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복을 비롯하여 중요한 사항이 어느 정도 결정되고 나자 다음엔 결정된 것들을 이행하는 단계가 남았다. 토르와 로키는 매일 같이 바쁘게 이리저리 불려다녔다. 치수를 잰다 장식을 한다 새로 맞췄으니 입어봐라 두 분이 거하게될 궁을 꾸미는데 실내 장식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예식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등등 온갖 일에 끌려다니고 나면 하루가 지나 있었다. 성인식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노라고 토르는 제 얼굴에 시종들이 잔뜩 발라놓은 정체 모를 끈적한 액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차라리 일주일 내내 전투를 하는게 낫다 여겨질 지경이었지만 아무 불평 않고 하라는 대로 얌전히 인형이 되어준 건 솔직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였다. 겨우 10년 남짓 겉보기만 유지하고 말 혼인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들이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미안해진 탓이다. 그런 토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이 만든 예복과 함께 이런저런 장신구를 들고 스카디와 시종들이 찾아왔고 토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기 무섭게 시종들의 작은 비명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하면 기껏 발라놓은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나 뭐라나.




"이번이 몇 번째였지?"

"열 한 번째입니다."



스카디가 짧게 답하며 그의 옷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열 한 벌의 옷을 갈아입는 동안 무엇이 그리 달라진 건지 토르는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의상은 거의 붉은색과 금색과 약간의 은색 천 들이었고 무언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눈에는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소매가 좀 짧아진 건가? 지난 번보다 조금 무거운 것도 같은데 확실하진 않고. 어차피 예복이라면 그냥 갑주를 입어도 되지 않을까? 그가 천둥의 신으로서의 호칭을 모두의 앞에서 공표하게 된 날 입었던 것도 갑주인데 그 정도면 충분한 예복인데. 이미 반박받은 바 있는 의견을 곱씹는 사이 스카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그시 보다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요. 그럼 이제 두 분의 조화만 보면 되는데...왕자님, 조금 옆으로 몸을 돌려주시겠습니까?"




또인가. 토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스카디가 마법으로 로키의 의복 형상을 토르의 옆에 나란히 세우려 손을 놀리는 게 보였다. 토르는 문득 로키의 옷은 어떤가 궁금해졌다. 로키도 그만큼, 혹은 복잡한 상황상 토르보다 더 많이 갈아입었을 텐데 대체 어떤 모양으로 결정된 건지 알고 싶었다. 로키는 그와는 달리 아름다운 예복이며 장식들을 좋아했으니 별로 어렵진 않았겠지. 고개를 좀 돌리자 언뜻 연한 하늘색과 초록색의 천자락이 보였고 그러기 무섭게 스카디의 매서운 손이 토르의 턱을 턱 잡아 멈추게 했다.



"왕.자.님."




왕족 상대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나 스카디는 더 없이 진지했다. 그녀가 서슬퍼런 눈으로 토르를 쏘아보며 말했다.



"혼례 전에 미리 보는 건 금기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불행한 혼인 생활을 하게 된다고요."




딱히 잘 살 생각이었던 것도 아닌데? 기세에 눌린 토르는 말을 삼키고 고개를 돌린채 천장으로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런 그의 옆에서 스카디와 그녀 휘하의 시종들이 의견을 이리저리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왕제님의 옷 색이 눌리니 조금 연하게 하고, 아니 이쪽을 진하게 하면 어떻게 할까요? 천 종류를 바꿔보면 어떨까? 차라리 이쪽에 포인트 장식을 주어서 시선을 분산시키는게 낫지 않겠어요? 기타 등등..기타 등등..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황금빛 천장을 올려보며 토르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취소할 수 없을 거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빨리 치르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그는 혼례까지 남은 날을 헤아렸다. 약 3달. 이마저도 국혼치고 너무 서두르는 거라 신하들은 아우성이었만 당사자 둘이 강력히 빨리 해치우자고 주장을 해서 얻은 기한이었다. 덕분에 아주 이상한, 그러니까 둘이 벌써 그렇고 그런 의미로 아주 좋은 사이가 아니냐는 오해를 좀 많이 사기는 해버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빨리 이 재난을 끝내야만 했다.












"얼굴 꼴이 엉망이네."



토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혼례를 코 앞에 둔 요 며칠간은 머리카락 끝도 볼 수 없었던 로키가 눈 앞에 있었다. 그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일이 식인데 그런 얼굴로 괜찮겠어, 왕자님?"

"...뭐, 아무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자신과 달리 반질반질한 얼굴이 공연히 약올라 토르는 부루퉁하니 답했다. 그는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식에 앞서 치러야 할 제의를 치르다가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앞에 경비가 있었을 텐데?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혼인 전에 마주치면 안된다고 엄청 요란 떨면서 막아서던데."

"그래? 별로 방해랄 게 보이지 않던데."



말하는 로키의 손 끝에 초록색 빛이 감겼다가 사라졌다. 아, 맞다. 토르는 깨달았다. 로키는 비밀 통로도 많이 알고 마법도 사용할 수 있으니 남들의 방해없이 드나드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로키가 다른 마음을 먹지 않은 게 다행이지. 토르는 저도 모르게 목 주변을 주무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키가 굳이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닐 거고. 왜 여기에 그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토르의 얼굴을 마주한 로키가 그의 의문을 읽은 듯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이라도 도망칠 줄 알았는데 안 갔네. 이번에도 도망치면 나를 망신 준 대가로 저주라도 걸어줄까 했는데."



웃는 얼굴에 한기가 스멀스멀 느껴져 토르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보시다시피 여기 멀쩡히 있습니다."

"그래, 그건 다행인데 별로 멀쩡해보이진 않아."



맘에 안들어하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은 로키가 그의 얼굴 위로 손가락을 춤추듯 가볍게 움직였다.




"숙부님?"



부르기 무섭게 얼굴 위로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적당히 기분좋은 냉기에 토르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로키가 말했다.



"이제 좀 낫네."



토르는 눈을 뜨고 로키의 표정과 마주했다. 스스로도 모르게 몸에 쌓여있던 피로감이 사라져있었다. 토르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로키가 먼저 와서 좋은 의도로 마법을 걸어주는 게 혼례 준비 기간 동안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다른 때면 어림 없는 일인데. 혹시 로키는 이 혼례를 기대하기라도 하고 있는 걸까? 저 얄미운 숙부가?




"표정 관리 정도는 해. 니 얼굴 꼴이 엉망이면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 '오, 봐봐. 역시 아스가르드 왕자는 제 반려가 맘에 안 드는게 분명해. 저게 어디가 혼인을 하는 자의 얼굴이라고 하겠어?' 그런 소리들이 오갈 거 아냐? 그 정도 외교적 머리도 안 돌아갈 정도면 실망인데. 오딘이 아주 실망할 거야. 그 동안의 제왕학은 무얼 위해 배운 거냐며."




생각을 끊고 들어온 로키 특유의 말투에 토르는 고이 제 생각을 접었다. 공연히 더 무안해져 그는 볼을 긁적였다. 일단은 사과하는 게 맞겠지?



"음..죄송합니다. 제가 좀더 신경 쓰겠.."

"당연히 신경 써야지. 내가 말해야 안다는 거 자체가 틀려먹었어, 철부지 왕자야."



로키는 짧게 말을 잇고 자리를 떠났다. 문을 닫으면서 그가 말했다.



"내일은 좀 그럴듯한 얼굴로 웃어봐, 조카님."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문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토르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착각을 한 거람.











처음 준비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영원히 끝날 거 같지 않더라니 결국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라며 토르는 시종들이 정성을 다해 입힌 옷깃을 보다 손을 올렸다. 그의 몸에 딱 맞춰 만들어진 혼례복이 답답하게 느껴져 조금이라도 여유를 주고 싶어서였으나 바로 곁에 선 시종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지는 것에 토르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어깨를 덮기 시작한 토르의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정리한 시종이 뿌듯한 얼굴로 손을 뗐다. 마무리로 머리카락 끝에 십년에 단 하루 핀다는 루피아 꽃을 모아 만든 값비싼 향료를 아낌없이 발라준 시종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다 되었습니다. 왕자님."



그를 올려보는 어린 시종의 눈에서 뿌듯함과 설레임 등이 묻어났다. 인사치례를 하며 몸을 일으키자 설레임과 기대가 가득한 시종들의 시선이 닿았다. 모두가 설레고 흐뭇해하는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오늘은 특별할 거 없는 좀 번거로운 날일 뿐인데 다들 그에게 뭘 기대하는 건가 싶어졌다. 로키와 제가 숙부와 조카로 천년 넘게 지내왔던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말이지. 그 사이에 무슨 왕실 로맨스라도 있기를 바란단 말인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이쪽입니다."



혼례에 맞춰 역시 정성스레 옷을 차려입은 시종 하나가 그를 로키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본래는 아스가르드의 왕족이 먼저, 타국에서 온 왕족이 뒤늦게 입장을 하는 게 관례였으나 로키의 복잡한 위치-오딘의 의형제이자 요툰헤임의 왕족- 탓에 어느 쪽을 먼저 입장시켜야하는지 같이 복잡해져 둘이 동시에 입장하기로 정해졌다. 또한 혼례가 치뤄질 왕궁의 중앙 홀은 로키의 별궁에서 훨씬 가까웠기에 토르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로키를 데리러 가기로 했다. 서리거인의 모습을 한 채로 기다리고 있을 숙부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느 쪽 모습을 취할 것인가 한참을 논의한 끝에 로키는 예식 중간에 서리거인에서 아스가르드인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도통 로키의 서리거인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다. 성인이 된 이래 항상 지금같은 형상을 취했기에 그의 서리거인 모습은 어릴때 외에는 본 기억이 없다. 푸른 피부에 붉은 눈인건 알지만 성인인 지금도 어릴때 그대로의 생김새일리는 없고. 토르는 현재 그가 알고 있는 로키의 모습에 푸른색과 붉은색 눈을 덧붙여보았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어?'



토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뭔가 기억날 듯 한데?



"어서오십시오, 토르 왕자님."



시종의 목소리에 토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로키가 머물게 된 이후로 서리별궁이라 불리게 된 궁전은 로키의 취향대로 아스가르드의 금색 위에 얇게 은으로 여러 섬세한 무늬들이 돋을 새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릴 때 이후론 거의 들어온 적 없는 궁을 새삼 둘러보던 푸른색 시선이 연한 금빛의 문에 닿아 멈췄다. 문을 열기 시작한 서리별궁의 시종들의 얼굴에 두근거림 섞인 홍조가 떠올라 있는 걸 본 토르는 쓴웃음을 삼켰다. 하긴, 보통 이렇게 자신의 반려를 처음 마주하면 좀 더 설레거나 두근거리긴 할 터였다. 애석하게도 토르와 로키 사이는 그런게 전혀 아니었지만 이들이 이렇게 기대하니 조금쯤 어울리는 반응을 해줘야할까? 하지만 로키는 태연한데 자신만 반응하면 그또한 웃긴 모양새가 될 것도 뻔한 일이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는 사이 문이 완전히 열렸다. 토르는 생각에 잠겼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토르가 어릴적 일이었다. 매번 저를 온갖 마법으로 골탕먹이던 로키가 요툰헤임으로 돌아간지도 몇 년째, 평화로운데 묘하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토르는 프리가의 부름에 왕비궁으로 달려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낯선 아스가르드인과 만났다. 왕비가 손수 가꾸는 정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아름다운 티테이블에 앉은 남자는 토르의 발소리에 그를 흘끗 보았을 뿐 아무말 없이 찻잔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무시를 받아본 적이 없던 토르는 바로 자세를 똑바로 하고 남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너는 누구지? 그리고 왕비는 어디 계시는가?



남자는 대답않고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찻잔으로 가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가 자신의 언행에 웃고 있다는 걸 눈치 챈 토르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낯선 이인데 어딘가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새하얀 피부와 목끝을 살짝 덮는 검은 머리가 선명히 대조되어 눈에 띄었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건 남자의 눈이었다. 왕비 정원에 가지각색으로 자리한 초록색의 식물보다도 선명한 녹색은 그 안에 담긴 수없이 많은 생각들로 반짝거렸다. 예쁘다. 무심결에 생각했다 화들짝 놀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낯선 이의 얼굴에 넋을 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 그가 한 질문에 무엇 하나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남자의 웃는 입매가 기억 속 얼굴 하나와 맞물렸다. 설마..




-....숙부님?

-풉..




남자가 더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그는 웃음으로 인해 떨리는 손에 들린 잔을 내려놓고 토르 쪽으로 돌아앉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그보다 한참이나 키가 컸다. 그가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자 발 끝에서부터 모습이 천천히 바뀌어 가며 서리거인의 푸른 피부와 일족 특유의 문신, 그리고 붉은색 눈이 드러났다. 이젠 더 이상 소년이라곤 할 수 없는, 훤칠한 청년의 모습을 한 로키가 몸을 숙여 토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여전히 멍청하네, 토르. 피부색 좀 바뀌었다고 숙부 얼굴도 못 알아보고.

"내가 서리거인인 거 처음 알아? 왜 그렇게 얼어있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토르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저와 손을 잡고 서 있는 로키를 흘끗 내려보았다. 초록색과 은색을 바탕으로 요툰헤임 특유의 흰 모피를 장식으로 아낌없이 덛댄 예복을 차려입은 로키는 서리거인의 모습이었다. 로키가 성인으로 아스가르드에 돌아온 이래 단 한번도 취하지 않던 모습이 오랜 기억을 자극해서였을까. 잊고 있었던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로키의 아스가르드인 모습을 보았던 순간과 그때 느꼈던 이상한 감각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변명은. 지금 손 뻣뻣하게 얼어있는 거 알아? 다들 우리 뒤에 서 있기에 얼굴을 못 봐서 다행이지."

"그건 숙부 손이 차가워서.."

"어흠, 흠."



헛기침 소리에 토르는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혼례를 주관하는 대마법사 프레이르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한 토르는 눈빛으로 미안하다 전하고 입술을 꾹 다물며 로키의 손을 꽉 쥐었다. 앙갚음이라도 하듯 마찬가지로 손을 꽉 쥔 로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앞에서 긴 예식에 따르는 오랜 마법 주문을 읊기 시작한 프레이르를 한 번 더 거슬렀다간 잘못된 주문에 묶일까 차마 더 못하고 그는 애써 앞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길고 긴 주문을 다 읊어 혼례의 약속을 마법적 계약으로 만든 프레이르가 둘에게 선언했다.




"이제 상대를 반려로 맞이한다는 계약의 증거로 맹세의 키스를 해주십시오."



토르는 로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로키도 그렇게 했다. 토르의 눈 앞에서 로키가 눈을 감더니 그와 마주잡은 손 끝에서부터 천천히 그에게 익숙해진 아스가르드인의 창백한 피부색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하객들 사이로 짧은 웅성거림이 스쳐지나갔다. 마침내 머리 끝까지 완전히 아스가르드인의 형상으로 바뀐 로키가 눈을 떴다. 선명한 초록색의 눈. 로키의 초록색과 은색의 예복은 그가 서리거인의 모습일 때도 잘 어울렸지만 아스가르드인의 모습일 때 더 잘 어울렸다. 특히 그의 녹음을 짙게 담은 눈이 예복의 초록색 위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져 더 그랬다. 어릴 때 잠깐을 제외하고 계속 봐왔던 익숙한 모습을 마주하자 새삼 자신이 숙부였던 로키와 혼인한다는 게 실감이 나 공연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차라리 아까의 서리거인 모습이었으면 남일 같기라도 했을 텐데.




"왕자님."



프레이르가 조용히 재촉했다. 토르는 로키의 얼굴을 마주했다. 토르가 망설이는 걸 눈치챘는지 로키가 비웃음 비슷한 표정을 슬쩍 띄웠다. 그가 소리없이 입술만 움직여 말을 건넸다.



-내가 먼저 해줘?



도발에 토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무감보다도 오기에 토르는 빙글거리는 로키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레 들이밀어진 입술에 깜짝 놀라 눈을 살짝 크게 떴던 로키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타액이 섞여 들어갔다.숙부에게선 겨울의 향이 나네. 토르는 감았던 눈을 뜨며 입술을 뗐다. 키스를 하며 습관적으로 허리를 끌어안은 토르의 팔을 지그시 밀며 로키가 눈을 떴다.



"숨막혀, 멍청아."



투덜거리는 입술과 검은 속눈썹 사이로 드러나는 초록눈을 멍하니 보고 있는 토르의 귀에 프레이르의 선언이 선명하게 내리꽂혔다.



"토르 오딘슨과 로키 라우페이슨의 혼인이 성사되었음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선언합니다."



하객들의 환호성이 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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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결혼했네요. 

웹에는 다음편까지만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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