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봐.

내가 이겼어.


*


가온과 서화는 미동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서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 했다. 추운 날씨임에도 제대로 된 옷가지도 걸치지 않은 가온의 모습이 서화는 거슬렸다. 추위에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더 두꺼운 가죽장갑을 끼고, 성가시게 펄럭이는 특수나노소재의 코트를 걸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서화와 마주 선 가온의 모습은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초여름 날씨를 맞이한 사람처럼 면으로 된 얇은 민소매와 고작의 청바지. 신발조차 또각이는 거슬리는 높은 굽을 신고 있는 가온의 모습에 서화는 자존심이 상했다. 저를 죽이기 위해 진심으로 갖춰입고 온 사람을 대하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추위나 깊은 자상 따위에 죽지 않는 뱀파이어에게 진심이 담긴 복장 따위는 그닥 의미를 갖지 못함을 서화도 알고 있다. 그저 미워할 만한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찾아내고 있는 중인 것 또한 본인도 납득하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는 것 뿐이다. 그래야만 했으므로. 서화의 표정이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먼지의 이동처럼 아주 미미하게 흔들렸다.


미세하게 변동하는 서화의 표정을 가온은 명확하게 짚어냈다. 기분이 안좋구나. 서화는 그닥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기에 가온은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 것인지, 기분이 나쁜 것인지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변하는 어투를 통해 알아내면 알아냈지, 적지 않은 기간을 그녀의 곁에 머물며 지내왔지만 가온은 여전히 그 변화를 목격해내는 것이 어려웠다. 어쩌다 한 번씩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애정을 갈구할 때의 눈빛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가온에게 여전히 몽상 속의 여인이었다. 

흩날리는 바람에 서화의 얼굴은 잠시 기다란 그녀의 푸른물결에 가려졌다. 가온 또한 바람에 휘날린 머리카락 덕에 얼굴이 가려졌다. 가온은 그 뒤로 울기 직전, 코 끝이 찡 울리며 감정이 가슴을 압박하여 눈물이 얼굴 위로 범람하기 직전에 지어지는 가장 못난 표정로 울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가는 가뭄든 논 위처럼 건조하게 매말라 있었다.


 관계의 끝을 달려가는 파국의 현장에 직접 부딪히고 나서야 가온은 서화의 몹시 '불쾌한 얼굴'이 어떤 것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됐다. 그 사실이 파탄나버린 이 관계에 남는 미련 만큼이나 가온을 서글프게 했으나 울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울어버리기에는 이미 가온은 너무 어른이 된지 오래다. 자신이 자초한 일에 울어버릴 만큼 나약하지 못했다.

바람은 곧 멈추었다. 바람이 멈춘 아스팔트 위로 떠돌아다니던 모래가루들이 자리를 찾아 하나 둘씩 가라앉았다. 새까만 아스팔트 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이 사이사이로 끼어들어갔다. 새까맣게 물들어버린 두 사람의 마음 사이로 스며드는 각자의 영향력을 닮아있는 먼지들의 움직임이었다. 미세하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명확하게 그 자리로 스며들어가고, 크기가 작기 때문에 어쩌면 완벽하게 끼어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무섭도록 그들을 닮아있었다. 애석한 것이 있다면 그 움직임을 당장은 가온밖에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움직임조차 끝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끝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가온은 자리에서 한 두 걸음씩 걸어 서화와의 거리를 좁혔다. 또각이는 요란한 소리가 거리로 울려퍼졌다. 평안을 기원하는 종소리같은 명랑한 소리였으나 서화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종소리에 두 손에 쥐어진 총을 매섭게 그녀에게 겨누었다. 한 발짝 다가갔을 때, 그녀는 다리 양 쪽에 준비되어있던 글록20을 모두 꺼내쥐었다. 두 발짝 다가갔을 때는 안전장치를 풀고 가온에게 겨누었다.

 가온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세 발짝 다가가려 할 때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요란한 총소리였다. 허공을 향한 두 번의 총성음이었지만 두번째 총알은 명백히 가온의 왼쪽 귀를 꿰뚫고 지나갔다. 틈새를 포착한 혈관들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혈흔을 뿜어냈다. 피는 금세 멎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가온의 뺨, 목, 어깨는 혈흔이 낭자하여 엉망인 꼴이 되었다.



-.. 아직 아무짓도 안했는데.



 가온의 말이 서화에게는 닿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녀 혼자 짓껄이는 막무가내의 어리광이었다. 가온은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보냈다. 그럼에도 서화는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시덥잖은 가온의 행동에 서화의 인상은 이미 당장이라도 가온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듯 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글록 20의 총구는 한 끗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가온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대략 35m 사이를 남겨두고 당장 심장을 꿰뚫어버릴 수 있는 이를 앞에 두고도 가온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멈추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더 빨라지는 가온의 걸음에 서화는 혀를 찼다. 단 한 번도 가온에게 내지 않았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가온을 불러세우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미묘하게 초점을 나간 눈을 하고 다가오는 그녀의 뒷모습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본 모습이 비춰졌다. 악마였다.

서화의 총구는 예고 없이 세 발의 탄을 날렸다. 흔들리지 않았던 만큼 서화가 날린 총구는 보기 좋게 가온의 양 다리와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총탄이 지나간 자리 그대로 녹아 짓눌려버린 피부 사이로 혈흔이 흘러 거리 위로 흐드러졌다. 가온의 입술 사이로도 신음이 비집고 흘렀다. 뜨거움과 통증으로 욱씬거리는 왼쪽 다리를 오른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왼손으로 어깨를 부여잡았다. 다리가 곧장 풀려 주저앉아버리기엔 뱀파이어에게 치명상조차 되지 않는 아무런 의미 없는 상처였다. 그럼에도 가온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처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가온에게 총구를 매섭게 겨누며 다가오지 못하도록 총까지 발포했던 서화는 가온이 자리에 주저앉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권총은 집을 찾아 갔지만 왼손에 쥐어진 글록은 여전히 서화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총구 또한 여전히 가온에게 머무른 채였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가온을 죽일 수 없는 위치에 머물른 채였다. 아무런 대화도 없던 대면식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가온이었다.



-내가 밉나요?



피칠갑을 하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다가온 여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가온은 자신이 던진 말이 이 상황에 맞지 않음을 알았다. 방금 그녀가 맞았던 총알이 그대로 서화에게 돌아간다면 아마 온갖 이유로 당장 목숨이 위험하다며 이곳저곳에서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그녀를 살리기 위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러나 가온은 달랐다. 고작 총알 세 개가 몸을 관통해도 죽지 않았다. 흩어져 날아간 귀는 이미 제 모양을 찾은 지 오래였고, 관통당한 살점과 근육들도 재생을 시작해 서서히 피가 멎어가고 있었다. 둘의 차이는 이것이었다. 인간에게 관능적인 영생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을 대가로 누군가를 해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 고작이지만 명백한. 

가온은 흘러버린 실수를 주워담기 위해 마저 입을 놀렸다. 당연한 것을 물어 미안하다고 했다. 이에 서화는 보기좋게 비웃었다. 되려 그 미안하다는 말이 마치 무언가 방아쇠라도 당긴 모양인지, 치명상을 피해 조준하던 그녀의 총구가 정확히 가온의 이마를 가르켰다. 이로도 부족했던 모양인지 아직은 조금 뜨거운 총구를 가온의 미아를 밀어내듯 가져다댔다.



-가증스러운 소리 하지말아요. 동정이라도 구하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은 이는 없어요.

-피나 먹고 사는 뱀파이어가 사람을 좋아한다고? 

-좋아해요. 어쩌면 더한 감정일수도 있고요.

-그만하죠? 날 쥐고 흔드는 건 이제 적당히 해.



불쾌감에 서화는 숨을 멈췄다. 총구를 밀어 가온의 고개를 뒤로 밀어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은 멈추지 않고 여전히 지껄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죄가 된다는 게 말이 되냐는 소리를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참으로 태연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서화는 들어서는 안되는 말을 들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배덕감을 자극하여 더욱 강하게 홀리게 만들기 위한 수작 같았다. 수작이라 믿어야 했다.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진 우스꽝스러운 헌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멍청한 아담과 이브처럼 선악과를 집어먹고 에덴에서 쫓겨날 수는 없었다. 

서화는 더욱 총구에 힘을 주었다. 그 멀리서는 잘만 당겼던 방아쇠가 가온의 눈 앞에 서니 마치 천근에 가까운 돌덩이들이 방아쇠 뒤에 가득 들어차 밀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총구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총을 쥐고 있던 서화 그녀 또한 모를 만큼의 미세한 흔들림이었으나 가온에게는 모두 보였다.

아, 보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은 이런 얼굴이구나.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가온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당기지도 못할 방아쇠를 잡고 흔들리는 서화를 마치 명화라도 감상하는 미술인처럼 그윽히 눈에 담았다. 미친 것이 분명했으나 가온은 분명 그 상황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이는 분명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려 애쓰는 서화의 모습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내려다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언니, 좋아하는 게 죄가 되어서는 안돼요.

-존재가 죄인데, 그 마음이 죄가 안될 리 없잖아요.

-죽으면 증명 할 수 있을까요?

-... 뭐?



흔들리는 것이 마음인지, 총구인지. 그게 아니면 이미 마음에 넋을 놓아버린 이성인지. 가온은 서화가 놀라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총을 쥔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겹쳐잡았다. 가온은 총 끝이 흔들린다며 서화를 다독였다. 가온은 이마를 겨누고 있던 총구를 내려 제 심장을 겨누었다. 가온은 눈꺼풀 뒤로 눈동자를 숨겼다. 

서화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당겨지지 않았던 방아쇠가 가온의 손길 한 번에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시끌벅적한 총소리가 침묵을 가르고 하늘 위로 흩어졌다. 짧은 발포음 뒤로 가온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서화는 쓰러지는 가온의 모습을 초점을 잡지 못하고 망가져버린 동공으로 뒤쫓았다. 쏘기 직전까지 흔들리던 손은 결국 마지막 순간 글록을 놓쳐버렸다. 서화는 다급하게 자세를 낮추어 가온의 숨을 확인했다. 서화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이미 미치광이에 가까웠다. 이는 여전히 뛰고 있는 가온의 심장소리를 듣고 나서도 여전했다.


서화는 그 한순간에 총구를 들어 심장이 아닌 가온의 옆구리를 관통시켰다. 가까운 곳에서 맞은 만큼, 가온의 피부조각은 총알로 인해 난자당한 듯한 형태로 찢어져 혈흔을 쏟아냈다. 혈흔은 가온의 옷가지와 살결을 적시는 걸로도 모자라 서화에게까지 튀어들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가온의 피가 어느새 아스팔트를 타고 서화의 옷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 내거다.'

가온은 제 피로 물들어가는 서화를 보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했다. 입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피와 함께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비춰지는 서화의 눈물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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