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4일, 금요일. 그날은 정신없는 날이었다. 온 세상에 흩어졌던 엄브렐라 아카데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슬퍼해야 마땅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다섯 하그리브스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그들이 버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의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 루서가 틀어놓은 노래에 맞춰 하그리브스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춤을 췄다. 함께, 하지만 따로. 음악이 채 끝나기도 전, 뒷마당에서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그들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파란 틈으로 보인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남자 하나가 달려 나왔다. 땅으로 떨어진 소년은 놀랍게도 그들이 잘 아는 소년이었다. 17년 전, 정확히는 16년 4개월 14일 전에 집을 뛰쳐나간 다섯째 하그리브스, 넘버 파이브. 파이브는 대뜸 10일 후에 세상이 끝난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말없이 사라졌던 파이브는 때로는 술에 취해서, 때로는 피에 젖어서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없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면을 쓴 괴한들이 아카데미를 급습하기도 하고, 클라우스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도 하고, 바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능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2019년 3월 24일, 금요일. 그날은 정신없는 날이었다. 온 세상에 흩어졌던 엄브렐라 아카데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슬퍼해야 마땅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다시.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똑같이 하루를 살아갔다. 자신이 버린 집으로 돌아오고, 서로와 티격대다가도 같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시공을 찢고 나타난 파이브를 마주했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열흘을 살았다. 바냐는 레너드 피보디라는 새로운 수강생과 묘한 기류를 즐겼고, 앨리슨은 그에 참견하다 다시 바냐와 엇나갔다. 디에고는 그리디스 도넛에 가서 유도라와 재회했고, 다시 체포를 당했다. 도심에서 일어난 총격전은 그리디스 도넛에서만 일어났다. 파이브는 어디선가 마네킹을 데려와서는 돌로레스라 소개했다. 마스크를 쓴 괴한들이 어디서 알았는지, 파이브를 찾아 아카데미를 급습했다. 그 과정에서 루서는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을 형제들에게 들켰다. 그 비밀을 까발린 괴한 둘은 클라우스를 납치해서는 고문했고, 클라우스는 그 대가로 그들의 가방을 뺏어 달아났다가 원치 않는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바냐는 레너드의 도움으로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깨닫고, 그리고는,

2019년 3월 24일, 금요일. 몇 번째일지도 모를 이 날은 정신없는 날이었다. 온 세상에 흩어진 엄브렐라 아카데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 이제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

물론 모든 열흘이 전과 같지는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 파이브는 그리디스 도넛에 갈 때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서 갔다. 그렇게 이스마엘 견인 기사는 죽음을 피했다. 백화점으로 곧장 향한 파이브는 아무에게도 들키거나 방해받지 않고 돌로레스를 데려왔다. 온전한 돌로레스를. 형제들이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열흘 있으면 그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새로이 놀랄 테니. 유리 눈의 주인을 알고 있었으니 메리테크에 구태여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클라우스는 파이브의 아버지 행세를 하고 20달러를 벌 기회를 놓쳤다. 앨리슨은 레너드를 볼 때마다 수상하다고 생각했고, 도서관으로 가서 뒷조사를 몇백 번도 더 했다. 기사 하나를 읽을 때마다 데자뷰가 수도 없이 느껴졌다. 디에고는 매번 엄마를 작동 중지시켰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는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헬렌은 몇 번이고 죽었다가, 살았다가, 다시 죽었고, 바냐는 오디션장에 열 번, 스무 번도 더 넘게 올라갔다. 지독한 기시감이 모두를 덮쳤다. 기시감에 시달리지 않는 것은 파이브 뿐이었다. 그는 지난 열흘들을 모두 기억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2019년 3월 22일, 금요일. 레지널드 하그리브스의 장례식. 파이브는 그 공간으로 떨어지자마자 한마디도 없이 방으로 올라갔다. 옷이라고는 교복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옷장을 열어보고, 한참을 고민하다 다시 그걸 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항상 하던 대로.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사는 것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는 가족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외로웠다. 지나간 시간을 모른 체 하며 같은 헛소리를 듣고, 듣고, 또 듣는 일은...

‘하지만 적어도 다들 살아있잖아. 멍청하지만, 살아있지.’

그는 애써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혼자서 모든 것을 껴안고 가는 것이 버거울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시간은 알게 모르게 다른 하그리브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몇 백 번을 재생한 카세트테이프는 어느 순간부터 늘어지게 된다. 구멍에 연필을 끼워 되감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하그리브스들의 시간은 서서히 늘어지고 끊어지고 있었다.

 

파이브는 항상 자신이 엄브렐라 아카데미의 유일한 ‘머리’라고 생각했다. 반쯤은 맞는 말이었다. 한 명씩 떼어놓고 본다면 파이브를 이길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뭉친다면, 시간은 오래 걸릴지라도 필요한 계산을 할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

금요일, 그들은 이상하게도 상대방이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토요일,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던 기시감은 모든 일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일요일, 하그리브스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한 일들이 공통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현상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썼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시간에 관해서라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금요일이 될 때까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그리브스들은 이 분야에 대한 나름의 전문가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 ‘전문가’는 아래층에서 땅콩버터 마시멜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있었다. 하그리브스들은 제비뽑기로 파이브를 구슬릴 사람을 정했다. 가장 짧은 제비를 뽑은 것은 바냐였다. 상냥하고 주눅 든 우리의 바냐.

“안녕, 파이브.”

바냐는 파이브의 옆으로 우물쭈물 다가가서 작게 인사했다. 기어드는 목소리였지만 파이브가 듣기에는 무리 없는 크기였다. 파이브는 입으로 가져가던 샌드위치를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응.”

짧은 대답 후에도 그는 바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왔냐는 물음이 시선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바냐는 손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파이브는 바냐를 물끄러미 보다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바냐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아서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또 그거 해 먹었네.”

“뭐, 이것만큼 쉽게 해먹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바냐는 파이브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꺼낼 타이밍을 기다렸다. 부엌 뒤쪽 계단에서 형제들이 답답해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파이브가 입에 든 것을 삼키고 새카만 커피로 단맛을 헹궈냈을 때, 바냐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조금 이상하지 않았어?”

“어떤 면에서?”

파이브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덤덤히 되물었다. 바냐는 파이브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게 원래 그의 말투인지 구분하려 애썼다.

“그냥. 모든 걸 이미 겪어봤던 것 같고, 뭘 하든 데자뷰가 느껴지고...”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너는 안 그랬어도 우리는 확실히 느꼈거든.”

우리?

바냐는 머쓱하게 웃었다. 파이브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애썼네. 비꼬는 듯한 말투가 입안에서 빵과 함께 뭉그러졌다. 바냐는 파이브의 눈치를 보며 그가 샌드위치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파이브는 딱딱한 빵의 가장자리만 남겨둔 채 손을 탁탁 털었다. 바냐는 접시에 덩그러니 남은 끄트머리와 뚜껑이 열린 땅콩버터 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웃음 섞인 말을 뱉었다.

“엄마가 보면 또 잔소리 하실 텐데.”

“안 계시잖아.”

“아, 그랬지.”

아버지의 장례식이 벌써 일주일 전이고, 엄마가 작동 중지된 채 발견된 것도 벌써 며칠이었다. 그런데도 바냐는 습관처럼 둘을 찾았다. 집이라는 공간에 배어있는 기억 때문인지, 어릴 적 모습 그대로인 파이브의 곁에 있자니 저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레이스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바냐는 손을 꿈지럭대며 어떤 것이 정답일지 생각했다. 바냐의 무의식이 마지막 선택지에 힘을 싣고 있었다.

“있지, 파이브.”

바냐는 제 손에 머물러있던 시선을 파이브에게로 올리며 낮게 속삭였다. 나에게 숨기는 게 있어? 바냐는 그렇게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혀를 타고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종말은 어땠어?”

바냐는 홀린 듯이 말을 뱉었다. 종말. 내가 왜 그 말을 했지? 무의식이 던진 직구를 알아챌 리 없는 바냐는 제 말에 되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평정을 유지하던 파이브는 바냐의 말에 저도 모르게 덜컥 얼어붙었다. 종말. 그는 바냐가 꺼낸 단어를 나직이 입안에서 굴려보며 떨리는 시선을 숨기려 애썼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파이브는 바냐의 팔을 턱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최근 열흘간, 그는 종말의 ‘종’자도 꺼낸 적이 없었다. 종말을 막겠답시고 뛰어다니는 일도 지쳐서 관두려던 참이었고, 어차피 세상이 망하기 직전 시간을 돌려 처음부터 다시 살아갈 텐데 말해서 뭐하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가족들에게 그들이 겪지도 않을 무거운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바냐는 종말이 일어난다는 사실조차 모를 텐데.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바냐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파이브를 보며 그가 이 이상 현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아마 계단에서 이걸 엿듣는 나머지 형제들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너와는 한 적이 없는 대화가 머릿속에 남아있어. 완전히는 아니고, 부분 부분이지만.”

“...바냐, 농담이 심해.”

돌로레스.”

파이브는 반박을 하려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바냐는 어깨를 으쓱하며 애써 입꼬리를 편평하게 끌어당겼다. 농담이 아니야, 파이브. 그렇게 말하는 듯이.

“너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지?”

“...”

망했다. 파이브의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도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바냐는 그런 파이브에게 부드럽게 질문했다. 친절하고 상냥한 바냐.

“말해줄래, 파이브?”

파이브는 둥그렇게 뜬 눈으로 바냐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한번 이해시켜봐.”

“아니. 너희는 나를 절대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할 거야.”

파이브는 아래로 잠겨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바냐는 저를 붙잡은 파이브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다. 붙잡힌 손목이 꽤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냐가 파이브에게 놓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은, 파이브의 표정이-


“됐어. 이 답답한 대화는 끝이야. 파이브, 이 재수 없는 자식아.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러는 건데?”

바냐는 제 뒤에서 들린 디에고의 목소리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언제 온 건지, 기척도 느끼지 못했었다. 디에고는 식탁을 탕, 내리치며 파이브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디에고- 그건 우리 계획이 아니었잖아! 바냐가 파이브의 입을 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어야지!”

“시끄러워 클라우스.”

“클라우스가 맞아, 디에고. 계획을 따랐어야지.”

숨어있던 형제들이 하나둘씩 식탁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클라우스는 다 망했다며 디에고를 보고 칭얼대고 있었고, 앨리슨과 루서는 한숨을 푹푹 쉬며 디에고에게 눈치를 줬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주방을 메우자 파이브는 예의 그 표정을 되찾았다. 모든 게 우습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표정. 바냐는 원래대로 돌아온 파이브를 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파이브가 그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봤나봐.

“아주 청문회를 열지 그래?”

파이브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다섯 쌍의 시선을 하나씩 마주 보며 조소를 지었다. 날카로운 어투에 실랑이가 잦아들고 고요가 찾아왔다. 조용한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건지 정하는 일은 누가 총알받이가 되는지 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한참이고 옆을 흘끔대며 공연히 서로의 옆구리를 찔렀다. 파이브는 형제들의 물밑싸움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들의 눈을 보니 먼저 나설 사람을 정하는 것 뿐, 결국은 누군가가 질문을 하기는 할 성싶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피해버릴까? 아니면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진실을 터놓을까. 그는 고민했다. 고민할 필요 없이 전자를 선택해도 모자랄 판에. 혼자 모든 것을 떠안는 것이 지쳤기 때문이리라. 파이브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후 뱉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한 번쯤은,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데자뷰를 느꼈댔나?”

하그리브스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브는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름대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여전히 남을 가르치는 듯한 어조였지만, 제법 누그러진 톤으로.

“그럴 만도 해. 너희는 이 열흘을 어디 보자... 예순 번도 넘게 살고 있으니까. 같은 일을 60번도 넘게 반복했으니, 당연히 이 모든 게 겪었던 일처럼 생각되겠지.”

“뭐?”

“어쩌면 일흔 번일지도 몰라. 어느 순간부터는 세는 걸 까먹었거든. 그럴 필요도, 의미도 없으니까.”

하. 파이브는 말을 마치고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낮게 웃었다. 형제들이 믿기 힘든 이야기를 소화하려 애쓰는 동안 그는 다시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일그러진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잠시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 숨겼어야 했나. 미지근하게 식기 시작한 커피는 기분 나쁜 씁쓰름함만을 남겼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감각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파이브는 불쾌한 감각을 안고 정적을 버텼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디에고였다.

“이해가 안 돼.”

파이브는 코웃음을 치고는 얼빠진 제 형제에게 툭 쏘아붙였다.

“네가 똑똑했다면-”

“-이해했을걸.”

디에고는 파이브의 말을 반사적으로 완성했다. 옆에 서 있던 앨리슨과 클라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디에고를 쳐다봤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디에고 뿐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왜 이걸 알고 있는 거지?”

파이브는 머그잔에서 눈을 떼지 않고 덤덤히 대답했다.

“말했잖아. 이미 겪은 일이니까 아는 게 당연하다고. 60번쯤 전... 그러니까 600일쯤 전에 너와 내가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어.”

“세상에.”

앨리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고는 팔짱을 꼈다. 다른 하그리브스들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다. 파이브는 컵을 제자리에서 반 바퀴쯤 돌려놓으며 혼잣말하듯 비아냥댔다. 후회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그래도 이렇게 몰려와서 나한테 물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새롭고 좋네.”

“좋다니, 파이브. 너한테는 이게 장난이야?”

루서는 파이브의 어조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앞으로 성큼 나섰다. 앨리슨은 그런 루서를 막아서며 타이르듯 말했다.

“비꼬는 거잖아, 루서.”

루서는 앨리슨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몸을 뒤로 물렀다. 그다음으로 입을 연 건 클라우스였다. 클라우스는 앨리슨의 팔 아래로 몸을 숙여 앞으로 나오며 루서가 비켜난 자리에 스르륵 고개를 디밀었다.

“오, 우리의 똑똑한 꼬맹이-어르신. 네 말은 우리가 루프에 갇혔다는 거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같은 시간을 돌고, 돌고, 또 돌고-”

파이브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슥 올렸다. 제 말을 제일 먼저 알아듣는 건 바냐거나 앨리슨이 될 줄 알았는데, 구석에서 눈만 굴리던 약쟁이 클라우스가 말의 요지를 잡아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클라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정확해.”

“그럼... 누가 그랬는지도 알아?”

파이브는 다시 한번 클라우스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동시에 허를 찔려서 말문이 턱 막혔다. 멀쩡한 머그잔을 제자리에서 들었다 놨다. 하던 파이브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알지.”

“그래, 아는데?”

클라우스는 파이브에게 보이지 않는 마이크를 슥 들이댔다. 파이브는 대답 대신 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댔다. 우, 형편없는 인터뷰이네. 클라우스는 장난기가 어린 어조로 툴툴댔고, 파이브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참을성 있게 그가 이름을 내놓기를 기다렸다. 마음껏 원망할 수 있는 이름 하나. 그게 그들이 바라는 전부였다. 하지만 파이브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부러 굼뜨게 잔을 내려놓고, 식탁 위에 흩어진 마시멜로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파이브를 읽어낸 건 앨리슨이었다.

“...너구나. 파이브, 네가 그랬구나.”

“누가 앨리슨한테 금색 별 스티커라도 하나 줘.”

앨리슨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바냐는 파이브의 팔을 덥석 잡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이브, 너라고?”

클라우스는 한 박자 늦게 제 머리를 감싸며 소리 높여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아니, 왜?”

파이브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것쯤은 예상했어야 하는데. 한 번 쯤은 괜찮으리란 헛소리를 믿어서는 안됐는데. 그게 비록 제가 한 말일지라도. 그는 시간을 돌리고 이 대화를 모두 없는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싸웠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힘을 비축해둬야 시간을 정확히 열흘 전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파이브는 다른 형제들을 차례로 마주 봤다. 제가 할 말이 혼란에 찬 시선을 잠재울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듯이, 차분하고, 또박또박하게.

“너희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었거든.”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주문 같은 건 없었다.

“무슨 소리야?”

루서가 덩치에 비해 한없이 작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디에고는 하네스에서 칼 하나를 뽑아 들고 파이브의 쪽으로 달려들었다.

“우리를 살리는 방법이긴, 우리를 엿먹일 방법이었겠지! 한평생을 이 빌어먹을 열흘 속에 갇혀서 바보처럼 살아가라는 소리잖아. 우리는 늙지도 죽지도 않고,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거지. 무엇을 이루든 다시 아무것도 없는 처음으로 돌아오고 말이야. 그게 우릴 ‘살린’ 거냐, 파이브? 가둔 거지!”

루서와 앨리슨은 디에고의 말에 시선을 바닥으로 돌리며 그의 난동을 모른 체 했다. 틀린 말 같지도 않아서였다.

“워, 워, 진정해, 디에고 레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동생이잖아. 우리 형인가? 하여튼. 칼은 너무했다.”

클라우스는 디에고의 앞을 막아서며 그의 손에서 칼을 뺏었다. 디에고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노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디에고 레고라니, 그건 또 무슨 같잖은 별명이야?”

클라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뺏어 둔 칼을 디에고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며.

“적어도 널 진정하게는 만들었잖아?”

“칼 내놔.”

“싫어. 기념품으로 가질 거야.”

둘은-항상 그랬듯-유치한 싸움이라는 샛길로 빠져 파이브로부터 관심을 치웠다. 등 뒤에서 짝수들이 티격대는 동안 바냐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 파이브와 눈을 맞췄다.

“파이브, 디에고의 말도 일리는 있어. 왜 그랬어?”

파이브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바냐. 너희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이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나도 알아. 나라고 이게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는 걸 몰랐겠어?”

그는 고개를 들어 다른 형제들을 바라봤다. 항상 그들을 내려다보던 차가운 눈은 축축한 시선으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디에고와 클라우스는 서로의 멱살을 놓고 파이브를 바라봤다. 잔잔한 충격이 둘의 표정에 어려 있었다. 아무도 그런 표정을 한 파이브를 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말을 잃은 틈을 타 파이브는 이를 악물고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꽉 쥔 주먹만큼이나 파르르 떨렸다.

“화내기 전에 이걸 생각해봐. 너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열흘을 사는 동안 나는 600일을 살았어. 똑같은 빌어먹을 짓을 60번이나 반복했다고. 그때마다 내가 뭘 본 줄 알아?”

“뭘 봤는데?”

루서가 묻자 파이브는 고개를 푹 숙였다. 거친 숨소리만이 고요 아래로 울렸다. 하그리브스들은 파이브의 입에서 나올 말이 좋은 말은 아닐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파이브는 긴 숨을 내쉬며 어깨를 파들 떨었다. 하그리브스들은 그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고민했다. 파이브가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적이 있었던가? 그의 빳빳한 목을 꺾을 정도의 진실이라면, 알아서는 안 될 끔찍함이 아닐까? 앉아있는 바냐를 뺀 네 사람은 서로 질문 가득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면, 그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어쩌면, 눈을 감고 뒤돌아 나가는 게 옳은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굳이 세상의 모든 것을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앨리슨과 클라우스는 서로 동의하는 눈치였다. 디에고는 영 찜찜한지 팔짱을 끼고 파이브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서는, 넘버 원은, 모두를 대신해 고개 숙인 파이브에게 재차 물었다.

“파이브, 뭘 봤냐니까?”

파이브는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한 번 정도는, 그들도 진실을 알아야지.

“종말. 세상의 끝뿐만 아니라, 너희의 끝을 봤어. 매번, 한 번도 빠짐 없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물기 어린 시선과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입매는 위로 휘어 있었다. 파이브는 관절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주먹을 꾹 쥐고는 자조 섞인 어투로 말을 꾸역꾸역 뱉어냈다. 금방이라도 속에 담긴 울분을 쏟아낼 듯,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웃긴 건 뭔지 알아? 나는 그걸 막으려고 수도 없이 뛰어다녔어. 젠장,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하지만 말이야, 루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희는 죽어.”

파이브가 말을 마칠 즈음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파이브는 말을 꺼낼 때마다 깊게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가 채 브레이크를 걸기도 전 다음 문장이 튀어나오고 다음 후회가 찾아왔다. 단어 하나하나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마치 잔뜩 흔들어둔 탄산음료의 뚜껑을 여는 것처럼.

“세상이 끝나든 너희만 끝나든, 결과는 하나야. 너희는 모두 죽어. 내가 그 꼴을 몇 번이나 더 봐야 해? 빌어먹을, 한 번으로도 충분함을 넘어선 꼴을 몇 번이나 더 봐야 하겠냐고, 클라우스.”

클라우스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파이브를 향해 팔을 뻗었다.

“오, 파이브...”

그는 파이브의 공포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벤의 죽음을 다섯 배로 곱하고, 그걸 다시 살아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늘린다면 파이브가 겪은 일에 준하지 않을까. 클라우스는 머릿속으로 대강 셈을 마쳤다. 모두가 죽은 가운데 혼자 살아남는 사람이 되는 것. 파이브의 공포는 그의 공포와도 맞닿은 구석이 있었으니까 계산을 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는 파이브의 어깨에 애정 어린 손길을 얹었다. 파이브는 클라우스를 흘긋 올려다보고는 됐다는 듯 그의 팔을 밀어냈다. 이제 와서 자존심을 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서 나는 시간을 뜯어냈어. 딱 열흘만큼의 시간을. 어떻게 했는지는 너희가 들어도 이해 못 해. 그러니까 설명하라는 말은 집어치워, 디에고.”

디에고는 무어라 딴지를 걸기도 전에 파이브에게 발언권을 뺏겼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토해내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도 파이브의 눈물을 한여름에 내리는 눈이라도 되는 것 마냥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너희의 마지막을 더는 볼 수가 없었어. 셀 수 없는 죽음을 마주하고, 내 손으로 사람들을 죽이면서 죽음에 무뎌졌지만 그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이 얄팍한 속임수를 부린 거야. 너희 입장에서는 내가 끔찍한 인간처럼 느껴질 테니 말을 아낀 거고. 자, 이게 네 보잘것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되었을까? 응, 디에고?”

디에고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루서?”

루서 역시. 파이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손을 들어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날 위해서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 있어 달란 말이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파이브...”

앨리슨은 울컥, 짜증을 토해내는 파이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파이브는-이번에는-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앨리슨의 뒤에서 루서를 붙잡고 어이가 없다는 듯 파이브를 가리켰다. 루서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클라우스의 손을 잡아 내렸다. 파이브는 앨리슨을 올려다보며 멍멍하니 울리는 목소리로 토로했다.

“나도 한계라는 게 있다고, 앨리슨. 너희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을 저지르며 겨우 찾아낸 해답이 이거야. 피할 수 없는 시간을 피해 보려는 그 발악 끝에 얻은 게 고작 열흘... 이걸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는지 너희가 알까? 아냐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파이브가, 그 오만하고 건방지던 파이브가 무너지는 광경은 모두의 입에 무거운 추를 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너흰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파이브는 고개 숙여 흐느꼈다. 어깨에 얹힌 손 하나 털어내지 못할 정도로 힘이 빠졌다. 제가 했던 모든 몸부림의 결과가 고작 이런 초라함뿐이라는 사실에 속이 뭉그러지는 듯했다. 그는 살면서 두 번째로 무력함을 느꼈다. 종말 후의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소리 죽여 눈물만 뚝뚝 떨구던 파이브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실크 잠옷의 옷자락에 색이 짙은 동그라미가 어지럽게 겹쳐 있었다.

“됐어. 이제 끝이야. 다 관둘 거야.”

그는 코가 막혀 맹한 목소리로 무겁게 말을 뱉었다. 파이브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형제들을 지나쳐 계단으로 향했다. 아무도 감히 그를 잡으려 손을 뻗지 않았다. 파이브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계단참에 발을 올리기 전, 그는 제자리에 굳어있을 형제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주먹 쥔 양손을 허리께로 올렸다.

“이게 내가 관두는 방법이야, 이 은혜도 모르는 머저리들아.”

파이브의 손이 파란 빛을 뿜어냈다. 하그리브스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온 세상이 일그러지고, 모든 것이 되감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역재생되기 시작했다. 파이브는 눈을 감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푸른 빛 속으로 뚝 떨어져 사라졌다. 그는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테이프가 처음으로 돌아가자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로써 테이프의 어딘가는 늘어졌겠지만 아직은 노래가 나올 수 있었다. 아직은.


2019년 3월 24일, 금요일. 그날은 정신없는 날이었다. 온 세상에 흩어졌던 엄브렐라 아카데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슬퍼해야 마땅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다섯 하그리브스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그들이 버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의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 어딘가 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모두가 아는 노래로.

아, 한 가지 변주는 있었다. 이번에는 파이브가 그들의 뒷마당에 떨어지지 않았다.


Fine

이것저것 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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