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고 창문에 신문지를 바르다 낯선 언어가 쓰여있는 신문지 위에서 어벤져스를 찾았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묵은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폐허와 그 위에 합성된 어벤져스의 사진이 있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알파벳에 이어지는 느낌표 세례. 캡틴 아메리카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채도가 높은 남색의 수트와 크게 A가 적힌 헬멧을 쓴 채 캡틴 아메리카는 카메라를 약간 비껴 어딘가를 곧게 쳐다보고 있었다. 

색바랜 종이 사진 위로 단호한 목소리가 겹쳤다. ‘네 평생동안 날 알았어.’ 그러나 버키의 평생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단편적이고 끔찍했으며 대부분 윈터 솔져로서의 기억이었다. 캡틴 아메리카가 말한 친구로서의 기억은 아주 드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때도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버키 반즈는 내가 여기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짜증스러움을 느꼈고, 캡틴 아메리카를 두고 도망가고 싶다고 징징거리면서도 이 정도면 아주 괜찮다는 마음을 느꼈다. 그런 양가적인 감정이 두 손 안에 들어오면, 손잡이를 아무리 돌려도 철컥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는 고장난 문 앞에서처럼 막막했다. 모든 것이 그랬다. 슬픔과 기쁨이 뭉쳐 있고, 처리하라는 소리와 죽게 둬서는 안된다고 하는 소리가 뭉뚱그려졌다. 밝은 감정도 어두운 감정과 엉켜 있어 감정을 느끼는 자체가 혼란스럽고 비참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 두려웠고, 그 감정을 느낀 순간 닥쳐올 고통이 두려웠다. 또다시 들키고 말 것이다. 모두 다 삭제되고 재설정 될 것이다. 버키는 브레인워싱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 때마다 반복되는 일련의 고통스럽고 잔인한 행위는 뼈에 새겨져 있었다.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어지러울 정도로 울렸다.

‘난 그가 말하는 스티브 로저스를 몰라. 버키 반즈도 몰라.’

버키의 안쪽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니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버키가 도망치는 것은 하이드라의 잔당과 선량한 법 집행관들에게서 피하기 위함이고, 머릿속에 폭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새삼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캡틴 아메리카나 어벤져스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피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버키는 어벤져스가 실린 신문지는 치워두고 다른 신문지를 집어들었다. 캡틴 아메리카와 매일같이 눈을 마주치는 상상은 하기 싫었으므로. 

창문을 모두 막고 나서 그는 짐승 같은 일정함으로 산책하듯이 도주로를 점검하고 세이프하우스가 들통나지 않도록 들쭉날쭉 오래 걸으며 추적을 경계했다. 

권총과 탄약은 냉장고에 넣고, 노트가 든 가방은 낡은 마룻바닥 아래 숨긴다. 매트리스며 테이블 따위를 어떻게 던져야 효과적으로 돌격을 막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사방의 안전 확보가 우선이고 삶의 질은, 그런 게 있다면, 최하로 떨어져도 개의치 않는다. 전시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언제라도 추격이 있으며 또한 전투가 일어나리라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는 삶은 황폐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기는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발버둥쳐 빠져나오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는 또 윈터 솔져가 된다. 

거리에서 흔하게 들리는 루마니아어는 아직 귀에 설었지만 몇 마디 정도는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차근차근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못 알아듣는다고 전기로 지지는 사람도 없다. 부쿠레슈티는 노점상이 많았고 버키는 CCTV에 걸리지 않을 만한 장소에서 과자며 생필품을 샀다. 한두 마디 어색하게 묻는 말에 주인이 대답해주는 것만으로도 버키는 일종의 감동을 느꼈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지 않다는 것, 위협적으로 굴지 않는다는 것. 모든 인간을 경계하면서도 버키는 본능적으로 인간적인 교류를 바랐다. 

버키는 무어라 쓰여있는지 읽지 못하므로 대개 포장지에 그려진 사진이나 그림을 보고 적당히 골랐다. 1년하고도 5개월 동안 알게 된 것은 버키는 레몬과 민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무 시어서 턱이 긴장하고 침이 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록색 이파리가 달린 레몬이 크게 그려진 크래커 포장지를 보면 발걸음을 멈췄고, 주인이 손님을 알은 체 하며 말을 걸면 충동적으로 한두 개씩 샀다. 

세이프하우스에 돌아올 때면 주머니의 크래커는 조금 끝이 부스러져 있었다. 버키는 부스러기까지 크래커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크래커 아래 새콤한 레몬 필링이 이에 씹히는 순간부터 눈가가 찡그려졌다. 뱉을 정도로 싫어하진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걸 돈 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계속해서 사오는 건 멍청한 일이었다. 버키는 빈 포장지를 판판하게 펴 들여다보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마 눈에 뜨인다면 또 사오지 않을까, 그렇게 어렴풋이 짐작했다. 






버키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은 이런 식이었다. 피복이 벗겨져 너덜너덜한 전선을 이으면 그 자잘한 연선들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부딪혀 빛이 터져나오는 것. 눈앞에서 부싯돌을 튕기듯 거칠게 불똥이 튄다. 그러한 거친 빛이 캄캄한 뇌를, 거기에 있었던 기억을 비춘다. 

눈앞에 코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는 셔츠를 입은 스티브 로저스가 있다. 작고, 마르고, 그러나 눈빛은 갓 돌에서 캔 마르지 않은 사파이어처럼 형형했다. 눈과 이마는 새빨갛고 부었고 곧 푸르게 멍이 들 것 같았다. 스티브는 아직 드문드문 흐르는 코피를 손가락으로 막고 손등으로 훔치고 해서 손이 피범벅이었다. 버키는 피가 뭉쳐서 도움이 되지 않았던 손수건을 급하게 빨아와서 내밀었다. 스티브가 축축한 손수건을 받아들고 코를 꽉 눌렀다. 

작은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되다시피한 스티브를 곁눈질하며 버키가 물었다. 

“이번엔 왜 대거리한 거야?”

“글쎄.”

“무슨 소리야, 그렇게 코피 터지게 싸워놓고 왜 싸웠는지도 몰라?”

“모르겠어.”

어이가 없어진 버키가 노려보아도 스티브는 코에 손수건을 틀어막은 채로 두꺼운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곤두세우며 다시 한 번 정말 모르겠다니까, 하고 말했다. 일부러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는 평소라면 따박따박 자기가 무슨 말을 했고 상대가 어떻게 받아쳤는지 죄다 이야기해왔으니까, 이번엔 정말로 스티브가 시비를 건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버키는 아직 이름 모를 상대에게 딱 한 방울 만큼의 안쓰러움을 느끼며 생각했다. 시비를 걸었는데 스티브 로저스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거나. 

“누구랑 싸웠는진 알아?”

스티브가 코가 막혀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대꾸했다. 

“종 크롱.”

아, 존 크론. 존 크론은 버키 반즈도 잘 알았다. 그들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버키보다 한 학년 위였지만 라틴 어 수업은 같이 들었다.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 먼 사이였지만 버키는 딱 한 번 얽힌 적이 있었다. 존 크론이 버키 앞에서 스티브를 두고 ‘왜소한 폐병쟁이 따위’라는 말을 했었던 것이다. “스티브가 너랑 뭘 해도 넌 삼 초도 안 돼서 링에서 떨어져 나갈 거다.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게 덩치만 스티브보다 좀 크다고 뭐가 되는 줄 알아?” “넌 뭐야, 그 새끼 싸고돌면 뭐 비역질이라도 시켜주든?” 버키는 두 말할 것 없이 주먹을 날렸고, 한 번 패버린 이후로 존은 적어도 버키 앞에서는 스티브 로저스에 대해 찍 소리도 하지 않았다. 

설마 이제 그 새끼가 그거 때문에 스티브 로저스한테 달려든 거 아냐? 기가 막혔지만 존 크론의 성격상 아니기가 더 힘들었다. 정작 자신을 두들겨 팬 버키 반즈에게는 한 마디도 더 대거리를 못했으면서 만만하다고 생각한 스티브에게 제 화를 푼 것이다. 비열하게도.

버키가 뭔가 생각나는 게 있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알아채고, 스티브가 코를 막고 있는 손수건을 치우며 또렷하게 말했다. 

“이봐, 너는 이 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해 봐.”

손수건을 치우자 천천히 코피가 다시 번졌다. 스티브는 머리가 띵한 지 눈을 자주 깜빡였지만 시선은 아픔으로 흔들리는 일 없이 똑바르게 버키를 향하고 있었다. 부어올라 왼쪽 눈은 거의 감겨있으면서도. 

“아, 그러니까 그 새끼가 먼저…….”

스티브가 의아한 듯이 그 뒤의 말을 기다리며 눈썹을 살짝 치떴다. 판유리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이 스티브의 얼굴 반쪽을 문질러 광을 냈다. 솟은 광대와 강퍅하게 들어간 뺨 위로 보일 듯 말 듯하게 자라난 금빛 솜털이 피에 뭉개져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스티브의 눈썹은 더티 블론드인 머리카락 색보다 조금 더 갈색이었고 반대로 속눈썹은 그보다 조금 더 연한 밀빛으로 돋아났다가 진해졌다. 에나멜을 입힌 듯이 반짝거리는 색이었다. 붉게 부은 코 아래로 아직 수염이라고 부르기 힘든 연한 솜털을 타고 새빨갛게 붉은 피가 조금 흘렀다. 파랗게 부어오른 멍에도 붉은 기가 있어 보라색으로 어른거렸다. 

버키는 그다지 주의해서 스티브를 찬찬히 훑지도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고 별 의심 없이 뇌리에 그 광경을 저장했다. 언젠가 잘게 찢어진 기억에서 이 광경을 건져낼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먼저?”

스티브가 뒷말을 재촉했다. 버키는 의자에서 잠깐 양 발바닥을 비비 꼬았다. 이제 자신이 할 말이 스티브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을지 걱정이 됐다. 육체적으로 스티브는 많이 뒤떨어졌고, 버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도 스티브를 주저앉힐 수 있었다. 당장 존 크론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버키에게 맞고 존은 그보다 만만한 스티브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스티브 로저스는 지금보다 더 상처받을 지도 몰랐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그러나 의도적으로 위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숨긴다면, 스티브 로저스는 그러한 기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버키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쳤다. 

“걔가 니 욕을 해서 내가 좀 팼거든. 내 생각엔 좀 맞으면 정신차리겠지 싶어서. 근데 네 욕 하다가 맞았으니까 너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하고 너한테도 시비 건 거야. 다른 이유는 생각 안 난다. 그 불곰 같은 새끼한테 뭔가 더 논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진 않고 그 새끼도 한 번 더 쥐어터져보면 앞뒤가 맞는 논리가 뭔지 알게 되겠지.”

스티브가 푸하,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가의 웃음은 눈가를 누그러뜨리며 번져나가고 곧 얼굴 전체를 물들였다. 그러나 찢어진 볼 안쪽과 땡땡하게 부어오른 눈가는 웃음을 지속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스티브는 애써 정색하고 낮게 신음했다. 

“뭐야, 그럼 니가 일 키운 거잖아. 욕을 내가 먹었는데 왜 네가 열받아서 패서 일을 키워.”

그러면서도 스티브는 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버키는 의자에서 몸을 기울여 스티브의 반듯한 인중을 타고 얇은 윗입술까지 흘러내린 핏방울을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엄지 손가락에 얇은 지문을 타고 핏자국이 뚜렷하게 났다.

“넌 내 욕 들으면 화 안 낼 거야? 그 씹새끼는 진짜, 일부러 너 혼자 있을 때를 노린 거야.” 

스티브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약간의 자포자기가 스쳤다. ‘네가 혼자였다고 해도 나만큼 맞진 않겠지.’ 그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버키가 재빠르게 이어 말했다. 

“손수건 다시 빨아오게 줘. 넌 빈혈이라면서 피 아낄 줄을 모르고 펑펑 쏟기만 하고.” 

“거의 멈췄어.”

“그럼 직접 가서 네 피칠갑된 얼굴 닦아. 죽으려고 환장했지, 코피를 그렇게 줄줄 흘리면서 집까지 걸어오려고 하고.” 버키가 분개해서 말했다. 

“호들갑 떨지마.”

스티브가 손을 내저어보이다가 자신의 손 역시 피투성이라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씻으러 주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피가 흐릿하게 녹아서 씻겨 내려가는 소리가 좁고 조용한 집안을 울렸다. 평소였다면 버키도 바로 뒤로 따라가서 잔소리를 했겠지만, 자신이 한 일이 마치 인과응보처럼(아무리 생각해도 존 크론의 잘못이지만) 돌아와 스티브 로저스가 이렇게 맞았을 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자리에서 한동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저 애한테 그렇게 막 대할 수 있지? 어떻게?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굴려지는 것에 대한 분노,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의 무지에 대한 분노, 또한 그 보석이 아직 진흙투성이여서 안타까워 하는 애석함과 애틋함이 혼재되어, 그의 마음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내장을 내리눌렀다. 

곧 버키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그는 얼른 손거울을 들고 수도 앞에 있는 스티브가 씻으며 볼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섰다. 손과 코 언저리와 입가만 말끔하게 닦아내고 수도꼭지를 잠그려던 스티브가 거울을 보고 낮게 웃었다. 아직 창백한 얼굴엔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고마워.”

“별 말씀을.”

씻고 수건으로 조심조심 얼굴을 닦아낸 후에 스티브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눈썹을 으쓱했다.

“근데 네 말 듣고 나니까 알겠네. 존 크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궁금했거든. 얼굴만 알지 말은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 그런데 걔가 삼 초만에 무너뜨려보라느니 해서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냐고 물었지.”

“아이고…….”

물론 존 크론은 일말의 여지 없는 개새끼였고 버키는 그 놈을 늘씬 두들겨줄 작정이었지만, 도발하려는 상대가 정중하게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어?’라고 묻는 장면을 생각해보곤 적어도 한 대 정도는 덜 갈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쎄, 뭘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녀석한테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알아. 계속 일어나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스티브의 눈은 단호했다. 그 웃는 얼굴, 멍들고 부어올랐지만 절대로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그 아름다운 얼굴. 버키의 입술이 한숨처럼 가볍게 다물렸다가 곧 다시 미소했다. 

스티브가 수건을 소파에 내려놓고 손가락 끝으로 부어오르기 시작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 행동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몇 가닥 젖은 채, 풀어진 실처럼 핏기가 가신 이마에 드리워졌다. 버키는 조심스럽게 그 금발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간지러운 행동이었다. 

버키는 그 순간 자신의 가슴 속에서 팔랑팔랑하는 수많은 나비를 느낄 수 있었다. 버키는 그를 사랑했다. 소중했고, 욕망했으며, 다정함을 느끼고, 꺾이지 않는 스티브에 대해 자랑스러움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꼈다. 스티브에게 부당하게 쏟아지는 모욕의 말을 참아넘길 너그러움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지만, 스티브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 상대를 짜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의 분노는 충분했다. 그렇게 모든 감정이 가로세로로 촘촘히 짜인 직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버키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감정으로 칭칭 감겨 어쩔 줄 몰랐다. 

“그 말인즉슨 계속 싸우겠다는 거지.”

스티브가 짐짓 목소리를 깔고 교장 흉내를 내며 근엄한 투로 대꾸했다.

“남자애들이야 싸우면서 크는 거지.”

버키가 마침내 누그러뜨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스티브 로저스, 너 같은 쌈닭이나 그렇지. 난 안 싸우거든? 난 뭐야, 윌슨 파야. 평화주의자라고.”

“퍽도 그러시겠어. 주먹부터 나가면서. 이번에도 니가 먼저 시작했다는 걸 잊지 마라.”

“아니지, 시작은 종 크롱의 주둥아리가 시작한 거고, 나야 뭐 그 다음이지. 그리고 앞으로 내 오른쪽 주먹의 이름은 평화라고 할게. 평화부터 앞서나가야지.”

스티브가 깔깔거리다가 또 아파서 앓는 소리를 내고는 버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웃기지 좀 마, 지금 웃으면 아프다고.”

스티브가 아픔으로 웃지도 못하고 다시 필사적으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을 본 버키는 말했다. 

“너 좋아하는 ‘레몬 파이’나 좀 사다줄까?”

스티브가 작게 미소하며 쓰지 않은 모자를 정중하게 들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일 키운 거 사과야? 조니의 가게 거라면 관대히 받을게.”

그래.

버키는 꿈속의 자신이 대답을 한 건지 자신이 정말로 중얼거렸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눈을 떴다. 막혀있던 댐의 문을 열어제친 것처럼 귀가 멍멍할 정도로 감정의 급류가 밀어닥쳤다. 애틋함과 사랑스러움, 분노, 경멸, 안쓰러움과 죄책감 같은 다채롭고 풍부한 감정이 모두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어 하나만 집어올려도 모든 감정이 햇빛을 받은 비늘처럼 무지개빛으로 빛나며 딸려 올라왔다. 그것은 혼란이었다. 가슴이 부풀어오를 정도로 밀어닥친 수많은 감정의 편린이 그를 휘두르고 패대기쳤다. 

불쌍한 버키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매트리스의 용수철 소리가 온몸에 느껴지고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차갑게 뺨과 목에 들러붙었다. 창문을 통해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가로등 불빛이 뻗어들어와 벽에 붉고 노란 빛을 혼잡스럽게 칠했다. 버키는 오한으로 떨리는 몸을 감싸안았다. 어둠 속에 희미한 형체로만 남았던 기억이지만 한 번 빛이 비춰지자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고 생생했다. 손이 떨리고 눈이 뜨겁게 달아올라서 그는 검은 가죽 장갑을 양손에 끼우다가 떨어뜨렸다. 거대한 감정의 급류가 그를 짓눌러 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버키는 수백번은 반복한 대로 하나의 도주로를 선택해 세이프하우스를 빠져나가 달렸다. 따뜻한 늦봄의 밤은 희미하게 라일락 향기가 났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밤의 냄새. 가로등은 드문드문 켜져 있었고 간판도 드문하게 켜져 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때때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쌩하게 지나갔다. 버키는 한참만에 헉헉거리며 앉았다. 

고장나 열리지 않는 문의 손잡이가 문득 덜컥이고, 거칠게 철컥철컥 잡아당기다가, 결국 문이 무숴져 버린 느낌. 얼어붙었던 감정은 어느새 녹아 아예 막혀있던 문을 터트리고 흘러나왔다. 버키는 뒤늦게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뺨이 눈물로 질척했고 눈이 녹아내릴 듯이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버키는 두 손을 맞잡았다. 장갑 안에서 메탈암이 끼릭끼릭 소리를 내고 변함없는 악력과 강인함으로 움직였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손은 이토록 떨고 있는데.

차츰 머릿속의 사이렌이 멈춘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코를 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밤거리는 흐릿하게 번져 빛나고 있었다. 열 일곱살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 때의 감정들까지 빛처럼 반짝이며 가슴을 관통했다. 감정을 느끼면 언제나 하이드라에서의 비참함이 되살아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키는 이 모든 감정을 다시 어둠 속에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가라앉지도 않을 것이다. 

2016년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그러나 버키는 한순간에 브루클린 애송이가 되어 밤거리에 앉아있었다. 열 일곱살의 버키 반즈는 확실하고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손금처럼 뚜렷하게 들여다보며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버키 반즈가 버키 반즈인 이상, 스티브 로저스가 스티브 로저스인 이상, 스티브처럼 좋아하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마음은 앞으로도 계속 스티브의 것이라고. 그건 첫사랑의 자각이었다.

그 마음은 여전히 바래지 않은 채 여기에서조차 가슴을 가르고 피투성이로 심장과 함께 드러났다. 스티브 로저스가 스티브 로저스인 이상 사랑할 수밖에 없노라고. 

이제 버키 반즈는 양가적인 감정을 이해했다. 그것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만큼 대단하지도 않았다. 밝고, 어둡고, 가볍고, 무겁고, 기쁘고, 고통스러우며, 떨떠름하고, 달콤하고, 섭섭하고, 귀하고, 아쉬운 마음은 이토록 동시에 마음에 흘러갈 수 있었다. 한 가지의 면만을 가진 감정은 없다. 그저 이름이 다를 뿐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스티브를 다시 보고 싶으면서도 절대로 그를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양가 감정 모두가 사랑으로 같은 결이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여전히 스티브 로저스였으나, 그는 버키 반즈고 동시에 윈터 솔져이기 때문에. 

밤바람에 눈물 자국이 말라갔다. 





END

2019.02.02.


예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이야기 자체가 짧아서 묵혀두고 있다가 전력으로...


MCU:CA S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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