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은 네임버스입니다만, 사실은 그게 뭔지 제대로 몰라서 제 맘대로 설정했습니다.

- 위장자에서도 설정만 따왔다는 수준으로 봐주세요. 

- 이름 한자는 일부러 본자로 썼습니다.

- 개그물입니다.













명대가 16살이 되던 해 봄이었다. 명경이 전 날 미리 말했기 때문에 평소와는 달리 모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탁에 앉았다. 넷이 둘러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일이 꽤 오랜만이었다. 명대가 막 오른쪽 손을 뻗어서 아성과 가까운 쪽 접시에 있는 빵을 집으려는 순간 손목 위로 무언가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명대보다도 아성이 더 먼저 눈치챘다.


“너 이거 뭐야?”

“뭐가?”


라며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거둬들여 보던 명대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네 남매가 쳐다보는 가운데 손목 위의 이상한 흔적들이 점점 늘어가고 모양을 갖춰가면서 글자가 되었다. 모두가 경악하며 그 과정을 지켜보는 중에 명대가 빽빽 비명을 내질렀다.


“아파... 아프단 말야. 이거 뭐야! 아파!! 아프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종의 희귀병 같은 것이었다. 두 명 각각의 사람에게 서로의 이름이 저절로 새겨진다는 특이한 현상. 유전도 아니고 환경도 아닌 그야말로 무작위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왜 나타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례는 드물지만 과거부터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고 제법 서구화 된 현재의 의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된 적도 있다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는 건 아성도 처음이었다.


명대는 아직까지 펄펄 뛰면서 난리였고 명경은 당장 전화기부터 붙들었다. 명루가 눈짓을 해서 아성은 일단 명대의 팔을 잡아서 의자에 다시 앉혔다. 명루가 명경의 곁으로 가려 나갔다. 명대가 울상을 해서 손목을 부여잡았다.


“이게 뭐야? 이게 그거야? 이름 새겨진다는 그거? 그거 전설 같은 게 아냐?”

“기다려 봐, 누님이랑 형님이 알아보실 거야.”


믿어지지 않지만 몇 번을 살펴봐도 그것이었다. 그리고 꿈틀거리며 새겨진 글자는 놀랍게도 誠(성)이었다. 더 이상 모양이 변하지 않는 상태로 저 글자로 멈춰진 걸 보고 아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장이 바닥까지 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아프다고 지랄발광을 하던 명대도 비명을 멈췄다. 둘이 아무 말도 못하고 명대의 손목만을 한참 내려다 보았다.


“왜 그래?”


돌아온 명루가 뭔가 심각한 느낌을 받았는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물었다. 그러자 명대가 넋이 빠져나간 얼굴을 들며 아직도 아성에게 잡혀있는 오른쪽 팔목을 흔들었다.


“큰 형 이거...”


명루는 뺏듯이 명대의 손목을 잡아 올리고 誠이란 글자를 보고 사나운 눈으로 아성을 쳐다봤다.


“너는?”

“없습니다.”


그러자 명대가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홱 돌렸다.


“진짜 없어?”

“없어.”

“왜!”



왜? 이 상황에 왜란 말이 나와? 아성은 속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이게 내 이름이라는 게 확실하진 않잖아.”

“내가 아는 사람 중엔 형 밖에 없단 말야.”

“게다가 성(姓)이랑 이런 것도 없이 단 한 글자로 누군지를 어떻게 알아.”

“그 말도 맞긴 하다.”


명대는 겨우 입을 다물었다. 거의 한 시간을 취조라도 당하듯이 세 남매에게 시달린 아성은 이제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입도 떼기 싫었다. 그렇지만 없는 글자를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또 誠은 꽤 많이 쓰일만한 글자라서 그 한 글자로 특정인을 알아내긴 어렵고 상대의 몸에 명대의 이름이 새겨진 걸 알아야 확인이 가능할 것 같았다.




명경, 명루, 명성 모두 이 현상의 박사 학위라도 딸 수 있을 정도로 자료를 모으고 공부했다. 돈과 권력의 힘을 빌려서 상상 이상의 스케일로 수소문도 해보았다. 誠을 이름으로 쓰는 사람들을 찾아냈지만 누구에게서도 명대의 이름이 나타나 있진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성은 –억울하게도- 몸에 명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이나 채근당하고 확인당했다. 명대가 다짜고짜 욕실에 쳐들어와서 난리를 부린 것도 한 번은 아니었다. 기가 차서 몇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제 심정은 오죽할까 싶어서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명대는 처음엔 무시무시할 정도로 화를 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불같이 화를 냈는데 그 끝은 언제나 자기가 왜 누군지도 모를 사람과 이런 되도 않는 운명 놀이를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반년이 지나고 거진 일 년이 흐르자 명대도 초조해졌는지 상대가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다. 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았단 소식을 들으면 반색을 하면서 자기가 가서 만나 보겠다고 먼저 나섰다. 가끔 생각났다는 듯이 아성의 소매를 걷어서 글씨가 없는 걸 확인하고 어깨를 푹 늘어트리며 돌아서는 게 가엾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해를 또 넘겨서 18살이 되던 봄 어느 날에 드디어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는지 갑자기 온 방의 물건을 때려눕히고 바락바락 소릴 질렀다.


“나타나기만 해봐 죽여버린다.”


무서워서 어디 나타나겠냐?



보통의 경우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혹시 싶어서 그보다 더 어리거나 훨씬 나이 많은 사람까지도 뒤져봤지만 명대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아직 글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경우도 있다 싶어서 계속해서 소식통을 열어두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두 해를 꼬박이 보냈으니 명대가 저 난리가 난 것도 이해할 법 했다. 아성이었으면 참는 시간이 더 짧았을 테이다.

물론 2년을 명대가 곱게 보낸 것도 아니긴 했다. 글자를 없애겠다고 난리쳐 보기도 했지만 간단한 상처를 내서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살갗을 뜯어내거나 큰 상처를 내기에 안쪽 손목이란 곳은 너무 연약하고 위험한 위치였다. 처음에 칼을 들고 글자를 도려내겠다 날뛸 때 까딱하다간 동맥 자를 거라고 아성이 말해줘서 명대는 의외로 그건 쉽게 포기했다. 아픈 건 싫고 죽는 건 더 싫다나. 가끔씩 발작적으로 난동을 부리고는 씩씩대면서 나타나면 죽여버릴거야 라고 말하는 눈빛에서 진짜 살기가 느껴졌다. 아성은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이 좀 안 됐다고 생각할 뻔 했다.















방에 불을 켜자 침대가 들썩이더니 명대가 시트 안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왜?”


생각보다 풀 죽은 목소리가 나왔다.


“왜 안 나타나지?”

“네가 죽일까봐 안 나오는 거 아니고?”

“안 웃겨.”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입술을 삐죽이더니 생기없이 물었다.


“형은...”

“없어.”


명대가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 말하고나니 조금 안됐단 생각이 들어서 코트를 의자에 대충 걸치고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거 물어본 거 아냐.”

“그래.”

“이 사람... 나타날까?”

“나타나면 좋겠어?”


명대가 한참이나 말없이 시선을 맞췄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형은, 나타났으면 좋겠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자 삐죽 눈가에 화기가 돌았다. 시트를 푹 뒤집어쓰고 몸을 돌렸다. 낮게 한숨을 쉬고 시트를 잡아 얼굴이 보이게 좀 내렸다. 평소라면 짜증을 내며 다시 끌어올렸을 텐데 명대는 가만히 있었다.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자 사납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타나는 게 너도 좋겠지?”

“안 좋아, 하나도 안 좋아.”

“최소한 누군지라도 아는 게 속 편하지 않겠어?”


명대가 다시 시트를 뒤집어썼다. 어깨쯤을 토닥이자 안에서 툴툴 불어터진 목소리가 나왔다.


“이렇게 안 나올 거면 아예 나오지 말던가. 누군 좋아서 찾는 줄 아나.”

“그 사람도 널 찾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아주 멀어서 못 찾을 뿐이라던가...”

“찾기 쉽게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 좋잖아.”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갈 듯이 작았다. 이름이 새겨지는 상대는 어떻게 선정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사례를 보면 가까운 관계의 사람인 적도 있고, 연인들에게서 정말 운명처럼 나타난 경우도 있었고, 누군지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이름이 새겨진 후에 만나기도 했다. 반드시 이름이 새겨진 사람과 연인 관계가 되는 것만도 아니었다.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운명에 굴복하며 사랑에 빠지곤 했다. 아성은 자신의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운 명대를 다시 내려봤다. 명대에겐 정해진 운명이 있다. 지금은 싫다고 펄펄 뛰지만 아마도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명대도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게, 그랬으면 좋았을걸.”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고 종종 날뛰긴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수그러들었다. 약간 풀이 죽은 것처럼 보여서 명경이 매일 호들갑을 떨면서 명대를 챙겼다. 명대는 십년전에나 했을 법한 어리광을 피우면서도 어딘가 얌전해졌다. 그게 그렇게 보기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번엔 오래 걸리나 보네.”

“2주 정도?”

“어디로 가는건데?”

“알아서 뭐하게.”


그러자 명대가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안 궁금해.”

“그럼 됐네.”


날이 꽤 서늘해져서 긴 셔츠를 입고 있던 명대가 손을 뻗어서 문을 잡았다. 소맷자락이 조금 말려 올라가면서 또렷해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더운 때에도 뭔가로 칭칭 감아두더니 긴 소매를 입었다고 풀어둔 모양이다. 아성의 시선이 글자에 가 닿았다는 걸 알고 명대는 얼른 손을 말아쥐었다. 그래도 아성이 손을 뻗어 손목에 대었을 때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아성은 찬찬히 손가락 끝으로 글자를 만졌다. 선명하게 새겨진 자신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내려보는 기분은 정말 생경했다.


“아프진 않아?”

“안 아파.”

“얼마나 됐지?”

“2년 4개월.”

“나타날 거야. 내가 찾아줄게.”

“됐어.”

“이번에 다녀오면 좀 시간이 나니까 내가 찾으러 다녀볼게.”

“필요 없다니까.”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누구여도 상관없어. 만나고 싶지 않아.”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대답했다. 그래서 아성도 맘에 두었던 말을 해줬다.


“그런 거라면 만나도 상관없지 않아?”

“뭐가.”

“만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 생각한다면, 만나도 상관없잖아.”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리고는 명대는 고까운 듯 뱉었다.


“그러네.”

“찾아줄게. 꼭 만나게 될 거야.”

“그러시던가.”


더 엉망으로 찌푸린 얼굴로 아성을 2,3초 쏘아보더니 손목을 홱 잡아빼고는 양손으로 벌컥 밀어제쳤다. 불의의 일격에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열린 문에 텅하고 부딪치고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다. 아성이 꼴사납게 주저앉은 게 기분 좋았는지 명대는 눈썹을 찡긋거리면서 씩 웃고는 팔랑팔랑 뛰어나갔다. 어딜 잘못 부딪쳤는지 어깨 뒤쪽에 타는 듯 한 통증이 잠시 전해졌지만 금세 사라졌다.





“출장지”에 도착하자마자 쉴 새도 없이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고 몇 대 걷어차이긴 했지만 꽤나 멀쩡한 상태로 끝낼 수 있었다. 재킷을 탁탁 털고는 칼을 대충 닦아 가방에 넣고 호텔로 갔다. 다른 사람의 피가 스며든 검정색 수트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어떻게 채인 건지 어깨가 조금 아팠다. 욕실에 들어가서 대충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기를 켜자 어깨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뜨거웠다. 그다지 맞은 기억도 없는데 통증이 밀려오는 게 어이없어서 거울에 등을 돌려섰다. 그리고 거울 속의 어깨 뒤쪽을 보는 순간 아성은 하늘이 무너지는 게 뭔지 경험했다. 明臺(명대). 이 망할 글자가 이렇게 나타날수도 있다는 걸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거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싸구려 위스키를 하나 사서 들어왔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등을 확인했지만, 혹시나 이게 반대로 보여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건 아닐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지만 글자는 나타났고, 쓰여진 이름은 명대였다. 같은 한자를 쓰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일리 없다는 것도 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고민이었다. 명대까지 갈 것도 없다. 명경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쓰러지는 게 눈에 선했다. 명루도 말할 것도 없다. 아성은 손으로 말라붙어가는 얼굴을 몇 번이나 훔쳤다. 차라리 이야기하지 말까. 하지만 영원히 속일 순 없을 일, 언젠간 알려질 것이다. 그땐 아마 속인 것까지 합쳐서 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게다가... 명대를 어떻게 하지? 스트레스로 일처리가 더 과격했던 2주였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딱히 누군가 필요했던 건 아니라서 방으로 곧바로 들어갔다. 가방을 한쪽에 두고 수트 재킷을 벗으려는데 어깨가 뻐근하게 아픈 느낌이었다.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2주 동안 명대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일이 제대로 안 될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걸 어떻게 하지? 명경이나 명루에게 먼저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명대에게 따로 이야기를 해야하나, 넷이 식사할 때 갑자기 폭탄을 터트려야 하나... 아성은 머리를 훅훅 저었다. 재킷, 타이, 셔츠까지 풀어서 대강 의자에 걸치고 혹시나 싶어서 다시 방에 걸린 거울에 등을 비춰봤다. 소름끼치게도 글자가 그대로 있었다. 아성은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게 한숨을 내쉬고 양손으로 두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 왔......”


그리고 명대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섰다. 최악이다. 최악의 방법으로 들킨 것이다. 아성도 이번엔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먼저 풀려난 건 명대였다. 명대가 갑자기 욕을 퍼부으면서 아성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 죽어버려. 죽어버려!!”


몇 대는 맞아주겠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명대, 내가 설명할테니 잠시..."


아성이 제 손에는 맞아주지 않자 방안의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성은 다시 한숨을 쉬면서 명대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너 같은 비열한 자식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길길이 날뛰는 명대는 아성이 잠깐만 얘기하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성이 하다못해 팔을 놔주자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지? 싶어서 문가로 다가가는데 다시 구르듯이 명대가 달려들었다. 손에는 꽤 위협적으로 보이는 칼이 들려있었다.


“죽어버려. 너 내가 죽일 거야.”

“다쳐, 하지 마.”

“죽으라고 이 새끼야.”

“말버릇이 그게 뭐냐.”


아무렇게나 막 휘두르는 칼이 맞을 리는 없지만 저러다가 제 몸에 상처라도 낼까 걱정스러웠다. 아성이 쉽게 팔목을 잡자 그 손이라도 상처내고 싶은지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가면서 난리를 쳤다. 너무 서슬퍼렇게 날뛰어서 아성은 잠깐 다시 손을 놔줬다. 명대는 다시 고래고래 욕을 하며 칼을 고쳐잡았다. 아성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칼을 떨어트리려 손등을 세게 쳤다.


“아악- 아프잖아!! 아프잖아!!!!”


2주간 제 걱정에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저러는 꼬라지를 보니까 왜 그 고생을 한 건가 싶었다. 떨어진 칼을 주으려 하길래 발로 슥 차서 문가로 보내버렸다. 손으로 한쪽 손목을 잡자 다른 쪽 손으로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다 그도 안 되니 손톱으로 아성의 손등을 북북 그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고, 내가 설명한다잖아.”

“됐다고!! 죽어버려! 이거 놔!!”


손톱으로 아예 살점을 떼어낼 거 같아서 아성은 약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손에 닿는 곳에 있던 벗어둔 셔츠를 집어서 둘둘 말아서 명대의 손목을 묶었다.


“얌전히, 내가 하는 이야기 좀 들어.”


그러자 아예 거품을 물고 속사포처럼 욕을 해댔다. 중간중간 비명 같은 소리 지르기를 섞어서. 이번엔 좀 더 짜증이 난데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와서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뭐하려고 그거 왜! 뭐할 건데 왜 그러는...읍-”


풀리기 쉽지 않게 단단하게 매듭을 짓자 비로소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명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성은 약간 후회했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뺨이 온통 물투성이였다. 손이 묶이고 입이 막힌 게 더 서러웠는지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얘기하는 거 잘 들어.”


그러자 막힌 입으로 뭔가 빼액빼액 소리를 질렀다. 풀어주진 못하겠다. 읍읍거리면서 뭐라고 계속 말하는 –그래봤자 욕일 것 같지만- 명대를 줄줄 끌어다가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대충 손바닥으로 닦아줬다. 그러자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눈물콧물 쏟아가면서 우는 명대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꺽꺽대고 울더니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 했다.


“좀 진정됐어?”


그러자 명대가 발로 어깨를 찼다. 진정되긴 했나보네. 얼마나 세게 찼는지 어깨에 발뒤꿈치 자국이 붉게 남았다. 손등과 팔목은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즐비하고. 아성은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이 사태에서 역시 가장 꼭지가 돌아버릴 사람이 명대임을 자기자신에게 다시 상기시키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 얘기 들을 거지?”


명대가 눈물을 한 방울 더 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하려고 했어. 속일 생각은 없었어.”


뭐라고 읍읍거린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듯 했다. 그야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이건 정말 다시 생각해도 억울한 일이다. 왜 2년도 넘게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는지 아성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정말이야, 얘기하려고 했어. 나도 당황했고 놀랐어. 그리고 생긴 지 얼마 안 됐어.”


명대가 눈으로 정말이냐고 물었다. 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 게 언제인지랑은 상관없이 고민은 원래도 했을 거야. 얘기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넌 어쨌든 동생이니까. 형이랑 누님이 얼마나 걱정하실지 생각하면 말하지 말까 생각하기도 했어. 그리고 너도. 이런 걸 생각하진 않았을 거 아냐. 너에겐 특별한 사람을 찾는 거니까.”


뭘 말하고 싶은지 명대는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성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말했을 거야. 내가, 찾아주기로 했었잖아.”


일부러 장난치듯이 웃었는데 명대가 다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기대를 깨게 되어서 미안. 예쁜 여자였으면 너도 좋았을 것을..."

 

울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당연히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아성도 슬슬 풀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거 풀어줄 테니, 소리는 지르지 말고.”


명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얼굴을 잔뜩 적시고 넥타이도 흠뻑 젖었다. 조금 미안해졌다. 아니 꽤 많이. 여러 가지로.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해서 얼굴 아래로 밀어서 내렸다.


“소리 지르지 말고.”


다시 한 번 말하자 명대가 고개를 또 한 번 끄덕였다. 움직임을 따라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명대가 눈을 한 번 감고 흑흑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뜨는데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안쓰러운 생각에 아성은 손가락으로 슥 눈물을 훑어주었다. 명대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성 형은, 나 좋아해?”


어떻게 하면 얘기가 거기까지 튀는지 모르겠지만. 아성은 당황스러움에 입이 채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명대는 다시 훌쩍훌쩍 거리면서 눈물을 쏟았다.


“명대.”

“아성 형은 나 좋아해?”


지금까지 중에 지금이 제일 머리가 아팠다.















명경이 차에서 내리자 명루가 가깝게 붙어섰다.


“일찍 돌아오네.”

“아성이 온다고 해서요. 누님은요?”

“마침 일도 일찍 끝났고... 명대가 부탁한 것도 왔길래 일찍 왔어.”


안으로 들어서서 코트와 가방을 주고 아성이 돌아왔는지를 묻자 아성과 명대가 모두 아성 방에 있다고 대답이 돌아왔다.


“간만에 만나서 그런가? 둘이 뭐하길래 나와보지도 않지?”


명경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아성의 방으로 향하길래 명루도 뒤따라 갔다. 문은 열려있었고, 열린 문으로 보이는 광경이 희한했다. 명경이 인상을 쓴 채로 문앞에 다가가도록 아성과 명대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아성 형은 나 좋아해?”


명대가 반쯤 울먹이면서 말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몇 톤이나 높아진 명경의 목소리에 명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아성이 벌떡 일어났다. 명대도 깜짝 놀란 얼굴로 문쪽을 쳐다봤다. 방안이 난장판이었다. 이것저것 부서지고 떨어진 물건들과 장식품들로 바닥도 어지러웠지만 젤 어이없었던 건 아성과 명대였다. 아성은 상의는 모두 벗은 채 바지만 입고 있었고, 아성 것으로 보이는 셔츠는 명대의 손목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명대의 목에 감겨있는 것도 아성의 넥타이로 보였다. 명대는 얼굴에 물얼룩이 가득한 채로 손이 묶인 채 아성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너 꼴이 그게 뭐야?”

“어떻게 된 거냐?”


뒤따라온 명루도 기가 차서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그게...”

“아성 형이랑 결혼할 거야.”

“뭐??!”


비명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명경이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발에 칼이 차였다.


“이건 또 뭐야! 칼이 왜 여깄어!!”


명대가 한쪽 눈에서 눈물을 툭 떨구더니 대답했다.


“내가... 아성 형 죽여버리려고......”


망했다. 생각하면서 아성은 손으로 얼굴을 세게 훑었다.




명경이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자 명루가 얼른 부축했다. 아성은 일단 명대의 손목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 높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너... 너..... 등....... 등에......”


아차 싶은 마음에 아성은 눈을 감았다. 진짜 망했다. 다 망했다. 어쨌든 손은 풀어줘야겠다 싶어서 한숨을 깊게 쉬고 묶은 셔츠를 풀었다. 엉망으로 구겨진 셔츠를 일단 팔을 꿰어서 걸쳐입었다.


“어떻게 된 거니.”

“말씀드릴게요.”


아성이 차분하게 대꾸하자 명경과 명루도 좀 정신을 차린 듯 했다.


“먼저 내려가 계세요. 곧 갈게요.”

“그래. 그래... 그러자.”


더 흐트러지지 않고 침착하게 등을 돌려나가는 명경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명루가 따라나가다 말고 잠깐 돌아봤지만 말없이 나가주었다. 정말로 고마웠다.






명대는 손이 풀렸는데도 얌전하게 침대에 앉아있었다. 턱을 잡고 돌려봤는데 약하게 묶어서 얼굴에 자국이 남진 않았다. 손목은 좀 빨갛긴 하지만 상처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나 괜찮아.”

“그래.”

“그런데 대답 안 했어.”

“뭐.........”


뭘 안 했냐고 물으려는데 생각이 났다. 아성이 말을 멈추자 명대가 머뭇대며 눈치를 봤다.


“좋아해.”

“명대.”


필사적으로 명대가 말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아성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명대는 다시 물었다.


“나는 아성 형 좋아해. 형은 나 좋아해?”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면 순순히 나타나주지 왜 이제야 나타난 걸까. 눈물은 멈췄지만 아직도 물기가 그득한 명대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친동생은 아니지만 가족이었다. 삐뚤어진 사춘기 소년의 동경과 애정이 담겨 있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햇살같은 동생이었다.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지만 사랑스러웠다. 명경도 명루도 명대도 모두 좋았다. 가족으로 남고 싶었다. 명대가 제법 어른스러워진 눈매를 찡긋거리며 자신을 돌아볼 때 가슴이 뜨거워졌었다. 어깨에 새겨진 글자보다 더. 가만히 뺨을 쓸고는 그대로 얼굴을 가깝게 끌어당겼다.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명대가 눈을 감았다. 어쩐지 사랑스러워서 아성은 조금 미소지으면서 입술을 겹쳤다. 다른 놈이 네 이름을 달고 나타났으면 그 자식은 내가 죽여버렸을거야.

















전 분명히 개그라고 그랬습니다ㅠ 비록 웃기진 않지만요ㅠㅠㅠ





랑야방/호가/왕카이/정왕종주/카이호가 필모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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