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겨울안개









민석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것은 봄이 온다는 어느날이었다. 매화 나무에 봉오리가 붉게 매달렸지만 아직은 조금 쌀쌀한 기운이 없지 않아, 가볍게 입었다간 쉬이 고뿔에 걸릴만한 날씨였다. 이런것들은 몸하나 만큼은 튼튼하게 태어난 준면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매년 정초만 되면 며칠동안 끙끙거리며 이유 모를 열을 앓던 민석이, 이번해에도 역시 액땜처럼 열병을 겪은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준면은 어머니 몰래 입구가 좁은 호리병에 꿀물을 담아 서당에 들렀다. 민석이 열병으로 미루어 두었던 서당일을 몰아서 해치웠다간 또 다시 고뿔에 걸릴까 염려된것이다. 날씨가 시간마다 변덕을 부려대니, 분명 지금쯤 콧물이라도 흘리고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가슴팍이 아직도 뜨끈뜨끈한 꿀물의 온기로 후끈했다.






"석아-. 어허, 왜이리 조용하누. 춘배야. 너네 도령은 어디로 가셨더냐."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민석은 서당은 물론이고, 본채에서도 보이질 않았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 애써 들고 온 꿀물이 금방이라도 식어버릴것만 같아 애가 탔다.






"아이구. 도령님 오셨어라? 즈이 데련님은 종이보러 가셨구만유. 아니 글씨, 오늘 쩌그 산아래 사시는 나리 아드님께서 백지에 먹을 쏟으셔가지구.. 데련님이 급하게 나가셨지라."






기침을 하며 아이를 가르치는데, 어린 도령 하나가 기침소리에 놀라 먹을 쏟아 사고를 쳐놓은 모양이었다. 도령은 놀라 울며 나자빠지고, 아랫것들 몇이 우는 도령을 업고 집에 데려다 주느라 몇 남지 않은 일손에, 민석이 혼자 다녀오겠다 한 것이 틀림없다.






"즈이가 나중에 가겠다고 그렇게 말렸구만. 도령님두 즈이 데련님 성정 아시지라? 부득불 본인이 가셔야겠다구 우기셔가지구.."


"너희는 며칠이나 앓아 누웠던 주인을 그냥 그렇게 보냈단 말이더냐!"






짜증이 치밀어 괜히 아랫것만 잡고 닥달을 하게되었다. 준면의 호통에 어쩔줄을 모르던 춘배가 짚신을 신은 발을 꼬물거리며 어깨를 움츠리자, 준면은 아랫 입술을 꽉 깨물며 몸을 돌렸다. 휙하고 돌아나간 덕에 휘날린 도포자락 사이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 소중히 품고있던것을 더욱 거세게 끌어안아야 했다.


발걸음이 다급했다. 까짓 꿀물이 뭐라고 식어빠지면 새로 해다 먹으면 될것이다. 허나, 얼마나 성한 몸이라고 종이를 사러 상점엘 나간것인지...


준면은 걱정이 앞서 눈앞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서둘러 달리다가, 흙구덩이를 밝아 곱던 비단신이 난장판이 되도록 양반의 체통따윈 잊은채 달렸다. 맞부딫혀 부는 바람에, 머리에 쓴 갓이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종놈을 하나 데리고 나올것을. 얼른 뛰어가보라 시켰을텐데. 내가 늦더라도 종놈이 먼저 달려가 데련님 또 열병 나신다며 호들갑이라도 떨어대라 시킬것을. 혼자서 달랑이며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을 민석을 떠올리다가 결국 열이 훅 받친다.






"이 자식이! 누굴 고생시키느라고 그런 등신같은 짓을해?!"






골목을 돌아 달려나가며 욕짓걸이를 하자, 근처를 지나던 마을 아낙들이 놀라 마른 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놓쳐버렸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자꾸만 발목이 잡히는 기분이 든다. 준면이 씩씩거리며 흙바닥에 굴러다니는것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자, 아낙이 나리께서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며 한사코 손길을 거절했다. 하지만, 분명 자신때문에 이리된 것에 그냥 지나칠수가 없는 노릇이다. 마지막까지 주워 묻은 흙을 털어내고 바구니채 아낙에게 건내자 아낙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아휴 우리 나리 성품이 어찌나 비단결 같으신지... 라고 감사인사를 전한다.






"되었네. 이만 가보게나."






그렇게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나니 정신이 돌아오는지 이리 달려가보질 않아도 민석은 종이를 사고, 쫄랑거리며 돌아올거란 생각에 진정이 되었다. 큰일이야 생기겠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연신 기침을 하더라는 아랫것의 말이 맘에 걸렸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움직이기로 했다. 가슴팍에 안은 호리병이 벌써 미지근해지기 시작했다.




*




"서당 나리님이요? 아휴 벌써 가셨지요. 백지랑, 세화지 조금 가져가셨습죠. 염료상점 위치 여쭤보신걸로 봐선 지금쯤 그리 가셨지 않을까요?"






이 자식은 정말 어딜 이렇게 싸돌아 다니는건지 모르겠다. 기침이 심하고 얼굴이 붉어 걱정이 되었던 주인장이 노비를 시켜 배달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바로는 어렵다는 말에 손수 들고갔다는 말까지 들었다. 도대체가 어쩜 그리도 미련한지, 준면은 주인장에게 염료가게로 가는 길을 물어봐야만 했다.


북적이는 시장통을 겨우 지나 장의 구석진 곳에 있는 염료상점을 찾았지만, 그곳에도 민석은 없었다. 헛헛한 발걸음으로 다시 길을 돌아가려니 답답한것이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






"주인장. 그래서 그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 보았는가?"

"아휴. 저희도 사람이 많아 제대로 보질 못했지요. 하필 오늘 마당패들이 놀이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게 말을 못할지경입니다요."






본래도 북적이던 장이었건만, 오늘은 유난스럽게도 떠들썩한것이. 마당패의 놀음때문이었던가 보다. 마을어귀를 궁싯거리던 거지들도 산발이된 머리를 하고선 멍석에 앉아 그 꼴들을 구경하고 있겠지. 어쩌면 곱게 차려입은 민석도 그곳에 서서 주전부리를 우물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준면은 복잡한 사람들을 해쳐, 마당패의 소리가 가까워지는 곳으로 향했다. 갈수록 족잡하여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때,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기침을 하느라 들썩이는 어깨가 안쓰러웠다.






"석아-!"






북과 장구와 꽹과리의 소리가 파도친다. 줄위에서 요란하게 날아다니는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펄쩍펄쩍 뒤며 부채를 흔들고 다시 사뿐하게 줄 위로 내려앉는 모습에 사람들은 연신 감탄을 내지른다. 그 통에 준면의 말이 민석에게 닿지 못한듯 했다. 실례하겠소- 하고 앞사람을 밀쳐보지만, 그 소리도 사물패의 소리에 뭉개진다. 이쪽의 사정이 이러한데, 민석의 사정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짐을들고 발을 옮기다가 홍수처럼 몰려든 사람들에게 휩쓸려 졸지에 오도가도 못한 신세가 되버리고 말았다. 아랫것 하나라도 데려올걸 그랬나. 조금 늦더라도 주인장의 배달을 기다릴것을 그랬나. 한쪽에 무거운 종이를 끌어안고, 한쪽엔 짚으로 엮은 염료병을 들고있으려니 여간 힘든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치이고 있으니 어리럼증이 몰려와 속이 메스꺼웠다.




준면은 거구의 사내에게 가로막혀 고개를 이리저리 빼가며 민석을 불렀다. 한번쯤을 들을법도 하건만, 민석은 그 소리도 듣지 못하고 빠져나갈길을 궁리하는것이었다. 호리병을 안고있던 손 하나를 풀어 민석에게 뻗어본다. 손끝에 그의 어깨가 닿을것도 같은데, 이리저리 밀리는 몸이 휘청이며 빗겨간다. 답답함에 성질이 솟구치지만, 이런 상황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질 못한다. 다시 한번 손을 뻗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앞쪽에서 이 꼴을 본 예의 그 사내가 놀라 발을 조금 옮기자, 비로소 민석의 어깨에 준면의 손이 닿았다. 쑤-욱 하고 빠져나가는 몸이 그대로 민석을 끌어안고 만다.






"석아. 너 나를 왜 이리도 고생시키니."






한품에 안긴 민석이 안쓰럽다. 뜨끈한 몸이 호리병보다 뜨거웠다. 면은 휘청이는 민석을 끌어안고, 인파 속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겨우 그 곳에서 빠져나오자, 이제야 민석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 너!!!"






창백하게 흐린 얼굴. 몽롱하게 겨우 뜨고있던 두 눈. 어물거리며 무얼 말하려다가 손에 든 것들을 모두 놓치고 입을 틀어막는 모습. 준면은 스려지는 그의 몸을 받아 번쩍 들어 안고 달렸다. 의원댁이 장에서 멀던가? 헉헉 거리는 숨에 갓은 벌써 벗겨져 어깨뒤로 날아가 펄럭이고 있었다. 도포가 나부끼고, 한쪽 비단신은 내달리다 날아가버렸다. 졸지에 버선발로 장마당을 달리며 간절히 빌었다.



제발. 민석아, 무사해라.






*



골이 흔들려 죽을 노릇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앞이 빙글뱅글 돌아나는 느낌이 선연했다. 눈을 감고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파도에 몸을 실었더니, 토기는 점차 가라앉고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준면의 호통과 드물게 부탁하는 소리. 그리고 어느 노인의 목소리와... 곧 다시 몸이 흔들렸고, 이번엔 유모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 파도 속을 헤엄치다가 눈을 떠보니 벌써 캄캄한 밤이었다. 산새가 조용히 부엉- 부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갤 돌리니, 어머니의 석류 병풍이 보인다. 장터에선 참으로 큰일이었지. 내일 날이 밝으면 털고 일어나 준면에게 가야겠다. 걱정하였냐 물어보야야겠지. 당연히 걱정이야 하였겠지. 그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던것이 생각난다.






"크흡!"






작게 웃기 시작하자, 이불이 들썩이며 바람이 든다. 민석은 모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 으응.... 석아... 좀 더 자... 응....."


"!!!!!"






준면이 민석의 곁에 누워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민석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옆구리쪽으로 파고들어온 그의 팔에 안기게 되었다. 웅크렸던 다리를 펴자, 그는 좀 더 몸을 붙여왔다.






".. 너 감기 옮는다. 등신아."


"...."






등신. 머저리. 그냥 집에 가면 될것을 또 이리 등신같은 짓을 한다. 이러니 점점 어머니를 뵐 낯이 없어진다. 그러면서도 내심 그가 반갑다. 가만히 잠든 준면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피부는 어찌 이리 고운지.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톰하고 너른 이마. 짙은 눈썹. 길다란 속눈썹에 오똑한 코. 입술까지. 어느것 하나 빠지질 않고 수려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 누르자, 준면이 찬찬히 눈을 떴다.






".... 감기 옮는다고. 등신."


"누구더러 등신이래."


"너."


"그럼 너는 뭐냐?"


"나?"


"어."


"등신 친구."


"나 너랑 친구 아닌데."


"친구 해줘. 외로우니까."


"웃기고있네.."


"근데 너. 게 까진 어쩐일로 나왔냐?"


".. 등신친구한테 꿀물 주러."


"그럼 그거 지금 줘. 목 말라."


"없어."


"먹었냐?"


"너 안고 달리다가 병을 깨버렸어."


"꿀물 먹고싶다."


"너 내 고간에 꿀물 흐르는거 알어?"


"지랄허네."


"그래. 빨아줄 생각 없지? 이제 자."


"... 야."


"아, 뭐."


"생각없다는 말은 안했는데."


"미친게지. 너 쓰러지고 몇 식경이나 잠들어있었는줄 아냐?"


"지금은 괜찮다는게 중요하지."


"나보다 더 한 놈일세.."


".. 병풍 뒤로 갈까?"


"이 미친놈아.."


"뭐, 이 등신아."


"빨리 움직이자고.."






둘은 결국 웃음이 터진다. 큭큭 거리며 이불을 어깨에 싸맨 채로, 조심히 병풍 뒤로 향했다.





-


비계에선 진행이 빨랐는데, 왜 길게 풀어서 쓰면 이렇게 길어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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