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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에서 깬 수해가 힘겹게 눈을 떴다. 전날 늦게까지 현장에 있다가 들어와 쓰러지듯 잠들었더니, 평소보다 늦은 아침이었다. 정운은 출근하고 없겠거니 생각하며 한참을 미적대다 겨우 거실로 나갔다. 아직도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부비며 식탁 위에 정운이 차려놓았을 아침을 찾았다. 자신이 쉬는 날 출근하게 되면 정운은 늘 아침을 차려놓고 가곤 했으니까. 오늘은 쪽지가 있네. 랩으로 덮인 접시 옆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갈 데가 있어서 다녀올게요. 밤에 늦게 돌아올 것 같으니까 너무 기다리지 말아요.‘

   수해는 쪽지를 들어 읽고는 앞뒤를 확인해 보았다. 별다른 추가적인 내용은 없고, 집에서 평소에 사용하는 메모지에 집에 굴러다니던 볼펜을 사용. 필체는 평소와 다름 없음. 침착해 보인다. 선 자세로 주방 테이블 위에 놓고 쓴 듯한 각도를 보니 나가기 직전에 작성한 듯 보인다. 

   랩으로 씌워 놓은 접시를 들어보았다. 계란 후라이가 올려진 토스트. 음식에서 나오는 김 때문에 랩 표면에 잦은 물방울이 맺혀 있다. 물방울의 크기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막 했을 때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던 걸로 추정된다. 음식의 온도는 완전히 식어있는 것으로 보아, 조리한 지 한 시간 이상 지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시각, 10시 46분. 정운이 집을 나선 시각은 대략 9시 반, 혹은 그 이전이다. 평소 정운이 병원에 출근하는 시각은 9시 30분. 정운은 출근을 한 것일까.

   정운의 런닝화나 운동복이 집에 남아있는지 빠르게 확인한다. 끝나고 운동을 하려는 건 아니군. 정운이 출근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수해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스마트폰을 켰다. 세상 참 좋아졌다니까… 커플 위치추적 앱에 표시된 정운은 시속 70킬로의 속도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토스트 접시를 들고 소파에 털썩 기대 앉았다. 천장을 보며 토스트를 우물우물 씹는 동안 생각했다. 행선지도 알리지 않아, 전날 언질도 주지 않아. 당일날 혼자 이렇게 휙 떠난다? 너무 기다리지 말라고? 정운 씨 지금 장난해?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수해의 본능에 불을 확 지르는 꼴 밖이 되지 않는다. 수해는 천천히 토스트를 씹으며 사냥감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정신을 예민하게 집중했다. 내면에서 불길이 확 타오른다. 아주 차가운 불꽃이.

   아주 좋지 않았다.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잔뜩 남기고 떠난 건 둘째치더라도, 정운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리를 비워선 안되었다.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것도 안 되고.

   수해는 냉담한 시선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어디까지 번지는지 지켜보았다. 한번 불이 붙으면 막을 수도, 누를 수도 없다. 자신이 어디까지 행동하려 할 지 그저 가늠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넣으며 플랜을 구성해 보았다. 1. 어플을 이용하여 정운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본 후 미행한다. 2. 정운의 루트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행선지를 추정해본다. 3. 정운이 집에 도착하길 기다린 후, 그의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통해 운행 기록을 확인한다. 정운이 자동차 스페어 키를 어디다 두곤 했더라. 서랍장 첫째 칸. 수해는 이 집 살림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아예 카드 사용내역까지 뒤져보지 그러냐. 정운은 카드 사용 내역을 일일이 문자로 받아보진 않았다. 수해는 잠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얌전히 귀가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어디 다녀왔냐고 물어보면 되잖아. 가장 마지막으로 일반 사람들이 할 법한 선택지를 떠올린다. 알아, 나도 아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 

   위치추적 어플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마침 정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수해 씨, 일어났어요? 식탁에 토스트 해놓은 거 먹어요. 나 오늘 늦게 들어갈 지도 몰라요. 열두 시 전엔 도착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정운의 위치는 남부지방의 한 휴게소였다. 이 근방에 뭐가 있지? 수해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기억을 저장해놓은 데이터베이스에서 정운과 관련된 데이터들을 금방 꺼내 놓았다. 부모님이 계신 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 대학을 다닌 지역. 군 복무를 했던 지역. 딱 맞아떨어지는 지역이 없었다. 그렇다면 여태 자신에게 이야기 한 적 없는 과거의 일과 관련된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 혼자 바람이 들어 꽃구경을 하러 놀러 간 것이 아니라면.

   수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 세 번째. 정운이 자신이 모르는 숨겨진 과거 간직하고 있기. 그리고 그것에 아직도 영향 받기.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무언가를 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주변에 화풀이 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도 정운의 손길이 닿는 것, 저것도 정운이 아끼는 것. 언젠가 수해가 화가 났을 때를 대비해 정운이 자기 흔적이 묻은 물건들을 일부러 여기저기 배치해놓은 것이 분명하다.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수해는 애써 쥐었던 주먹을 풀고 차분해지려 애를 썼다.

   정운은 아직 수해에 대해 잘 모른다. 정운은 가엽게도, 몇 번이나 시도하고 노력했다. 수해를 알고 싶어서 캐묻기도, 애원하기도, 말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수해는 그 모든 노력들을 다 알면서 자신을 감췄다. 정운이 속상하지 않을 정도만, 정운이 알아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조심스럽게 선별해서 알려주었다.

   수해가 이 집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꿰고 있는지 알면, 정운은 기겁할 것이다. 정운의 사소한 습관, 늘 반복되는 루틴들, 출근길이 얼마나 걸리는지, 가는 도중 어떤 것에 시선을 주는지까지 낱낱이 알고 있다고 하면. 퇴근길에 어떤 음식점에 자주 들리는지, 담배는 어느 편의점에서 사곤 하는지. 수해는 심지어 병원에 출근하는 직원들이 몇 시쯤 도착해서 점심으로는 무엇을 먹고 언제 퇴근하는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정운이 자신에게 알도록 허락한 범위 안에서였다. 정운이 수해에게 직접 정보를 주지 않은 영역은 수해가 파고들지 않았다. 수해는 그것을 정말 최소의 마지노선을 지키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주려고 항상 노력해왔다. 파헤치고 싶은 욕망이 들어도 그러지 말자고.

   오늘같이 시험에 들게 하는 날이 아니면, 수해의 노력은 큰 시련 없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오늘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를 끌고 왔다. 평소 일할 때 목표로 하는 대상에게서 수집한 정보들을 잘 보이는 곳에 정리할 때 사용하곤 하는 물건이다. 마커를 꺼내 중앙에 이정운 이라고 썼다. 이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 수해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정운의 이름에서 가지를 뻗어 나가려던 수해가 손을 멈추었다. 이래선 안되었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다. 정운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안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수해는 다시 마커의 뚜껑을 닫고 내려놓았다.

   어쩌면 수해가 정운이 사는 동네로 이사 오기로 했을 때부터 정운은 이미 수해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정운. 나한테 명함을 줬을 때부터. 아니, 나한테 자기 머플러를 주었을 때부터. 이정운은 이미 수해에게 꽉 잡힌 처지였다. 정운 자신이 스스로 수해에게 감겨들고 있다고 믿게 하려고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당신은 어디도 못가. 감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딜 가려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수백번 되뇌고 있는데, 정운이 메모에 남긴 말이 생각났다. 그래,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돌아온다고 했으니 믿고 기다려야지.

   이래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싫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흐려지게 만든다. 수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천장을 보았다. 왜 기분나쁜 생각들은 그렇게도 똑똑한지. 문득, 정운이 수해에게 자신을 붙잡아 달라던가, 놓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씨발… 수해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욕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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