼이었던 사촌의 고백을 받아주고 학교를 졸업하면 찾아오라고 한 건 나였다.

과거에는 주변 사람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겁났다. 만약 이 관계가 알려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너무나 최악이라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각을 하고 나자 삼촌과 외숙모의 연락을 받기 힘들어졌다. 수업이나 알바 때문에 바빴다고 변명하고 몇 시간 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답장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다 바로 어제 어른들 몰래 박하민과 섹스를 하고 얼굴을 마주치니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등을 만져보니 식은땀마저 나고 있었다. 반면 거실에서 상차림을 돕고 있는 박하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양심의 가책은커녕 나를 보고 반가워하기까지 했다.

세수를 하고 숙모가 사용하라고 한 로션을 바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거실로 나올 때쯤엔 이미 배가 상당히 고팠다. 실내에 퍼진 음식 냄새도 한층 강해져 있었다.

“일어났구나, 우리 손녀딸.”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머니가 반겨주며 꼭 안아주셨다. 나보다 키가 작은 할머니의 몸에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났다. 아침부터 전을 부친 모양이었다.

“씻었니? 로션은?”

“잘 썼어요. 감사합니다.”

“얘는, 가족끼리 그 정도는 당연하지.”

숙모가 두 손에 밥그릇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상에 앉아 전을 집어 먹고 있던 박하민이 있었다.

“너는 어른들이랑 같이 먹어야지 벌써 손을 대면 어떡하니.”

“엄마도 아.”

“놔둬라. 맛있게 잘 먹는데 뭘.”

숙모가 눈을 흘기자마자 박하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질로 전을 찢었다. 그리고는 숙모의 입에 전을 내밀며 넉살좋게 애교를 부렸다. 숙모는 말로만 ‘으이구’라고 진절머리 내면서도 싫지 않은지 덥석 받아먹었다. 박하민은 맞은 편의 할머니에게도 잊지 않고 곧바로 들이밀었다. ‘할머니도 드셔야죠.’ 할머니는 손자가 예쁜 짓 한다고 칭찬하며 음식을 받아먹었다.

“누나도 이리 와. 내가 먹여 줄까?”

박하민이 다음으로 선택한 건 나였다. 전의 가장자리를 찢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박하민이 미소 지으며 손짓한 순간, 할머니와 숙모 모두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내 아들이지만 여자친구한테 사랑 받겠네. 어휴,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엄마한테 소홀할 게 눈에 보인다.”

“하민 어멈도 어멈이다. 젊은 애들이 연애하면 부모 생각 안 나는 건 당연한데 뭘.”

“어머니, 하민 아빠도 그랬어요?”

“그럼 안 그랬을까.”

상 앞에 앉아 있던 숙모가 일어났다. 어른들이 여자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의기양양할 정도로 두 눈을 반짝거리던 박하민은 내가 외면하자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박하민과 사이좋은 모습을 도저히 보일 수 없었다.

부엌으로 가자 숙모가 국을 옮겨달라고 했다. 하얀 사기그릇에 담긴 소고기 무국이 어제처럼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었다. 큰 쟁반에 국그릇 다섯 개를 들고 걸어 나오자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를 보며 할머니와 잡담하던 박하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코앞까지 다가왔다.

“무거우니까 내가 할게.”

할머니는 화면 속 트로트 가수의 노래를 듣느라 여념이 없었다. 박하민이 쟁반을 대신 받아드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평범했건만 심장박동이 한층 빨라졌다. 박하민이 국그릇을 하나씩 놓는 모습을 뒤로 한 체 부엌으로 돌아갔다. 이 집에서는 서로 가까워지는 걸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다 가져갔어. 이제 먹자.”

숙모가 양 손에 밥그릇을 들고 인심 좋게 웃었다. 상으로 향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타이밍 좋게 현관이 열리고 삼촌이 나타났다. ‘밥 다 됐으니까 와서 앉아요, 여보.’ 라는 숙모의 말에 삼촌이 손을 씻겠다며 화장실로 갔다.

“여기 앉아라. 할미 곁에.”

어디에 앉을지 몰라 엉거주춤한 사이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정해주었다. 내 지정석인 할머니 옆이었다. 그 순간 박하민이 자리를 옮겼다. 분명 조금 전까지 할머니의 맞은편에 앉아 하하호호 거렸으면서 내가 앉는 순간 나의 맞은편으로 이동했다.

손이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서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원망스러워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할 수만 있다면 눈 위를 손바닥으로 가려버렸을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저렇게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이해가지 않았다. 고작 한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데 왜 이렇게 애처럼 구는 걸까.

속이 타들어가는 와중 삼촌과 숙모가 왔다. 숙모는 박하민의 옆이자 할머니의 맞은편에 앉았고, 삼촌은 할머니와 숙모의 가운데였다. 박하민과 나는 각각 식탁의 끝을 차지했다. 박하민이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할 때 나도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였다. 할머니가 어서 먹자고 하자 가족들 모두 수저를 들었다.

“어머니, 아침에 다시 보니까 뒷집 아들 말이 맞네요. 요즘 비가 많이 와서 그런가 지붕 판넬에 틈이 생겼어요.”

“그 청년은 몇 시에 온대요?”

“아침에 온다 했으니 곧 오겠지.”

다들 염두에 두고 있는 집수리가 거론되었다. 상에 올라온 건 제육볶음과 호박잎, 그리고 감자전이었다. 사람이 여럿이다보니 먹기 좋게 두 그릇 씩 나눠 담겨 있었다. 붉게 양념된 돼지고기를 입에 넣은 박하민이 ‘음, 맛있다’고 한 마디 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많이 먹으라고 했다.

“저희는 식사하고 장 보러 갈 건데 어머니는 집에 있으시겠어요, 그럼?”

“너희끼리 갔다 와라. 지붕 수리도 있으니 나는 집에 있어야겠다.”

오늘은 장을 보러 갈 것이다. 엄마의 산소에 가져갈 음식을 만들기 위함이자 혼자 계시는 할머니를 위해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했다. 할머니 혼자서는 장을 보기 위해 매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을버스를 타셔야 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엄마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로 향할 것이다. 이후엔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이곳을 떠난다. 시골에 내려올 때는 나 혼자 왔지만, 올라갈 때는 삼촌네 가족과 함께 하기로 했다. 자취방에 데려다 줄 테니 삼촌의 차를 타고 가라는 거였다.

그러나 함께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민아, 넌 계속 그렇게 아르바이트 할 거니? 공부는 어쩌고.”

박하민은 삼 개월 전부터 중학생을 가르치는 과외를 했다. 박하민이 다니는 대학의 이름과 과를 대면 과외 자리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다. 게다가 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기까지 했다. 과외 문의가 하도 많이 와서 질릴 정도라고 그간 박하민은 핸드폰 너머 피곤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딴에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내게는 자랑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숙모는 박하민의 아르바이트가 얼마나 탐탁지 않은지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같은 화제를 꺼내고 있었다. 잔소리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박하민의 짙은 눈썹이 가볍게 팔자가 되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하느라 근래 들어 피곤해하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덕택에 박하민과는 그 동안 만나지 못했다. 얼마나 아쉬웠던지 고모의 기일에 빈 집에서 어른들 몰래 섹스를 하자고 조른 게 박하민이다.

“어머니, 하민이가 일에 정신 팔려서 이번 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졌어요.”

“엄마, 그만해요. 이제 고등학생도 아닌데.”

“대학생은 성적이 안 중요하니? 대학원 진학 준비도 해야지.”

“기말에 만회한다고요.”

숙모의 잔소리가 박하민의 신경을 긁어놓고 있었다. 답지 않게 눈살을 찌푸리며 수저를 식탁에 놓는 달그락 소리가 커졌다. 박하민은 좀처럼 부모에게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타인과 부딪칠 일을 최대한 피하는 성격이었다. 소극적이거나 약하다기보다는 분쟁을 귀찮아하는 편에 가까웠다. 박하민은 언제나 나에게 말했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면 듣는 척을 하면 된다고. 약아빠진 소리였지만 사회생활의 기본이기도 했다. 나는 그 기본조차 하지 못한다.

“내버려 둬, 하민 엄마. 장학금 좀 안 받으면 어때. 지가 일하고 싶다는데.”

“당신이 허락해줘서 문제야. 학교에서 집이 멀지도 않은데 나가 산다는 게 말이 돼?”

“독립하고 싶다잖아. 대학생이면 그럴 때도 됐지.”

귀를 의심했다. 박하민이 집을 나가고 싶어 한다고?

여태까지 최대한 정면을 피하던 시선이 거짓말처럼 눈앞으로 향했다. 드디어 자신을 쳐다보자 박하민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주인의 지시를 잘 따른 개가 마치 칭찬을 해주기를 바라는 모습 같기도 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상황을 내가 환영할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게 분명하다.

“누나도 혼자 살잖아요.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죠.”

개소리. 헛소리도 저런 망언이 없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에게 배울 것이 있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지경이다. 나는 약을 먹지 않으면 불안 증세가 심해져서 일상생활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한심한 사람이다.

순간 깨달았다. 오늘분의 약이 아직이라는 걸.

약이 들어있는 캐리어는 빈 집에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순식간에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하고 입맛이 사라졌다. 아침부터 박하민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심장이 뛰어댄 건 약을 먹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하민아, 혼자 살면서 여자친구 만나려고 그러냐.”

“어머니도 참. 못 하는 소리가 없으셔.”

할머니의 놀리는 말에도 박하민은 웃기만 할 뿐 부정하지 않았다. 박하민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 뻔하다. 자취의 이유는 할머니의 말대로 부모의 간섭받지 않고 이성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대상이 나라는 거다.

박하민은 전철로 한 시간이나 걸려 만나러 오면서도 단 한 번도 자고 간 적이 없었다. 외박을 하면 추궁을 받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취를 한다면 그 동안 박하민을 통제하던 많은 제약이 사라진다.

박하민의 대학이 삼촌 집에서 내 자취방으로 오는 방향에 있기 때문에 대학 근처로 방을 구하면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렇게 되면 주말마다 자고가려 들 게 분명했다. 이 길의 말로는 뻔하다.

“설마 지금 만나는 애 있는 건 아니지?”

삼촌이 허허실실 굴지 몰라도 숙모는 그렇지 않았다. 날카로워진 부모의 말씨에 박하민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곤 입 안의 음식을 꿀꺽 삼켰다. 수저를 놓은 지 오래인 나는 손아귀에 땀이 흘렀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식탁 아래에서 손바닥을 무릎에 문질렀다.

“없어요. 여자친구는 무슨.”

“근데 왜 자취를 하겠대.”

“동기들 중에 혼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학교 근처에 살면 아침마다 지하철 안타도 되잖아요. 시간도 절약하고.”

“하민 엄마, 놔 둬. 지 돈으로 나가겠다는데 대견하지도 않아. 나도 저 나이 때 어머니한테 손 안 벌렸어. 저게 나를 닮은 거지.”

“장학금도 계속 받을 수 있어요. 약속해요.”

“지가 자신 있다잖아.”

“설마하니 사고라도 치면…, 어휴. 말을 말자. 그 때는 엄마한테 죽을 줄 알아.”

모공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박하민은 잠자리에서 피임에 철저히 신경 썼다. 언제나 콘돔을 준비하는 건 박하민이었다. 자신이 여러 개 지니고 다니면 부모에게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내 자취방 서랍에 콘돔을 넉넉히 채워두었다.

나의 몸 상태를 세심히 체크하고 예정일보다 늦어지면 나보다도 걱정했다. 생리 불순 정도야 자주 있는 일이라 무심해진 이쪽에 비하면 자신의 몸도 아니면서 어디 잘못된 게 아니냐 노심초사했다. 체외사정법은 믿을 수 없다고 콘돔을 반드시 꼈다. 중간에 뺄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덕분에 적어도 피임 관련해선 박하민을 전적으로 신용하고 있었다.

“애도 아니고 좀 믿어주세요. 책임감은 있으니까.”

“잘 먹었습니다.”

사실 박하민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삼촌과 숙모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박하민에게는 여러 가지 가면이 있다. 상대에 따라 가면의 모습이 변했다. 동성에게는 전형적인 사교성 좋은 유쾌한 이십대 초반 남자였고, 어른들에게는 좋은 학교와 좋은 과에서 장학금까지 받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이성에게는 아이돌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얼굴에 어딘지 속을 알 수 없는 신비로움 마저 존재했다.

하지만 내게 박하민은 달랐다. 한 살 어린 사촌 동생이자 나에게 욕정하는 남자이자 이제는 보호자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정신과에 상담을 갈 때마다 바래다주면서 나를 위해 면허를 따고 싶다고 했다. 사학년이 되면 삼촌이 차를 사 주기로 했다고 한다.

박하민의 모든 말과 행동은 분명 이쪽을 위한 것인데도 어쩐지 나를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의사에게 항상 같이 오는 박하민을 남자 친구로밖에 둘러대지 못하면서,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촌 동생과의 육체관계를 평범한 애인으로 속이는 게 나에게 일절의 도움도 되지 않다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았다.

“좀 더 먹지 않고.”

삼촌의 말대로 밥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할머니조차 아무 말 없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친척들이 내 이상기후를 감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맛 없으면 고기만이라도 먹어야지’ 라고 하는 숙모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벌레처럼 맴돌았다.

조심스럽게 목을 가다듬었다.

“약을 저 쪽 집에 두고 와서 아직 못 먹었어요.”

“으이구, 불쌍한 내 새끼.”

“어머니, 괜찮아요. 우울증 정도는 요즘 누구나 갖고 있는 걸요. 금방 괜찮아질 거에요.”

“그럼 얼른 저 집에 가 봐야겠네. 약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할머니가 식탁이 꺼지도록 한숨 쉬었다. 숙모가 재빨리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삼촌도 태연하게 다독였다. 삼촌은 결혼 전부터 아팠던 엄마 때문에 우울증 환자에게 누구보다도 익숙했다.

약을 못 먹었다는 말에 갑자기 입을 다문 박하민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식은땀이 흐르는 차가운 손을 옆에 있는 할머니에게 주물리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좀, 그만 쳐다봤으면 했다. 박하민 때문에 심장에 좋지 않았다.

“상태가 안 좋으면 집에 있어라. 어제 혼자 내려오느라 힘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하렴. 하민이랑 하민 아빠만 데려가도 되니까.”

“저도 집에 있으면 안 돼요? 장 보는 건 엄마 아빠 두 분이서 충분하잖아요.”

“네가 와야 무거운 걸 들지. 니네 아빠 이제 늙어서 힘도 없는데.”

“그건 네 엄마 말이 맞아.”

“그럼 저번처럼 많이 사지 말고 금방 와요.”

“간 김에 할머니 장도 봐 드려야지.”

박하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내가 걱정돼서 남고 싶지만 더 이상 고집을 피웠다간 부모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럼 할미는 여기 있을 테니 너는 저 집에 가 있을래?”

할머니의 체온 높은 손바닥이 등을 상냥하게 쓸었다.

“그렇잖아도 찬현이가 수리하러 갈 텐데 네가 거기 있으면 되겠다.”

“누나가 본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집 주인이 있고 없고 차이가 있지.”

박하민은 결국 부모를 따라 시장에 가게 되었다. 나 혼자 빈 집으로 간다는 말에 박하민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찬 물을 목으로 거칠게 넘기며 울대가 꿀렁거렸다.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박하민이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일 산소에 갔다가 차로 떠날 테니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오늘을 넘기면 그 동안의 마음가짐이 수포로 돌아간다.

“어머니, 그럼 필요하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저희가 사 올 테니까.”

슬슬 다들 수저를 놓는 분위기라 상을 치우는 데 자원했다. 다 먹은 그릇과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 속에 빈 그릇을 내려두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누나, 괜찮아?”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저 때문에 불안초조해서 힘들었냐는 건지.

“얼굴이 창백해.”

“신경 쓰지 마.”

“엄마한테 가기 싫다고 핑계대서 안 간다고 할까?”

“그냥 따라가. 나 혼자 있어도 되니까.”

갑자기 등에 느껴지는 체온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쳐냈다. 박하민이 뒤에서 몸을 붙여온 거였다. 거실에서 어른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데 스킨십을 하다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며 입술을 깨물자 반 발자국 정도 물러난 박하민이 옅게 미소 지었다. 저보다 키가 작아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내가 제발 이러지 말라고 눈으로 애원하는 모습에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하민아, 누나 상 치우는 거 도와주고 나면 준비해라. 바로 출발할 테니까.”

“네, 아빠.”

가까운 곳에서 들린 삼촌의 목소리에 솜털이 쭈뼛 섰다. 삼촌이 부엌 근처에 있는 큰 방으로 들어가면서 한 말이었다. 겁에 질린 나에 비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박하민은 침착한 목소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알겠다고 답했다.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싫다고 하는데도 자신을 밀어붙이는 태도가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담대함의 정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결국 포기하고 싱크대의 물을 틀자 박하민이 옆에 나란히 서서 손에 물을 묻혔다. ‘설거지 도와줄게.’ 라고 하는 말투에서 여유마저 묻어났다.

“알겠으니까 가서 그릇 더 가져와.”

“응, 누나.”

박하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로 되돌아갔다. 주인에게 꼬리 치는 강아지 같은 평소의 연하 말투였다. 제 뜻대로 따라준다는 것을 확인하자 고압적인 태도가 사라졌다.

방금 전은 내가 알지 못하던 박하민이었다. 자취를 시작하면 사이가 좀 더 가까워질 거란 생각에 어쩌면 그 동안 참고 있었던 욕망을 드러낸 건지도 모른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나중엔 어떻게 되는 걸까. 박하민을 통제할 수 없는 미래가 뻔히 그려졌다.

이 관계에서 목줄을 쥐고 있는 건 사실 내가 아니라 박하민이다. 박하민의 말대로 나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렇게 사느니 역시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설거지 세제로 일어난 거품을 손에 묻히며 박하민이 즐거워하든 말든, 내 머릿속은 이미 자살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인 여성을 위한 로설/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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