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본 소설은 체벌 요소, 폭력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W. 편백








삑, 띠리리.

"2번!"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3번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2번이다, 2번! 


주인 맞이하는 강아지 마냥 달려 나간 3번이 우뚝 멈춰섰다. 아까 옥상에서 봤던 것보다 더 큰 상처들을 주렁주렁 달고 온 개별의 모습 때문이었다. 오면 왜 이리 늦었냐며 잔뜩 귀찮게 굴 생각이었는데 개별의 상태를 보니 아무런 말도 행동도 나오질 않았다.


2번과 3번은 숙소 룸메이트였다. 3급 때는 군 내무반처럼 동기 모두가 한 방에서 지냈어야 했으나 2급으로 진급한 이후로는 둘씩 짝지어 방을 쓸 수 있었다. 기수 순서대로 룸메이트가 찍 지어졌고, 3번과 2번이 같은 방이었다. 21기 1번이 함께 진급했더라면 아마 3번은 2번과 같은 숙소로 배정 받지 못했을 것이다.


저를 부르며 달려나온 3번이 자신의 꼴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개별은 아무 반응하지 않았다. 일단 신발부터 벗었다. 덥썩, 3번이 개별의 팔을 붙잡고 몸을 살폈다. 하필이면 아까 맞은 데를 잡은 3번에 2번은 인상을 그득 찌푸리며 3번을 바라봤다. 팔이라도 뿌리치고 싶은데 저보다도 더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살피니 곧장 내칠 수가 없었다.


"아파요, 놔요."


3번은 원체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보통 정보 능력 특화생들은 집에서 컴퓨터만 두들기고 있는 경우가 많아 내성적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 인간은 돌연변이인지 뭔지 참 붙임성이 좋았다. 그에 비해 2번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목적 없이는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말을 걸어도 단답, 반응도 딱딱하고 미소 한 번을 잘 보이지 않는다. 인싸 오브 인싸 3번에게도 유일하게 친해지지 못한 사람이 2번이었다. 들이대도 들이대는 만큼의 성과가 없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3번도 2번에게 비비질 않았다. 


그러나 이번 팀 대련에서 같은 조가 되었고, 이는 신이 주신 찬스였다. 2번이랑 친해질 찬스. 비즈니스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살아 생전 2번의 목소리를 그리도 많이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를 쓰는 것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가끔씩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도 지니어스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푹 빠져버렸달까? 못하는 게 없는 게 멋있었다. 비슷한 수준이라면 라이벌로 두고 따라잡으려 애썼겠지만 그 경지를 넘어선 사람은 우러러보기 마련이었다. 정말이지 별처럼 반짝 반짝 빛났다. 그런 의미에서 3번은 2번의 광팬이었다. 2번은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건 없을 거다. 하면 무조건 잘 하는 사람. 뭘 해도 멋있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2번이 아무리 무반응이어도 막 들이대보기로. 10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고, 무지성 비비적대기는 막기 어려울테니까. 함께 팀대련을 준비하면서 잔뜩 친근하게 굴었고, 혼자 있을 때면 항상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처음엔 아무리 말을 붙여도 대답을 않더니 나중엔 저를 보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농담을 던질 때면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 꽤 재밌기도 했다.


"비켜주세요."


틈을 비집고 현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개별을 눈으로 쫓았다. 옥상에서 헤어질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에 피폐하진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보 팀장님과 밥 먹고 나서 숙소에 가면 오늘 대련에 대해 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근데 한참이 지나도 오질 않고, 겨우 돌아와 비춘 얼굴엔 상처가 가득하기까지 하다. 딱딱한 말투로 제게 말을 던지곤 저를 지나쳐 들어가버린다. 농담까지 할 수 있는 사이가 됐으니 나름 가까워진 줄 알았는데 다시 벽이 세워진 기분이다.


미친.


캐비넷을 열고 옷을 벗은 2번의 상체가 온통 얼룩덜룩했다. 저건 대련할 때 다친 상처가 아니었다. 두껍게도 부어오른 팔을 보고 놀란 3번은 2번에게로 다가가 몸 상태를 확인했다. 2번이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손길을 뿌리쳤다.


"아 좀,"

"또 누가 괴롭혀요?"


'또'라고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선배 기수가 싹 물갈 됐었던 사내 괴롭힘 사건 때문이겠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가해자들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묘연했다. 저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3번을 다시 내칠 수가 없었다. 다친 저보다도 더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며 걱정하는 사람에게 어찌 그렇게 굴겠는가. 그는 잠시만 기다려보라며 수건을 꺼내더니 냉동고을 열어 그 속으로 얼음을 때려 부었다. 아, 차가워. 상처가 많아 어디부터 찜질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일단 제일 상처가 심해보이는 곳에 냅다 갖다댔더니 2번이 몸을 움찔 거렸다.


"어머, 미안해요. 차가워요?"

"아니, 하아..."


짜증난다. 3번의 저 친절함이 자괴감이 들 만큼 기분이 더럽다. 정보 팀장님 아래 있다고 저렇게 따뜻한 걸까?


"...괜찮아요?"


그에 비해 나는... 개 팀장 아래에 있어서 타인의 호의에 이리도 싸가지 없이 굴게 된 건가? 괜히 3번에게 화풀이 하는 꼴이 꼭 S의 미니미 버전이나 다름없었다. 괜찮냐며 걱정 어린 말을 뱉는 3번에 개별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난 절대 그 사람처럼 되지 않을 거야. 



개팀장한테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서, 제가 불 사질렀던 과제물을 다시 받으면서, 그 지옥 같았던 사무실을 벗어나면서 수도 없이 다짐했다. 난 절대 팀장님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고. 아직은 내가 그 인간보다 모자라니 설설 기어야겠지만, 훗날엔 내가 개팀장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을 내 발 아래로 두겠다 다짐했다.


"아까 치료 다 받고 왔어요. 괜찮아요."


개별은 3번의 손을 잡아 얼음 주머니를 떼어내곤 최대한 친절하게 이야기 했다. 그동안 괜시리 틱틱 대던 투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말투에 3번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밥은, 먹었어요?"


모든 이가 기피하고 싫어하는 S와는 다른, 모든 이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전략가가 될 거야. 그리고 모든 이를 대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단 한 사람, 팀장님만 빼고. 그게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겠지.


"아뇨, 내일 아침에 먹어야죠."


제게 흐릿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웃는 걸 처음 본 것 같다. 얼굴이 기생 오래비 같이 생겨서 그런가, 얼굴이 흉측하리만큼 부어올라 있어도 웃으니 참 예뻤다. 변복한 2번이 책상 위에다 파일을 펼치고 펜을 꺼냈다. 수능 직전의 고 3도 이렇게 열심히 하진 않겠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더니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아까 탈의할 때 슬쩍 보니 하체에 멍자국이 가득했었지. 아마 그 상처가 아려서 저러나보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저 많은 과제를 어떻게 다 감당하는 것일까? 난 정보 교육 과제만 받아도 수행하기 어려워 쩔쩔매는데... 온갖 교육이란 교육은 다 듣는 2번은 늘 과제를 산더미로 받아놓고 밤 지새웠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 하면서도 남들 다 잘 때 눈을 붉히고 있었다. 그 많은 과제 중에서도 작전 교육 과제가 전체 분량의 반은 차지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입이 벌어질 만큼 쌓여있었지만 오늘은 그 양이 이전보다 배는 많았다. 저걸 언제 다 하려나. 다른 교육생들은 저 아이가 재능을 타고 났다고 시기 질투하지만 가까이에서 봐 본 결과, 쟤는 타고난 것보다 더 큰 노력을 하는 애였다.


서울대 의대에 합격 시켜준다고 해도 그 많은 공부량을 감당해내야만 의사가 될 수 있듯이, 어떠한 엠블럼을 지니기 위해선 그만한 노력이 필요했다. 2번을 예로 들자면 별, ND의 유망주 따위와 같은 엠블럼말이다. 난 그걸 훈장을 준다해도 감당하지 못한다. 쟤니까 하는 거지. 고로 부러워할 게 아니라 우러러 봐야 한다는 게 더 옳지.


그래서 적어도 저 시간 만큼은 건드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저 아이의 비상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웁,


"나 불 키고 자는 거 좋아해요!!!"


까, 깜짝이야... 난 데 없는 고함질에 깜짝 놀란 2번이 황당한 표정으로 3번을 바라봤다. 그래서... 어쩌라고...? 얼굴로 말하기 대회가 있다면 2번은 두 말 할 것 없이 대상일 것이다. 세상 하찮은 말을 세상 씩씩하게도 내뱉은 3번이 민망한 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 나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하라구요..."


블랙 조직 소속원이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지가 대뜸 어그로 끌어놓고 생각보다 큰 반응에 멋쩍어 하는 건 뭐야?


"...네, 고마워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세상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인 3번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다. 오늘 내내 죽상이었던 개별이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저런 사람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하는구나.









*







S는 현재 보스실에 홀로 서 있었다. 호출 해놓고 자리에 있지 않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예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망할 조직 문화. 막돼먹은 짓거리에 열불이 터져도 여긴 계급이 우선이었기에 차마 어찌 할 도리 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쯧, 하여튼 재수 없는 인간."  


보스에 대한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다. 아마 ND 내에서 가장 충성심이 없는 사람이 S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에 붙어 있는 건, 단지 버릇 또는 비즈니스일 뿐이었다.


철컹,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시계를 보고 있던 S가 뒤를 돌았다. 때깔나게도 입은 보스가 뒤에 C를 달고 함께 보스실로 들어 왔다. 둘이 원래 같이 있었던 것인지 오다 만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기분이 더러웠다. 허리 숙여 인사 했지만 받아주는 제스처라고는 1도 없이 본인의 데스크 앞에 앉았다.


"보고 시작해."


몇 십 분을 마을 정승 마냥 굳건히 자리 한 채 기다렸는데, 늦은 주제에 미안하단 말 한 마디도 없이 명령질이었다. 나한테만 저러지. 다른 직원들한테는 저한테 대하듯 이리도 싸가지 없이 굴지 않으면서. 꿈쩍도 않는 것이 상정이었다. 반응해서 뭐하겠는가.


"fast 관련하여 ND 미국 지사와 화상 회의 회의록이랑 전략 설명서입니다."


fast는 이번에 Exi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IT 기업이었다. ND의 정보력으로 타 기업보다 빨리 알아챈 전망이 밝은 기업. 다른 데서 눈독들이기 전에 계약을 맺어 Exi에 소속시켜야 했다. 이에 따라 fast에겐 큰 이득이 되는 계약 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놓치면 아쉬운 쪽은 Exi인 걸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fast는 계약 조건을 점점 Exi 측에 불리하게 세우며 갑의 위치에 서기 시작했다.


"추가적으로 찾은 fast 정보 조사 보고서입니다."


결국 Exi 내부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 결국 ND의 개입이 필요해진 상황까지 온 것이다. ND에서 fast의 뒷조사를 마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Exi의 계약을 따내야 한다. fast와의 미팅에서 S와 C는 표면적으로는 Exi 소속으로 참석하게 될 것이다. Exi의 비중 있는 주주이자 간부이기 때문에 가능한 신분이었다.


어둠의 조직이라 하면 물리적 폭력으로 일을 해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ND는 아니다. 특히나 이번 작전처럼 기업 혹은 조직과의 대결이 아닌 연합의 경우는 암투이다. 보이지 않는 싸움의 영역.


"해외 지사랑 스케쥴 조정해서 일정 잡히면 출장 다녀와."

"예, 알겠습니다."


Exi의 대형 프로젝트를 위한 계약인 만큼 보스와의 회의가 길어졌다. 보스실을 나선 S와 C는 뻐근한듯 목부터 꺾었다. 


"......"

"......"


어색하다. C와 함께 걷는 게 불편하리 만큼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어제 개별이 놈을 때려패다 C랑 잠깐 부딪혔던 사건 때문이겠지. 큼, C가 괜시리 헛기침을 뱉었다. 너도 불편한가 보구나? S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 말이나 건넸다. 평소였으면 물어보지도 않을 티엠아이 질문 정도.


"회의 오기 전에 뭐 했어?"

"오전에 보안 교육하고, 보스랑 같이 식사했습니다."


보스와 같이 식사라니. 다른 팀장들은 그 작자와 술잔도 부딪힐 만큼 친분이 있어 식사야 쉽게 가능하겠지만 S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보스와의 관계가 좋지 않기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불편했다. 아마 제가 조금이라도 무능력 했다면 곧장 나가리였을 것이다. 아직 저를 따라 잡을 직원이 없으니 옆에 두고 있을 뿐이지.


"나라면 체 했어."


S의 솔직한 말에 C가 무슨 소린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히도 말했지만 어쩐지 씁쓸해보였다. 다시 침묵이 흐르길 시작했다. 보스랑 식사 했다는 말은 뺄 걸 그랬다.


"보안 교육이면 개별이도 들었겠네?"

"개별이가 누굽니까?"

"2번."


아. C가 짧은 감탄사를 뱉고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오늘 보안 교육에서 제일 먼저 취약점을 찾아내 코드를 입력하여 보완했었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녀석은 교육 시간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는데 작업을 완료하고 일찍 교육실을 나섰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교육 때도 한 건 했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S가 묻고자 하는 바를 지레 짐작하고 먼저 알려주었다. 역시나, 눈치도 빠르고 센스도 대단하다. 저러니 보스가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 밥을 먹지. 


다시 침묵이 흘렀다. 개별이 얘기를 꺼냈더니 어제 일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어젠,"


C가 걸음을 멈춰서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함께 걸음을 멈춰선 S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죄송했습니다."


C가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잘못은 제가 한 것 같은데 왜 C가 사과를 하는 것일까? 그때 C가 제게 뱉었던 말이 뼈 아프긴 했지만 틀린 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낸 것도 맞았고, 제가 아닌 C에게 갔더라면 엄청 예쁨 받으면서 조직 생활 했을 거라는 그 말도 전혀 틀리지 않았었다. 


C는 3번과 마주보고 밥 먹을 만큼 본인의 팀원을 잘 챙겼다. 살갑게 굴고 다정히도 대하는데, 그에 비해 저는 개별이를 막 대하면 막 대했지 칭찬 한 번 제대로 해 준 기억이 없었다. 보스가 저와 함께 밥을 안 먹어준다고 씁쓸할 이유가 있나. 내가 보스를 싫어하는 만큼 개별이도 저를 싫어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개별이 잘못인가, 내 잘못이지. 그러니 C의 말은 간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안."


아랫 사람에게 고개 숙이는 법 없는 S가 사과를 한다. C가 내심 놀란 눈치로 S를 바라보자 그 시선이 민망한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C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살다 살다 작전 팀장님 사과를 다 들어보네.







*




그걸 진짜 다 해오냐...?


"허, 참..."


 종이에 빼곡히 채워진 글씨들을 보던 S가 기가 찬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는 개별을 바라봤다.


"너 얘네들이랑 친해?"


같은 팀원이었던 교육생들에 대해서 알아오랬더니 개인 tmi까지 모조리 적어온 것이 참 신통방통 했다. 거기다 시키지도 않은 과제들까지 지가 혼자서 해오기까지. 이 팀원들 구성으로 짤 수 있는 전략들 플랜 A, B, C, D... 몇 개니? 뿐만 아니라 각 플랜에 ', ''까지 혼자 변수를 계산해서 쭉 적어놓은 것이 참 장하기도 장했다.


"안 친합니다."

"그럼 신종 반항이야?"


해오래서 해왔더니 왜 지랄이냐는 눈빛이다. 아니, 시키긴 시켰지... 근데 진짜로 다 해올 줄은 몰랐어.


"다른 교육 과제들은 다 해가긴 해?"


믿을 수 없다는 듯 취조식으로 제게 꼬치꼬치 캐묻는 S에 개별이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렴 작전 팀장님 성질머리가 가장 더럽다지만 다른 팀장님들도 팀장님들만의 아우라가 있었다. 앞에 서면 괜히 기죽게 되고, 가끔 화를 내실 때면 공포를 느낄 만큼 무섭다. 그런 작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교육을 받는 내가 설마 내가 작전 팀장님한테 안 뒤지려고 다른 과제들을 다 포기 했을까봐?


"그것들은 받는 당일날 다 끝낼 수 있어요."


내가 내주는 것들이 많고 어렵다는 걸 이렇게 돌려 말하네. S는 개별의 말에 헛기침을 했다. 사실 녀석이 과제를 다 해오겠다고 했을 때 딱히 기대하지 않았었다. 안 해 오면 뒤진다고 엄포까지 했었지만 사실상 여기에 반만 해와도 노력이 가상 했기에 별 말 없이 넘어가 줄 생각이었었다.


하는 말은 반드시 지키는구나. 무슨 수가 있어도 지키는구나. 대견하기도 하고, 다크써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얼굴을 보니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의자 끌고 와."


개별은 S의 지시에 주변을 둘러 보며 의자를 찾았다. 이건 또 언제 장만한 거람? 창고 가면 널린 게 의자던데 뭐하러 새삥으로 준비해 둔 건진 모르겠다. 쇼파 옆에 짱박아 놓은 의자를 두 손으로 들어 가져 온 개별이 S를 바라봤다. 평소엔 사무실 구석 쇼파에 앉혀두고 다른 자료들을 주며 주어진 문제를 풀도록 시켰는데 오늘은 뭔 바람인지 마주보고 앉도록 앞에 앉으라며 턱짓했다. 의자를 놓고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쿠션감이 상당하다. 이틀 전 맞은 곳이 눌려도 아프지 않을 만큼.


"시간 걸리니까, 이거부터 외우고 있어."


S가 인쇄본을 개별의 앞에 펼쳤다. 첫 줄만 서너번 반복해서 읽어야 할 만큼 가독성 떨어지는 용어와 코드들이 천지였다. 뭘까? 은어? 양면으로 인쇄되어 사전만한 두께를 가지고 있는 종이 뭉텅이를 보며 개별은 한참 동안이나 벙쪘다.


"...다 외워야 합니까?"

"이건 다 해놓고, 그건 못해?"


할 말이 없다. 이번에 내준 과제를 괜히 다 해 왔나. 아냐, 다 안 해 왔어도 시켰을 거야. 못 외우면 때려서 외우게 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외우기 싫게도 생긴 이 글자들을 보자니 벌써부터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Exi가 글로벌 기업인 만큼 ND도 글로벌 규모야. 나중에 해외 지사랑 자주 교류할텐데 걔네들이랑 소통하려면 공통 은어는 필수야. 이거 검사 끝나고 용어 하나 하나 설명해줄게. 일단 외워."


"...예."


얼핏 울상이 스쳐간 건 기분탓이겠지. S는 입 안에 와사비라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개별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동안은 저와 멀찍이 떨어트려놓고 따로 공부를 시키다 오늘은 앞에 앉혀놓았더니 열중하는 모습을 실시간 4K로 감상할 수 있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눈이 참 국보급이다. 땡그란데 날렵한 것이 꼭 고양이 새끼같은 눈깔이다. 뉘집 새낀지 참 곱게도 생겼다, 곱게도 생겼어...


"......"


그러고 보니 낯설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자체로 독보적인 녀석이라 그 기운이 흐릿해 확실히 판단하기가 어렵다만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운이 보였다. 이 집중한 모습이 말이다. 개별은 S가 본인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그란 정수리를 내보이며 용어들을 살폈다.


"저, 질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감상에 젖기도 잠시 불쑥 말을 건네는 개별에 정신이 확 깼다. 선녀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 걸린 나무꾼 마냥 덜컥 심장이 내려 앉았다. 다행히 녀석은 자료에 집중하느라 S의 그 표정을 못 본 것 같다.


"뭔데."

"예전 작전 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 질문에 S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묵념이라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 난데 없이 작전 팀장님에 대해 물어보는 녀석의 저의가 궁금했으나 표정을 살펴보니 별 의도는 없어보였다.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듯 했다.


"5년 전에 돌아가셨어."

"아..."


괜히 물어봤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암울해졌다.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답변이었지만, 죽었다니 무어라 반응하기가 힘들었다. 머쓱한 듯 이마를 긁적인 개별은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다시 시선을 자료로 옮겼다. S도 딱히 다른 말을 추가하지 않고 개별이 해온 과제물을 읽어내렸다. 


S는 과제물을 바라보며 구 작전 팀장에 대한 잔상에 빠져 있었다. 실력 있고 자상한 분이었지. 그 누구보다 멋있고 존경스러웠던, S의 유일한 우상이었다. 개별이가 가볍게 물었던 질문이 S에게 가져 온 영향력이 상당했다. 구 작전 팀장님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더니 그동안 함께 보낸 세월들과 그의 그 초라하고 덧없던 최후가 자꾸만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본 S의 표정이 어쩐지 씁쓸했다. 팀장님이 저런 표정도 지어 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나? 이런 폭력 조직에서 근무하다 보면 같은 동료가 죽는 일은 다반사일텐데. 어지간히 정을 주고 받은 사이였었나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애틋한 표정을 내보일 리는 없을테니.


뭐, 그러든 말든 내 알 반가...


'지잉-'


데스크 위에 올려둔 S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 덕에 잡생각에서 깨어난 그는 전화기를 집어 ND가 개발한 통수신 어플을 확인했다.


'O#2021023 : S-12.'


해외 지사로부터 전송된 메세지는 fast의 출장 날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전명 O#2021023, 시행일이 12일 뒤다. 이번 작전은 fast 간부들과 대면 미팅에서 무조건 계약을 따내는 것이었다. fast는 미국 기업이기 때문에 장시간 비행을 해야만 하며, 도착해서도 곧장 미팅을 하는 것이 아니라, ND의 해외 지사와의 회의 및 전략도 구축하여 작전을 돌입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 일주일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넉넉잡아 내일 모레 쯤은 출국해야겠지.


"하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차라리 치고 받는 물리적인 다툼이었으면 우리가 질 리가 없을테니 이토록 골 때리진 않을텐데 말이다. S의 한숨 소리에 개별이 고개를 들고 힐끗 쳐다봤다. 마침 시선을 개별에게로 두었던 S와 얼떨결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뭘 봐."


개 띠껍다.


개별은 S가 원래 괴팍하기 그지 없는 성질머리니 본인이 참기로 하며 얌전히 눈을 깔아줬다. 이젠 그의 어긋난 인성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괜히 반응 했다가 싸가지 없다며 저를 엎어두고 신랄하게 매질 당할지도 모른다. 별 반응 없이 눈을 깐 개별을 보던 S가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출장 나가면 얜 어떡하지? 


제가 잠시 ND를 떠난다면 이 녀석을 교육할 수가 없었다. 교육생이라 개인 전자기기는 소지가 불가능 했기에 연락을 주고 받기도 어려웠다. 뭐 이래 저래 연락을 주고 받을 방법이야 찾으면 되겠지만 비효율도 그런 비효율이 없을 것이다. 다른 팀원의 수업 같은 경우 교육 담당 직원이 여럿 배정되어 있으나, 작전 교육은 올해 처음 도입된 것이기에 교육을 담당 직원이 S 뿐이었다.


몇 주치의 과제를 몰아서 내주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걸로 교육이 충당될 수는 없다. 대량의 과제는 S에게도 부담이었다. 다들 제가 개별이에게 무리하게 과제를 내주어 이 녀석만 엄청 고생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상 그 무리한 양의 과제를 피드백하는 S도 개별이 만큼이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런데 몇 주 치 과제를 내준다? 오히려 S가 더 바빠질 것이다. fast 건 이외에도 업무 독박을 쓰고 있기 때문에 매우 바쁜데다 출장을 다녀오면 그만큼 업무가 밀려 있을 것이었다. 잠 자면서 일하는 게 가능하지 않는 한 감당 불가능이다.


답 없다.


더군다나 이번 해외 출장에는 C도 가게 될텐데, 그렇다면 정보팀 교육도 C 대신 다른 부하직원들이 수업을 할 것이다. 그치만 난 그 놈들한테 개별이를 맡길 순 없다. C 정도는 돼야 얘를 가르치지. S는 아까보다 더 생각이 복잡해졌다. fast만 생각해도 골머리가 당기는데 이 녀석의 교육까지 사려해야 하다니. 여러모로 착잡하다.


한편, 개별은 S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왜 자꾸 노려보는 거지...?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한 건가 싶어 붙어 있지도 않은 눈곱을 떼려 눈꺼풀을 비비기까지 했다. 아님 아까 내가 구작전팀장님에 대해 물어 심기가 불편해졌나?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여러모로 불편했다.


"너 말이야."

"네."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꼿꼿히 세우고 S를 바라봤다.


"...너,"


왜 팀장님 답지 않게 뜸을 들이지? 불러놓고 본론을 재깍 꺼내질 않았다. 근심 많은 눈초리로 저를 빤히 바라볼 뿐.


"하아..."


뭐야... 결국 하려던 말을 내놓지 않고 고개를 숙인 팀장님은 미간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싱겁다는 듯 다시 용어를 외우려는데 S가 곧 다짐했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내 출장 따라와라."


난 또 뭐라ㄱ...


"...네?"


출장을 따라오라고? 출장이면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교육생은 외부통행이 불가했기에 사내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보안을 위해 휴대폰과 같은 전자기기도 소지할 수 없기에 아주 거대한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3급 교육생 때 팀장님 집에 반쯤 끌려가서 통근했던 이후로 밖을 구경한지도 두 달이나 흘렀다.


"2주 정도 출장 가게 됐는데, 그럼 교육을 못 해서. 해외 지사 구경도 좀 하고, 일 하는 거 보면서 견습하면 너한테도 좋을 거야."


해외 지사 구경에다 팀장님이 출두할 만큼 스케일 있는 작전 견습이라니. 레어 찬스였다. 귀가 나비 날갯짓 하듯 팔랑거렸다. 심장이 막 두근댔다. 오랜만에 밖을 나간다니 그것도 해외로? 개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어,"


잠시만, 그럼 팀장님이랑 2주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건가?


"뭐."


의미 모를 감탄사를 뱉은 개별은 저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사색했다. 녀석의 표정이 마치 아까의 저 마냥 심각했다. 왜 저런 표정인 거지? S는 의아한 표정으로 개별을 바라봤다.


한편 개별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밸런스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해외 가는 대신 작전 팀장님이랑 2주 같이 있기 VS 사내에 갇혀 있는 대신 작전 팀장님 2주 안 보기. 와, 진짜 어렵다. 솔직히 2주만 팀장님을 안 봐도 여태까지 쌓인 스트레스들이 확 풀릴 것 같았다. 아무렴 해외라고 한들 팀장님이 옆에 있으면 말짱도루묵이지. 가서 또 쥐어터지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안 갈 수도 있습니까?"


확장된 동공과 올라간 눈썹, S의 표정이 물음표 그 자체였다. 어떻게든 데려갈 궁리만 하고 있었기에 안 갈 거라는 대답은 상상도 못 했다.


"안 간다고?"

"팀장님이랑 2주 동안 있는 건 좀..."


...니 새끼가 이틀 전에 맞은 게 좀 모자란가 보구나?


"너, 맞을래?"


너무 솔직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랑 2주 동안 있는 게 뭐, 어디가 어때서? 그 좋은 기회를 고민할 정도로 불편하다 이건가?


"C도 갈 거야."

"아, 그러면 가겠습니다."


진지하게 몇 대만 좀 때릴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스무 대만 때리고 싶다. 몇 달 내내 외부랑 단절된 이곳에 죄수마냥 갇혀 있는 녀석이, 회사 단지 밖이 아니라 무려 해외까지 나갈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학구열이 뛰어난 놈이 눈을 반짝일 만큼 배울 것이 많을 출장 견습의 기회를 고작 나랑 2주 동안 지내야 하는 것 때문에 고민할 만큼 내가 불편한가? C가 간다니 곧장 동의하는 것도 꽤 마상이었다. 그만큼 불편한 저와의 2주를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C가 좋다는 건가.


'팀장님... 하아... 저 작전 팀장님이 너무 싫어요...'


제 사무실에서 개별이가 Medi에게 했던 그 말이 귀에 맴돌았다. 가슴이 쿡쿡 쑤셔왔다. 생소한 이 느낌이 몸서리 치게 싫다. 그래도 난 너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런 건데. 다른 놈들한텐 일말의 관심도 없지만 너한테는 그게 안 돼서 사사건건 간섭하게 된 거였는데.


참, 양심도 없지. 내가 성질 못 죽이고 애를 반 죽여 놓고선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면 쓰나. S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 말은 잊자. 나라도 내가 싫을텐데 뭐. 어찌 됐든 이 녀석은 내게 다시 왔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렇게 밉나... 제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과제에 집중하는 녀석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럼 가는 걸로 안다."


다신 널 안 때리면 네가 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려나.










*








'...항공 121편 샌프란시스코행 탑승을 시작하겠습니다.'


지연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대기석에 앉아있던 S와 C 그리고 개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행기 처음 타보지?"

"아, 예..."


C의 물음에 개별이 멋쩍게 대답했다. 하라는 대로 차분하게 체크인을 다 마쳤었지만 그래도 어리숙한 티가 나나보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C는 피식 웃으며 개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애새낀 내가 데려왔는데 왜 둘이 붙어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가자-."


C가 개별의 어깨를 감싸 쥐며 든든한 동네 형 마냥 탑승을 동행했다. 어쩜 저리도 살갑게 애를 챙길까? 둘 사이가 대체 얼만큼 친한 것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C는 3번이랑만 친한 줄 알았더니 개별이랑 더 친해보이는 기분이었다. 듣자하니 같이 마주보고 맞담하는 사이라고도 하던데.


와, 쟤 지금 웃는 거?


공항으로 오면서 본 개별이는 오랜만의 외출에 들떠 보였었다. 룸미러로 그 얼굴을 관찰하던 S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을 정도로. 긍정적인 감정이 담긴 표정은 잘 내보이지 않는 녀석이 풍경을 구경하며 살포시 미소 짓던 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도 참 예쁘다. 뭐가 이리도 이쁜 것인지. 보기 힘든 미소라서 그런 그런가, 아님 생긴 게 예뻐서 그런가.


그렇게 웃고 다니면 좀 좋나. 생각해보니 나는 쟤가 우는 거 밖에 못 본 거 같다.


"어허, 뭐해 신발 벗고 타야지."

"아 언제적 농담을...;"


저 둘 사이에 끼어 함께 농담을 주고 받고 싶지만 그건 이상일 뿐이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아무래도 녀석이 나를 기피하는 것 때문이겠지. 꼈다가 갑분싸 될까봐지 뭐. 어쩐지 왕따 당하는 기분이었다.


비행기에 일렬로 탑승한 셋은 자신의 좌석을 찾아 앉았다. 비행기를 처음 탈 개별을 위해 아주 작은 배려 겸 창가 자리를 잡아주었었다. 차 안에서도 풍경 구경을 하는 녀석인데, 비행기면 오죽할까. 꼬물꼬물 움직이는 녀석을 보니 잘 데려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 착석한 녀석은 옆 자리에 S가 앉는 것을 보고 순간 멈칫 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캐치한 S의 표정이 굳었다. 뭐지 이 기분?


"나랑 앉아서 싫냐?"


싫은 게 아니라, 그냥 긴장한 거였다. 무슨 피해 망상이라도 있는 양, 제게 또 비비 꼬는 투로 삐딱하게 물어오는 S에 개별은 미간을 모았다.


"안 싫습니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얘한테 절절 매고 있다는 것일까? S는 어쩐지 그 말이 내심 기쁘게 다가왔다. 안 싫다는 게 곧 좋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싫어도 뭐 어쩔 거야."


말을 해도 참 얄궂게 하지.


개별이를 데리고 출장을 나가게 해달라는 요청에 보스는 웬 일인지 쉽게 허락해주었다. 무척이나 비꼴 줄 알고, 워드에다가 그 녀석을 데려가야 하는 이유를 스무 가지나 적어서 외우고 갔던 것 같은데 그 모든 게 무색하게도 '그러든가.' 라고 했었다.


S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개별의 턱을 잡아 눈을 맞췄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단, ND의 내부 정보를 아는 교육생이니만큼 잘 관리하는 것을 조건으로. 문제 발생 시 그 모든 책임은 S가 지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어떡해. 최대한 곁에 두어야 하는 것을.


"교육생이 출장 따라나가는 건 전례에 없었어. 이런 경우는 네가 처음 만큼 내가 널 철두철미하게 관리 해야 하는 게 조건이었어. 그러니 관리를 목적으로 한 제한이나 지시에 불만 갖지 마. 불편해도 참아."


개별이 땡글 거리는 눈으로 저를 똑바로 직시했다. 말귀를 제대로 알아먹은 것인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미국에 도착하면 딴 데 보지말고 내 뒷꽁무니만 쫓아. 화장실을 가더라도 나한테 말하고, 절대 혼자 다니면 안 돼. 누가 말 걸면 대답하지 말고, 나 불러. 영어 못 하는 척 해."


이렇게 길게 설명해 줄 필요도 없는데. 상사가 그렇다면 예, 하고 따르는 게 조직의 법도지만 S는 왜 때문인지 개별이에게 설명하고 납득을 시키고 있었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기 때문인 것일까?


"예."


걱정하는 일 생기지 않게 할테니 안심해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 2급 교육생이니만큼 본인의 위치도,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해야 하는 것도 잘 알겠지. S는 그 예쁜 눈을 한참 바라보다 잡고 있던 턱을 놓아주었다.


S의 손길에서 풀려난 개별은 10시간 동안 S가 내 준 과제들을 할 요량으로 가방 속에 있던 프린트물을 꺼냈다. 세팅을 마친 개별이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비행기 시설이 참 좋네. 그러고 보니 제가 출장에 따라가는 비용은 누가 내준 걸까? 이코노미석도 아니고 비즈니스 석에다 미국까지 가는 거라면 꽤 비용이 나갈텐데. 


개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S를 힐끗 쳐다봤다. 서류를 살펴가며 집중하는 팀장님은 어쩐지 태가 나 보였다. 윤기가 좔좔 흐른다고 해야 할까? 비싼 시계를 손목에 걸치고 단정한 정장을 입은 것이, 하필 또 비즈니스 석에 앉아서 업무를 보니 간지가 흘렀다.


휙, 


시선을 느낀 것인지 홍채를 굴려 저를 바라보는 팀장님에 개별을 곧장 눈을 깔았다. 또 뭘 보냐며 쿠사리 먹을까봐 빠르게도 반응했다. 다행히 팀장님은 별 다른 말 없이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건 뭐지? 시선을 돌린 곳에 자리하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좌석에 달린 버튼이었다. 누르면 안 되는 것을 이렇게 대놓고 붙인 것은 아닐테니 눌러봐도 되지 않을까? 얇딱한 손가락을 움직여 버튼을 꾹 눌렀다.


'지잉,'


응...?


웬 기계음이 울리더니 개별이와 S의 좌석 사이로 칸막이가 솟아올랐다. S가 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개별에게로 완전히 돌렸다. 


...뭐하냐?


딱 그 표정이었다. 개별은 S의 표정이 어떻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놀라운 기능에 감탄스러울 뿐. 와, 라며 외마디 탄성을 뱉은 개별은 버튼을 신 쳐다보듯 경이롭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어올려 S의 그 황당한 얼굴을 바라봤다.


'지잉- 탁.'


녀석의 모습이 칸막이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었다.



"......"



이 썅놈 새끼가.





-







10시간의 비행은 아무리 좌석이 편하다고 한들 좀이 쑤시고 불편했다. 혼자 노는 것을 잘 한다고 해도 한 자리에 국한 돼서 가방 속에 있는 것들로만 뭔가를 하는 것은 갑갑합을 충분히 유발하는 조건이었다. 비행기를 처음 탄다는 설렘도 10분만에 사라졌었다. 창 밖의 구름에 감탄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기내에서 수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했다. 시차 적응이 벌써부터 되질 않았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왜 여긴 또 아침이냔 말이다. 이동만으로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엄한 데 에너지 낭비를 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듯 팀장님들 뒤만 졸졸 따랐다. 아까는 정보 팀장님이 저를 챙기고 다녔지만, 갑자기 회의 거리가 생기기라도 한 듯 작전 팀장님과 상의를 하는 탓에 뒤로 빠져 줘야 했다. 


위탁한 수하물을 받고 입국 심사까지 마친 뒤 공항을 나가는 길목이었다. 다양한 인종들이 있는 곳이 공항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아메리칸의 외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동양인의 외관을 하고 있는 팀장님들이니 쫓아다니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대략 2주는 머물게 된 바람에 짐이 꽤 많아 들고 다니기가 참 귀찮았다. 얼른 숙소에 가서 짐부터 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텁, 


...?


갑자기 손목을 덥썩 잡힌 개별은 웬 외국인의 악력에 의해 발걸음이 멈춰졌다.


"Cecilia?"


세...세...뭐?


"Are you Cecilia?"


미국 식 도를 아십니까인가? 난데 없이 나보고 세실리아냐며 물어오는 낯선 외국인에 개별이 인상을 그득 찌푸렸다.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팔을 홱 뿌리치니 오 쏘리 쏘리 하며 고개를 숙인다.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팀장님들이 꽤 멀리 가 있었다. 얼른 팀장님들을 쫓아가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이 망할 외국인이 다시 팔을 붙잡아 돌렸다.


"O...One moment please!"

"아이 씨,"

"Sorry, but I should ask you! Do you know Cecilia?"


아니, 세실리아가 누군데 아까부터 세실리아 타령이야?


"Don't you know her? Your face looks..."

"I don't know her."


이것 좀 놔라가 영어로 뭐지? 상대가 외국인이다보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회화가 이렇게 딸릴 줄을 몰랐네. 듣고 해석하는 거와는 달리 내뱉는 건 경험의 영역이었다. 팀장님들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급하니 더욱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잔뜩 예민해진 투로 대답하곤 다시 팔을 뿌리치려는데 이 작자 생각보다 힘이 세다. 팔이라도 꺾어야 할까?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다부진 하얀 손을 살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민 했다. 안돼, 그랬다가 경찰서 끌려가면 어떡해.


"Your eyes look like her!"

"......"


흥분을 감추지 못 한 채 숨을 헐떡이는 그를 바라보던 개별은 초조했던 마음이 일순간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랑 닮은 눈을 한 여자가 있다는 소리에 어떤 고아가, 어떤 부모 없는 애가 혹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필이면 눈을 닮았다는데.


"...Who is she?"


그래서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이 아니면 내가 알아야할 것들을 알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혹시나 그 세실리아라는 사람이 나와 관련된 사람은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다.


"She has..."


퍽-!


뒤통수를 후려치는 익숙한 손맛에 머리가 앞으로 홱 숙여졌다. 얼떨결에 이 외국인에게 인사를 박아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외국인이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개별은 머리를 비비며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은 가해자를 바라봤다. 역시나, 작전 팀장님이다. 험상궂은 얼굴을 마주하기도 잠시, 정보 팀장님이 외국인에게서 저의 손목 떼어내어 본인 쪽으로 잡아 당겼다. 아마 외국인보다는 작전 팀장님으로부터 저를 보호하려던 의도였을 거다. 표정을 보니 뺨이라도 안 맞은 게 다행인 표정이었다.


팀장님들은 외국인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저 외국인이 작전 팀장님한테 몇 대 맞을까봐도 내심 걱정했는데 별 다른 조치 없이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아마 그만한 이유가 다 있겠지. 그렇다면 팔을 꺾지 않아 다행이다. 하마터면 외국 땅 밟자마자 일 저지를 뻔 했다. 정보 팀장님에게 손목이 잡힌 채 먼저 앞서가는 작전 팀장님을 뒤따랐다.


그래서, 세실리아가 누구일까.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여러분. 편백입니다. 근 한 달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일과가 개별이급으로 바빠 하루 하루 허덕였답니다. 일을 미루지 않아도 일이 밀리는 기이한 현상을 맞이하고 있어요. 그동안 여러 사건들이 있었고 심경의 변화들도 대단했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전 여러분이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오래도록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포스타입 알림이 올 때면 그것만큼 힐링이 되는 것도 없더라구요. 누군가 내 글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쩌면 바쁜 일과들 중에 다른 일과를 또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이 올 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그 관심이 좋더라구요. 예전엔 한 달에 5편씩 올리곤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편을 겨우 쓸 정도라니. 겨울이 오면 다시 빡세게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늦은 시간이라 올리기가 주저 되지만, 그래도 더 이상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 곧장 올린답니다. 잠 이루지 못한 독자 분들이 계시다면 그 과정에서 함께 밤을 지새워 줄 친구 같은 한 편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답니다.


다음 편은 적어도 이번 편보다는 빠른 텀으로 찾아 오겠습니다. 모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트위터: @PB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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